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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 황석영
“가물가물 정신이 흐려지는데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맞은편 의자로 가까이 가서 순남이의 몸을 만져보려고 하니 가뭇, 헛것이 사라졌다. 아직도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현관문의 자물쇠를 모두 열어놓았다. 내 안에, 내 집에 들어와 있는 것들 모두 나가라고…. 몸살기는 조금 가신 것 같은데 맥이 없었다. 나는 깨끗이 목욕을 하고 싶었다. 2층으로 올라가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몸을 푹 담갔다. 온몸이 녹아내리고 넋만 둥둥 뜨는 듯했다. 차츰 더 편안해졌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교회 목사에게 심방을 와달라고 전화했다. 그리고 옷을 벗고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고 새 잠옷을 꺼내어 입었다. 빗소리가 점점 멀게 들렸다.”
“내가 널 데리러 왔다.”순남이가 말했다.
“니얄 가문 안되나?”
“네 맘대로 안되지.”
나는 발끈했다.
“당신보러 누가 공산당에 들라고 해서? 난 아저씨하군 함께 못 가오. 난 교회 장로야.”
검은 것은 다리를 가딱까딱 흔들며 중얼거렸다.
“거기는 니편 내편도 없다.”
“나는 당신을 쥑였으니 그편이 아니라구.”
“죽고 사는 것도 없다.”
“용서하고 회개하구도 없구?”
“아암”
“거기가 대체 어디요?”
이 소설의 주인공인 류요섭 목사의 형인 류요한이 이제 죽음을 앞두고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전봇대에 매달아 죽인, 자기 집 머슴같이 일을 봐 주던 순남이 혼령이 찾아와 비몽사몽간에 만나는 장면이다. - 27쪽
“정 안 되겠다 싶으문 초마나우태에 둘둘 싸서 야밤에 산으로 간단다. 산엘 가 높직한 낭구를 보아가주구 그 가지에다가 붙들어 매놓구 내려온다. 까마구는 또 어쩌나 그리 많던지 채 죽지도 않앴넌데 몰려와 눈알두 파먹고 기래. 저어 부모가 밤새 지키멘 새를 보아. 그렇허다 살아나는 아도 있어선나르 모두 멫밤을 나무 및이를 지키멘 날을 샌다넌구나. 우리가 어려서부텀 어른들께 들었지마는 손님마마란 기이 원래가 서쪽 병이라고 하댔다. 서쪽 나라 오랑캐 병이라구 하니 양구신 믿던 나라서 온 게 분명티 않으냐. 내가 너이 하래비 우로 아덜을 둘씩이나 손님마마에 보내고 났시니 양구신에 부아가 나겼느냐 좋다고 믿겠너냐. 사람은 제 근본얼 알아야 복을 받는 게다.”
요섭이 돌아가신 할머니한테 생전에 들었던 이야기다. 그만큼 천연두, 즉 마마가 무서웠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손님인 것은 그런 의미가 포함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섭의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가 물려받은 땅을 잘 관리하여 두 배나 늘려놓았고 아버지도 척식회사 과수원 관리를 잘해서 해방 전 무렵에는 동네에서 몇째 가는 포실한 중농 집안을 이루었다. 그리고 두 분은 인근 동리의 기독교인 유지들과 함께 찬샘골에 교회를 세웠다. 면에 있는 교회보다 찬샘골의 광명교회가 훨씬 크고 교인도 더 많게 되었다. - 43쪽
〈제너널 셔먼〉호라는 미국 배가 1866년 중국 텐진에서 조선으로 출항했다. 선주 프린스턴은 평양의 왕릉에 귀중한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영국인 상인 메도우즈와 결탁해 조선 항해에 나선 것이다. 서양의 물품과 무기를 가득 실은 프리스턴은 덴마크 사람 페이지 선장과 스코틀랜드 출신 개신교 목사 토마스를 통역 겸 안내인으로 삼았고 그의 친구 윌슨과 호가드 등 아홉 명 선원들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한 것이다.
27살의 토마스는 그전에 산뚱에서 선교를 하다 천주교 신자인 조선인을 만나게 되고,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최초로 개신교를 전파하고 싶었다. 처음 백령도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두 달 반 동안 한문으로 된 복음서 16권을 도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령도에 처음 교회가 생겼던 이유다. 몰론 그전에 황해도에 조선 최초의 교회가 생기기도 했다. 조선을 작은 토호국쯤으로 생각한 토마스는 왕을 직접 만나 선교 허가를 받으려했지만 평양을 서울로 아는 등 조선에 대해서 무지했다. 그는 후일을 기약하고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이번에 다시 오게 된 것인데, 그동안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해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고, 자신의 이름도 한자명 최란헌으로 지었다.
몇 달 전에 프랑스 함대의 침공으로 난리가 났던 당시 조선은 외국에서 들어오는 배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7월 10일 밤 제너널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부 신장포에 닻을 내렸다. 관찰사가 중군을 보내 이양선의 내항 목적과 동태를 살피도록 했다. 중군이 이르자 토마스, 즉 최란헌은 자신들의 목적이 단순한 상거래에 있으며 자신들이 가져온 서양의 각종물품과 조선의 금이나 인삼 종이 호피와 교역할 것을 청했다. 그리고 토마스는 자신들은 말썽 많았던 천주교가 아니라 개신교임을 밝혔다. 평양부는 천주교뿐 아니라 신교도 국법으로 금하고 있으니 곧 돌아가라고 하였다. 다만 그들의 요청에 따라 식량은 보태주었다. 그러나 셔먼호는 13일 강을 거슬러 만경대 아래 두로도에 닻을 내리고 작은 배로 강변을 오르내리면서 물정을 살폈다.
토마스는 보트에서 장사포와 석호정 부근에 내렸는데 배를 구경하려고 나온 백성들에게 가지고 온 한자 성서와 전도지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임무를 받고 나온 중군이 16일 이들을 인질로 잡았다. 토마스는 조선에 온 이유를 1) 기독교를 전하기 위함. 2) 좋은 물건을 서로 교역하자는 것. 3) 아름다운 산천과 명승지를 구경하려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더 설명했다. 하지만 중군이 가지고 있던 문서에는 선원 전원을 유인해 상륙하게 한 다음 살해하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개신교단 측은 주장한다. 이로 인해 셔먼호 선원들이 분노하여 중군 일행을 잡아 배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관찰사가 관리를 보내 이들의 석방을 교섭했지만 서양인들은 계속해서 교역을 요구하며 19일 아침 다시 강을 거슬러 황강정 앞에 정박하고는 보트에서 내려 까막여울로 올라왔다. 놀라고 분노한 백성들이 강변에 몰려들었고 백성들은 중군을 놓아 보내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돌팔매를 날리기 시작했는데 그리되자 관군들도 합세하여 접전이 일어났다. 혼란 중에 붙잡혔던 중군들이 구사일생 배에서 탈출했고 서양배는 돌아가기는커녕 강변에 올라 민가를 급습하고 식량과 가축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했다.
7.22 조선 관군은 셔먼호 본선에 포를 퍼붓기 시작했고 셔먼호도 대포로 응답해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소총과 함포를 쏘아댔지만 하루종일에 걸친 전투로 전력이 소모되어 이튿날인 23일 강 하류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하류에도 매복하고 있다가 사흘 동안 공방전을 벌였다. 그런데 셔먼호가 그만 모래톱에 걸리고 말았는데 이에 백성들은 불붙인 작은 배를 하류로 내려보내 이양선에 불이 붙었고 선원들은 저항할 힘을 잃고 뱃머리에 나와 구원을 요청했다. 배 안의 화약과 기름이 터져 맹렬하게 타올랐다. 배에서 뛰어내리다 죽었고 뭍에 닿은 이들은 살기 오른 군중들에 의해 사살됐다.
한국의 개신교단은 토마스의 순교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달아나서 살겠다는 생각보다는 가지고 온 성경을 불에 태우지 않고 조선사람들에게 전하려고 애썼다. 그는 성경이 들어있는 상자를 매고 강변 둔덕으로 올라갔다. 그는 성경을 한 권씩 꺼내어 언덕에 서 있는 백성들에게 던지며, ‘오오 하나님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저 불쌍한 백성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하고 외쳤다. 체포된 토마스는 사형장인 대동강변 양각도로 끌려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끝없이 외쳤다. 9.6 땅거미가 질 무렵 토마스는 27세 나이로 참수되었다. 이것이 서북지방에 처음 뿌려진 개신교의 씨앗이었다. - 54쪽
‘최경녀, 경녀의 어머니는 청년단에게 코를 철사로 매인 채 나체로 끌려다님. 남편이 군대에 나가 있다는 것 때문이었음.’
‘오은순, 당시 열 살 현재는 신천박물관 해설강사로 미제의 죄상을 전 세계에 고발하고 있음. 아버지는 당원. 구월산 유격대에 들어가 있었음. 가족은 후퇴를 못함. 아버지를 찾아 산으로 올랐는데 어머니가 식량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갔다가 잡힘. 은순은 지주네 집에 갇힘. 거기서 뜻밖에 아버지를 만남. 그러나 그들은 부녀간의 상봉을 불허. 어린 딸 앞에서 아버지를 물고문. 딸은 기절. 그들은 아버지를 묘목 움에 생매장. 그때 은순은 구덩이 속에서 기어나옴. 일가친척 이십여명이 희생됨.’
요섭 일행에게 미제의 잔학성을 보여준다며 오전에 전시실을 보여주고 오후에는 박물관으로 데려갔다, 박물관에는 각종 유물 전시물과 사진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몇 명의 얼굴 사진 아래 붙은 설명이다. 요섭은 덤덤한 마음으로 그것을 읽었다. “요섭은 눈안에 물기가 고이는 것을 느꼈다. 흐려진 시선 저쪽으로 차가 다가왔다.”- 112쪽
이찌로가 박일랑 동지로 둔갑한 것은 해방되고 나서 겨우 반면 만이었어. 하긴 그해 가을부터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어느 누구도 드러내놓고 그의 바뀐 말투를 시비 걸진 못했단 말이야. 어느결에 마을 어른들도 그에게 하게 정도는 쓰게 되었다. 그는 움에서 살다가 해방 몇 해 전부터 동네 사랑에서 가마니와 망태기도 짜면서 기거했는데 한동안 타관으로 떠났는지 몇 달 동안 보이지 않다가 겨울이 다 지나서야 돌아왔지.
어머니 애기로는 그자가 인민복 입고 농촌위원장이란 완장을 차고 민청 아이들 몇 명을 데리고 집안으로 썩 들어서더래. 그러군 아버지더러 나오라고 하더래. 무슨 일이냐니까 종이쪽지를 내어 얼굴에 흔들더란다. 임시인민위원회에서 토지개혁령이 내려왔는데 그걸 시행하겠다면서 소작지 무상몰수 처분을 받겠느냐 아니면 공평한 분배를 위해서 헌납을 하겠느냐 하더래. 녀석이 글을 모르는 줄 알고 눈이 어두워 공문이 보이지 않으니 읽어 달라구했더니 이찌로가 눈 앞에 들구 천천히 읽더래. 아버지는 집어치우라구 종잇장을 채뜨려서 박박 찢어버렸지. 그때 눈앞이 번쩍 하더래요. 이찌로가 아버지의 면상을 후려 친게야. 아버지가 얼굴을 싸쥐고 넘어지는 걸 어머니가 똑똑히 보았대. 어머니는 이찌로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어.
“이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감히 누굴 치느냐?”
이찌로는 천천히 어머니 손목을 비틀었어. 그리고는 확 떠다밀었지. 어머니가 넘어지자 신발 신은 채로 안방으로 들어가서 제 패거리 서너 명과 같이 장롱이며 문갑을 뒤져서 땅문서를 가지고 나왔데. 그리군 꼭 한마디 하더래.
“동무들 인민의 적을 체포하시오.”- 135쪽
이 소설의 요지는 1950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배경으로 이 땅에 들어와 엄청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이데올로기(기독교와 맑스주의)와 그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인간군상들의 원한과 해원(解怨)을 그린다. 손님이란 천연두를 뜻하는 민속적 별명이기도 하고, 주체가 되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뜻하기도 한다. 17세기 서양에서 압록강을 건너온 천연두는 병자호란 후에는 풍토병이 되다시피 했는데, 이후 마을 어귀에 세워진 장승이나 돌무더기들은 이런 ‘손님 귀신’을 막고자 하는 의미였다.
손님의 의미는 ‘손님 귀신’으로서, 막아내고자 하는 타자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소설 속에서 규정한 손님은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타의에 의해 지니게 되었다고 판단되는 기독교와 맑스주의다. 방북과 해외체류, 5년간의 복역생활 후 복귀하면서 독서계에 커다란 화제를 불러온 황석영의 장편소설이 [손님]이다.
“미국 브루클린에 살던 류요섭 목사는 고향방문단 일행으로 북한에 가게 되는데, 요섭은 방북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형 류요한 장로가 숨을 거둔다. 그 며칠 사이 요섭은 알 수 없는 꿈과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요섭은 유품으로 남은 수첩에서 형이 박명선이란 여인을 만나기로 했다는 메모를 발견하고 그녀를 찾아 로스앤젤레스로 향하지만, 양로원에서 홀로 살아가는 박명선은 류요한 장로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풀지 않고 동생 요한에게도 냉대로 일관한다. 결국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요한은 형을 화장하고 남은 뼛조각 하나를 챙겨 넣은 채 평양으로 떠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데, 홀연히 망자의 유령이 고향으로 가는 그와 동행하게 된다.
요섭은 초현실 속으로 걸어들어온 듯 멍한 기분으로 평양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고향인 황해도 신천 ‘찬샘골’로 향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에도 형의 헛것은 그와 하나가 되었다 둘이 되었다 하면서 과거의 아슴한 기억으로 그들을 불러낸다. 요섭은 형이 북에 남기고 온 아들 단열과 해후하고 고향 땅에 세워진 〈학살박물관〉을 참관하면서 당시 생존자의 증언을 듣는다. 한국전쟁 당시 ‘미제’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사건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그곳에서 요한은 당시 기독청년이었던 형과 연관된 끔찍했던 45일간의 기억을 떠올리고 몸서리친다.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지만 사실은 우익기독세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 만행, 서로를 죽고 죽이던 검은 유령들이 요섭에게도 떠올랐다. 그때를 이야기하는 요한과 요한의 아내, 두더지 삼촌과 이찌로, 이렇게 산 자와 죽은 자들의 해원이 시작된다….
이 소설에서 [손님]은 주체적 근대화에 실패한 우리에게는 외부에서 이식된 ‘기독교’와 ‘맑스주의’다. 1950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배경으로 이 땅에 들어와 엄청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와 그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인간군상들의 원한과 해원을 그려냄으로써, 이제야 겨우 냉전의 얼음이 녹기 시작한 한반도에서의 화해와 상생이 열려 나가기를 희망한다. [손님]은 황석영만이 경험할 수 있었던 방북 취재, 선 굵은 서사,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특히 [손님]은 형식적인 면에서 황해도 ‘진지노귀굿’의 얼개을 차용해 구성한, 리얼리즘의 틀을 깨고 나온 ‘리얼리즘’이라고 할 만하다.
황석영(黃晳暎, 1943년1월4일∼ )은 1962년 《입석부근(立石附近)》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등단하였고 1970년 《탑(塔)》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활동했다. 1989년 몰래 방북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9월에 베를린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서 부인, 아들과 정착해 생활하다가 여권 만료 시한인 1992년 2월이 임박해 독일 내 합법적인 체류에 문제가 생기자 1991년 11월 독일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옮겼다. 1993년 귀국 이후 방북 사건과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1998년 사면 석방되었다. 검찰이 무기징역을 구형하자 북한은 관영 중앙통신을 통해 “그의 방북과 해외활동은 순수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함께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의 의무감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결코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황석영이 북한에 매수되어 밀입북하여 북으로부터 25만 달러의 공작비를 받았다는 당국의 발표에 대해 “작가로서 동족이 살고있는 공화국 북반부를 다녀갔을 뿐이고 우리는 그를 동포 작가로서 대해주었을 따름”이라며 “터무니없이 날조된 수사결과”라며 황석영을 즉각 석방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민중 역사소설로 불리는 《장길산》을 통해 그는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에 주목했으며 《한씨연대기》와 《삼포 가는 길》을 통해서는 산업화 시대정신과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대변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길산》, 《삼포 가는 길》, 《손님》, 《오래된 정원》, 《심청》등이 있다.
황석영 〈석방대책위원회(공동의장 신경림 등 4명)〉은 1993년9월25일 황석영문학제 개최에 맞춰 황석영의 방북과 이후 국외에서의 활동, 귀국, 그리고 투옥으로 이어지는 행보를 통해 남북분단의 모순을 증언해 제1부 <사람이 살고 있었네> 북에서 만난 문인과 노동자, 농민, 학생들을 비롯해, 북한사회 곳곳에 대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 방북기 2부 <통일을 위해 문학의 길을 걷다보면 어디나 조국이었네>, 방북과 관련한 인터뷰를 모음 3부 <분단시대 통일작가 황석영>을 통해 방북 이전인 80년대 발표한 단편 <골짜기>와 <열애>를 수록하고, 4부 北의 초청장과 합의서, 영화계약서, 귀국성명서, 모두 진술서 등 방북관련 자료를 엮은 「황석영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시와사회사刊)를 발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