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총예술소비운동본부 손경찬 본부장과 함께 떠난 “그리운 그곳, 나의 고향 영덕” 답사 그리고 삶
내 고향 영덕은 자랑거리 참 많다.
백 리 길 넘는 천혜의 청정 해안 먹을거리 대게 놀 거리 월월이청청 볼거리 해맞이공원, 옥계계곡 사월이면 복사꽃도 수두룩하다.
-손경찬의 시『내고향 영덕』 中
길, 떠나다 도시의 여름, 제멋을 톡톡히 내고 있다. 훅훅 불어오는 더운 바람이 몸을 감는다. 여름하늘은 소리없이 말갛고 조용했다. 회색 콘크리트 숲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대구예총 예술소비운동본부 손경찬(54) 본부장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덕군이다. 고향이 부모이고 고향이 그의 전신이라는 손경찬 본부장과 동행취재 했다. 그가 들려준 고향의 소리 아름다웠다.
손경찬 본부장의 이력은 참으로 다양하다. 군의원, CEO, 도의원, 수필가, 시인, 문화예술 운동가 등…. 30대에 영덕군 최연소 군 의원, 40대 경상북도의회 의원이라는 타이틀로 한 때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지금은 잠시 무거웠던 정치적 짐들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현재 그는 수필가이자 시인으로 그리고 대구예총 예술소비운동본부 본부장으로 대구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많은 공로를 쌓아오고 있다. 또한 오래전부터 예술인들의 든든한 조력자로 그들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있다.
글 사진 일멋
삶1 그리운 어머니 평일 오전, 대구에서 영덕으로 달려가는 포항간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알맞은 바람과 알맞은 햇살이 좋았다. 문화예술인들의 삶을 아끼고 귀히 여기는 그와의 동행이 낯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른 점심을 하기 위해 포항과 영덕의 경계선(포항 7번국도 영덕 진입로) 쯤 되는 바닷가 근처에 차를 세웠다. 영덕에 오면 그가 꼭 들린다는 ‘해변횟집’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람에 섞여 불어오는 바다 냄새가 진동을 한다. 파도가 높다. 파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어촌마을의 비릿한 냄새는 더 깊게 흘러왔다. 그 냄새가 좋아서 자주 바다를 찾았던 기억이 났다. 20대, 친구와 떠났던 바다 여행의 추억도 바람에 실려 왔다.
“어무이, 잘 계셨는교?.” 손 본부장이 횟집에서 일하시는 할머니들께 문안을 여쭌다. “지난 복날에 닭 잡수라고 드린 용돈으로 닭은 사드셨는교?” “잘 묵었지” 그는 이곳에 올 때면 늘 살갑게 다가서고 할머니들은 반갑게 손 잡아주고. 그에겐 부모이고 할머니들에겐 그가 아들이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돌아가시고 11살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제게는 고향어르신들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어르신들이 제 부모님입니다. 다리 밑에서 잠도 자보고 깡통 들고 남의 집도 기웃거리며 동냥도 해보고… 그때 내 처지를 따뜻하게 달래주셨던 분들이 계셨죠. 이곳의 어무이들처럼요.” 툭툭 주고받는 모습이 꼭 부모자식같이 정겹다 했더니 그 까닭 있었다. 유년의 삶을 홀로 보내고 어른이 된 지금. 고향 영덕은 언제나 그리운 어머니이다.
해변횟집엔 할머니들께서 손수 음식을 하고 상을 차려내신다. 30년 넘게 이곳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분도 계신다. 그래서 단골은 단박에 알아보고 더 살갑게 대하신다. 싱싱한 회와 전복 비빔밥이 맛깔나게 한상 차려졌다. 미역, 멸치, 나물 등 자연식 반찬이다. 전복비빔밥은 난생 처음이다. “전복이 얼마나 비싼데 비빔밥을…” 입이 횡재했다. 주인 할머니께서 담근 고추장도 얻어왔다.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최고였기에 때를 써서, 아니 애교를 부려 얻어왔다. “고맙습니데이. 더븐데 아이스크림 사잡수이소” 고추장은 기자가 얻고 인사는 손 본부장이 대신했다. ?해변횟집 : 영덕군 남정면 부경리 274번지 054.733.3352
답사1 대숲은 부르고 해풍은 대답했다. - 죽도(竹島)산 전망대
정오를 지나자 하늘이 슬금슬금 낮게 가라앉는다. 일본에서 태풍이 북상한다더니 자연이 어김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여행하기에는 적당히 좋은 날씨다. 고향 답사 제1코스, 축산면 축산리 죽도산 전망대로 향했다. 마을과 붙어있는 축산항에 조업을 마친 배들이 평화롭게 정박해있다. 평일이라 그런지 영덕블루로드를 즐기는 일행들과 간혹 마주칠 뿐 마을은 조용했다. 조그마한 해안가를 따라 죽도산으로 올랐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흰색 등대가 보인다. 1935년에 세워진 이 등대는 어둔 바다를 달려오는 어선들의 안내지기다. 영덕 블루로드 B코스의 종착지이기도 한 죽도산은 이름처럼 대나무가 많았다. 하늘은 흐렸지만 바람은 좋았다. 해풍에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바람 하나 잡았다. 짠내가 난다. 어느새 머리카락이 뻑뻑해졌다. 죽도산 전망대까지 해발 80m를 오르는 동안 대숲은 쉴새 없이 윙윙 소리 냈다. 대숲은 부르고 해풍은 대답했다. 하늘에 걸린 소나무 한 그루를 따라 전망대에 올랐다.
“예전에는 이곳이 섬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에 땅으로 매워지면서 육지가 되었죠. 죽도산은 총 면적 123,500m, 해발 80m로 예전에는 군사통제 지역이었는데 개방이 되면서 주말이면 천여명이 모이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블루로드에서는 꼭 빠지지 않는 명소죠.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는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동해바다는 맑고 깨끗한 물에서만 자란다는 산호가 많이 서식하는 곳입니다. 그만큼 청정 바다를 자랑하는 곳이 또 영덕이죠. 저 아래 축산항의 풍경 좀 보세요. 마을이 한폭의 수채화 같지 않습니까. 저것이 바로 우리의 문화이죠. 이 마을을 관광지역으로 조금 더 개발한다면 그리스의 산토리니 마을보다 아름답지 못할 게 하나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가장 큰 항구였던 축산항과 하늘과 맞닿아 있는 깊고 푸른 동해 바다의 수평선. C자 반달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아름다운 해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전망대에 서서 손 본부장의 ‘고향 예찬’을 계속 들으며 살짝 고개를 돌리니 인근에서 가장 높아 조선시대 초부터 ‘봉수대’로 쓰였다는 대소산도 보였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왜적의 방어를 위하여 이곳에서 봉화대의 발화산으로 봉화를 올리기도 한 곳입니다. 봉화대 아래에 영양 남씨 입향조가 보이나요? 원래 남씨는 중국 성이지요. 예전 조선시대 때 중국 사신들이 넘어왔는데 이곳에서 풍랑을 만나 전부 죽고 살아남은 3명의 중국 사신들이 이 일대에서 살았다 해서 이를 기리기 위해 입향조가 세워진 것입니다.” 손 본부장이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손가락을 뻗어가며 설명해주었다. “무더운 여름이면 어디 멀리 휴가 갈 필요 없이 수박과 돗자리 하나 들고 이곳에 오면 최고지요. 전망대 근처에 자리 깔고 누워서 수박을 먹으면 신선이 부럽지 않을 정도랍니다. 하하하” 죽도(竹島)의 망향대 전망대에서 맞았던 그 바람과 전망대에서 바라본 축산항의 풍경. 금세 그립다는 말을 내뱉고 두 번째 답사지 괴시리 전통마을로 향했다.
삶2 고마운 사람들
축산항에서 잠시 마을 가게에 들렀다. 등대슈퍼. 바닷가와 잘 어울리는 상호다. 가게 안에 반가운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손 본부장의 목소리와 아지매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일을 마친 아지매들이 삼삼오오모여 정담을 나누던 중에 그가 들어선 것이다. “내가 이 가게 20년 단골입니다. 이 아지매도 알고 저 아지매도 알고. 의원이 되기까지 지지해준 최고의 동지들입니다. 아직까지 손경찬이 팬이시더. 하하”
손경찬 본부장은 젊은 시절 삼성그룹 비서실에 입사해 10여 년간 19개국을 돌아다니며 선진 정치제도를 배웠고 우리나라에 지방자치가 시작될 무렵인 1990년에는 서른 살의 나이로 초대 영덕군의회에 출마해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가 첫 출마를 한 곳이 바로 이곳 축산항이었다. 4년 간 묵묵히 열심히 일해 준 그를 마을 사람들은 잊지 않았고 10년 후 경북도의원으로 출마했을 당시 축산항 지지율만해도 98%에 달했다고 하니, 그가 고향의 일꾼으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가를 말해주는 증표가 아니겠는가. “이분들이 저를 지켜주신 분들입니다.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반성할 수 있도록 채찍을 주신 분들이죠.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시니 고향엘 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저는 복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아지매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렌즈속에 그가 환하게 웃고 있다. 언제 어느 때 무시로 찾아와도 아직도 그를 반기고 응원하고 있는 고마운 그들이 있어서.
답사2 괴시리(호지마을) 전통마을
영덕군 영해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800m쯤 들어가면 조선시대 전통가옥들로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괴시리 전통마을이 나온다. 마을 초입에 길게 뻗은 연밭이 이 마을과 잘 어울렸다. 마을은 평온하고 고요했다. 목은 선생의 출생지이기도 한 괴시리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민속마을이며 영양 남(南)씨의 집성촌이다. 영덕군에서 괴시 마을의 전통과 유교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복원사업을 전개한 이후, 옛 모습을 되찾아 우리나라의 특색 있는 전통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괴시 전통마을은 괴정(槐亭), 영해 구계댁(邱溪宅), 영해 주곡댁(注谷宅), 물소와서당(勿小窩書堂) 등 조선후기 영남지역 사대부들의 주택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괴시리 전통마을의 원래 이름은 호지촌(濠池村)이었는데, 목은 이색 선생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고향이 중국의 괴시(槐市)와 비슷하다 하여 괴시로 부르면서 그 명칭이 굳어졌습니다. 1260년 경 함창 김씨가 이곳에서 처음 터를 잡은 뒤 수안 김씨, 영해 신씨를 거쳐 1630년 무렵 영양 남씨가 정착하면서 영양 남씨 집성촌이 되었죠.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槐市派宗宅:경북 민속자료 제75호)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재와 전통 고가(古家) 30여 호가 남아 있어 조상들의 생활과 멋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괴시리 전통마을은 우리 후손들이 정성껏 가꾸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영덕의 문화 유산입니다.” 괴시리전통마을에선 목은(牧隱) 이색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충절을 기리기 위한 “목은문화제”가 격년제로 열리고 있으며 영덕전통문화영상물, 전통차 체험, 전통놀이체험 등 고택문화체험도 할 수 있다.
그의 설명과 더불어 나지막한 흙벽 돌담을 끼고 돌면서 고옥의 풍경을 감상했다. 삐걱 대는 나무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금세 외할머니가 마중 나올 것 만 같다. 툇마루에 걸쳐진 하얀 고무신, 마당안의 자그마한 텃밭, 앉은뱅이 들꽃과 유실수, 장독대, 담쟁이……. 사랑채에선 호롱불 아래 옷을 짓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어린시절 흙먼지 날리는 황톳길을 걷던 그 길들. 기억에 박혀있는 유년의 추억이 괴시리에서 다시 살아났다. 돌아서 나오는 길에 연밭에서 마음에 드는 글귀하나 발견했다. 연꽃처럼 사는 사람. 우리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괴시리 마을 사람들이 아마도 그러하지 않을까.
개부구족(開敷具足)
연꽃이 피면 필히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꽃피운 만큼의 선행은 꼭 그만큼의 결과를 맺는다. 연꽃 열매처럼 좋은 씨앗을 맺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찾아가는 길 :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054-730-6114
답사3 목은(牧隱) 이색 선생 유적지
괴시리 전통마을에서 뒷산 중턱으로 10여분 올라가면 고려의 성리학자이며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선생의 유적지가 있다. 목은 선생의 본관은 한산,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운정이다. 목은 선생은 1328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무가정에서 태어났으며, 20세에 부친이 머물던 원나라에 유학을 떠난다. 귀국 후 2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숙옹부승을 시작으로 40세에 판개성부사 및 성균관의 대사성을 겸직하였다. 성리학의 발전과 교육진흥 등에 큰 공헌을 하였다. 유, 불. 선에 조예가 깊어 유교의 입장에서 삼교를 융합하였고, 훗날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룬 권근. 이숭인. 길재. 하륜. 정도전. 김종직. 변계량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그의 불사이군의 충절은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유년 시절까지 이곳에 살았던 이색 선생은 <관어대소부>, <유사정기> 등의 시를 통해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문장의 조종’ 이란 칭송을 받을 만큼 시인이자 대문호였던 그는 고려 말기의 학문과 정치에 큰 업적을 남겼다.
영덕군은 괴시리 전통마을에 옛 문헌에 묘사된 대로 생가 터를 복원시키고, 목은기념관과 동상, 시비 등을 세웠다. 생가 옆에는 기념관도 함께 조성되어있었다. 경상북도는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 등 삼은(三隱)의 업적과 정신을 재조명하는 역사문화관광지 조성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찾아가는 길 :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삶3 문화예술소비운동
목은 선생을 만나고 나오면서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내 고향 참 좋지요?” 손 본부장이 내뱉는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며 글을 썼다는 이색 선생처럼 그에게도 고향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다. 하여 언제나 만나는 이들에게 고향이야기를 들려준다. <수필시대>에서 수필가로 등단하였고 <영남문학>에서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한 그에게 고향은 늘 좋은 글감이 되고 있다. 그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고향이야기 다음엔 예술소비운동 이야기가 뒤따라온다. 그는 지금 대구예총의 예술소비운동본부 본부장으로서 대구 시민들의 건강한 예술 소비를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펼쳐나가고 있다.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27년 전 부산에서 ‘브로드웨이 42번가’ 뮤지컬을 관람하면서 부터입니다. 그 이후로 연극, 예술의 매력에 푹 빠져 많은 작품들을 찾아다니면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무대 위의 화려한 배우들의 모습이 아닌 무대 밖의 배우들의 삶을 보게 되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꿈을 키우며 살고 있더군요. 안타깝고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배고픔과 가난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때부터 예술인들의 후원자가 되겠다는 결심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이 정말로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것은 관객들의 적극적인 소비가 있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사람들이 뮤지컬, 연극, 영화 등 많은 예술을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 시작 했죠. 작년4월 대구 예총의 문무학 회장님이 취임하면서 예술소비운동본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관객과 예술인이 하나 되고 예술인들이 서로를 격려해주는 운동. 손 부장이 지향하는 참 문화, 그것이 바로 예술소비운동이다.
답사4 나옹왕사 유적지 장육사
마지막 답사지인 영덕군 창수면 갈천1리 120번지에 소재한 장육사로 행했다. 구름이 산다는 뜻의 운서산 아래에 자리한 장육사는 고려 공민왕 때 왕사까지 지냈던 나옹선사의 창건성지(1320~1376)로 유명하다. 장육교를 지나 장육사 가는 길은 산세가 깊고 조용했다. 구불구불 길옆에 심어진 담뱃잎과 까치구멍집이라는 독특한 구조의 초가집이 눈길을 끈다.
바람소리를 벗 삼아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시간을 잃어버리게 할 만큼 고요했다. 오래도록 눈에 담고픈 자연풍광에 절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나옹선사의 시가 입속에서 웅얼거린다. 산사를 찾는 나그네에게 미움도 사랑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한 나옹선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1979년 12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된 장육사는 조선 세종 때 산불로 전소되었다가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폐찰되어 다시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1900년에 지은 것이라 전해진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기와집 형태인 장육사 대웅전 천장에는 진락비천상과 좌우벽에는 주악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삼존불 뒤로 보이는 “영산회상도 후불탱화”는 경북유형문화제 제373호이다. 관음전에는 건칠보살좌상 보물 제993호가 모셔져있다. 건칠불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버린 불상을 말한다. 높이 86cm의 조선 초기 불상이다.
삼배를 올리고 나와 선 대웅전 뜰에서 바라본 하늘이 티없이 맑다. 산사의 정갈한 물 한 모금에 시름을 잊고 싶다면 깊은 골 장육사를 찾아가보기를 바란다. ?찾아가는 길 :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120, 054. 732. 6289
답사를 마치고
하루 동안의 짧은 여행에서 돌아왔다. 취재라는 명목으로 길을 나섰지만 여행지에서는 일을 떠난 자유인이 되었다. 망망대해 동해의 너른 품이 반겨주었고 숲이 산이 도시인을 품어주었다. 후대에 남긴 선조들의 정신이 철없는 도시인을 철들게 했다. 여행을 하며 뭉근하게 가슴을 울렸던 손경찬 본부장의 삶도 여운으로 남는다. 동행취재에 응해주신 대구예총 예술소비운동본부 손경찬 본부장님께 감사들 드린다. 붓을 놓고 카메라를 들고 다녔던 김한숙 화가, 오은정 기자에게도 추억이었으리라. 원고를 쓰는 하루 온종일 죽도산 대숲바람이 윙윙 댄다.
TIP 부용 식당에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저녁을 먹기 위해 한우 식당엘 들렀다. 역시 손 본장의 지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멍게비빔밥에 감탄하고 또 이곳 음식에 감탄했다. 참 맛나다. 손 본부장이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먹느라 잠시 잊었다. 어딜갔나 했더니 고향 영해에서 오신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있다. “많이들 잡수이소. 더울 때는 고기도 좀 잡숫고 일해야 합니데이.” 어디서나 그의 살가운 목소리에 정이 넘친다. |
출처: 문화교양지 일하는멋 원문보기 글쓴이: 일멋
첫댓글 지난 7월 일하는 멋 잡지사와 손경찬 회장님께서 동행했던 고향 영덕 답사 기사입니다.
그 하루가 참 오래 기억됩니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설레임이다
그들과 함께한 영덕이 그랬다
가족들과 누비고 다녔던 영덕과는 다른 새로움이었다
괴시리 목은의 초당, 초당 이무호, 그리고 손경찬회장님은 영덕의 자랑이 아닐까
아름다운 그들을 만나게해준 일멋에 감사합니다....언제나 멋진 일멋이기를...
참 유별스럽다. 회장님의 고향 사랑은.........
처음엔 그랬습니다. 누구나 고향이 살갑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 회장님께 고향은 어머니요, 삶이요, 꿈을 펼치시는 에너지의 진원지가 아닐런지요.
들샘님과 함께 고향을 찾은 회장님, 더 없이 편안하고 멋져 보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같은 장면을 봐도 느끼는 것의 차이가 있고, 같은 사실을 표현해도 주는 풍경이 같지 아니함을 느낍니다.
들샘님이 바람처럼 나다니며 구상진행의 대가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세필붓처럼 근접묘사를 할 줄은 몰랐심다... 대단한 들샘님의 필력이여....^^
두분덕에 영덕을 다시보게 되네요. 전복비빔밥 생각하니 입안에 침이 고이고...
취재하시면서 영덕 구경 확실히 하셨네요.
여름에 수 차례 동해 바다가면서 지나다녔던 곳인데...
기사 읽으며 간접적으로 또한 더 확실히 알게 되네요.
사진따라 함께 여행 잘 했습니다. 담에 취재 길따라 가보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실린다는 그지요. 들샘님과 노랑별님이 고생하고 손본부장님은 해설사겸 모델인거죠. 나머지 지인들과 어르신은 귀한 게스트1,2,3,4,5 ...
이렇게 발행된 책은 언제 나오남요. 저도 한권 주실거지요. 아님 사야 되남
우와...이렇게 따라 눈길만 따라 다녀도 머리가 상쾌해지네요.
마음은 피곤하구만요. 왜냐구요. 그걸 몰라서 묻는갑요. 그런 멋진 곳을 눈으로만 보고, 맛나다고 칭찬하는 저 멍게비빔밥과 눈앞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고기가... 흑흑흐ㅜㄱ
마지막은 동네어르신들이 장식하셨구만요...더 없이 즐겁고 반가운 영덕 구경이였슴다. 조명선올림.
멋진 영덕 답사기행문 너무 잘 봤습니다.
영덕 이제 제2의 고향같아지내요~ㅋ
영덕 괴시리 마을 스쳐가면서 이름이 익은 듯 합니다. 작년 봄, 영덕 복사꽃마을 오십천에서 무릉도원을 경험했고
아직 생각하면 설레는 곳입니다. 올해도 가게 되면, 위의 답사기행문 참고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