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청석입니다.
돌갗이 푸르고 우둘두둘 하여 마치 개구리 피부와 같은 돌을 개구리석 이라 부릅니다.
이 석은 모습은 개구리를 닮아있으나 물씻김이 좋고 중간중간에 패임이 있어 개구리석이라 부르기는 좀 어렵겠습니다.
크기는 길이24 높이 38 폭 14cm 정도로 수석 중에서는 키가 큰 편입니다.
수석의 규격석[規格石]은 길이 30-20cm 높이 20-7cm 너비15-9cm로 봅니다.
어느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이 돌에서 고양이를 발견했습니다.
이후 고양이석猫石이라고 부르며 즐겼는데
어느날은 고양이를 보다 돌이 홀연히 사라진 일도 있었습니다.
물형석도 이렇게 시각과 인지에 따라 달리 보 이더군요.
요즘 과거를 돌아볼 일이 줄었습니다.
지나간 사건이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저 점점이 연결된 별자리처럼 기억의 모서리로 보일뿐입니다.
별중엔 은하도 있듯이 내 기억의 별들 각각에 엄청난 에피소드가 모여 있겠지만 말입니다.
원래 저는 현재의 내가 가장 최고의 순간이라 생각하므로 지난날을 돌이켜 보는 습성이 없습니다.
미래에 대해선 낙천주의자이지만 과거에 대해선 비관주의자라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지나온 생이 내게 평가 절하되어 과거의 내가 못난이로 여겨질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잘못이 반성되지도 않습니다.
그땐 그 일들이 가장 최선의 상태였을 것이기 때문에 따로 복기할 것은 없습니다.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바꿀 것 참 많겠지만
그때 내린 결정과 순간은 늘 익어있는 채로 맺힌 무거운 열매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삶을 처음처럼 시작한다고 달라질 것 있을까 싶습니다.
세세한 내용은 바뀌겠지만 큰 길은 이정표를 벗어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습니다.
우린 그 줄에 올라타 균형 잡으며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미래라는 게 정해져 있고 과거라는 것도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과거는 기억과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미래는 여전히 확률의 안개 속입니다.
과거는 없고 미래도 없지만 그 부재의 contents와 context가 현재를 받치고 있다고 말해봅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추론하는 것을 산파법이라 하여, 돌을 조각하여 사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돌 속에 있는 사자를 데려오는 일이라 했습니다.
과거라는 돌 속에서 사자를 조각하든 고양이를 데려오든 방법은 같겠지만 맥락은 다릅니다.
내가 개구리청석에서 고양이를 발견하면 돌이 홀연히 사라지듯 말입니다.
현재라는 돌 속에 무엇이 있어왔는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순간 그것은 형성됩니다.
예전에 어떤 개념을 생각하여 1에서 100까지 나누고 각각의 이름을 붙여보았는데 이름짓는 그 순간 개념을 구체화하며 존재가 창조된다는 느낌이 든 적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도 돌아본다는 방식으로 인지하여 생성되고 미래도 예견하는 것만으로도 기반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우겨봅니다.
소크라테스는 돌 속에 이미 사자가 있다했지만 저는 우리가 돌에서 고양이를 보는 순간 고양이가 돌에서 창조되어 존재하게 된다고 주장해봅니다.
구태여 양자역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내가 보고 인지하는 순간 확정되는 이 순간의 기적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 세상의 인연들에겐 한없이 미진하지만
이 순간순간의 연속을 창조하고 있는 나, 참으로 귀한 존재입니다.
첫댓글 진짜 고양이같이 보입니다. 사자가 되어 나오도록 자주 들여다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