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에서는 최영준교수의 <영남대로(嶺南大路)>(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0)를 예로 삼았다.
책은 우리나라의 옛 도로인 영남대로를 중심으로 역사지리적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다.
영남대로는 총연장이 약 380km로서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동래를 잇는 최단코스였다.
이 도로는 현재의 경부국도나 철도보다 78~80km나 거리가 짧다.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는 428km다.)
... (중략) ...
조선시대에는 도로명칭을 한양을 중심으로 종착지에 따라 붙였다.
서로(西路, 의주방면), 북로(北路, 경성 방면) 등이 그런 예다.
한양에서 동래 부산포까지 이르는 위 도로는 경상충청대로, 경상대로 혹은 동남저부산 제4로라고 불리웠는데,
문헌상에 나타나는 이러한 명칭들을 현지주민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적절한 명칭을 선정할 필요성을 느껴 영남대로라 칭하였다.
(책 16쪽 요약)
그런 경위로 도로명을 지은 저자는 영남대로의 옛 경로를 복원하기 위해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지(驛志), <대동지지>, <택리지>, 도로고 등의 문헌, 청구도, 대동여지도, 조선해륙전도 등의
지도, 그리고 항공사진을 참조하였다.
특히 읍지 및 읍지도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3년여 동안 여러 차례 현지답사도 했다.
저자의 말대로 "길은 자연 및 인문환경에 알맞는 수단으로 설계되어 있으므로,
모든 도로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도로의 역사지리적 연구가 올바른 지리인식의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다.
[그림38]은 18세기 우리나라의 4대 간선도로를 나타낸 것이다.
그림에 나타난 도로 경로의 정확성을 판단하는 것이 나의 일은 아니다.
우역제도(郵驛制度)까지 검토하여 복원한 것이므로 부분적 이견은 몰라도
큰 흐름에는 대체로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절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그림을 보며 "어떤 이유로 도로가 그림과 같은 경로를 취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 논의의 기초가 될 우리나라의 지형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반도의 척량인 태백산맥은 추가령곡에서 맥이 끊어졌다가 다시 솟아 낭림산맥을 이룬다.
태백산맥은 몇 군데의 안부(鞍部)에 의해 맥이 끊어지기는 하나
평균고도가 1,000미터를 넘기 때문에 한반도의 동해안지방을 문화적으로 고립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한반도의 지형은 흔히 서쪽에 있는 대륙을 향하여 모로 누운 거수(巨獸)의 뼈대에 비유된다.
거수의 등뼈에 해당되는 것은 태백산맥이고
갈비뼈에 해당되는 부분은 광주산맥, 차령산맥, 소백산맥 등 서남서 주향의 산맥들이다.
이러한 산맥의 사이에는 산맥과 평행하게 흐르는 하천들이 있으며, 하천을 따라 넓은 분지들이 발달하였다.
그러므로 주요 도시들은 그러한 분지 내에 자리잡고 있다.
(책 35-36쪽 요약)
도로와 상관 없는 얘기지만,
우선 인식의 바탕 자체가 일본의 '조선지형 왜곡 책략'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태백산맥은 나라의 척량이 아니며, 우리나라가 '중국을 향해 모로 누운 땅'은 더욱 아니다.
게다가 위 지리인식들은 실제의 지형과 상관 없는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다.
산을 보지 않고 산을 쓴 것이다.
(1) "태백산맥은 몇 군데의 안부(鞍部)에 의해 맥이 끊어지기는 하나 ..."
안부(鞍部)는 고개다.
고개는 어느 산 어느 줄기에도 있는 자연현상이다.
산봉우리 하나 넘을 때마다 존재하는 것이 고개다.
안부는 능선의 일부이며 그 자체가 산줄기다.
따라서 안부는 맥을 끊는 게 아니라 맥을 이어주는 지형이다.
"추가령곡에서 맥이 끊어졌다가..." 라는 서술도 마찬가지다.
추가령곡에서 지질구조가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산줄기가 끊기는 것은 아니다.
도로를 낼 때 땅 속의 지질구조가 바뀌었다고 도로의 노선을 바꾸지는 않는다.
도로의 노선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산과 강 자체다.
(2) "평균고도가 1,000미터를 넘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통해 평균고도를 계산했는지 모르겠으되,
태백산맥 능선 전체의 평균고도는 결코 1,000미터를 넘지 못한다.
태백산 남쪽의 야산줄기들이 평균치를 깎아먹기 때문이다.
만약 산맥 중의 높은 봉우리 몇 개만 추려 평균치를 냈다면 1,000미터가 넘기는 하겠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계산한다면 소백산맥은 평균고도 1,300미터를 넘나드는 산맥이 된다.
(3) "갈비뼈에 해당되는 부분은 광주산맥, 차령산맥, 소백산맥 등 서남서 주향의 산맥들이다."
광주산맥, 차령산맥은 가공의 선이다.
한강과 금강에 의해 여러 차례 토막난, 구멍난 담장이다.
사실 남한땅의 전체적 지형감각을 결정적으로 왜곡하는 것이 바로 광주산맥, 차령산맥이라는 허상의 존재다.
(4) "이러한 산맥의 사이에는 산맥과 평행하게 흐르는 하천들이 있으며, 하천을 따라..."
허상이 그림자까지 만들어낸 꼴이다.
소위 갈비뼈에 해당한다는 광주 · 차령 · 소백산맥과 평행하게 흐르는 하천은 우리나라에 없다.
오히려 한강과 금강이 몇 군데서 산맥들과 수직으로 교차하면서 산맥을 동강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지형인식에 의거하여 언급되는 분지, 도시들의 입지 근거 또한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산맥은 이처럼 잘못된 지형인식을 제공한다.
그러한 바탕에서 우리나라 도로입지의 전체적 경향을 추론한 논지는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지형 때문에 우리나라는 동북-서남방향의 교통로를 열기가 비교적 쉬우나
남북방향의 교통로 개설에는 중첩되는 자연장벽들로 인하여 어려운 점이 많다.
(책 36쪽)
산맥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4대 간선도로는 왜 '중첩되는 자연장벽들'에도 불구하고 남북방향으로 개설되었을까?
이번에는 산경표에게 물어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자연장벽은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으로 인하여 동서방향의 교통로는 내기 어려우나, 남북방향의 교통로는 비교적 열기 쉽다."
하나의 땅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다르다.
어느 쪽이 맞는가?
그림이 말해준다.
나라의 4대 간선도로가 모두 '남북방향'으로 개설되어 있는 것이다.
영남대로만 해도 백두대간 외에 장벽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긴 땅이고,
따라서 중심인 한양에서 동래나 의주 같은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자면
자연환경에 무관하게 남북방향으로 길을 낼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하지 말자.
만약 산맥이 말하듯 정말로 우리나라의 지형이 남북방향으로 장애물 첩첩이었다면,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의 입지가 현재 같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입지 자체도 달라졌을 것이다.
도로 여건으로만 보아도 부산은 거기 있을 만한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사람은 게으르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도로는 목적지에 이르는 최적 경로를 통해 난다.
'최적 경로'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직선거리가 짧을 것.
둘째, 편할 것.
도로는 이 두 가지 조건이 적당한 타협을 거쳐 완성된 결과라고 본다.
북로(北路 ; 한양 ⇒ 경성)를 보자.
최단코스 따라 길이 나있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범위 내에서 바닷가 편한 쪽으로 길이 돌고 있다.
길이는 다소 늘어지더라도 험한 산지 첩첩인 백두대간을 비켜가고 있는 것이다.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최단코스다.
그 경로는 '가장 짧다'는 이유 말고도 지형적으로 '쉬웠다'는 전제를 충족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맥은 그 경로가 "중첩되는 자연장벽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 건설되었다고 파악한다.
그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인식을 극복하기 위하여 산맥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개발했다.
영남대로상에는 광주, 차령, 소백 등의 큰 산맥과 지맥들이 놓여있어,
상당히 많은 장벽이 분포하였다.
그러나 광주산맥을 비롯한 대부분의 산맥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침식을 받아왔기 때문에
맥이 끊어져 안부를 형성한 곳이 적지 않다.
이러한 안부는 주위의 산지보다 고도가 현저하게 낮고 경사가 느리기 때문에
교통로를 열기 편하여 일찍이 고대도로의 입지로 선정되었다.
(책 36-38쪽)
안부는 주위의 산지와 별개의 지형이 아니다.
안부의 고도가 낮고 경사가 완만한 것은 광주산맥, 차령산맥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모든 산악지형의 기본구조일 뿐이다.
몇 번 반복되는 얘기지만 광주산맥, 차령산맥의 맥이 끊겨있는 것은,
다시 말해 그 산맥들이 장애물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은 "침식을 받아 낮아진 안부" 때문이 아니라,
강물에 의해 끊겨있기 때문이다.
영남대로는 차령산맥이 한강에 의해 완전히 절단되어 있는 지역을 단순히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침식을 받아온 지형..." 운운은 따라서
영남대로의 입지를 설명하는 논리가 되지 못한다.
일본인들이 그려준 가상의 선을 진짜 장벽으로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야기하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궁여지책일 뿐이다.
실제로 산을 다녀보지 않고 책상 위에서만 생각하는 지리학이 지어낸 억지며,
"산맥은 강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사실의 반증일 뿐이다.
산경도를 보자.
영남대로가 통과해야 하는 고개는 문경새재 하나뿐이다.
나머지 경로는 선택사항이다.
새재 외에는 절대로 고개를 넘지 않겠다면 그럴 수 있다.
낙동강 따라 올라가다가 문경새재 넘은 후 한강 따라 내려오면 그만이다.
그러나 실제의 영남대로를 보면 문경새재 말고도 몇 개의 작은 고개들을 넘는다.
그 고개들은 그렇지만, 산맥이라는 장벽을 넘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
강변 험지를 피하고 경과지의 도시를 거치기 위해 생기는 현상일 뿐이다.
말한 대로 지맥을 피해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당한 거리상의 손해를 초래할 경우, 사람들은 그 지맥을 넘어버리는 방법을 택한다.
비유하자면 아파트단지 내의 화단을 빙 돌아다닐 것이냐, 아니면 그냥 넘어다닐 것이냐의 차이 같은 것이다.
그것은 거리와 능률 중의 선택사항일 뿐, 전체 경로의 원리를 설명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4대 간선도로가 어느 한 세대의 일시적 발상이나 계획에 의해 건설된 것은 아니다.
한 마을의 여러 세대가 반복경험에 의해 이웃 고을에 이르는 가장 능률적인 길을 터득하게 되고,
그것들이 연결되면서 나타난 결과물일 뿐이다.
그러한 도로입지의 능률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외적 요소가 지형임은 말할 것도 없다.
산경도는 그러한 사실들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부산에 이르는 가장 편한 길을 따른 것이다"고 말한다.
그처럼 단순한 문제를 산맥은 어렵게 꼬아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