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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22 - 니혼바시(일본교) 다리를 보고는 황거를 구경하며 옛 일을 회상하다!
11월 8일 아침에 걸어서 니혼바시 (日本橋 일본교) 다리를 찾아갔는데, 1603년 에도 막부가 세워지고
도카이도(동해도) 등 다섯 방향 도로가 출발하는 강변에 지어졌지만 지금의 다리는 20번째
건축된 다리 라 오래된 일본 전통양식 고풍스러운 다리가 아니고 철근콘크리트 다리 인게 아쉽습니다.
에도시대 니혼바시 에 대해서는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広重 가 그린 "東海道五十三(동해도 53)
역참의 “첫 번째 그림으로 니혼바시 아침풍경 이 있으니.... 이른바 우키요에 (浮世繪 부세회)
라고 불리는 목판화 인데...... 우키요(憂き世) 는 덧없는 세상, 속세 를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17세기 청나라의 공격으로 중국 경덕진이 혼란해지자 일본 도자기가 대거 유럽으로 수출되었는데,
이때 도자기를 포장한 종이가 우키요에 그림 이니 브라크몽이 마네와 드가에게 소개했고
이후 프랑스 인상파 탄생에 영감 을 주면서 모네는 부인 카미유 를 모델로 “일본옷을
입은 여인” 을 그렸으며... 고흐는 안도 히로시게의 자두나무를 모방해 꽃핀 자두나무 를 그렸습니다.
니혼바시 (日本橋 일본교) 는 일본 금융가 중심지 로 변모했으니 일본은행 본점 이 주오구 니혼바시 혼고쿠초
(東京都中央区日本橋本石町) 에 있는데, 암스테르담역을 본떠 도쿄역을 설계한 다쓰노 신고 의 또 하나의
작품으로 메이지시대인 1882년에 화폐 발행믈 목적으로 건축한 서양식 석조건물로 중요 무형문화재 입니다.
역시 니혼바시 카부토초에 있는 도쿄 증권거래소 (東京証券取引所) 는 아프로-유라시아 대륙 최대
의 증권거래소로 뉴욕 증권거래소와 함께 세계 경제의 중추이며, 현재 미국의 뉴욕증권거래소
와 나스닥 에 이은 세계 3위의 증권 거래소 로.... 1949년에 증권거래법에 근거해서 설립되었습니다.
니혼바시 의 일본은행 본점과 도쿄 증권거래소 를 생각하니 문득 동아일보 김수연 기자가 쓴
“탈 중국에 날개 단 日 증시, '잃어버린 30년‘ 지운 부활” 이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일본의 떠오르는 태양 (Japan’s rising sun)‘ 2023년 5월 만수르 모히우딘 싱가포르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가 내놓은 리포트의 제목이니 오랫동안 ‘저문 태양’ 에 가까워 보였던 일본 경제 가 최근 꿈틀거리고 있다. ”
1989년 12월 38,916엔인 닛케이주가 는 버블 붕괴후 하락하기 시작해 2009년 3월 7,055엔 까지 주저앉았지만
올해들어 일본 증시는 연일 고점을 경신하며 16일에는 33,706엔 으로, 닛케이 주가는 5월 한달 동안에만
7% 올라 33년만에 최고치를 경신하며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 을 극복할 가능성도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중국 대체 투자처 로 떠오른 일본 증시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건 외국인 투자가 다. NHK 에 따르면 5일 부터
9일까지 도쿄와 나고야 거래소에서 해외 투자는 9854억엔을 순매수하며 11주 연속 매수 우위 를 보였다.
해외 투자자가 일본 주식을 11주 연속 순매수한 것은 아베노믹스 초기인 2013년 1월 이후 10년 5개월 만이다.
그 배경으로 투자금의 탈(脫)중국 현상이 꼽힌다. 중국의 경기 회복 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데다 정부 규제
로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투자자들은 중국에서 자금을 빼 다른 아시아 국가로 옮기고 있으니 일본 으로,
미국 반도체 마이크론은 일본에 5조원을 투자해 차세대 D램을 생산하기로 했고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도 수년전 부터 일본의 종합상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일본 주식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박상준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지난 수년간 한국 언론은 선진국에서 탈락한 일본경제를 조롱 하는 기사를
수없이 쏟아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일본 주식열풍 이라니? 의아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거시
지표와는 별개로 지난 2년간 일본기업의 실적은 개선되었으니 도요타와 소니는 사상 최대 실적 을
올렸고 5대 종합상사는 순이익이 4조원을 남겼으며, 워런 버핏 은 2년전 일본 종합상사에 투자해서
현재 수익이 100%를 초과 했다는데..... 하지만 앞으로 엔화 폭락 가능성등 위험요인도 있다” 고 말합니다.
니혼바시(일본교) 를 보고는 다음 여행지는 일왕이 사는 황거(皇居) 이니 도쿄역에서 마루노우치로
나가 찾아가는데.... 옛날에 처음 방문때는 야마노테선으로 유라쿠쵸역에 내려서
일왕(천황)이 사는 ‘황거’ 를 보았으니..... 해자 를 파서 물을 채웠는데 폭이 200 미터도 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일왕(천황) 의 거처인 여기 황거(皇居, 고쿄) 는 백 오십년전 옛날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를 비롯한 에도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 거주하던 성(城) 입니다.
도쿠기와 이에야스 는 나고야 동쪽 미카와 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6살 때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 로 잡혀갔다가..... 훗날 세력을 키워 시즈오카현 하마마쓰 를
점령해서 옮기고 그 후에 슨푸(시즈오카시) 에다가 가이(야마나시) 까지 차지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1590년에 조선에서 황윤길과 김성일 등 사신이 도착했는데도 만나지 않고
오사카성을 비우고는 멀리 동쪽으로 출병해 일본 전국의 다이묘 군사 15만 3천명을 동원해,
5대 100년간 관동 에서 세력을 떨친 8만 2천명 군세를 자랑한 호죠씨의 오다와라성 을 점령합니다.
이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게 스루가(시즈오카)등 기존 영지 5개국을 반납 시키고 동쪽
변방인 관동 8개국 을 주어 옮기게 하니, 이에야스는 절치부심해서 에도성 을 쌓았는데...... 1868년
무진전쟁에 패해 망하고 교토 일왕(천황) 이 옮겨오니 에도는 도쿄(東京)가 되고 에도성은 황거 가 된 것입니다.
황거(皇居, 고쿄) 는 치요다구에 있는 궁궐로, 천황(일왕) 과 황후의 거처니 황거의 총관리는 궁내청이
담당하는데, 명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8년에 붙여진 호칭 이며 본래는 에도성 이 있던 곳
으로 내리(內裏), 어소(御所), 대내(大內), 구중(九重), 궁중(宮中), 황궁(皇宮), 황성(皇城) 이라 했습니다.
천황(일왕)이 주거하는 곳을 어소(御所) 라고 하며, 공식행사와 정무를 보는 궁전과 궁내청사도 황거에 있는데,
본래 에도 막부의 에도성으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1868년에 메이지 덴노가 기존 거처 교토 고쇼 를 떠나
새로이 에도성에 머무르면서 에도성은 도케이성(東京城 동경성) 으로 이름이 바뀌고 도쿄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성(城) 중에 5대 국보가 있는데, 우리 생각에는 황거(에도성)와 오사카성에 나고야성과
구마모토성 들이 들어갈 것 같지만 이런 성들은 전란과 화재에 2차대전때 미군의 폭격으로
부숴지고 새로 만든 것이라 문화재가 될수 없으니..... 옛날 천수각이 온전히 보존된 12개 성
중에 히메지성, 히코네성, 이누야마성, 마쓰모토성에 마쓰에성 5개가 일본 국보로 정해졌습니다.
동어원(東御苑) 구역은 자유롭게(월,금 제외) 출입 가능하나, 그외 참관이 허가된 구역은 일본황실을 관리하는
부서인 궁내청에 사전에 신청하여 허가 를 받아야만 단체 가이드 투어 로 둘러볼 수 있는데 선착순 3백명
까지 투어에 참가할 수 있으며 장화전 외관과 궁내청 청사등 일부 구역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에 한정 됩니다.
정전과 어소, 궁중삼전과 후키아게 어원 은 1월 2일과 천황의 생일인 12월 23일 2차례 황거에서 일반참하 행사
때 볼수 있는데, 인파가 몰려 창가에서 손을 흔드는 천황 일가에게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를 외치며 환호를 하는데, 황족들이 권력은 없어도 일본 국민들에게 의미가 큰 존재 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1603년 에도(도쿄)에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진후 여기 에도성(훗날 황거)의 주인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조선에 수교 를 요청하는데..... “나는 관동에 있었기 때문에 임진년 일에 대해서 미리 알지못했고
히데요시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진실로 조선과 나와는 원한이 없고 화친 하기 를 바란다” 라고 말합니다.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는데 영지도 멀고 또 전공을 세우는걸 히데요시가 꺼린 때문입니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때 잡아간 조선인 부터 먼저 돌려달라고 요구하니, 1607년 부터 3차례
쇄한사가 8천에 가까운 조선인 을 데려온후 수교하고 부산에 왜관 을 다시 열고 왜인들이
거주하며 무역 하는걸 허락했으며 1636년 부터 400~500명에 이르는 통신사 일행이 12회 파견 됩니다.
동서고금 5천년사에 이웃한 나라는 99% 철천지 원수 이니, 흉노(~몽골)와 중국, 중국과 베트남, 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과 버마,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스와 페르시아, 페르시아와 로마, 로마와 게르만족,
스페인과 영국,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러시아등이 그러하니 100년 평화 가 드문데
조선과 일본은 1603년 부터 1874년 까지 "270여년간 선린우호" 했으니 세계사에 특이한 사례 입니다?
400~500명 가량의 조선 통신사 가 12차례나 일본을 방문하게 되니 일본은 이를 위해 각지에 숙소
로 쓸 절을 수리하거나 새 숙소를 짓고 도로를 정비하며 다리 를 새로 놓고는 각지의
번주들은 정성을 다해 산해진미로 대접 하니.... 조선 통신사 일행이 한번 다녀가면 “막부
2년치 예산” 이 쓰였다니 돈을 숙소와 길바닥에 깐 것이니 자연히 왜구 도 최종적으로 근절됩니다.
왜구가 근절된 것은 3가지 이유 라고 보는데... 왜구는 신라시대에도 수십차례나 침범해 4세기말 수도 서라벌이
포위 되니 내물왕이 광개토대왕에게 노객이 되겠다며 5만대군 의 구원을 빌 정도로 피해가 컸는데 1223년
고종 때 김해를 약탈한 것을 시작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극성을 부리니 해안가에는 사람이 살수 없었습니다.
이후 공민왕 (1352~1374) 때는 경상, 전라도는 물론이고 함경도와 평안도에 까지 출몰
하며 황해도에 상륙해 개경을 노리니 수도를 철원등 내륙으로 천도 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는데.... 20년간 무려 100회 가 넘는 침입으로 고려는 쑥대밭 이 됩니다.
우왕 (1375~1385) 때를 보면 10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무려 370회 나 달했으니 강화가
함락되고 수도 개경이 왜구에게 위협 당했으며 고려 강산은 산산히 찢어져 피로 얼룩
지는데, 해안 지방은 사람의 자취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무인지경으로 변해 황폐화 됩니다.
첫째는 대마도 정벌 이니 1388년 5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폐하는 중에 왜구는
양광, 전라, 교주도에 침입해 살육을 자행하자 1389년 2월 박위는 전함 100척 으로 대마도를 급습해
정박중인 배 300척을 태우고 가옥을 불질렀으나 도민들은 산속으로 도망치니 왜구를 죽이거나 포로등
전과는 없이 조선인 포로 100인만 구해 귀환하는데... 600여회 침공을 받고서야 처음으로 반격한 것입니다.
1398년 1월 대마도 사절 이 조하에 참예한후 예물을 바치고 쌀과 콩을 받아 갔으니 도주
소(宗貞茂) 등이 보낸 자들인데, 부산포와 내이포 에 한해 출입하도록 하고 행장을
소지한 선박에 한해 기항하도록 해서 염포(울산) 와 가배량(통영) 에도 왜관 을 설치합니다.
하지만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태종때는 60여회 나 되었는데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중 비인현(충남 서천) 을 침입하고 해주를 노략질하며 황해도절제사
이사검의 병선 5척이 왜구에게 포위 되자 태종은 회의를 열고 대마도 정벌 을 결정합니다.
*** 현재 이즈하라항의 모습 ***
이종무 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해서 경상· 전라· 충청 3도 병선 227척에 1만 7천 병력 으로
65일치 식량을 준비해 1419년 6월 20일 대마도 에 도착하여 왜군 114명을 참수 하고
21명을 포로 로 잡았으며 1,900호의 가옥을 불지르고 129척의 선박 을 노획해 불태웁니다.
*** 이즈하라 위쪽 가네다성으로 오르는 길 ***
2만에 가까운 압도적인 무력을 투입했음에도 적병을 사살하거나 섬을 점령하는등 뚜렷한 큰
전과 없이 오히려 절제사 박실 이 산속으로 진격하다가 복병을 만나 장수와 군사 180명
이 전사 하자 조선군은 희생을 줄이기 위해 반격하지도 못하고 황급히 철수 하는데...
그러나 철군한날 왜구가 재침 하므로 다시 정벌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실행하지는 못합니다.
두 번째는 왜관을 설치해 저들이 원하는 쌀 을 주는 것이니...., 1421년 4월 대마도주
가 통상을 허락해 주도록 애원하자..... 왜구를 평화적 내왕자 로 바꾸어서
요구를 받아들여서는 부산에 통상을 허락하고 공물에 대해 쌀과 콩 을 주어 달랩니다.
세 번째는 조선이 에도 막부와 수교해 통신사 를 보냈으며, 게다가 에도 도쿠가와 막부는
규슈의 섬과 대마도 까지 일본 전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쇄국정책 으로 들어가
일본인이 해외로 나가면 사형 에 처하는등 출국을 원천봉쇄하자 왜구는 근절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왜(假倭) 라는 단어가 종종 보이니 “정원이 회계하기를 황간에 나타난 적은 우리나라 사람이
왜인을 가장한 것 입니다” 로 나오고 울산 서생포에 부왜(附倭) 200호가 왜군 진영 인근에 산다고 했으며,
‘고려사’ 우왕 8년 4월 기사에도 “화척(禾尺)들이 무리지어 왜구를 사칭 하면서 영해군(寧海郡)을 침략하여
관아와 민가를 불살랐다. 판밀직 임성미등을 보내 추격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남녀 50인과 말 200필을 바쳤다.”
그런데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를 국제신문에 연재하고 있으니 “진주가 함락됐다...
광양 피란민들은 왜적처럼 꾸며 노략질” 제목의 기사를 보면..... 7월 2일 김득룡이 와서 진주가
위태롭다고 전하자 “그럴리가 만무하다, 어떤 미친 사람이 잘못 전한 말 이리라” 라고 했으나 7월 5일
광양의 성응지로 부터 진주가 함락됐다는 보고를 받게 되며 사흘후 광양을 약탈한 가왜(假倭) 가 등장합니다.
7월 8일(8월 4일) 조붕이 “적이 광양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 을 듣고 광양 사람들이 미리 고을
관청과 창고를 불지르고 노략질 하였다” 고 하는 말을 들으니, 해괴함을 이길 길
없다. 순천부사(권준), 광양현감(어영담) 을 보내려고 하다가 뜬 소문을 믿을 수 없어 중지 했다.
7월 9일 남해현령이 와서 “광양, 순천이 이미 노략질 을 당해버렸다” 고 거듭 말한다. 그래서 광양현감(어영담)
, 순천부사(권준) 와 송희립 김득룡 정사립을 떠나보냈디. 이 소식이야말로 뼈아픈 일이라 말을 못하겠다.
오희문의 쇄미록 에도 음력 7월 14일자 기록에 구례에서 조선인들이 왜군 복장을 하고 약탈한 기사가 나옵니다.
하지만 진짜 가왜(假倭) 가 극심했건 명나라 니 왜구 중에 진짜는 10% 정도이고 90%는 중국인 이었으니,
왕직(王直) 은 소금 장수이다가 밀수꾼이자 해적이 된자로, 정해왕(淨海王) 을 자칭하며 16세기
동지나해를 장악한 인물이니 가정제 때 해적들의 난동이 너무 심해서 가정왜구(嘉靖俊德) 라고 부릅니다.
왕직 은 해상무역으로 일본, 필리핀, 베트남, 타이, 말라카와 교역하며 부를 축적하고 1540년에는 일본 북규슈
왜구들의 근거지 고토 열도 (五島列島)를 장악해 일본인 왜구 까지도 거느리고 밀무역 으로 위세를 누렸는데,
1543년 일본에 또 다른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가고시마 남쪽 타네가시마에 갔다가 배가 풍랑 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그의 배에 함께 타고있던 포르투갈인이 타네가시마 영주에게 화승총(조총) 을 팔았다고 하며
이 조총을 대량으로 구입한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장악 하고 후임인 히데요시가 조총으로
무장해 임진왜란 을 일으키니.... 그럼 왕직은 전쟁의 원인 제공자인 셈인데, 1547년 명나라
주환의 해금 강화와 단속이 심해지자 왜구들과 결탁하여 중국 연안을 대대적으로 약탈 합니다.
왕직 은 1551년에는 진사반을 소탕하고 절강성 주산을 중국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1553년에 명나라
유대유의 공격을 받자 일본 북규슈 히라도로 도주해 나라를 세워 국호를 송(宋) 으로 하면서
정해왕(淨海王) 을 자칭했다가 나중에는 휘왕(徽王) 으로 바꿨고.... 중국과 일본 36개의 섬이
왕직을 따랐으며 또한 1555년 을묘왜변 때 조선에 쳐들어온 해적단도 왕직의 무리 들 이었습니다.
1868년에 존왕양이론자 들이 나가사키의 영국 상인에게서 신식 소총과 대포에, 기관포와 군함을 구입해서
조슈번, 사쓰마번, 히젠번, 도사번 등을 중심으로 천황(일왕)을 등에 업고 5천명으로 반란 을 일으키니
도쿠가와 막부는 1만 5천 군대를 출진시켰으나 교토 전투에서 천황이 반군(신정부)에 어기(御旗) 를 하사
하자 관군에서 오히려 반군 으로 처지가 바뀌어버린 막부군대는 사기가 떨어져 탈영이 시작되며 패배합니다.
이후 메이지 신정부 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국교 재수립을 요청하나 대원군은 일본이 보내온 국서가 도쿠가와
막부와 주고받을 때 쓰던 인장 이 찍한 것이 아닌데다가 문체가 자존망대하니 거부 했고, 일본은 1875년
운양호 군함을 보내 강화도를 침공 하니 270년간 지속된 조선과 일본의 기나긴 선린우호시대는 막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