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né Magritte 르네 마그리트
* 출생 - 사망 : 1898.11.21 (벨기에) – 1967.08.15
* 그는 초기에 벨기에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해서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음.
*1926년~1930년까지 파리에 체류하며 여러 초현실주의 화가, 시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
* 그의 작품기법 ‘데페이즈망(낯설게 하기, 고립)’- 모순되거나 대립되는 요소들을 동일한 화폭에 결합시키거나, 어떤 오브제를 전혀 엉뚱한 환경에 위치시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 심리적 충격과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중절모와 코트 차림의 사내는 르네 마그리트가 자신의 작품에 수없이 등장시킨 그의 대표 아이콘인데, 실제 마그리트 자신이 즐겨 착용한 패션이라고 한다.
골콩드(Golconde)
중절모에 레인 코트 차림의 신사가 떼로 등장하는 골콩드 혹은 겨울비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재현된 이미지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인간비’를 그린 것이다. 화가의 분신(들)이 마치 빗줄기마냥 길쭉한 자태로 허공에 꽂혀있다. 똑같은 의상에 똑같은 포즈를 취한 이 무개성한 개인들의 열거는 현대 조직 사회가 박탈한 도시인의 개성은 아닐까? 중력에 지배당하는 비라면 지면을 향해 떨어지겠지만, 조직에 얽혀 사는 우리의 형편을 반영하듯, 인물들은 허공 위에 불안정하게 붙잡힌 군상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관람자가 이 그림을 유독 선호한다. 쓸쓸한 현대적 삶에 대한 공감에서일까? 하지만 그런 복잡한 속내를 따지지 않고도 관객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이 그림의 상황 설정에 열광한다.
동료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에 천착했다면, 마그리트는 또렷한 의식이 만들 수 있는 허구의 유희에 충실했다. 그 때문에 마그리트의 아이디어는 후대 상업 광고에 꾸준히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골콩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미지의 반역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나의 그림을 상징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작품의 진정한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용 할 때는 그 물건 속에서 상징적 의도를 찾지 않지만, 그림을 볼 때는 그 용도를 찾을 수 없고 회화를 접하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의미를 찾게 된다. 사람들은 편안해지기 위한 의지할 만한 것을 원한다.”
현실과 초현실, 실제와 허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미술사와 철학사에 길이 남은 작품이다. 누가 봐도 명백히 파이프 그림인데, 마그리트는 이것을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언어는 매우 정확하고 명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단순하고 한정된 것이다. 현실은 그보다 훨씬 모순적이고 복합적이다. 이처럼 그림과 글이 만나면 회화와 언어 양자에 대한 기존의 사고를 흔들어 놓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린 왜 밑의 문장의‘이것’이 위의 파이프를 지칭한다고 쉽게 생각한 것일까?
모든 존재는 그 존재가 처한 시, 공간 내에 특정한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모양은 파이프지만 어떤 특정계층을 나타낼 수도 있는 것처럼 파이프면서도 동시에 여러 의미로 전환 될 수 있기에 파이프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파이프를 정확히 묘사한 그림일 뿐 파이프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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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 달력특집 일곱빛깔 명화 패러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 시대를 이끄는 대표적인 프랑스 화가였다. 그의 낭만주의 사상과 양식은 계몽주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또 그는 정확한 묘사를 요구하는 그 시대의 예술사조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붓질을 특징으로 삼았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1830년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 가운데 여성은 자유를 상징하며, 한 손에는 프랑스 국기(프랑스어: La Tricolore)를 다른 손에는 총검을 휘드르고 있다. 이 작품은 들라크루아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유디트
유디트는 성경의 외전이라 불릴만한 ' 외경 ' 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영웅으로, 예루살렘을 침입한 느부갓네살의 앗시리아 군대에 맞서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이 기록에 남아있는데, 그 장면이 숱한 유디트화의 극적 구성의 촛점이 되어 알려졌다.
'아름다운 여인의 대담한 살인 행동'이라는 특이한 소재로 많은 화가들이 사랑한 유디트. 성과 죽음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다는 소재의 특성상 보티첼리, 지오르지오네 , 카라바조, 루벤스, 그리고 클렘트까지 유디트를 그렸다. 구스타프 클림트 전의 화가들은 유디트의 초상화 정도로만 표현하였는데, 클림트는 홀로페르네스에 대한 유디트의 혐오감이나 살해 행위에 대한 고통보다는 승리감과 도취되어 황홀경에 빠져있는 여인으로 그녀를 표현하였다. 가슴과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채로 유혹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클림트의 유디트는 매혹적인 힘을 과시하며, 감상자들을 에로틱한 상상으로 이끈다.
절규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와 피오르드에 걸린 칼을 보았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화자의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곡선으로 표현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구름으로 나타내었으며, 화면 하단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인물은 마치 유령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데, 뭉크는 깊은 좌절에 빠진 사람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와 같은 형태의 왜곡을 하였다고 한다.
절규(노르웨이어: Skrik; 1893-1910년)는 노르웨이의 예술가 에드바르 뭉크의 연작 중 하나인 표현주의 그림으로, 핏빛의 하늘을 배경으로 괴로워하는 인물을 묘사하였다. 배경의 풍경은 노르웨이 오슬로 (당시 크리스티아니아)의 이케베르크 언덕에서 보이는 오슬로피오르이다.
지오반니 아르놀피니와 그의 부인의 초상
"1434년에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다"라는 의미의 화려한 라틴어 서명은 마치 샹들리에와 거울 사이의 벽에 새겨진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아르놀피니의 초상'으로 알려진 수수께끼 같은 이 초상화는 플랑드르 지방의 한 가정 침실을 배경으로 그려졌으며 네덜란드 회화 중에서도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견이 있긴 하지만, 이 커플은 브뤼주에 살았던 루카 출신의 부유한 상인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 조반나 체나미로 추정된다. 얀 반 에이크(1385-1441경)는 독창적이고 재치 있는 방식으로 그림에 자신의 서명을 집어넣었다.
유별날 정도로 자세한 배경과 두 인물의 자세는 이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이 작품은 두 남녀의 결혼식을 묘사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왔지만, 사실 조반나는 임신한 것이 아니라 당시 크게 유행하였던 풍성한 드레스를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이 그림이 조반나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려진 사후 초상화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방 여기저기에 있는 물건들은 이 커플의 관계를 알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침대 틀에 걸린 먼지털이 솔은 여성의 가사 의무를 의미하고, 침대 틀 위의 조각상은 출산의 수호성인 성녀 마가렛으로 생각된다.
반 에이크는 이 작품에서 놀라운 부분묘사와 빛의 표현 능력을 보여주었다. 테두리에 예수 수난의 장면이 있는 정교한 거울에는 커플의 뒷모습과 함께 현관에 서 있는 다른 두 사람의 모습이 비친다. 그중 하나가 붉은 터번을 쓰고 있는 반 에이크인 것 같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에두아르 마네(1832-1883)는 그림이 출품되기 한 해 전, 그는 예기치 않았던 격려를 받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죽으면서 그에게 상당한 유산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마네는 상업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물의를 일으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당황할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마네가 재능 있는 화가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 주제에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비평가들은 이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16세기의 유명한 그림 <전원의 연주회>에 토대를 두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가상적인 과거를 배경으로 한 <전원의 연주회>는 분명한 상상이었던 반면 마네의 그림 속 인물의 옷차림은 사실적이며 현대적이다. 이 그림은 도덕성의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왜 두 신사는 옷을 벗고 있는 여자 옆에 앉아 있는가?
여러 가지 면에서 이 그림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예를 들어 오른쪽 인물의 자세는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1840-1534경)의 판화에서 모방한 것이다. 원래 문맥에서 남자의 제스처는 완전하게 이해되지만,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배경에 있는 인물 역시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녀는 근처에 있는 배에 비해 너무 크다. 마네는 작품 구성에 있어서의 관습과 원근법의 법칙을 조롱하고 있는 것 같다.
피리부는 소년
실제의 모델을 표현했다기보다 가상의 현실을 통해 모렝을 자신의 가정 생활로 편입시키려는 마네의 욕망이 깔려있다. <생 라자르 역>에서 모렝이 유모로 등장하는 것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은 마네의 심경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이 그림은 <올랭피아>와 <생 라자르 역> 중간에 위치하는데, 이 당시에 마네의 마음에서 일어난 모렝에 대한 태도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숨은 진실을 알기 전까지 이 그림을 통해 모렝이라는 여성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다. 여성성은 사라지고 사춘기 소년의 모호한 성징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은 모렝으로부터 섹슈얼리티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마네의 심중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누드로 모렝을 그리는 대신 마네는 의상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했다. 배경이 없이 인물만 등장하는 구성은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초상화의 규칙을 위반한 결과다. 주목해야 할 것은 피리 부는 소년의 시선이다. 그림에서 드러나는 소년의 표정은 관객에게 모호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이런 시선과 표정은 모렝을 모델로 그린 다른 그림 <거리의 여가수>를 연상시킨다. 피리를 입에 대고 부는 모습은 순간의 행동을 포착하는 마네 특유의 관점을 드러낸다. 이런 관점은 동작이나 행동의 통제를 미덕으로 생각한 마네의 취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특이한 초상화다. 겉으로 보기에 피리 부는 소년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빅토린 모렝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는 피리 부는 소년을 모델로 쓰지 않고 모렝을 모델로 삼아서 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모렝은 마네의 모델 중 한 명으로서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 같은 문제작에도 등장하는 여성 모델이다.
브라이덜 커플
마르크 샤갈의 작품.
골콩드 Thank You~~
"난 삶과 예술을 구분하지 않는다. 내 화폭에는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색감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