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설교(23)
-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에 대한 가르침(2) : 기도(1) -
마태복음 6장 5-6절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에 대한 가르침으로 앞서의 ‘구제’에 이어서 본문에서는 ‘기도’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러한 행위는 외식하는 자 - 위선자 - 에게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외식하는 자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한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 의’를 삼고 그 의로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자기 의’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에게서 보게 되는 이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 - 기도 - 를 행하는 것은 저들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기도’란 단어는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는 간구, 감사, 찬양, 그리고 찬미가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간구의 개념에서의 ‘기도’란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기도에 대하여 언급하고 계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기도하는 것에서도 그들의 특징적인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동인구가 많은 교통의 주요 교차로인 길모퉁인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이곳에서 기도를 행하는 것은 가능하면 이곳을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를 나타내는 것을 통하여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들으려고 하는, 그래서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고자 하는 과시욕에 의해서입니다.
여기서 매우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광경이 눈에 띕니다. 그것은 회당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서인지요. 여기서 말하는 외식하는 자들이 기도하기를 좋아한 것은 항상 기도하는, 그러니까 삶에서 기도의 경건에 있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루 중 특정한 시간에 기도하여야 했습니다(행 3:1). 이때 가장 좋은 기도 장소는 성전 이었으며(눅 18:10; 행 3:1), 또한 예루살렘 외곽과 그리고 회당이었습니다. 그러니 정해진 기도 시간에 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여들어 기도하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특정한 장소인 회당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제로 든 것은 정해진 기도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회당에서 기도함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사람들에게서 기도에 빠지지 않고 열심을 갖는다고 하는 인정을 받는 것에 힘쓸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여들 정해진 기도 시간 외에는, 그래서 사람이 없는 때에서는 이들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은밀한 중에 구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의 기도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기도는 종교적 행위로 갖는 기도 외에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자기 과시로 갖는 것입니다.
이것의 보다 사실적인 것은 그들이 회당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큰 거리 어귀에서도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정해진 기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이나 그 외곽, 그리고 회당으로 모여드는데, 마침 그 기도 시간에 다른 장소에 있었다면 그는 그곳에서 기도해도 무방했습니다. 성전과 그 외곽과 회당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서 기도를 쉬어서는 안 된다고 기도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쉴 수가 없는 그들은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라도 기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있는 장소가 그곳이 어디이든지 간에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정해진 기도 시간에 성전이나 기도할만한 장소에 있지 못하면 그들은 다른 장소에서도 기도해도 무방하다는 점을 십분 이용하여서 그가 기도할 때에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가능한 한에는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도록 하고자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도시의 넓은 길인 사거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회당에서든 큰 길거리 어귀에서든 외식하는 자들은 기도를 사람들에게 보여 자신이 경건하다고 하는 종교적 행위를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에 있은 기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신을 보이기 위한 기도를 행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위선자’들은 앞서 ‘구제’에서 말씀하셨듯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을 상이 없다 -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듣는 것에서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의식해서 기도하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들으며 존귀히 여김을 받았으니 사람들로부터 받을 상을 다 받았습니다. 그런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고서 기도한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상 - 천국에 들어감 - 을 결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들으며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을 이 땅에서 얻고 또한 없어질 영광에 두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자신이 입은 영광에 두고자 하십니다. 즉, 자신 안에 두고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예수께서 그들의 주로 오시기 이전에 행해온 자기 의를 과시하는 기도에 있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이전에 행해온 자기 의를 과시하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도에 있게 하실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는 기도란 골방에서 해야 한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을 사람들이 볼 수 없게 아예 문을 닫고 기도하라는 것에서입니다(참조. 왕하 4:33; 사 26:20). ‘골방’은 원래의 의미가 물건을 저장해 두는 광을 뜻합니다. 그러니 물건을 꺼내기 위해서 그 집의 주인이나 사람이 찾지 않는 한에는 아무도 없는 은밀한 곳입니다. 그러니 집에서 가장 방해를 받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한 골방에 들어가 그것도 문을 닫고 기도하면 그 누구도 기도하는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자는 그 누구도 의식(意識)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사람에게 자기를 과시할 마음을 가질 까닭이 없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만을 의식할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기도하는 그를 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듯이 또한 하나님께 보이려고 기도를 행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 의를 과시하려고 하는 것에서 기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지신 생각 - 주께 있는 하나님의 뜻 - 을 좇아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구하는 것에 그들의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봄에 있는 것에서 기도에 있습니다. 이것을 잘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는 명백히 ‘자기 의’를 구하는 외식하는 자들이 갖는 기도와는 대조가 됩니다. 전혀 다른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 행위에 있는 자기 의를 인정받고 칭찬을 들으며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것에 반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함에 있으면서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을 구하는 기도에 있는 것에서 그는 그가 은밀하게 드린 그 기도를 아버지께서 온전히 이루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죄 용서하심을 받아 주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에서 말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그런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우리가 있어야 할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 것은 ‘우리가 하는 기도는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에 있는 것은 자신이 기도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들으며 존경을 받고자 해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즉, 기도의 목적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며, 기도의 대상은 이 땅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에 있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하실 뜻(일)을 알고 온전한 순종에 자신을 두는 것에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자신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으로서 자신을 온전한 순종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는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함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생각하는 것에 있는 것에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는 단지 그분의 존재만 의식하고 있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를 의식하는 것에서 입니다. 8절 하반 절은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심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며,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십니다. 그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임할 죄로 인한 ‘저주’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의로 우리의 ‘복’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죄 사함이 되시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케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이를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판으로 하고 있는 온 땅에 거하십니다. 그러니 아무도 없는 은밀한 곳인 골방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사람이 정한 특별한 기도 시간에서만 만나고 기도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고 생각하는 모든 시간에서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가 구할 기도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심으로 언제든지 항상 구할 기도에 있게 하시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많은 시간을 갖고 말을 많이 해서 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을 많이 하여 간청해야만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7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의 뜻을 우리에게 구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알게 하시며 그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의뢰에 있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알게 해주시며 그 믿음에 있게 해 주시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 있는 대로 그는 보게 될 것입니다. 그가 믿음에 있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에 그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기도의 갚으심이 되는 ‘복 있는 자’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