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0월 제28회 유엔회의에서 대만을 축출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많은 나라들이 대만정부와의 단교를 선언했다. 이 일련의 타격은 당시 이미 86세의 고령이던 장개석으로 하여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하였다. 1972년 3월, 장개석은 전립선비대로 수술을 받는다. 나중에 전립선숙질로 바뀌는데, 이 이후로는 회복되지 못한다.
1972년 7월, 장개석은 감기가 폐렴으로 바뀌면서 병원에 입원한다. 아직 완전히 낫기도 전에 의외의 차량사고를 당해서 "영민총원(榮民總院)"에 입원하며, 한번 입원하자 1년간 계속된다. 이후 장개석은 손님을 만나지 않겠다고 선포한다. 업무는 기본적으로 부총통인 엄가금과 큰아들인 장경국이 처리했다. 중대한 문제나 골치아픈 문제가 생기면, 엄, 장 두 사람이 장개석의 병상에 가서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았다.
1975년 2월 하순, 장개석의 병세가 점점 악화된다. 장경국은 상황을 보고는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가 부친을 모시고자 한다. 3월 26일 밤, 장개석의 병세는 다시 악화된다. 3시간여의 응급치료를 받은 후 비로소 호전된다. 장개석은 깨어난 후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느끼고, 장경국으로 하여금 "오원(행정원, 입법원, 사법원, 고시원, 감찰원)"의 원장을 사림관저로 불러 그의 유언을 구술하는 것을 받아적으라고 지시한다. 장개석은 유언을 다 말한 후에, 병세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여, 장씨집안은 어두운 구름이 뒤덮인다.
1975년 4월 5일, 장개석의 병세는 다시 악화된다. 장경국의 그날 밤 일기의 기재에 따르면. "새벽에 부친에게 문안을 드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부친은 이미 일어나서 의자에 앉아계셨다. 소자가 온 것을 보고는 부친은 얼굴에 웃음을 띄었다. 소자로서 마음이 매우 편안했다. 왜냐하면 소자는 오랫동안 부친의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부친은 청명절에 대하여 묻고, 장백령 선생의 백세탄신에 관한 일을 물었다.
소자가 물러나려고 할 때, 부친은 너도 잘 쉬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소자는 이 말을 듣고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누가 알았겠는가. 이것이 소자에 대한 마지막 당부일 줄을. 본인은 불안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저녁에 다시 부친의 병세를 알아보았을 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6시경에 약간 쉬었고, 8시반에 세번째 부친의 병세를 알아봤는데, 이미 악화되기 시작했다. 수면중에 심장이 미약했고, 호흡이 정지되기 시작했다. 수시간동안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영민의원"의 장개석 병세의료소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4월 5일, 장개석은 돌연 복부가 불편함을 느끼고, 비뇨계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의사는 장개석의 심장기능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저녁 8시 15분, 장개석의 병세는 극히 악화되었다. 의사는 장개석의 맥박이 갑자기 느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긴급전화로 장경국에게 통지했다.
장경국이 도착했을 때, 장개석의 심작박동은 이미 불규칙했고, 혈압은 내려갔고, 상황이 극히 위험했다. 바로 의사는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그리고 약물과 전기충격으로 심장을 자극했다. 심장과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45분후에, 심장은 다시 박동을 멈추었다. 11시 50분, 장개석의 두 눈동자는 크게 떠지고, 응급조치의 효과는 없이 사망하였다. 향년 89세였다.
장개석이 임종할 때, 송미령과 장남 장경국, 차남 장위국, 손자 장효무, 장효용이 모두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장개석이 병으로 죽을 때, 대만당국의 당정군의 요인들은 장개석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통지를 받은 후, 그날 밤으로 사림관저에 도착했다. 그리고 강재석의 유언에 서명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먼저 장부인 송미령이 서명했고, 이어서 "부총통" 엄가금이 서명했다. 행정원장을 맡고 있던 장개석의 장남 장경국이 서명할 때 "두 손을 떨렸고, 이미 글이 제대로 쓰여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다음에는 입법원장인 예문아, 사법원장인 전형금, 고시원장인 양량공, 감찰원장인 여준현의 여러 사람이 떨리는 손으로 유서에 서명했다.
그날 밤, 장경국은 장남의 신분으로 송미령과 장례에 관한 사항을 협의했다. 상의를 거쳐. 임시로 장개석의 영구를 타이페이시 남쪽 60킬로미터에 있는 자호(慈湖) 호반에 두기로 했다. 1960년대초에, 장개석이 이 곳을 지날 때, 이 곳의 풍수를 마음에 들어했고, 그는 여기에 중국사합원식의 행국을 지었으며 이름을 자호라고 지었다. 장개석은 생전에 자주 이곳에 와서 머물렀고, 그가 죽은 후에 영구를 여기에 잠시 안치하라고 당부했었다.
4월 6일 새벽 2시, 장개석의 유해는 사림관저에서 "영민총원"으로 옮겨졌다. 다음 날, 백성들이 장개석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도록 허용했다. 4월 9일, 장개석의 영구는 국부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영구를 옮기기 전에, 장경국은 친히 부친의 옷을 입혔다. 고향의 관례에 따라, 부친에게 7개의 바지, 7개의 내의를 입혔는데, 장포와 마괘를 포함한다.
유체는 비단으로 감싸고, 검은 양말, 검은 가죽구두를 신겼고, 가슴에는 대홍채옥훈장을 좌우양측에는 국광훈장과 청천백일훈장을 달았다. 장개석이 가장 즐겨 읽던 <<삼민주의>> <<성경>> <<황막감천>> <<당시>>의 4권의 책도 송미령이 영구안에 넣었다. 그리고 털모자, 작은 모자, 장갑 1짝, 수건 1개, 지팡이 1개를 넣었다. 이것들은 모두 장개석이 만년에 사용하던 물건들이다.
4월 16일, 장개석을 염하는 날이었다. 대만당국은 장개석을 위하여 융중한 장례를 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