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신앙 공통체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고향
구산 성지는 박해 시대 이래로 유명한 교우촌이자 전통적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고향이다.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순교자들을 가족 묘지에 이장,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최근 주변의 택지 개발로 가족 묘지가 이장되고 머지않아 옛 모습이 사라진 아파트 단지 안의 고립된 성지로 변모될 예정이라 아쉬움이 크다.
구산에서 배출된 순교자는 1841년에 4월 29일(또는 28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성 김성우(金星禹, 禹集, 1795~1841, 안토니오)를 비롯하여 그의 첫째 동생 덕심(德深, 萬集, 1798~1841, 아우구스티노), 둘째 동생 윤심(允深, 文集, 1801~1868, 베드로 알칸트라)과 김성우의 아들 성희(金聖熙, 1815~1868, 암브로시오), 덕심(만집)의 아들 차희(金次熙, ?~1858) 윤심(문집)의 아들 경희(金敬熙, 1823~1868), 사촌인 주집(金胄集, 스테파노)의 아들 윤희(金允熙, 1834~1868)와 최지현(崔址鉉, 揮斗, ? ~1868), 심칠여(沈七汝, 1832~1868, 아우구스티노) 등 모두 9명이다.
성 김성우 안토니오는 1833년에 유방제(劉方濟, 본명 余恒德, 1795~1854,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어의동, 즉 서울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서울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여름에는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를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이때 모방 신부는 김성우의 신심을 높이 사서 이곳의 공소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39년 박해 때 그의 아우들과 사촌 김주집을 체포하여 광주유수(廣州留守)가 있던 남한산성으로 끌고 갔다. 그중 덕심(만집)은 체포된 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1월 28일에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로 순교하였다(옥사 獄死). 반면에 윤심(문집)과 사촌은 19년 5개월만인 1858년 철종(哲宗) 임금의 원자 탄생을 경축하는 특사(特赦) 때 배교 없이 석방되었다. 그후 윤심은 1868년 3월 8일(음 2월 15일), 그의 조카들 성희, 차희, 경희, 윤희 등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김성우는 1840년 1월경에 체포되었으며, ‘사학(邪學)의 괴수’라는 명목 아래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 4월 29일(음 윤3월 9일 또는 양력 4월 28일 음력 윤 3월 8일) 47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고, 외교인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였다.
옥중에서 그가 남긴 유명한 명언은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1846년 9월 22일자 서한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순교를 각오한 말씀이었다.
“사또께서 아무리 묻고 권고하고 할지라도 제 입에서는 한 가지 대답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즉 저는 천주교 신자요, 천주교 신자로서 죽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구산 성지 내에는 수원교회사연구소가 있어 성지와 순교자들의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 뜨거이 죽음 익히며 (구산에서) <김영수> ▒
가난한 사람이 작은 꽃잎에다
가슴 기울여 문지르는 들판에는
사라지고도 살아 있는 이
안개 속에서 눈 맑게 뜨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깨어 있는 바람 있어
꽃잎을 흔들 때마다
나는 한 자락 부끄럼으로 깊어집니다
삶이야 한 호흡일 뿐이지만
죽음은 영원한 햇살입니까
이제 나의 젊음도
용서의 물소리에 따스히 젖고 싶습니다
내가 손 뻗어 죽음에 닿으려 해도
흔히 싸늘한 삶에 이마 닿지만
나도 이제 뜨거이 죽음 익히며
슬픔 다 비워내면서
떠나면서는 뒤돌아보지 않으리이다
돌아오면서는 뒤돌아보지 않으리이다
■ 순교자
◆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부유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두 동생과 함께 곧 입교하였고, 열렬한 신앙으로 전교 활동을 펼쳐 자신이 사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세례를 받고 서울로 이사한 뒤 자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인으로 밀고 되었으나 미리 피신하였고, 고향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 체포되었다. 그러나 김성우도 이듬해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감옥에서도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여 2명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옥살이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대를 맞고 이튿날 교수형을 받아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김성우 안토니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 교우들이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수 있도록 빌어 주소서.
◆ 김만집 아우구스티노(1798∼1841)
김만집은 김성우 성인의 첫째 동생으로 비록 형제들보다는 늦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이후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아우인 김문집(베드로)과 사촌 김주집(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로부터 김만집은 다시 오랫동안 험난한 옥고를 겪어야만 했으나, 신앙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기 위해 이를 참아 받았다. 결국 옥중에서 병을 얻게 된 그는 몇 주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41년 1월 28일(양력 2월 19일)로, 그의 나이 44세였다. 김만집이 순교한 뒤에도 아우인 김문집과 김주집은 약 18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858년에 석방되었다. 한편 김만집의 장남 원희는 부친이 순교한 뒤 버려진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 김문집 베드로(1801∼1868)
김문집은 김성우 성인의 둘째 동생으로 맏형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둘째형인 김만집(아우구스티노)과 사촌 김주집(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약 18년 동안을 갇혀 있다가 1858년 왕세자의 탄생을 계기로 베풀어진 특사 때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문집은 비밀리에 신부를 모셔다 성사를 보았으며, 언제나 교회를 도울 방도를 궁리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광주 포졸들이 구산으로 몰려왔고, 이내 그들은 김씨 집안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김문집을 비롯하여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김주집의 장남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다. 그러니까 5촌 이내의 3대가 같은 날 같은 옥에 갇히게 된 셈이었다.
이후 김씨 집안 사람들은 여러 차례 유수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고통을 이겨냈다. 특히 68세의 김문집은 조카와 손자를 다독거리면서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자고 권면하였다.
그 결과 이들 6명 모두는 유수 앞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씨 집안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포교가 '3대가 함께 죽도록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도중에 가장 어린 김교익을 언덕 아래로 밀쳐내 살려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김문집과 아들·조카 4명은 1868년 2월 15일(양력 3월 8일)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이 순교한 뒤 김교익이 몰래 남한산성의 형장으로 가서 김문집, 김성희, 김경희 등 3명의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 김성희 암브로시오(1815∼1868)
김성희는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로 그의 부인은 전주 이씨 범회의 딸이었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김문집의 아들인 경희의 5남 교익(토마스)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김성희는 부친 김성우가 1841년에 순교하자, 그 시신을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이후 그는 약국을 경영하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860년경에는 매부 홍희만에게 교리를 전하는 등 전교와 신앙생활에 열심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이겨낸 뒤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에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시신은 그의 양자 김교익이 밤에 몰래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 최지현(1818∼1868)
최지현은 경주 최씨로, 자는 군실이다. <좌포도청등록>에는 그의 세례명이 휘두로 나오는데, 이것이 정확히 어떤 세례명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구산 마을에서 부친 최규겸과 어머니 교하 노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훗날 용인으로 이사하여 살던 중에 아내 함열 남궁 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었다. 이때가 1860년경이었다. 그 후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아내가 먼저 체포되어 순교하자, 그는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살다가 1868년에 체포되고 말았다.
< 좌포도청등록>에 따르면, 최지현은 1868년 윤 4월 4일 51세의 나이로 강원도 원주 태생 조종구(타대오), 경기도 지평 태생 민효원(나자로), 경기도 광주 태생 홍희만, 경기도 구산 태생 심칠여(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처음의 문초 때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돌려 굳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친척이 찾아다가 그 집 산에 안장했었는데, 1978년에 순교자의 후손들이 구산으로 이장하였다.
◆ 김경희(1823∼1868)
김경희는 순교자 김문집의 외아들로, 자는 치선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1823년(순조 23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장성한 뒤 순흥 안씨 진환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첫 부인이 일찍 사망하면서 전주 이씨 종태의 딸과 재혼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던 그는 비밀리에 자신의 집을 방문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열심히 생활하다가 1868년에 부친과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남한산성 안에 있는 광주 유수의 치소로 압송된 그는 친척들과 함께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굳게 신앙을 지키고 1868년 2월 15일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후손들에 의해 거두어져 구산에 안장되었다.
◆ 심칠여 아우구스티노(1832∼1868)
심칠여는 구산 신자들 사이에서 전승되어 오지 않던 순교자이다. 그러나 <좌포도청등록>에 따르면, 구산 태생으로 1859년 무렵에 이웃 마을에 살던 신자 심성일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1864년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성인 주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심칠여는 1868년 윤 4월 4일에 강원도 원주 태생 조종구(타대오), 경기도 지평 태생 민효원(나자로), 경기도 광주 태생 홍희만, 경기도 구산 태생 최지현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처음의 문초 때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돌려 굳게 신앙을 고백한 뒤 많은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이후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
◆ 김차희( ? ∼1868)
김차희는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로 부인은 광산 김씨였다. 그는 부친 김만집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1년 남한산성에서 옥사로 순교할 때 12세 전후의 어린 아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후로는 종형 김성희(암브로시오)를 따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편 침술을 배워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의 침술은 인근에 잘 알려질 정도로 능통하였다고 한다.
김차희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옥리들이 하는 말을 듣고 포교의 아들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침술로 그 아들을 소생시켜 주었다. 그 일이 있은 뒤 김차희가 하루는 심한 곤장을 맞고 신음하고 있을 때, 그 포교가 다시 찾아와 배교하고 살아나가라고 권유하였으나, 그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던 날 재판관이 모든 신자들을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권유할 때, 김차희의 차례가 되자 그 포교는 그의 뒤에 서서 대신 "다시는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결과 김차희만은 형장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이렇게 살아남은 김차희는 그 순간부터 가슴이 떨리고 매를 맞아 부어오른 상처가 더욱 쑤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다시 재판관을 향해 "조금 전의 대답은 제가 한 것이 아니오. 저는 비록 매를 맞아 죽을지언정 천주교를 버릴 수가 없소"라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인척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이 거두어 안양 수리산(현 안양시 안양 3동)에 안장하였으나 실전되고, 훗날 그의 의묘(擬墓)가 구산에 조성되었다.
◆ 김윤희(1834∼1868)
김윤희는 김성우 성인의 사촌 김주집(스테파노)의 장남으로, 세례명은 알 수 없다. 김주집은 기해박해 때 김문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약 18년 동안 옥중에서 고통을 겪다가 1858년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윤희도 일찍부터 부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윤희는 성장하면서 인척들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고, 신부로부터 성사도 받았다. 그러다가 1868년에 5촌 당숙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6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김윤희는 집안 사람들과 함께 유수 앞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이 약해진 적이 없었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35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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