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박충서 형제님의 간증을 다시 올립니다. 주님곁에서 편안히 쉬고 계실 형제님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다시 보고픈 그 모습을 꼭 다시 만날 때까지 땅에 있는 성도들이 함께 열심히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카페지기-
박충서
가족 현악 사중주단을 꿈꾸던 학생 시절 나는 유교 사상이 가득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한국 전쟁이 발발했는데, 청주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대전으로 전학을 갔다. 청주에서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 시절에는 책가방이 없어서 누구나 넓은 보자기로 책을 싸서 메고 다녔는데, 그 책 보자기를 학교에서나 가끔 펼쳐보았을 뿐 집에서는 펴보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그대로 방에 던져 놓고는 밖에 나가 놀기에 바빴다. 당연히 성적은 좋지 않았고, 반 아이들이 70명이면 70등, 80명이면 80등이 내 차지였다. 대전으로 전학 온 후, 선생님께서 내 성적표를 보시고 야릇한 표정을 지으셨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청주에서는 숙제 없이 지냈는데 대전에서는 숙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청주에서는 방학 숙제도 없었다. 내게는 이 숙제가 생소했고,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책을 보았고 선생님의 말씀도 듣게 되었다.
수개월에 한 번씩 시험을 보았는데 시험을 볼 때마다 15등 내지 20등씩 성적이 올랐고, 5학년이 되었을 때는 상위권에 속해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성적순으로 반장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반장은 되지 않았다. 그때는 중학교 합격자 발표가 나고도 1개월 정도 더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수업에서 담임선생님은 내 이야기만 하셨다. 지금도 나는 이 선생님의 존함만은 기억하고 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은 체육과 국어였고, 좋아하는 과목은 음악과 수학이었다. 체육 수업이 있는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비오는 소리가 들리면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런 날은 체육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하루 종일 신이 났다.(칠순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이에 내가 교회를 알고 이제 와서 유도와 태권도를 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봐도 놀랍고 신기한 일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학교 방송실에서 음악을 들려 주었는데, 난생 처음 듣는 그 음악이 무척 경쾌하고 힘 있고 아름다운지라, 운동장에서 놀던 것도 잊고 그대로 서서 듣고 있었다.
음악이 끝나고 나니 슈베르트의 군대 행진곡이라는 설명이 흘러나왔다. ‘아! 음악이 이런 것이구나.’ 초등학교 4학년, 10살의 나이에 어떻게 그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 뒤, 오디오는 커녕 FM 방송도 없던 때라 어쩌다 AFKN 방송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 나오면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음악에 빠져 들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밥 먹으라는 야단도 많이 들었다.
대학생이 되어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는데, 학교 수업과 레슨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 악기 연습을 병행하자니 절대적으로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새벽 4시에 통금 해제 경보음이 울리면 일어나 피아노를 연주했다. 하루는 피아노 연습을 하는데, 큰 형님이 이 집이 너 혼자 사는 집이냐며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나는 창과 벽을 담요로 두르고, 피아노에 담요를 씌어 놓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그 안에서 연주를 했다. 선풍기도 없었기에 그렇게 피아노를 치다 보면 땀으로 목욕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바이올린은 학교에 가서 연습했다. 예과가 청량리역 맞은편에 있었는데, 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창고 같은 곳이 있었다. 강의실과 꽤 멀리 떨어져 있어, 강의실에서는 전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이었다. 뽀얗게 먼지가 쌓인 것으로 보아 다른 학생들은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점심을 굶고 그 시간에 연습을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가정을 이루면 넓은 잔디밭이 있는 정원에서 가족으로 구성된 현악 사중주를 연주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나이에 으레 생각하는, 사람이 왜 태어났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싸움 한 번 한 적 없고, 학교 성적은 그런대로 괜찮고, 착하다는 말이 항상 따라 붙는 소위 모범생이었다. 법 없이도 살 사람, 그것이 나에 대한 수식어였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기인 한 친구에게는 ‘너는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범생이라는 말이 과연 좋은 말인지 의문이 간다.
그러나 그 당시 주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았다 하더라도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씻을 수 없는 아주 부끄러운 죄를 지은 적이 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은 그때 지은 죄. 그 죄로 인한 자책감. 가슴은 있는 대로 두근거렸고, 얼굴은 달아오르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랬던 것이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가면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지은 죄가 아니어서인지, 차츰 생각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면서 여전히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계속 듣고 살아왔다. 심지어 어머니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우연히 복음을 깨달은 아내와 결혼한 후
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 생활을 하는 중에, 나와 사귀는 사람이 나에게 자신이 무슨 책을 읽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해 왔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은 어렵고 재미없어서 첫 장만 읽고 덮어 두었던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과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말했다. 이 <고백록>은, 무언가 멋있어 보일 것 같아서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책방을 다 찾아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찾지 못했다며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고는 이 책이 그 책인가 보다 생각하고 <참회록>을 읽었다고 한다. 그녀는 나와는 달리 사는 것에 대한 고통, 죄 문제로 인한 고통으로 계속 고민을 해 왔는데, 자신의 고민과 어거스틴의 고민이 매우 닮았다는 것과 어거스틴의 고통이 해결되는 책의 내용을 읽고, 거기서 그녀도 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을 나와 결혼한 후에야 이야기했다.
그녀는 나와 약혼할 때까지만 해도, 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을 믿어도 괜찮느냐는 질문만 했었다. 만일 그녀가 교회에 다녀도 괜찮으냐고 했다든지 예수를 믿어도 괜찮겠느냐고 말했더라면, 나는 단호히 반대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을 보면 그는 위선자 같고 나약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선한 체하는 것이 가식이 가득 찬 사람 같아, 도무지 내 비위에 맞지 않았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도무지 낯이 간지러워 옆에 있기도 거북했다. 차라리 절에 다닌다고 하면, 무언가 속이 차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을 믿어도 괜찮느냐고 했고, 나는 그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기에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나와 결혼한 후에,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고 복음을 알았지만 이런 나와 약혼을 한 후 결혼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용서된 것을 발견하고, 즉 구원받은 후 동네에 있는 교회는 다 가보고 심지어 성당까지 가 보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발견한 것과 같은 말을 하는 곳은 없었기에 아무 교회에도 가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집 앞의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아내가 내게 함께 가보자고 했다. 하도 조르니까 한번 가보자고 갔는데, 이왕 들으려면 제대로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제일 앞 좌석 가운데에 앉았다.
그런데 소위 목사라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며 별짓을 다 하는데, 무당이 굿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어릴 때 한번 본 굿도 그런 난리판이었다. 그럼에도 참으면서 목사가 혹 무슨 말을 할까 기다렸으나, 두 시간인지 세 시간인지 지나자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 채 다 끝났단다. 뒤에 앉아 있었던 아내는 보이지도 않았다. 집에 와보니 아내는 벌써 집에 와 있었다. 내가 막 화를 내려는 판에 거꾸로 아내가 내게 핀잔을 했다. 무엇 하러 그런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고 있느냐, 자신은 10분 정도 있다가 나왔다고 말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래도 교회는 의롭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겠느냐는 나의 막연한 생각마저 무너져 버렸다.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 뒤 연신내로 병원을 이전했다. 그런데 결혼한 후 2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지금의 딸 아이가 있기 4년 전의 일이다. 나는 유별나게 아이를 좋아하고 아내와 아들, 딸과 함께 현악 사중주곡을 연주해야겠다고 상상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아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낙천적이고 세상을 밝게만 바라보던 나에게 웃음이 사라졌다. 병원 일을 하다 보니 경제적인 여유는 있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기쁘기는커녕 병원에서나 집에서나 삶이 무의미했고 살고 싶은 의욕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옆 집 부인이 아내에게 성경 공부를 하는 곳에 같이 가겠느냐는 제안을 했던 모양이다. 아내는 저녁에 그곳에 다녀와서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여기가 진짜라고 말하며, 나에게 성경 공부하러 같이 가자고 말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곳은 이용화 씨를 중심으로 성경 공부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워낙 예수 믿는다는 것에 부정적이어서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는데, 아내가 계속 권유를 해오기에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살 욕망도 끊어진 상태이다 보니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어느 여고의 강당을 빌려서,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무슨 교회가 이렇나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꾸밈없고 가식이 없어 신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서너 달 성경 공부를 하러 다니던 74년 어느 날이었다. 날짜는 잊어버렸다.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중에 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들으며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저질렀던 죄가 생각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찌 할 바를 모르겠고 숨이 꽉 막혀왔다. 다른 말씀들은 하나도 들리지 않고,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내 죄만 심장을 꽉 조여오고 있었다. 죄를 저질렀던 고등학교 2학년 그 당시 보다도 더 가슴이 조여왔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러니까 예수님이 여러분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까!” 라며 벼락같이 소리치셨다. 그 순간 그렇게도 두근거리던 가슴이 이상하게 차분히 가라앉으며, 머릿속에는 ‘아,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계셔야 되는 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양심이 무척 편안해졌다.
그렇게 두근거리던 가슴이 거짓말같이 평안해진 것이다. 그리고 전에는 목사를, 생산은 없이 사회 재산이나 축내는 기생충 같은 존재로 생각했는데, 목사의 위치가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설교하셨던 권 목사님께서 커 보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 하시는 일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양심의 평안함이 있은 후 설교를 듣는 것이 달라졌다. 설교 내용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경의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후 마포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주일간의 전도집회에 참석하였고, 그때부터 성경을 약간 체계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또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당신의 존재를 보여주시는지,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지 등 성경 내용을 조금 알게 되었다. 성경은 참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가면서 계속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주변에서 나를 두고 하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즉 인간의 선은 하나님 앞에서는 헌 누더기 같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욥 35:6-8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그런 선이 아니라 영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요 12:50 나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데 전 3:11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나에게 약속하신 것도 알았다. 요 10:28
소설을 보아도 전과 달리 보게 되었다. 학생 때 레미제라블을 읽고 장발장은 선한 사람이고 그를 쫓는 경감은 냉혈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구원받은 후 이 소설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율법은 죄와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그 죄가 아무리 작을지라도 율법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장발장이 작은 죄를 짓고 후에 아무리 선하게 살았더라도 그 사소한 죄는 많은 선으로 덮이지 않는다. 죄가 아무리 작을지라도 율법은 끝까지 쫓는다. 마치 경감이 장발장을 끝까지 추적하는 것처럼, 결코 그냥 두지 않는다. 경감이 스스로 강에 빠져 죽은 뒤에야 장발장은 자유함을 얻었다.
나에게 양심의 자유함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택하신 예수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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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수님 진심으로 감사드림니다
오 - 형제님 많은 성도들이 님과 헤어짐에 아쉬워 당신의 영전앞에 많이 모였담니다 안녕히 가세요
'먼저 간 성도' 또 한분을 보내며 많이 슬프지만 다시 만날 날 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성경 귀절을 조목 조목 대시면서 나긋 나긋하게 말씀해 주시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 너무 많은 추억이 있네요 다시 만날때가 있기에 보내드립니다 또 만나요
주와 같이 길가는것 즐거운 일아닌가 우리 주님 가신 발자취 를 밟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예수와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당신은 주님앞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우리들도 모두 조만간 만나게 될 날이 올겁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편히 쉬옵소서...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거 동락 하는 중 위로를 나누네... 또 이별 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안에 교통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땅에 있으실때 당신의 달려갈 길을 마치시고 주님의 품으로 가신 대 선배님,, 솔직히 부럽습니다. 미처 얼굴과 존암을 평소 기억해놓지 못한데 대한 자책감이 듭니다. 분명히 얼굴은 제가 멀리서나마 뵈었던 분이시리라 생각합니다.주님의 품안에서 얼마나 평안 하십니까.. 선배님의 그 발자취를 과연 따라갈수나 있을지,,저는 자신이 없지만,, 많이 보고싶을거 같습니다..잘 쉬시고 계십시요..근데 왜이리 눈물이 앞을 가리는지요.. 평생 육으로서만이라도 영원한 교제를 가지고 싶은데, 이것또한 육의 마음이라 그런가 봅니다. 지금 살아계셔서 생활하고 계시는 주위 선배님들이나 여러 성도님들이 너무 귀하게 느껴집니다
우리안의 참되고 까페의 모든 회원님들과 여러 선배님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감사드립니다..
'명복(冥福)'이라는 말을 안쓰시는 것을 보니 확실히 구원받은 분들이구만요. 문상(問喪) 다녀온 회사 직원분의 말씀이 "화기애애한 송별식장 같았서여" 화기애애(和氣靄靄)!
레미제라블은 중고교시절 영화로 스릴과 재미(마리우스와 고젯트의 꿈같은 사랑을 만들어 주는 주인공)로만 봤었는데, 고인은 너무나 깊은 뜻으로 이해 하시고 계신점 참으로 감동 스럽습니다.
육신을 입고 살던 때의 모습을 뵙는 듯합니다... 조용하면서도 열정적인 그 모습이 생각납니다.
마지막 주말학교를 같이하시면서 웃으시던 모습 가실줄 몰랐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고 가신 형제님.. 육신의 수고를 벗고 주님의 평안한 품에서 안식하시길 바랍니다. 남은 자매님과 가족에게도 주님의 위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멀리서 전송도못하고 여러성도들의 코메트만 읽으면서 생전의 형제님의 온순하고 온화한 모습그려봅니다 부디 주님안에 평안 하시길 빕니다 우리다시 만날 때까지.......
항상 조용하게만 느꼈던 그 분이 먼저 가셨다니 맘 속으로만 울적해 집니다 절 기억하실지
다시 만날날을 기다리며......좀더 많은 교제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장지에서 들었던 형제님의 생생한 육성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한데, 구원 간증을 접하니 자상하고 조용하신 형제님을 옆에서 보는듯합니다. 믿음 생활을 여러모로 조심스럽게 성경말씀에 비취어 말씀하시던 모습들을 떠 올리며 신앙생활에 더욱 열심을 내고저 합니다
항상 감사하시면서 그걸 생활로 실천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한여름에 얼굴이 상기되도록 땀을 흘리시며 같이 태권도하던 모습이 선합니다...열정과 넉넉한 미소가 늘 기억될겁니다...
언제나 총회장님을 뵈올때 항상 겸손한 마음과 잔잔한 미소에 마음에서 감사한 생활로 말씀속에 이끌어 형제님을 뵈면 저도 그렇게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다짐을 하면서 지냈읍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을 하셨읍니다 주님 품안에서 편히 쉬십시요
항상 잔잔하시고 조용한 음성을 듣는듯 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진실되게 살다간 모습을 기억하면서 주님안에서 이제는 육신을 벗고 평안하게 쉬십시오;다시만날날을 기다려 봅니다.
조용하시면서도 항상 모든일에 최선을 다하시던 모습을 본받고 싶습니다 다시 만날때까지 주님 품안에서 편히 쉬십시요
이상하게 이가 아파서 치료 받았더니 돌아가셨다고.. 8년쯤전에 총회장님이 직접 해준 이인데... 그래서 아팠나? 항상 조용하시고 아무도 탓하지 않으시고 모임일에 헌신적이시던 모습이 선합니다...언젠가 우리도 가야겠지만, 분명 편히 쉬실 것입니다
모두 다 가야될 길이지만 이렇게 빨리 가실줄은 몰랐습니다. 아쉬움을 어떻게 달래야 할런지!!... 옆에 계실 때 대접 한 번 못해 드리고 이렇게 보내드리게 되어 마음 한쪽 무겁습니다. 두루두루~치과봉사 다니시던 모습... 가슴져려오네요!!...
삶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fun school 동영상에 그대로 움직이고 계신데.님이가신 그때부터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가않는군요. 허상이거니.그림자거니.꿈이거니.하고. 이 허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까? 변하지 않는 한가지 사실이있어 우리는 든든하다. 이별의 슬픔 없으리라.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을 보내신 그 모습이 늘 가슴속에 남아 있읍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거룩한 곳에서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육체를 갖고 이세상 살아가셨던 그 모습이 생생합니다. 간증을 읽노라니 직접 듣는듯한 느낌도 나네요~ 편한 곳에 가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겠지요?
마음이 젖어드는 간증을 읽고나니 새삼 총회장님이 더 보고 싶어지네요, 생전에 먼 발굼치에서만 보았지, 인사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내가 교제 가운데 사는 사람인지.. 의문도 들고요, 아마, 회장님도 저를 모르실거고. 또, 이런 일은 계속 반복 될른지 모르겠네요. 우리 서로 저처럼 후회 남기지 말고 부지런히 안성도 다니고 인사 나눕시다.
저는 대전교회 조금철 입니다.
조근조근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주님 계신 곳에서 다시 만나길 기다리겠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 듣고 기분이 참 묘~ 했었는데, 그새 잊고 지냈었네요. 저도 박충서 형제님처럼 이 세상 떠날 때에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 아쉬워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제 인간적인 마음 접고, 다시 만날때까지~ 하는 노래 부르며 그리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니 총회장님 목소리가 들리는것 같아 더 그리웁니다, 다음에 더좋은 곳에서 만나뵙겠지요
서해바다를 한 번도 못가보셨다면서 시간 되면 서해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고 하셨었는데.....더 좋고 아름다운 곳에서 편히 쉬세요.
이제는 그리움이란 형상으로 남았네요. 님의 광고하시던 모습 영상으로만 보았는데도 주님께 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아니야 내가 잘못 보았나 하면서 확인 또 확인했지요. 이 간증을 읽으려니 눈물이 빗물처럼 흐르네요. 해지는 저편에서 먼저 간 성도가 되셨으니 모든 짐 편히 내려놓고 주님 품에서 안식의 가쁨을 누리소서. 다시 만날 때까지.......
이제는 그리움이란 형상으로 남았네요. 님의 광고하시던 모습 영상으로만 보았는데도 주님께 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아니야 내가 잘못 보았나 하면서 확인 또 확인했지요. 이 간증을 읽으려니 눈물이 빗물처럼 흐르네요. 해지는 저편에서 먼저 간 성도가 되셨으니 모든 짐 편히 내려놓고 주님 품에서 안식의 가쁨을 누리소서. 다시 만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