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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수필입문반4월11일제2강보충자료 좋은수필의 결속
좋은수필의 결속: 내적 기질과 외적 방향성
좋은수필은 유기적인 결속으로 이루어진다. 결속에는 내적 기질과 외적 방향성으로 구분된다.
내적 결속은 인간의 4가지 기질과 같다. 인간의 기질을 풀이한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BC 400년경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가 분류한 4가지 유형이다. 담즙질은 모험적이고 의지가 강하며 경쟁력이 있고 긍정적이다. 다혈질은 쾌활하고 사교적이며 무대 체질이다. 점액질은 평온하며 참을성이 있고 감정을 잘 억제한다. 우울질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섬세하며 이해심이 많다. 인간은 모두 이것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가장 이상적인 인간은 네 체질을 고르게 가진다
좋은 글도 4가지 기질을 갖는다. 그것은 공감이 넓은 주제, 격 있는 소재, 탄탄한 구성, 그리고 담백한 문장이다. 주제는 담즙질에, 소재는 다혈질에, 구성은 점액질에 문장은 우울질에 비유될 것이다.
외적 결속은 교통신호가 있는 사거리 방향과 같다. 사거리는 작가와 글, 독자와 글, 사회와 글, 자연과 글의 관계를 말한다. 만일 교통신호가 없으면 길은 순식간에 마비되어 소통을 할 수 없다. 글도 외부로 가는 방향으로서 작가자신, 독자, 사회, 자연과 적절하고 균형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교통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이 신호등이다. 글의 흐름을 조절하는 신호등은 체험, 상상, 서사이다. 이것이 각각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의 신호이다. 붉은색으로서 체험은 차가 정지하되 존재하게 하며, 노란색으로서 상상은 글의 엔진을 가동시키며 푸른색으로서 서사는 차라는 글이 질주하게 한다.
만일 글의 4가지 자질을 잘 조절하고 글의 네 길이 잘 뚫리게 한다면 좋은수필이 만들어질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생각하고 생각하여 자신의 글쓰기에 응용할 것이다.
1) 어머니의 강/김애자
강가에 차를 대고 곤하게 잠든 어머니 얼굴을 들여다본다. 망백(望百)의 문턱을 넘어서고부터 손에 들고 있던 염주도 내려놓고,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침이 마르도록 읊으시던 귀거래사도 잊으셨다. 어머니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삶에 숱한 편린들이 삭제되어 버린 이후론, 먹고 자는 원초적인 본능만 남아 무위로 움직일 뿐이다.
사람이 과거의 기억에서 놓여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뇌 세포가 거반 손상된 노모는 살아있으되 살아 있는 자가 누려야 할 모든 권리를 상실하였다. 무심무념(無心無念)의 상태에서 검불 같은 노구도 운신하기가 귀찮고 힘겨워 하고많은 날을 방안에서만 지내신다. 정체된 삶, 그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 속에 갇혀 지내다가 봄볕이 따순 날, 딸의 손에 이끌려 강가로 납신 것이다.
노모께 한 번은 이 강을 보여주고 싶었다. 강은 그분에게 애틋한 정한의 공간임을 잘 알고 있기에, 끝내 모르쇠 하면 돌아가시고 난 후 회한으로 남을 것 같아서다. 때문에 강을 기억할 것이란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단지 촛농에 다붙은 심지 같은 눈동자에 저 푸른 물빛만을 담아드리고 싶었다. 하여 목욕을 시키고 손톱과 발톱을 깎고 미장원에서 머리도 손질하였다. 그렇게 떠나온 길이건만 어머니는 도무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께서 강과 로맨스를 시작한 것은, 강마을로 시집오고 나서였다. 평산 신씨 가문에서 열여섯 나이에 출가하여 마주친 강물은 어린 새댁에게 서사적이기 보다 서정적인 설레임과 호기심을 일으키었다.장마 때면 물이 불어나 목계나루에 배가 며칠씩 묶여 있을 양이면, 뱃사람들과 보부상들이 몰려와 떠들썩하였고, 권번의 기녀들이 치는 설장구의 역동적인 가락이 물이랑을 타고 넘실거렸다.
목계는 일찍부터 물물교환의 메카였다. 한양과 영월로 뗏목이 오고가는 중심지답게 강심이 깊었고, 강폭 또한 넓었으므로 나루 특유의 전통문화가 자연스럽게 발달하였다. 그중, 정월 초아흐렛날에 치르는 줄다리기 행사는 규모자체가 대축제였다.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 편장을 세웠고, 용머리는 칠 척이나 되었으며, 몸체는 백 척이 넘었다고 한다. 이 거대한 줄을 백사장으로 옮길 때 수줄 편장은 꿩의 장목에 푸른 기를 달고 풍물패를 앞세웠다. 암줄 편장도 질세라 노란 띠에 공작모를 쓰고 치열하게 선두 다툼을 벌리며 경계선에 이르렀다. 그런 후에 비녀목을 지르곤 동편과 서편에서 모인 동민들이 보름이상 줄을 달이며 흥청거렸다.
이렇게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기간이면 어린 새댁에게도 문밖출입이 허용되었다. 귀밑에 솜털이 채 벗겨지지 않은 열일곱 각시와, 여드름이 함박 돋아난 열아홉 신랑이 가만가만 대문을 열고 나와선, 강 언덕에 앉아 강 건너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바라보며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앳된 남녀가 밤 깊도록 이마를 마주대고 소근거렸을 장면을 떠 올리면 사랑의 클라이맥스를 느끼게 한다. 태곳적 압록강 가에서 살았던 유화와 해모수도 강 언덕 어디 쯤에 선가 밤 깊도록 뒤척이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열애 끝에 주몽을 잉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강은 한 여인의 달콤한 로망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자정을 베풀지 않았다.젊은 내외의 금슬을 질투라도 했던지 지아비는 아내를 두고 머나 먼 이역으로 떠나가는 별리의 아픔을 그 강가에서 겪게 했던 것이다.성과 이름을 일본어로 개명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직장을 잡을 수 없었던 암울한 벽 앞에서 혈기왕성한 지아비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었다.몇 번의 취업과 해고를 겪은 후 짐을 꾸려 만주 길림으로 떠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야속한 일이었다. 강물이 얼고 풀리기를 몇 차례나 거듭하였으나 번번이 기다림을 배반하였다. 마침내 목숨처럼 붙들고 있었던 기다림의 끈마저 끊어지고 말았다.해방 사흘을 앞에 두고 지아비는 만주 길림성 부여현에서 장질부사로 급사하였다는 비보가 거짓말처럼 날아들었던 것이다. 겨우 서른여섯이었다.
이로써 여인은 우비고뇌(憂悲苦惱)가 갈피없이 뒤섞인 삶을 홀로 감당해야만 했다. 삯바느질로 삼남매를 먹이고 키워야 했으므로 지아비가 그토록 바라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스쳐가는 봄바람에 불과했다. 6․25 전란 당시에는 낯선 피난지에서 손가락에 끼고 있던 가락지를 뽑아 유기그릇과 비누로 바꾸어 버선코가 헤지도록 발품을 팔기도 했었다. 진사 댁 맏손녀의 일생이 참으로 기구하였다. 기구한 생을 이어가는 동안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외롭고 쓸쓸한 여정의 끝, 존재와 부재의 간극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어머니의 야윈 어깨를 흔들어 본다. 푸시시 눈을 떴으나 수면 위로 내리꽂히는 빛의 굴절이 눈부신가, 미간에 잡힌 주름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다 가라앉는다.
“어머니, 강이에요.” 그러나 노모에게는 강물도 부질없다. 무릎 위에 놓인 사탕봉지로 손이 갈 뿐이다. 사탕 한 알을 입에 물고 우물거리다가 다시 눈을 감는다.
당신에게, 이제 저 강은 헛것이다. 아니 강만이 아니다. 곁에 있는 딸도 헛것이요. 자신조차도 헛것일진데, 세상살이 중 헛것 아닌 것이 어디에 있다고 사위스럽게 눈을 뜨려 하시겠는가. 순례의 종점에 이른 얼굴이 저리도 편안하시거늘.
2) 큰누님 박씨 묘비명/박지원
유인孺人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 여섯에 덕수德水 이택모李宅模 백규伯揆에게 시집 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 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鵝谷인지라, 장차 서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려 한다.
백규가 그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 길이 막막하여, 어린 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궤짝을 이끌고 강물에 띄워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함께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두포斗浦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막 여덟살이었다.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구르며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내게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 여덟 해 전의 일이다.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리워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 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하였다. 유독 어릴 적 일은 또렷하고 또 즐거운 기억이 많은데, 세월은 길어 그 사이에는 언제나 이별의 근심을 괴로워 하고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였으니, 덧 없기 마치 꿈 속과도 같구나. 형제로 지낸 날들은 또 어찌 이다지 짧았더란 말인가.
떠나는 이 정녕코 뒷 기약을 남기지만 去者丁寧留後期
오히려 보내는 사람 눈물로 옷깃 적시게 하네. 猶令送者淚沾衣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꼬 扁舟從此何時返
보내는 이 하릴 없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送者徒然岸上歸
(해석인용)
죽은 누님을 그리며 지은 묘지명이다. 연암과 죽은 누님과는 여덟살의 터울이 있었다. 어려서 그는 누님에게 업혀 자랐을 터이다. 열 여섯에 시집간 누이가 마흔 셋의 젊은 나이에 고생만 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아내를 잃자 살 도리가 막막해졌다고 했으니, 그나마 그간의 생계도 누님이 삯바느질 등으로 꾸려왔음이 분명하다. 자형 백규는 선산 아래 땅뙈기라도 붙이고 살아볼 요량으로 상여가 나가는 길에 아예 이삿짐을 꾸려 길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 그 세간이라는 것이 겨우 솥 하나, 그릇 몇 개, 옷 상자와 짐 궤짝 두어 개가 전부라니, 그 궁상이야 꼭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도 연암은 그 비통함을 말하는 대신, 전혀 엉뚱하게도 누님이 시집 가던 날 새벽에 자신과의 사이에 있었던 절로 미소를 자아내는 한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있다. 신부 화장을 하고 있던 누님 곁에서, 허공에 대고 발을 동동거리며 새신랑 흉내로 누이를 놀리던 여덟살 짜리 철 없던 동생. 누이는 부끄러움을 못 이겨 “아이! 몰라.”하며 머리 빗던 빗을 던졌고, 그 빗에 이마를 맞은 동생은 “때렸어!”하며 악을 쓰고 울었다. 그래도 누이는 “흥!”하며 야단하는 대신, 패물 노리개를 꺼내 주며 동생을 달래었다. 아! 착하고 유순하기만 한 누이여.
이제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가 떠나가고 있다. 자형, 그리고 조카 아이들과 하직의 인사를 나누고, 배는 새벽 강물 위로 미끄러져 간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붉은 명정, 돛대의 그림자를 흔드는 푸른 물결, 그나마도 언덕을 돌아가서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세월이 좋아지면 내 수이 돌아옴세”하며 떠나던 자형의 말이 귀끝에 맴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알기에 그 허망한 기약은 외려 가슴 아프다. 이제 누님의 모습은 다시는 볼 수 없는가. 그러나 보라. 강물의 원경으로 빙 둘러선 새벽 산의 짙은 그림자는 마치 시집가던 날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배 떠난 뒤 잔잔해진 수면은 내가 침을 뱉어 더럽혔던 그 거울 같지 아니한가. 또 저 너머 초승달은 화장하던 누님의 눈썹만 같다. 그러고 보면 누님은 떠난 것이 아니라, 강물로 달빛으로 먼 산으로 되살아나 나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다.
3) 강바닥을 찾아서 / 정성화
빨랫거리는 강으로 가기 위한 핑계였다. 강으로 가는 길은 탱자나무 울타리로 이어져 있었다. 하얀 꽃이 진 자리에 맺힌 어린 탱자가 가시를 피해가며 얼마나 자랐는지 보고 싶은 게 더 큰 이유였다.
빨래방망이를 행구어 빨래 위에 얹고 내 고무신을 씻어 햇살이 드는 돌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고는 동네아이들이 물장난을 치고 있는 강물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아이들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발이 푹 꺼졌다.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내 발이 강바닥을 놓쳐버렸다. 아이들이 물장구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했다.
강바닥을 어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물속에서 억지로 눈을 떴다. 강물 속은 엷은 연둣빛이었으나 움푹 파여진 강바닥은 나를 향해 거무스름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얼른 손바닥으로 강바닥을 힘껏 떠밀었다. 그 반작용 때문인지 내 몸이 다시 떠올랐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큰물이 지나간 뒤에 엉켜버린 수초의 꼴을 하고 강가로 다시 걸어 나왔을 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햇살에 바짝 마른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고무신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났다. 내 발가락도 얼마나 놀랐던지 하얗게 질린 채 쪼글쪼글해져 있었다.
열 살 때의 그 아찔했던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은 수필 때문이었다. 수필이란, 소금물에 담가둔 조개가 해감을 뱉어내듯 그렇게 저절로 내 몸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수필이란, 단단한 조개껍대기 속에 야무지게 달라붙어있는 조개의 속살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수필을 쓰면서 갑자기 발아래가 푹 꺼지는 느낌, 물속에 잠긴 채 어디론가 끝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수필집을 내는 일은 겁도 없이 강물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일이었다. 강바닥에 언제 처박히고 말지, 물살에 의해 어느 강기슭으로 떠내려갈지 모를 일이었지만 일단 나의 바닥을 내 발과 내 눈, 아니 나의 온몸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간간이 나를 엄습해 오던 수필에 대한 두려움을 그 강물에 얼마쯤 씻어보고도 싶었다.
물속에서 눈을 뜨고 강바닥을 바라보았을 때 나에게 벗어나는 길을 일러주던 강바닥, 수필집을 낸다는 것은 그 강바닥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4) 강물에게 길을 묻다 / 정태헌
강변에 서서 도도히 흐르는 물살을 바라본다. 강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리지어 유장하게 흘러간다. 느릿하게 걷다가도 창창(蒼蒼)히 달려간다. 때론 소쿠라지고 소용돌이치면서도 강물은 한 가지 열망으로 먼 길을 향한다. 한사코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강변 너머의 아우성들을 못 들은 체, 묵묵히 더 낮은 곳으로 향할 뿐이다. 산록의 갈맷빛 물그림자에 몸을 헹구며 흐르기에 더 청징해 보인다.
늠실늠실 흘러가는 저 섬진강 강물을 보라. 있는 힘을 다해 바다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맴돈다고 에돈다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 헤살 놓는 바람에도 잔물굽이만 흔들릴 뿐, 맴돌아도 눈을 뜨고 에돌아도 멈추지 않으며 흐르면서도 해찰하지 않는다. 더디 가니 빨리 가라 등을 떠밀어서는 안 된다. 강물은 가야할 길과 곳곳에서 흐르는 속도를 잘 알고 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흔적을 만들며 흐르고 있는 중이다. 강물은 무릎 꺾여 넘어질지라도 흘러갈 것이다. 흘러야 한다. 그래야 지혜를 얻게 되고 낮은 곳에서도 갈 길을 찾게 된다.
우리가 산다는 것도 강물처럼 가야할 곳을 향해 흔적을 만들며 흐르는 일이다. 생은 물질적이든 감정적이든, 육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성취하고 싶은 목표를 향하여 걷는 일이다. 힘겹다고 중도에 머물러 버리면 썩고 만다. 여울에서 맴돌다 길을 잃어버리면 방황하게 된다. 안주는 부패를 낳고 방황은 혼돈을 불러온다. 허나 방황할지언정 저 강물처럼 쉼 없이 흘러가야 한다. 방황은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틀과 원동력을 잉태하고 있다. 수평선의 시원은 방황하면서도 쉼 없이 흐른 계곡물이다. 하지만 안주는 무력함이며 퇴보다. 머물러 평온만을 누리며 사는 일은 흐르지 않는 강물처럼 썩고 만다.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저 강물처럼 부지런히 흘러야 한다. 중도에 마르지 않는 한 강물은 바다에 이른다.
강물은 흘러가야 할 곳이 분명하기에 저리 늠실거리며 흘러가는 것일 게다. 세류로 흘러 여울에서 감돌다가 대하와 만나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청류도 되고 탁류도 된다. 절벽에서는 폭포로 떨어져 내려 소를 이루고 장애물을 만나면 사나운 기세로 빠르게 소용돌이치지만 평지에 이르면 장엄하게 흐른다. 산악에서 발원하여 바다에 이르는 강물의 흐름을 생각해 보라. 이 또한 우리 생의 모습이 아닌가. 강 상류의 빠르고 격한 흐름은 젊은 날의 열정과 방황을, 맴돌며 에돌아 흐르는 물길은 중년의 시련과 갈등을, 하류에 이르러 깊고 완만해진 흐름은 노년의 지혜와 넉넉함이지 않은가.
도인(道人)은 길을 가며 깨달은 사람이다. 강물이 바다에 이르듯, 우리도 가야할 길을 걷다 보면 또 다른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게 생의 종착역일지라도 섭리로 받아들일 일이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안주나 방황이 아닌 순례의 길이다. 순례는 목표를 세우고 가야할 방향을 향하여 먼 길을 걷는 여정이다. 고통이 따를지라도 가야 한다. 생을 밀고 가며 숙성시키는 힘은 안락이 아니라 고통이질 않던가.
순례 중 간이역을 만나리라. 간이역은 중간 거점일 뿐, 집착해서는 안 되는 유혹의 장소다. 그곳은 삶의 본질에서 벗어난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것들이 매복해 있는 곳이다. 잠시 머물지언정 오랫동안 안주해서는 안 된다. 지향하는 방향과 과정에 힘쓸 일이지 간이역에서 길게 한눈팔다 보면 눈빛이 흐려진다. 이는 강물이 가르쳐 준 삶의 지혜다.
될 수 있으면 혼자 가야 하리라. 허나 뜨거운 피와 붉은 영혼을 지닌 인간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일이 어찌 쉬우랴. 기꺼운 순례를 위해서는 동행자가 있으면 더 좋으리라. 혼자 가는 것보다는 고단하지 않으며 시행착오를 줄여 줄 수 있을 테니까.
동행은 방황이나 나태를 경계한다. 강물이 무리들과 어깨 맞대고 흐르는 것은 빗나가지 않기 위함이다. 행렬에서 벗어나면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 무리에서 이탈하면 미아가 되기 쉽다. 누군가 곁에서 동행해 준다면 흔흔한 여정이 되리라. 한데 누구와 함께 어떤 형태로 순례를 해야 할까. 이는 각자 선택해야 할 생의 몫이다. 어떤 길로 누구와 어떤 순례를 하는가에 따라 그 삶의 빛깔과 형태는 달라질 것이다.
강물 따라 묵상하며 천천히, 빠르게 걷는다. 무욕의 고요, 순명의 섭리, 생의 무량, 질곡의 너그러움으로 강물은 흐른다. 강물을 따라 걷자. 하늘로 머리를 두르고 땅 위에 발을 딛고 길을 통해 순례를 하자. 옷차림은 치장하거나 화려함을 뽐낼 필요가 없다.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지 못함을 서러워할 필요도 없다. 누옥에 거처한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으며 이를 생의 고통이라 여기지 말 일이다. 인생은 기쁨 몇 숟가락에 나머지는 고통의 그릇이 아니던가. 마지막 날, 누워서 생을 마감하기보다는 걷다가 스러져 길 위에서 생명을 소진할 수 있다면 더욱 좋으리라.
강물로 흐르고 싶다. 삶이 세월의 강물에 그물 치는 일이라면 이젠 보다 낮은 곳을 향하여 그물을 드리우고 싶다. 낮게 살더라도 안락의 늪에는 빠지지 말자. 생이 고통과 시련의 연속일지라도 축연(祝宴)이라 여기는 순례자가 되기를 소망하자.
굽이굽이 긴 여정을 어떻게 흘러야 넓은 바다에 이르러 수평선으로 설 수 있는지 강물에게 길을 묻는다. 낮은 곳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흘러가는 강물에게 그 길을 묻는다.
5) 냇물/최명희
냇물은 아직도 내 어린 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나뭇가지 높은 곳에서 그 잎사귀를 힘차게 날리던 포플러가 햇빛에 후줄근히 젖은 여름 한낮, 땡볕에 콧등을 그을리며 물싸움을 하고 온통 입술이 새파랗게 되어서야 자갈밭에 나와 앉아 아무 돌멩이나 주워 들고 귀에 댄 채 머리를 흔들면, 햇빛은 수면(水面)위에서 천이나 만이나 되는 유리 보석처럼 찬란하게 부서졌었다.
자갈밭에 아무렇게나 가란 잡초 그늘에 옷을 차곡차곡 접어놓고, 피라미새끼 두어 마리나, 정말 기분 좋게도 미꾸라지가 잡힌 날은 모래까지 한줌 섞어서 물을 담아 두던 계집아이 동무의 옥색 고무신과 점점이 박혀 있던 붉은 꽃무늬, 비 개인 후 물이 불면 어른들은 못 가게 나무라시지만 몰래 빠져나가 그중 깊은 곳에 참외를 던져놓고 헤엄 시합을 할 때, 머슴애들은 저희끼리 어깨를 짜고 차츰차츰 원을 좁혀오며 <어얼레- 얼레>하던 높은 웃음소리들이 가끔 선명한 색깔로 떠오른다.
해가 서서히 붉은 빛을 남기고 사라진 뒤 어둠이 옷자락으로 시간을 덮으면 천변(川邊)의 어물전(魚物전)에 서는 석유램프를 처마 끝에 켜 울렸었다.
그러면 등불의 그림자는 주황색의 긴 꼬리를 달고 흘러내려 순식간에 냇물을 불빛으로 덮었다.
그때 냇물은 어린아이처럼 명랑하게, 은자(隱者)와도 같은 음성으로 웃었다.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친구가 어느 겨울 갑작스레 나를 방문하던 날, 그가 추운 바람을 타고 냇가에 서서 무수히 빛나는 등불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소리로
<뺨이 붉은 아이야. 이 담에 내가 너를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때까지 너는 꼭 이렇게 젊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여라.>
하고 소곤거릴 때, 냇물은 <머플러> 펄럭이는 소리로 흘러갔었다.
나는 때로 유년시절에의 그리움과 걷잡을 수 없는 향수(香愁)로 서성거리곤 한다.
기억의 서랍 속에서 말없이 죽어가고 있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날을 그리워하며 날마다 여위어 가는 것은, 아직 돌아오지도 않은 앞날 때문에 불안하여 미리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만큼 부질없고 허무한 일이다.
냇물은 거슬러 뒤돌아 흐르지 않는다.
단일(單一)한 것을 향하여 끈기 있고 참을성 있게, 아무것에도 집착의 뿌리를 내리지 않고 그는 흘러간다.
대개 사람이 그 마음속에 키우고 있는 집착의 뿌리는 얼마나 강한 번식력과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 혹은 한번 맛보았던 즐거움과 비애, 황금의 궤짝과 옥으로 궨 고귀한 관, 그리고 자기의 손을 쥐고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손,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집념을 찬란한 잎사귀로 가슴을 덮고 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날을, 그 잎에서 뿜어지는 광채로 눈멀고, 그 잎에서 절그렁거리는 장식품의 소리로 귀먹고 만다
날 위에 날이 흐르면 잎사귀는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자기의 참 모습에서 자기를 차단시켜 버리는 두꺼운 옷, 성벽(城璧)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옷은 헛된 것, 그대를 결박하는 사슬, 스스로의 망상으로 지은 감옥과도 같은 것, 그대는 자기의 얼굴도 잊고 마는구나.>
냇물을 회유(誨諭)하며 속삭인다.
그에게는 옷이 없다.
형태가 없으니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아니, 옷이랑 형태 위에 입혀진 것이 아니라 옷이 곧 형태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옷은 껍질, 남과의 경계, 계산, 울타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허위다.
언젠가는 낡아 초라하게 뼈대를 드러낼 가아(假我)의 교활한 펄럭임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나는 나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업는 것 같다.
내 얼굴이라고 믿고 있는 나의 모습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주인노릇을 하던 낯선 얼굴, 다만 옷이 아니었을까?
냇물을 분장된 옷에 자기를 가리우지 않고 아무 것에도 속박되지 않으며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구김 없이 흘러간다.
나는 냇가에 서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물론 냇가에는 깊은 명상을 위하여 고요히 머리를 수그린 시인도 없고 푸른 꿈을 지닌 채 머나 먼 곳으로 항해를 떠나는 선박도 없고, 또한 물 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진주를 따라 들어가는 해녀도 없다.
기껏해야 붕어를 잡고, 이름도 없는 새끼고기를 잡는 대소쿠리나 매미채 같은 그물망을 들고 첨벙거리는 머슴애와 빨래광주리를 이고 오는 아낙네들의 좋은 친구일 뿐이다.
아무도 냇물에 신비(神秘)를 가지거나 꿈을 가지거나 두려움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냇물은 무관심 속에서 흘러간다.
그러나 냇가에 고요히 앉아 낮고 맑은 물소리를 들으면, 그가 이제야 살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면서도 오랜 날 세상을 살아 온 슬기롭고 현명한 노인임을 나는 안다.
냇물은 시작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간다.
<이 냇물, 어디까지 흘러갈까?>
<강으로 간대>
<강?>
<우리 한번 따라 가 볼까?>
<강물까지?>
<응>
어느 휴일 오후 차가운 물에 밭을 잠그고 물밑을 들여다보던 동무 아이와 나는 손을 마주 자고 물을 따라 내려갔었다.
어둠이 귀밑에서 큰 소리로 서걱거릴 때에야 우리는 겁먹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야?>
<강일까?>
<아직은 아니야.>
<그렇게나 멀어? 강물은…?>
낯선 동네와 지붕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얼굴, 아직도 강에 닿지 못했다는 슬픔과 피로 때문에 우리는 와락 겁이 나 훌쩍거리며 울다가 발이 허옇게 불어 절룩이면서 냇물을 거슬러 올라 온 일이 있었다.
냇물은 강(江)으로 가는 길을 잃는 일이 없다.
냇물은 스스로 길을 이루며 자기를 실어 나른다.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자기의 질서이며 그 스스로 시작이고 끝이다.
나는 턱을 고이고 냇가에 앉아 그의 맥이 튀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나는 나의 길이 되어 주는가?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정확하게 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아직도 형태를 가지지 못한 유아기, 부유 상태에서 이곳과 저곳을 낯설게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길의 거미줄 끝없는 어둠 속에서 혼돈으로 어지러워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나이 어려, 처음 보는 신작로에서 길을 잃었을 때, 손목을 이끌고 내 집 대문 앞까지 데려다 주던 친절한 아주머니나, 박하사탕과 만두를 사주던 순경아저씨는, 지금은 내 곁에 없다.
어려서도 곧잘 길을 잃고 징징거리며 울던 나는, 지금 내 생의 네거리, 신호등 도표지판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어깨를 오그리고 서성거린다.
상냥하게 등불을 밝혀 줄 하인도 없고 부드러우나 메마른 음성으로 기도를 외워 줄 모친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냇물은 부드럽고 준엄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어리석고 게으른 자여 길이란 남이 닦아주고 열어주는 평탄한 것이 아닌 것을. 그대는, 가슴으로 돌부리를 깎으며 흘러가는 나의 피를 볼 수 있는가? 사소한 번민의 화살에도 중독을 일으키며 허황한 욕망의 채찍에 감겨 허덕이는 그대는, 실낱같은 바람조차 이기지 못하고 미친 듯이 도는 바람개비 같은 자리에서 매암 도는 팽이에 불과하다.>
냇물은 뾰족한 돌부리를 깎는 인고(忍苦)의 소리를 삼키며 쉼 없이 흘러간다.
냇물은 한 번도 같은 돌 위를 흐르는 일이 없으면서도 한 번도 그 돌 위에 물결이 그치지는 않는다.
그는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지 않게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잠잠히 자기의 품안에 붕어나 송사리를 기르면서 흘러간다.
강물 속에 살고 있는 아름답고 빛나는 고기와, 바다 깊이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재산에 대해서는 한 치의 탐욕도 보이지 않는다.
밋밋한 자기에게 수치와 모멸을 느끼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언젠가 강물에 닿을 것을, 그리고 바다, 그가 흐르기 시작부터 가야할 목적지, 목적지라기보다는 근원(根源)에 닿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는 지금 냇물이라는 낮고 좁은 골짜기를 흐르고 있지만, 냇물이면서 곧 강물이고 또 동시에 바다임을 알고 잇는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말없는 질서, 자연적인 규율이다.
대개 젊은이의 자혜는 햇빛에 비치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번뜩이나 길을 잃기 쉽다,
한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궁극적인 세계를 바다라 한다면, 재치와 기교에 넘친 지혜는 바다에 닿기도 전, 늪을 이루고 만다.
생(生)의 근원에 대한 묵묵하고 인내력 있는 추구와 성실성보다 순간적인 예지(銳智)에 도취하고, 많은 것을 손쉽게 단정 짓고 혹은 버리고, 사고(思考)의 문을 아집(我執)으로 통하게 할 때, 그는 자기에게 갇히게 된다.
자기에게 갇히는 것은, 냇물이 흐르다 멎어 웅덩이를 만들고 늪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는 그 늪에 자기가 빠져 손잡이도 없고 딛을 땅도 없이 허우적이게 될 것이다.
고여 있는 물은 흐리는 물을 따를 수 없다.
생각해보면 生이란 어느 한 순간 섬광처럼 비쳐 내린 영감(靈感)이나 논리적 궤변, 재치나 기교에 의해 참 모습을 알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은 아닐 것 같다.
무수한 얼굴을 지닌 무수한 길을 만나고 너무도 다른 빛깔의 양쪽 세계를 같은 시각에 보아야 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생(生)은 가느다란 파이프 속에 흐르는 물이나 납작한 종잇장 같은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총체(總體), 기쁨과 고통의 덩어리, 하늘이 내려준 목숨을 질기도록 성실하게 살고 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냇물이 흐르다가 거대한 바위에 부딪쳤을 때 산산이 조각나는 몸을 이끌고 다시금 좁디좁은 틈으로 흘러 내려 강에 이르고, 일곱 해의 가뭄에 앙상히 뼈대를 드러내면서도 마지막 남아있는 한 방울의 물이 끈질기게 줄기를 이루며 바다에 닿아서야 비로소 바다가 무엇인지 말 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머나 먼 낯선 길을 말없는 인종(忍從)과 신념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성실성이야말로 생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태도일 것이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돌아앉았다.
그리고 나의 얄팍한, 한 치의 깊이도 한 뼘의 넓이도 가지지 못한 손바닥만 한 가슴을 굽어보았다.
가슴은, 어디선가 물이 흘러 올 줄기를 잃고, 어디론가 흘러가야 할 길이 막힌 채 납작한 접시가 되어있었다.
한줌의 햇빛이 비쳐도 가뭄에 허덕이며 목말라 울부짖고, 단 한줌의 비만 내려도 창수(脹水)가 나고 해일(海溢)이 넘치는, 가엾고 빈약한 가슴을 오래도록 드려다 보았다.
그로 하여 슬픔과 탄식에 울고 있을 때 냇물은 소곤거렸다.
<삽을 들어서 가슴을 파라>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분부였다.
편협하여 포용할 줄 모르고 남에게 베풀 한 방울의 물마저 지니지 못한 진흙의 웅덩이, 접시 같은 가슴의 언저리에 삽질을 하면 처음 한 삽은,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의 삽질은 참으로 막막하겠지.
어쩌면, 자기의 어리석은 행위,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는지도 모르는 꿈에 대한 조소(潮笑), 이제 그만 내팽개치고 싶은 피로 때문에 많은 시간을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에 대한 나의 신념이 한 무더기 한 무더기씩 막힌 흙을 떠낼 때 나의 신념이 흘린 땀은 어느 사이엔가 줄기를 이루고 여울이 되고 드디어는 냇물이 되어 흐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영혼의 성장을 위한 그 기나긴 도정(道程)을 인내를 가지고 떠날 것이다.
나의 영혼 속으로 냇물이 흐르면 나는 붕어를 기르고 배를 띄우고, 그리고 마지막 내 목숨의 근원, 나의 고향, 빛나고 깊은 님, 아무 것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바다에 이르겠지.
가능성과 완성에는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겠는가―.
햇빛이 어둠에서 그늘을 거두어가듯 내 영혼은 넓은 깨달음이 이 우매한 옷을 모두 벗겨주는 끊임없는 깨우침의 목소리, 내 혼의 어둡고 광활한 들판 한쪽에서부터 빛을 머금은 냇물이 반짝이며 흘러오는 그 살아있는 숨소리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