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근대사의 흐름을 바꾼 백영훈의 기도4
〈‘미래가 있다고 믿는 자에게만 미래가 있다’〉
한국산업개발연구원(KID) 백영훈 원장은 한국산업기술대 최고경영자과정 특강을 통해
우리민족이 잃어버린 1000년 역사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역사에 중심에 서야하고,
기업인이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인류미래를 창조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미래가 있다고 믿는 자에게만 미래가 있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미래에 대한 비전과 확신을 가져야만 새로운 1000년 역사의 중심에 우리민족이
설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영훈 박사는 한독경제협력 40주년을 맞은 지난 2002년 3월 5일 독일 대통령이
수여하는 독일 연방공화국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휴버트 모어 독일대사는 당시 축사를 통해, “저명한 인물은 번지르르한 말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능력과 업적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지난 40년간 간호사 및 광산근로자 독일파견, 고속도로건설을 위한
경협차관, 국가 경제발전 계획입안 등 한·독 경제발전을 위해 애써 온 백영훈 박사의
탁월한 업적과 기여한 공로에 대해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독일 대십자 훈장’
서훈식을 거행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었다.
백 원장은 이날 특강을 통해 1000년 동안 흩어졌던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와 향후
우리가 전개해야할 1000년 역사를 어떻게 펼쳐가야 할지에 대한 하나의 테제를
우리에게 제시했다.
▣ 독일과의 첫 번째 인연
백영훈은 1932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해, 고려대 상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54년 우리나라 첫 국비유학생으로 독일(당시 서독)땅을 밟았다.
서독 퀠른 대학과 뉴렌베르크 대학에서 경제학을 수학하고, 58년 당시 28세의 약관
나이에 서독 에르랑겐 대학원에서 한국 최초의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귀국해
중앙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는 4년동안의 독일 유학시절 학문뿐만 아니라 서독이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경제대국으로 일어서는 생생한 현장을 경험하였고, 그들의 성실함과 부지런함,
굽힐 줄 모르는 용기와 책임감, 나 혼자가 아닌 우리로 이어지는 강한 공동체
및 연대의식이 한데 엮어져 복지사회로 비약할 수 있는 사회의 안정과 성장된
국민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고 배웠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의 형편을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는 반만년을 지탱해온
끈기와 저력의 역사 그리고 교육받은 지적자원 외에는 자연자원이 거의 없는
좁은 국토, 밀도 높은 인구, 청산되지 않은 구시대 잔재,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
GNP 80달러의 세계 120개 국가 중119위의 빈곤국가로서 주변국가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 5.16 군사혁명 정부와의 인연
백영훈 박사가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5·16 군사혁명 정권은
국가 경제개발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경제재건을 위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하여
미국· 일본 등에 경제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혁명정부에 대한 미국의 외면과
정상화되지 못했던 일본과의 관계로 경제원조는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때 5·16 군사혁명정부는 우리와 똑같이 2차 대전으로 분단된 서독정부로부터
경제 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독일을 잘 이해하고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전문가로
중앙대학교 교수 백영훈 박사를 지목한 혁명 정권은, 백 박사가 병역미필자로
논산훈련소에 훈련병으로 소집되어 있음을 알고 국방부수속을 밟은 뒤
상공부장관 특별보좌관으로 발탁하여 서독경제 협력단을 구성하고
차관교섭을 위해 서독에 파견하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번째로 독일과의 인연을 갖게 된다.
▣ 한독 경제협력 40주년
백영훈 박사는 정태혁 상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서독경제협력단의 일원으로
구성됐고, 상공부 장관 특별보좌관으로 차관협상을 위해 독일을 드나들며 1억5천만
마르크의 상업차관을 들여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우리정부는 1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사업을 착수할 수 있게 된다.
서독정부로부터 상업차관이 결정되자 서독기업인들이 자기 제품 수출과 한국시장
진출을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합작사업의 기업파트너를 찾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독 경제협력의 발판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경제원조까지도 중단했던 미국은..
서독과의 경제협력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미국 기업인들은 한국시장 진출을
서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서독, 미국에서 온 세계적 기업들과의
협력과 상담을 통해서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는 역사적 계기를 맞게 된다.
백 박사는 1964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빈자격으로 서독을 방문할 때,
통역관으로 대통령을 수행하여 독일을 방문해 루프게 독일 대통령과의 회담을
수행하게 된다. 당시 서독 수상이었던 에르하르트는 독일경제부흥의 기간사업들을
소개하면서 한국이 고속도로 건설과 자동차산업, 정유공장, 제철사업을 해보라고
적극 권유했다. 이게 인연이 되어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울산 공업단지를 위시해
구미·창원 등 대단위 공업단지를 건설하는데 대통령 자문역으로 참여하게 된다.
백 박사는, 그 후에도 정부를 대표하여 여러 번 독일에 파견되었고 광부와 간호사들의
서독취업을 비롯한 여러 문제들을 현지외교관·교민들과 협의하여 처리하는 등 독일과의
경제·민간교류에 평생을 바쳐오고 있다. 외환위기 때는 독일 상공회의소를 찾아가 한국
투자를 호소하여, 독일기업들이 15억 달러를 한국에 투자하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