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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끼 성지
나가사키는 1571년 포르투갈 선박이 처음 내항한 이후 외국과 교류하는 창구 구실을 했던 역사 깊은 항구도시이다. 성당의 종소리와 뱃고동 소리가 어울려 낭만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는 곳이지만 가톨릭 순교자가 600여 명 났고, 원폭의 비극이 남아 있는 역사의 도시이기도 하다. 나가사키는 “신앙의 고향” 이라고 부른다. 현재 나가사키 시내에는 22개의 성당이 있고 현 내에는 모두 137개의 성당이 있다. 그중의 대표적인 교회가 우라카미 성당과 오우라성당이다.
니시사카(西坂) 공원
나가사키(長埼) 열차역 근처에 있는 니시사카(西坂) 공원은 일본에서 최초로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세계에 알려진 순교지이다. 키리시탄 금교령 하에서 순교장소가 불명확 했었는데 1947년 니시자카로 확정되었다. 26인 순교자가 시성된지 100년이 되는 1962년에 기념비와 기념관이 건립되고 니시자카 공원이 조성되었다.
1587년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무역을 장려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조심스레 인정하자 급증하는 신자와 기리시탄의 신자 대명(大名)의 규제를 위해 사제추방령을 내렸다. 잇달아 이어지는 교토의 대지진과 태풍, 외국무역선의 불착륙 등이 기리시탄의 탓으로 빙자하여 신국(神國)인 일본에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박해를 시작하여 교토와 오-사카에서 활동하던 사제와 신자 26명을 십자가의 책형에 처해 본보기를 보이게 한 것이 일본의 첫 순교의 길이다.
최연소자 12살의 루도비꼬 이바라기 소년부터 64세의 디에꼬 키사이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20명, 외국인 6의 26명은 조리돌림과 왼쪽 귀를 잘리고 추위와 허기를 견디면서 나가사키까지 1달 정도의 약 800km의 순교의 길을 맨발로 걸어왔다.
바오로 미키(三木)는“ 나는 길에서 단 하루도 설교를 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였고 일행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를 부르고, 보기 드문 행복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14살의 토마스는 히로시마에서 잠시의 시간을 이용하여 어머니께 [임종시에 상등통회로 신부님이 안 계셔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열심히 살라.]는 편지를 적었으나 보내지 못하고 아버지 미카엘 고자키의 옷섶에서 나중에 발견되었다.
전해지는 사료에는 「16∼17세기 나가사키(長崎)는 일본의 로마(良摩) 같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나가사키현이 유럽의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인 데다가 현을 지배하던 다이묘가 대부분 가톨릭신자였던 것에 기인한다. 전국적인 금교령이 내려진 1614년 나가사키의 신자 수는 5만 명, 성당은 16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엄청난 숫자다. 이후 에도 막부의 박해로 신자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잠복 신앙은 큐슈 일대 수많은 섬에서 부모에서 자식에게 확실하게 전승됐고, 1865년 오우라 성당에서의「신자 재발견」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신앙 박해기, 일본에서는 신자를 가려내기 위해 예수의 초상화나 마리아상이 조각된 메달을 발로 밟게 하는 ‘후미에’(踏繪)라는 방법이 동원됐다. 신자로서 차마 메달을 밟지 못한 사람은 모두 처형됐다. 후미에는 나가사키의 우라카미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자행되었고, 이에 발각된 신자들에게는 배교를 강요하기 위하여 상상을 초월한 갖갖은 고문이 가해졌다.
나가사키시내 여러 곳에 마련된 사료관에는 후미에 진품을 비롯해 일본에 상주하던 예수회 등 수도회 사제들이 본국으로 보낸 편지, 마카오에서 가져온 성인의 유해, 순교당시 상황을 묘사한 「순교화(畵)」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인연이 깊다. 하지만 악연이 깊어서인지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처럼 일본은 아직도 우리에게 먼 나라이다. 일본 가톨릭교회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일본 가톨릭교회의 성지는 놀라움을 주기 충분했다.
200여 년 가까이 박해를 겪으며 스러져간 수많은 순교자들과 그들이 남긴 흔적들은 한국의 신앙 선조들이 겪은 것과 너무나 많이 닮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 열도의 최남단 큐슈지방의 나가사키현(長琦縣)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신앙의 흔적들과 순교자들의 혼이 고스란히 담겨진 곳이다."
☼일본 천주교회의 역사 :
일본 천주교회는 토쿄 대교구, 오사카 대교구, 나가사키 대교구를 비롯하여 16개 교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당 수는 781개이고, 신자총 수는 41만 3천명이다. 현재 일본 천주교회는 성인 42위(1862년 26위 시성, 1987년 16위 시성)와 복자 205위를 모시고 있다.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549년 8월 15일 예수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치스코 사비에르(혹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Francisco Xavier) 신부가 큐슈지역 가고시마에 입국하면서이다. 일본에서는 이때부터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자는 물론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포르투갈어 발음을 따라 ‘기리시탄’이라고 불렀다.
사비에르 신부는 유럽의 새로운 자연과학을 일본에 전달하여 큰 영향을 주었다. 선교사들이 전해 주는 복음과 유럽의 새 문물은 전란에 시달린 일본사회에 큰 희망을 안겨 주었다. 사비에르 신부는 영주領主를 포함하여 무사들 가운데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는데 불교에서 개종한 비파법사(琵琶法師) 라우렌시오의 세례는 일본의 전교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예수회의 장상인 토레스(Torres) 신부가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과 함께 열심히 포교한 결과 유력한 영주인 오무라(大村純忠)와 다카야마(高山右近), 고니시(小西行長), 아리마(有馬晴信) 등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일본 집권자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보호 아래 교세는 발전을 거듭하여 1580년에는 신자수가 10만 명에 이르렀다.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문화를 환영하고 불교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기리시탄을 지원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예수회의 장상인 토레스(Torres) 신부가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과 함께 열심히 포교한 결과 유력한 영주인 오무라(大村純忠)와 다카야마(高山右近), 고니시(小西行長), 아리마(有馬晴信) 등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일본 집권자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보호 아래 교세는 발전을 거듭하여 1580년에는 신자수가 10만 명에 이르렀다.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문화를 환영하고 불교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기리시탄을 지원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얼마 동안은 무역의 이득을 위해 기리시탄의 보호책을 썼으나 1587년에 태도가 돌변하여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박해의 돌풍이 한때 일본 전국을 휩쓸자 파괴당한 교회도 많았으나, 얼마 뒤부터 교세는 오히려 상승세를 보였다. 하지만 1593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필리핀 총독 사절단의 자격으로 일본에 입국한 뒤 공공연히 선교활동을 벌인 결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그의 분노를 부채질함으로써 1597년 2월 5일 프란치스코회 수사 6명을 비롯하여 예수회 수사 3명과 미키(三木, 바오로) 등 일본인 17명이 나가사키의 니시사카(西坂)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들은 그후 1862년에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일본 26성인’이 되었다.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실권을 잡고, 에도(江戶, 오늘의 동경)에 막부(幕府)를 세우고 일본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 역시 처음에는 기리시탄의 활동을 묵인하였으나, 프로테스탄트인 네덜란드인들이 들어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헐뜯으며 무역의 이익을 앞세워 도쿠가와 정권에 접근하게 되면서부터, 그리고 기리시탄 신자가 늘어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으로 차츰 금교정책을 펴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4년 기리시탄의 전면적인 금교령을 선포하고, 성당을 파괴하는 등, 혹독한 박해시대를 만들어 갔다. 그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1873년까지 250여 년 동안 신자들은 큐슈, 교토, 오사카, 에도 등지에서 가혹한 박해를 받아 많은 순교자를 내었지만, 이런 박해 속에서도 일본교회는 수난을 이겨내며 신앙을 고수하였다.
☧ 여기애인. 그리고 나가이 박사
시네마(島根)현 출신인 나가이 박사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방사선 의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일본 교회 역사상 대단한 가톨릭 집안의 후손인 부인 미도리(마리나) 여사의 영향을 받아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명은 바오로였다. 열악한 의료 연구시설로 인해 ‘만추골추성 백혈병, 남은 생애 3년’을 선고받았지만 꿋꿋하게 연구에 매진하는 성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던 와중에 원폭투하를 겪으며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피폭으로 인해 가눌 수 없는 몸을 이끌며 두 아이들과 함께 ‘여기당’ 이라는 곳에서「나가사키의 종」, 「묵주알」등의 저술 활동을 통하여 ‘참된 평화의 길’을 전 세계에 전파하였다. 누워서 지내는 처지였지만 당시 천황과 헬렌 켈러 등 유명 인사들이 그의 조언을 들으러 올 정도로 당시에 필요한 사람이었으며, 훌륭한 사랑의 실천자인 예수님의 사도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축복 서한을 보냈고, 이후 나가사키시에서는 명예 시민증 1호를 수여하였다. 1951년 5월 1일 사망할 때 43세였다.
우라카미의 성당에서 도보로 5분정도 언덕을 오르다보면 아주 초라한 판자집이 하나 보인다. 이곳은 성경의 말씀을 몸으로 살은 평화의 성자, 나가이 박사가 평화를 수호하는 여기애인 (如己愛人)의 삶을 실천하며 살다간 집이다.
1948년 우라카미의 신자들이 마련해준 다다미 2장의 작은집에서 나가이 박사는 두 아이와 함께 살며,‘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코 12.31)는 성경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는 삶, 여기애인 (如己愛人)의 정신으로 이집을 여기당(如己堂.뇨코도)이라고 이름 했다.
그는 평화의 수호자로 ‘평화’(平和を)란 글자를 병석에서 쓴 친필의 붓글 1000장을 국내외로 우송하여 두 번 다시 인류에게 전쟁과 원폭 없는 평화를 지키려했다. 현재 옆 건물에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순교자들께 드리는 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저희는 오늘 순교자들을 찾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어, 하느님과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저희를 위해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순교자들은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 주시어, 교회를 이 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와 수도자가 많이 나게 하시고, 저희는 주님의 계명을 잘 지켜 친구들에게 복음을 잘 전하게 해주십시오.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 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 주소서.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사랑받는 친구가 되게헤주십시오.
이세상에서 주님을 증거한 모든 순교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