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야 이방운은 김홍도가 활동할 무렵 함께 시의도의 대가로 손꼽힌 화기이다. 앞서 소개한 그의 시의도는 양명학 시조인 왕수인의 시를 소재로 한 것이다. 양명학자의 시는 조선시대 후기로서는 조금 뜻밖인데 어째서 가능했는가는 조금 생각해볼 문제이다.
직업화가였던 그는 많은 산수화를 그렸다. 그중에는 겸재를 사숙해 금강산과 강릉 일대의 진경을 그린 것이 다수 있다.
그런데 진경산수화를 통해 겸재를 사숙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와 왕수인을 맺어주는 연결고리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겸재는 당시 활동하던 서화가들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양명학 학자와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양명학은 조선의 주자성리학 입장에서는 이단시됐다. 이는 다분히 퇴계 선생이 양명학에 불교적 색채가 심하다고 지적한 데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송시열 직계라고 할 수 있는 안동 김문의 김창업, 김창흡 형제 등 노론 본류에 가까웠던 겸재는 당시 유명한 양명학도였던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호는 원교(圓嶠 또는 員嶠), 1705-1777)와도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교는 소론 명문집안 출신이다. 그러나 영조 때 소론 전체가 정권에서 멀어지고 또 백부가 역모 사건에 연루되면서 그는 출세 길이 막혀버렸다. 이후 그는 평생 재야 학인으로 살면서 후학을 지도하고 서화를 즐기면서 살았다.
원교는 겸재보다 29살 연하이다. 이 둘이 어떤 연유로 만나 교류를 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이를 말해주는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원교가 글씨를 잘 쓰고 또 독학으로 익힌 그림도 솜씨가 뛰어나 당시 수장가인 김광수(金光遂 호는 상고당(尙古堂), 1696-?)와 매우 가까웠다고 했다. 아마도 이런 조건이 당시의 대화가 겸재에 다갈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들어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 겸재 그림에는 원교가 글을 쓴 것이 여러 점 전한다.
겸재는 74살 되던 해, 즉 1749년에 중국 시학의 정수라고 일컬어지는 사공도의 시품을 그림으로 그리는 대작업을 수행했다. 사공도(司空圖, 837-908))는 당나라 말기를 대표한 시인이며 시의 대이론가였다. 그는 한시에 담긴 미학적 내용을 24가지(24품)으로 나누고 4자 12행 즉 48자로 된 시를 지어 이 내용을 다시 시로 표현했다. 그것이 『이십사시품』이다.
겸재의 《사공표성 이십사시품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시 이론의 시로 적은 것을 다시 그림으로 그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이미지화한 것이다. 문학에 대한 기본적 조예가 없다면 불가능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겸재가 이를 그렸지만 화첩 속에 보이는 시의 원문, 즉 원교가 쓴 글을 제작 당시의 것은 아니다. 그림은 1749년에 그려졌으나 맞은 편에 표구돼 있는 원교 글 사공도 시는 그림이 그려진 2년 뒤인 1951년에 쓴 것이다.
겸재 그림은 한시 미학의 정수를 시로 읊어 놓은 것을 그림으로 다시 소화해 냈기 때문에 시의도로 보자면 최고 수준의 시의도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예를 들어 이 화첩속의 그림 하나를 소개해보자. 사공도는 24품 가운데 19번째로 한시의 미학으로 ‘비개(悲慨)’를 꼽았다. 시는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의 비통함도 표현 가능한데 그것이 바로 ‘비개’라는 것이다. 사공도는 이 비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시로 이렇게 읊었다.
장사는 장검을 어루만지고
목 놓아 노래 불러 슬픔만 가득 차네
우수수 나뭇잎은 떨어지는데
푸른 이끼 위로 비는 주룩주룩 내린다
(壯士拂劍 浩歌彌哀 蕭蕭落葉 滿雨蒼苔, 안대회 『궁극의 시학』인용)
이 내용은 중국 고사를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진시황을 죽이러 떠나는 자객 형가(荊軻)을 읊은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형가는 죽고 사는 것을 기약할 수 없는 임무를 띠고 역수(易水)를 떠나가면서 시를 한 수 읊었는데 이를 듣는 사람치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지은 시가 바로 ‘바람은 우수수 불고 역수는 찬데/ 장사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네(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고 하는 「역수가(易水歌)」이다.
정선 <비개> (《사공표성 이십사시품도첩》중 19) 견본담채 27.8x25.2cm 국립중앙박물관
이렇게 설명된 비개를 대상으로 겸재는 솔잎마저 바람에 마구 헝클어진 소나무 숲가에서 커다란 장검을 집고 먼 하늘을 바라보는 한 인물을 그렸다. 붉은 띠로 조여 맨 청색 장삼은 바람에 한 없이 흩날리고 얼굴에 가득한 수염에도 강한 바람이 부딪치고 있다. 강한 바람과 흩날리는 나뭇가지 먼데를 바라보는 시선은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 옆에는 비개의 원시 내용이 원교 글씨로 적혀있다.
이처럼 겸재가 그림을 그리고 원교가 시를 써서 결과적으로 이 화첩은 겸재와 원교의 합작이 됐지만 그 관계가 어떻게 맺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기록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겸재 그림에 원교가 글이나 시구를 적은 그림은 여럿 전한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전시에 소개된 겸재의 <설경>에도 원교가 배관기를 쓴 것이 전한다.
정선 <설경> 지본담채 24.5x30cm 개인
이런 관계를 전제로 한다면 색다르게 보일 그림이 겸재 그림 속에 하나 있다. 겸재의 시의도 치고는 매우 큰 그림으로 길이가 124cm이나 되는 <선객도해도(仙客渡海圖)>이다. 둥근 달이 휘영청 떠있는 너른 바다를 배경으로 노인 한 사람이 지팡이 쥐고 바다 위를 떠가는 모습이 노련한 필치로 그려져있다.
머리에 작은 화양건(華陽巾)을 쓰고 옷깃이 검은 학창의(鶴氅衣) 차림의 선인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며 물위를 떠가는데 발밑을 받치고 있는 파도만이 고요한 물결 사이로 일렁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늘에는 달무리를 안은 둥근 달이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에 아랫부분이 살짝 가리고 있다.
겸재의 물결 표현은 붓 두세 자루를 한꺼번에 붙잡고 그으며 평행한 선을 반복해 보이는 게 특기인데 여기서도 여실하다. 젊은 연구자 김취정씨는 겸재가 그린 물 표현만 가지고 흥미로운 논문을 한 편을 쓴 적이 있다. 거기를 보면 일렁이는 파도는 파도 문양 위쪽에 옅은 채색을 가하되 명도 차이를 주어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어째든 이런 기법이 동원돼 이 그림에서는 망망한 대해에 거친 파도가 일고 있는 분위기를 한결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정선 <선객도해도> 1755년경 지본수묵 123.9x67.5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에는 시구와 함께 ‘원백’라고 새긴 인장이 찍혀있다. 최완수 선생에 따르면 이 인장은 겸재가 1755년 즉 그가 80살에 그린 작품에도 찍혀 있는 도장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림에 보이는 노성한 필치 또한 그가 80살 무렵에 그린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했다.
이 도장 옆에는‘야정해도삼만리 월명비석천하풍(夜靜海濤三萬里 月明飛錫天下風)’이라고 적혀있다. 이 시구는 왕수인의 시 가운데에서도 특히 널리 알려진「범해(泛海)」의 한 구절이다. 전체 내용은 이렇다.
險夷原不滯胸中 험이원부체흉중
何異浮雲過太空 하이부운과태공
夜靜海濤三萬里 야정해도삼만리
月明飛錫下天風 월명비석하천풍
험한 들 평탄한 들 원래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뜬 구름이 허공을 지나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깊은 밤 조용한 파도 삼만리에 걸쳐 있으니
달빛 아래 지팡이 휘두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분이어라
왕수인은 부친에 이어 과거에 합격해 순탄한 중앙관직의 신진 관료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35살 때 전기가 찾아왔다. 당시 명나라 황제 정덕제는 욕심이 많고 음탕했다. 그런 그를 부추킨 것은 팔호(八虎)라고 불리운 측근의 환관들이었다. 그 중 가장 악질적인 자가 유근이었다. 왕수인은 유근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꾸로 투옥되면서 곤장 40대를 맞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난 뒤에는 베트남 근처의 용장(龍場)이란 곳에 역참 정도의 관직으로 좌천되어 갔다. 그런데 거친 환경에 풍토병이 심한 용장의 생활에서도 굴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마침내 지행합일이라는 양명학의 기초를 쌓아올린 것으로 돼 있다. 이 시는 옥에 갇히기 전에 유근이 보낸 자객을 피해 주산군도(舟山群島) 근처로 달아나며 쓴 것으로 전한다.
그래서 해로가 험하든 평탄하든 이미 자신의 마음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배는 조용한 밤바다에 조용히 파도가 치는 가운데 석장이 날아가는 듯한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을 읊은 것이다. 석장을 날린다는 것은 당나라 때 은봉(隱峰)이란 스님이 석장을 날려 오대산에 올랐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후로는 변해서 수도(修道) 여행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그런데 겸재가 왕수인의 유명한 이 시를 소재로 바다 위를 떠가는 선인을 그린 해에 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와 교류하던 이광사가 영조를 비방하는 나주괘서 사건에 연루되면서 옥에 갇혀 3월 왕의 친국을 받았고 이어 5월에는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당했다. 원교는 이 유배에서 시작돼 이후 8년 뒤에는 남쪽 끝 진도로 보내졌고 그 후 다시 바다 건너 신지도로 유배지가 바뀌면서 결국은 23년 동안 두 번 다시 서울 땅을 밟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겸재가 왕수인의 시 「범해」를 소재로 <선객도해도>를 그림을 그릴 때 왕수인 학설을 받들던 이광사는 이와 같은 험난한 운명의 전주곡이 막 시작되는 순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겸재가 그의 앞날을 점쳤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한때 교류하던 몰락 소론 출신의 양명학 준재의 앞날에 험난한 길이 놓여있을 것이라는 것만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림 속 시구는 ‘야정해도삼만리 월명비석하천풍(夜靜海濤三萬里 月明飛錫下天風)’이라고 했으나 그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둥근 달 아래 커다랗게 위치를 차지한 흰 구름이 그려져 있는 것처럼 그의 마음속에는 원교를 향해 ‘앞길이 험하고 평탄한 게 무슨 대수겠소, 그대 마음은 이미 허공을 지나는 뜬 구름같이 흔들리지 않을 것을’하고 그를 위로하고 있다고도 여길만한 그림이다. 시로 인하면 뜻하지 않게 그림 해석의 폭이 이렇게 넓어질 수도 있다.(y)
첫댓글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