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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락티코스
십자가의 형태로 그들의 어깨를 덮는 스카풀라레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온순한 이들을 일으키시고(시편 147,6 참조). 방해하는 자들로부터 언제나 그들을 보호하시며, 방해받지 않는 일을 그들에게 마련해 주십니다. [4]
허리를 감싸는 띠*는 모든 불결함을 몰아내고, “남자는 여자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다"(1코린 7,1)라고 선언합니다. [5]
㈜ : 필론에 따르면, "띠는 쾌락과 모든 욕정을 졸라매는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주의를 받아들인 오리게네스는. "정결하게 사는 사람들은 허리띠를 가지고 있다”(『루카 복음 강해』SO: SC 87, 536-7)고 말한다. 허리는 욕정의 본거지며 ‘띠’를 매는 부위다.
지팡이는 그것을 붙잡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나무*이며, 주님께 의지하듯 그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확고한 지주입니다(잠언 3,18 참조)[7]
㈜ : 지팡이는 생명의 나무’라는 에바그리우스의 이 정의는 생명의 나무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 잠언 3,18은 ‘지혜’와 관련된다. 오리게네스로 대표되는 전통은 지혜와 관련되는 성경의 표현들을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수행론 100장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분투한다. 모든 쾌락이 그런 갈망에서 비롯된다면 갈망은 감각에서 생겨난다. 감각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은 욕정에서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4]
㈜ : 에바그리우스는 감각을 제일 앞에 두고 시작한다. 감각은 갈망과 다른 모든 욕정을 낳는다. 그러므로 아파테이아에 도달하려면 감각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은둔(세상으로부터의 분리)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모든 생각을 포함하는 발생학적* 생각은 모두 여덟 가지다. 바로 탐식·음욕·탐욕·슬픔·분노·아케디아·헛된 영광·교만이다. 이 모든 생각이 영혼을 괴롭히느냐 괴롭히지 않느냐는 우리 능력 밖에 있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영혼 안에 머무르느냐 머무르지 않느냐, 욕정을 일으키느냐 일으키지 않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 [6]
㈜ : 발생학적: 스토아 학파가 욕정의 분류에 사용한 형용사로, 가장 일반적 인 여덟 가지 생각이 다른 생각들을 낳는다는 뜻이다.
비참해진 불행한 영혼은 과거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힐수록 그만큼 더 의기소침해진다. [10]
분노는 가장 격한 욕정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의를 행했거나 행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 대한 흥분과 영혼의 동요다. 분노는 영혼을 온종일 성나게 하지만, 무엇보다 기도 중에 우리를 슬프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을 빼앗는다. 이따금 오래 지속되고 격노로 바뀌면서 밤에 동요와 체력 소모, 창백함과 위험한 야수들의 습격을 야기한다. [11]
아케디아*의 악령은 모든 악령 가운데 가장 사악한 놈이다. [12]
㈜ : 아케디아는 ‘영적 태만’ 혹은 ‘영적 무기력’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독수도승 생활에 연결된 영혼의 한 상태다.
그는 수도승의 머릿속에 인생은 길고 영적 수행은 수고스럽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 한마디로 악령은 수도승이 독방을 떠나 이른바 경기장(1코린 9,24 참조)에서 달아나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이놈을 따라올 악령은 어디에도 없다. 반면 영혼이 승리하면 영혼 안에 평화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1베드 1,8 참조)이 생겨난다. [12]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은 매우 미묘하여 덕스러운 사람에게 쉽게 스며든다. 헛된 영광으로 인해 수도승은 자신의 투쟁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사람들에게서 오는 영광을 추구한다. [13]
☕ 수도자도 영광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는 어렵다.
교만의 악령은 영혼을 가장 심한 타락으로 이끈다. 실제로 이 악령은 영혼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선행의 원인이라고 믿게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면모를 몰라주는 형제들을 어리석은 자로 여겨 그들에게 거만을 떨게 한다. 분노와 슬픔이 이 악령에 뒤따라온다. 마침내 가장 큰 질병이 그에 잇따라 오는데 허공에서 악령의 무리를 보는 정신착란이다. [14]
독서와 밤샘, 그리고 기도는 산만한 정신을 안정시킨다. 굶주림과 수고와 고독은 불타는 갈망을 잠재운다. 시편 낭송과 인내와 자비는 흥분한 영혼을 진정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수행은 적절한 때 적당한 정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극단적으로 무리하게 행해진 것은 잠시밖에 지속되지 못한다. 잠시 지속되는 것들은 오히려 해롭고 무익하다.* [15]
☕ 절제와 끝까지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 : 수고(κοπος: 손노동뿐 아니라 생활양식의 엄격함이나 불편 등을 뜻한다. 이집트 수도승생활에서 이에 대한 근본적인 언급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수도승 생활을 코포스(κοπος)로 정의한다.
삶과 죽음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불가능하듯, 사람에게 사랑과 재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랑은 재물의 파괴자일 뿐 아니라 현세 생활 자체의 파괴자이기도 하다. [18]
☕ 나눔과 소유는 양쪽 끝에 있다.
모든 세속적 쾌락을 멀리하는 사람은 슬픔의 악령이 접근할 수 없는 망루다. 슬픔은 실재하거나 갈망하는 쾌락의 결핍이다. … 우리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 악령은 바로 거기에 올가미를 놓아 슬픔을 만든다. [19]
☕ 없기에 슬픈 것이다.
분노와 미움은 증오심을 키운다. 동정과 온유는 있는 증오심조차 감소시킨다. [20]
☕ 분노는 사람을 악마로 만든다.
기도 중에 환상에 사로잡혀 하느님께 순수한 기도를 바치지 못하면 그대는 즉시 아케디아의 악령에 떨어지게 된다. 이 악령은 무엇보다 이런 상태에서 나타나며, 개의 모습으로 새끼 사슴과 같은 영혼을 갈기갈기 찢는다.* [23]
㈜ : 분노는 음욕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더럽히고 기도를 방해한다. 분노의 악령을 통해서 아케디아에 떨어지며 기도의 방해물이 생겨난다(『기도론』21-27 참조)
정념부의 본성은 악령과 싸우는 것이며 어떠한 쾌락에도 맞서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영적 쾌락과 그것에 따라오는 지복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우리의 정념부가 악령과 대적할 것을 권고한다. 반면에 악령은 우리를 세속적 욕망으로 유인하면서 정념부가 본성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다투도록 강요한다. [24]
☕ 수행이란 악령과 싸우는 과정이다.
그대 자신을 살펴라(신명 15,9 참조). 이는 그대가 형제들 중 누군가를 화나게 하여 떠나가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대가 기도할 때 늘 걸림돌이 되는 슬픔의 악령으로 인해 삶에서 도망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25]
㈜ : 오로지 분노를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도 기도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혹의 순간에 그럴듯한 변명으로 독방을 떠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항구하게 독방에 앉아 있으면서 모든 공격자, 특히 아케디아의 악령을 용감히 맞아들여 대적해야 한다. 이놈은 모든 공격자 가운데 가장 고약하며, 무엇보다도 영혼을 가장 괴롭힌다. 사실 이 싸움을 멀리하고 여기서 도피하는 것은 정신을 무능하고 비겁한 겁쟁이로 만든다. [28]
☕ 도피가 최선이 아니다. 일단 맞서 싸워야 하다.
거룩하고 매우 실천적인* 우리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수도승은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만, 마치 오랜 세월 육체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처럼 육체를 사용해야 한다.” 그분은 또 말씀하셨다. “전자는 ‘아케디아’의 생각들을 뿌리 뽑고 수도승을 더욱 열심하게 하며, 후자는 그의 육체를 건강하게 지켜 주고 늘 한결같은 고행을 유지시킨다.”* [29]
㈜ : *매우 실천적인(πρακτικωτατος): 프락티케를 완수한 사람, 곧 ‘생각’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고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다. “늘 한결같은 고행”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이런 사람은 사변적 금욕주의자가 아니다. 에바그리우스는 "매우 실천적인 스승”으로, 주님께서 ‘택하신 도구’인 이집트의 마카리우스 원로를 상정한다.
** 아케디아의 또 다른 치료법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생각하는 것’이다(『안토니우스의 생애』 19 참조). 게으른 자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1코린 15,31)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유익하다. 실제로 우리가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헛된 영광의 악령은 피하기 힘들다. 그것을 물리치려고 그대가 행하는 것 자체*가 그대에게 헛된 영광의 새로운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30]
㈜ : 그대가 행한 것 자체’: 헛된 영광을 쫓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드러내는 겸손의 표시도 헛된 영광의 새로운 원인이 될 수 있다.
인식을 얻고 거기서 기쁨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모든 쾌락을 제시하는 헛된 영광의 악령의 됨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사실 무엇이 영적 관상보다 더 큰 것을 그에게 약속할 수 있겠는가? [32]
☕ 세상의 모든 쾌락을 쓰레기로 여길 때 헛된 영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영혼의 욕정은 사람에게서 오는 반면 육체의 욕정은 육체에서 온다. 육체의 욕정은 고행으로 제거되고, 영혼의 욕정은 영적 사랑으로 근절된다. [35]
정오의 악령(시편 91,6 참조)은 보통 영혼 전체에 들러붙어 정신을 억압한다. 이 때문에 독수도승생활은 욕정을 제거한 후에야 감미롭다. 욕정을 제거한 후에는 순수한 기억만 남게 되고, 이제부터 수도승의 전투는 더 이상 싸움이 아닌 싸움 자체에 대한 관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36]
㈜ :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영혼은 그를 괴롭히는 기억’을 더는 가지지 않는다. 욕정에서 자유로워진 영혼은 더는 악령에 맞서 싸우지 않고, ‘그 싸움의 이유’를 관상할 수 있다. 계명 준수는 각 계명에 부합하는 관상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악령에 맞선 싸움은 영적 전투의 한 부분일 뿐이다.
모든 상황에서 일상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매 순간 주의하고, 받아들인 계명들을 가능한 한 실천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있다. [40]
악령은 우리를 거스른 욕정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가능한 것을 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행하도록 강요한다. 악령은 병자가 고통에 감사하고 봉사자에게 참을성을 보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또 병자가 쇠약해도 고행을 실천하도록 권고하며, 몸이 무거워도 선 채로 시편을 바치도록 권고한다.* [40]
㈜ : 여기서 제시된 권고, 즉 상황을 고려하면서 규정을 완화하라고 하는 권고는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 나타나는 가르침과 일치한다. 가령, 투병이나 손님 환대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는 단식을 중단하는 것을 허락한다. 우리는 팔라디우스를 통해, 에바그리우스 자신이 생애 마지막까지 위장병을 앓고 있었고, 익힌 채소를 섭취하려고 자신의 일상 규정을 변경했음을 알고 있
다. 에바그리우스는 다른 작품에서, 수도승에게 자신의 능력에 부치는 금욕을 행하도록 강요하는 악령의 유혹에 대해 언급한다.
그대가 유혹받을 때 그대를 괴롭힌 놈에게 분노에 찬 말을 하기 전에는 기도하지 마라. 사실 그대 영혼은 생각들을 통해서 영향받았다. 결과적으로 기도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그러나 그대가 적에게 분노에 찬 말을 한다면, 그대는 그가 제시한 표상을 깨뜨려 사라지게 한다. 이것이 분노의 자연적인 효과이기 때문이다. 좋은 표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42]
㈜ : ‘그대를 괴롭힌 놈’: 싸움꾼에 비유된 악령을 말한다. 여기서 제시된 방법은 '반박’이다. ‘분노’: 23장에서 정신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진 분노가 여기서는 악령이 불러 일으킨 악한 생각을 좇는다. 이는 분노의 선용(善用)이다. 실제로 악령과 싸우는 것은 영혼의 정념부가 지닌 본성이다. ‘영향받은’: 영혼이 악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 기도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사라지게 한다’ : 분노는 표상들을 사라지게 한다. 분노가 정신을 어둡게하기 때문이다. 분노를 잘 사용하면 악한 생각에 결부된 것들을 박멸할 수 있다.
정신이 하느님을 모독하고(감히 형언하지 못할)금지된 것을 상상하도록 유혹하는 불순한 악령에 동요되지도 말고 우리의 열정을 무디게 하지도 말자. 주님은 까음을 아시는 분’(사도 1,24; 15.8 참조)이시며, 우리가 세상에 있었을 때조차 그러한 광기로 미치지 않았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 악령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단념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우리 주 하느님 앞에 서 있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불경한 생각을 했던 분을 향해 감히 손을 펴 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46]
㈜ : 하느님을 모독하도록 유혹하는 악령이 바로 교만의 악령이다. 그리고 금지된 것에 대한 상상은 신성모독의 악령이 제시한 생각이다. 가자의 도로테우스는 신성모독과 교만의 관계를 강조했다. 우리 마음이 정화되지 않았을 때도 우리가 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은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아신다. 신성모독의 악령은 기도에 반대된다.
악령은 세속인과는 주로 사물을 통해 싸우지만 수도승과는 생각을 통해 싸우는 경우가 더 잦다. [48]
내적 싸움이 사물을 통해 행해지는 싸움보다 더 어렵다. 정신이란 쉽게 동요되고, 금지된 상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힘든 무엇이기 때문이다.* [48]
㈜ : 에바그리우스는 '사물’을 통한 싸움과 ‘생각’을 통한 싸움을 엄밀하게 구분한다. ‘사물’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는 것이며, ‘생각’은 무엇보다도 고독을 통하여 ‘사물’에서 분리된 수도승이 아는 것이다.
우리는 일하고 밤샘 기도를 하고 줄곧 단식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대신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는 법이 있다. 사실 영혼의 욕망부를 치유하는 이 명령을 준행하는 데는 육체도 필요하다. 우리 육체는 연약하여 그러한 노고를 넉넉히 감당해 내지 못한다. 그러나 기도는 싸움을 위해 정신을 강하고 순수하게 한다. 정신은 이 육체 없이도 기도하기 위하여 자연적으로 만들어졌고, 또 영혼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악령과 싸우기 때문이다.* [49]
㈜ : 악령에 맞서 싸울 수 있게 하는 손노동, 철야, 단식 같은 수행들은 대부분 지속적으로 실천될 수 없다. 오직 기도만 지속될 수 있고, 또 바오로 사도의 계명(1 테살 5,17)에 따라 그리되어야 한다.
악령은 관상적 방법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을 매우 못마땅해한다. [50]
육체를 영혼에서 분리하는 것은 오직 그것들을 결합한 분에게만 속한다. 그러나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하는 것은 덕을 지향하는 사람에게도 속한다.* [52]
㈜ : ‘그것들을 결합한 분’: 이는 ‘창조주’를 뜻한다. 그분은 영혼으로 전락한 타락한 정신에 육체를 결합했다.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하다’: 이는 덕행을 실천함으로써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다.
첫댓글 "영혼의 욕정은 사람에게서 오는 반면 육체의 욕정은 육체에서 온다. 육체의 욕정은 고행으로 제거되고, 영혼의 욕정은 영적 사랑으로 근절된다."
분노는 사람을 악마로 만든다.
아케디아의 악령은 모든 악령 가운데 가장 사악한 놈이다......
아케디아는
'영적태만 '
혹은 '영적무기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