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전북 남원시 어현동 37-158
063-620-6792
www.nwmuseum.or.kr
역사문화와 전통의 고장, 남원향토박물관 [전북/남원]
남원 지역에 산재해 있는 유형·무형의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보존·전시·연구하기 위하여
설립한 박물관으로, 2004년 5월 1일 개관하였다.
부지면적 8,169㎡, 건축 총면적 1,382㎡의 지하 1층·지상 1층 건물이다.
민속·문화·역사마당으로 구성된 전시실과 기획전시실·영상실·연구실·
수장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토기·자기·고서적·고문서·민속유물 등
약 2,500점의 유물과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남원시 어현동 남원관광단지 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용시간은 09:00~18:00 (휴관일 월요일)이다.
남원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남원과 가까운 곡성군 입면의 제월리 ·송전리와 옥과면 주산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남원지역에서도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 인다. 또한 남원시 왕정동 만복사지
린산 자락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간석기들이 발견된 사례가 있어
그 가능성은 더욱 높다. 특히 만복사지 앞에는 비옥한 넓은 들이 있어
이들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축천(丑川)이, 남쪽에는 요천(寥川)이 있어
아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했던 여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남원 지역에 구석 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없다하더라도
신석기 시대 후반에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청동기 시대에는
집 단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남원지역에서 발견되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고죽동에서 발굴된 집터와 고인돌(支石墓)이 있다.
집터는 고죽동(高竹洞)에서 3기가 발굴되었는데
남원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청동기 시대 유적이다.
또한 송동면세전리 낡은터는 초기 철기시대 집터로
약 30여기가 확인되었는데 약30㎡(10평) 규모다.
이 집터는 백제초기의 남원인 고룡군 (古龍郡)의
소재지를 비롯해 한 일간의 문화교류를
밝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원에서 건너간 일본 최고의 도자기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의 끝 무렵인 정유재란(1597)당시
사쓰마(사摩)의 번주(藩主) 시마즈 요시 히로(島솔義弘)는 남원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당시 남원은 전라도의 문화 중심지이자 조선 도자기의 생산지로서 이 름난 고장이었다.
따라서 이곳 전투에 참가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주위의 도자기를 눈여겨보았다.
그 무렵 일본에 서는 차도(茶道)가 유행하여, 조선에서는 일상 생활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릇들이 일본에서는 귀중한 보물로 여겨졌 다. 이런까닭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돌아가면서 남원 출신의 박평의(朴平意)등 남녀도공(陶工)을 강제로 끌고 갔다.
이들은 처음 구시키노(구木野)에 살다가 다시 가고시마(역야島) 인긴의
나와시로 가와(고代川)로 옮겼다 그리고 고 국에서 익힌 도예 기술을 더욱 갈고 닦아
민족의 빛갈이 살아 있는 백자(白磁)를 재현하려 노력한다.
그 결과 "사쓰 마 도자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남원은 세계적 무형유산인 판소리의 고장이며
『춘향전』, 『흥부전』등 고전 문학의 산실이자 주요 배경지였다.
개인은 가족, 친족, 촌락의 구성원으로서 그 개인의 사건은 사회집단 전체의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한 사회집단 의 성원은 그 사회가 규정한 일정한 시기에
모두 동일한 형태의 의례를 치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통과의례는 모든 사회에 존재하지만 사회구조나 문화의 차에 따라 강조하는
의례가 다르고 절차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우리사회도 역사에따라 각기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규범과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현재까지 우리 생활에 반영되어 있는 통과의례는 조선시대의 잔영이 많다.
이처럼 남원은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그 사이의 비옥한 평야 등 천혜의 자연
환경을 바탕으로 멋과 여유를 누리는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그리고 이 멋과 여유는 삶 속에서 문학이나 음악 같은 예술로 분출되었다.
돌
아기가 태어난 지 만 1년이 되는 생일에 행하는 의례이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옛날에는 아기들의 사망률도 높았으므로 1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성장하여 첫돌을 맞는 일은
특별히 중요하여 잔치를 크게 베풀었는데 지금까지 도 이어지는 풍습이다.
돌에는 백설기와 수수 경단, 송편과 국수 그리고 대추와 각양각색의
과일로 돌상을 차려주는 데 의미가 담긴 상차림이다.
관례
관례는 남자 어린이가 15세~20세가 되면 상투를 틀고 어른의 평상복을 입히고
갓(관(冠)을 씌우고 술 마시는 예법을 가르치며 별호를 지어주는 의식으로
성인이 되었음으로 사회 일원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부과하는 의례다.
전통 사회에 있어 그 절차를 보면, 혼례 날짜 20일전이나 한달전에
일가의 어른들을 모시고 관례를 한다. 먼저 날을 잡으면 사당에다
고하는 절을 올리고 가까운 집안 어른들 가운데 유덕하고 예법을 잘 아는
어른을 빈객(賓客)으로 모셔 다가 관례를 주관하도록 한다.
혼례
혼례는 남자와 여자가 혼인(婚姻)을 하여 부부가 되는 의식절차를 정한 것이다.
혼인의 의식절차를 정한 예절이라 면 '혼례(婚禮)'라고 해야 할 텐데
'혼(昏)'자를 써서 '혼례(昏禮)'라고 하는 까닭은 혼인예식은 해가
저무는 시간에 올리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혼인예식을 해가 저무는 시간에 올리는 이유는
혼인이란 음(陰)과 양(陽)의 만남 이므로 그 시간도 양인
낮과 음인 밤이 교차하는 시간인 해가 저무는 때가 합당하기 때문에 혼인
예식 이 끝나면 곧 바로 첫날밤을 차리는 합궁례(合宮禮)를 치뤄야 했기 때문이다.
회갑연
혼례를 치르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살아가다가 나이 61세에 이르게 되면
이를 회갑(回甲)이라 한다. 회갑은 자기가 태어난 해로 돌아
왔다는 뜻으로 환갑(還甲)이라고도 하고 '화(華)'자를 풀어서 보면 61이 된다고 하여
화갑(華甲)이 라고도 하며 이러한 의례(儀禮)를 수연례(壽宴禮)라 한다.
회혼례는 수연은 아니나 역시 나이가 많이 들어야 맞는 경사이다.
혼례를 올리고 만 60년을 해로한 해를 회혼이라 한다.
결혼 60주년을 맞은 부부가 자손들 앞에서 혼례복을 입고 60년 전과 같은 혼례식을
올리면서 '해로 60년'을 기념하는 의례이다. 친척 친지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부모의 회혼(回婚)을 축하한다.
상례
상례는 사람이 숨을 거둔 후 장사를 지낼 때 수반되는 모든 의례로
사람이 운명(殞命)하여 땅에 묻힌 다음, 대상(大 祥)을
지내고 담제, 길제(吉祭)를 지내는 것으로서
탈상(脫喪)하기까지의 3년 동안의 모든 의식을 말한다.
효(孝)를 예(禮)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의 유교적 관념에서는
부모의 상을 당한 것을 큰 불효의 하나로 여겨 장례를 잘 지내려
하였다. 그러기에 우리 관습에 관혼상제의 의례 중에서 가장 엄숙하고 정중하여
그 절차가 까다 롭고 그 이론이 구구한 것이 바로 상례이다.
세시풍속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되풀이하는 주기전승의 의례적인 풍속으로
세시(歲時), 세사(歲事), 월령(月令), 시령(時令) 이라고도 불렀다.
전통시대는 주로 농경에 의존했기에 농경과 관련된 풍속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로 오면서 산업화의 영향, 교육의 보급등으로 인해
과거의 전통적 세시풍속들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이다.
남원의 특산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조선 시대부터
이름난 남원의 토산품으로 벌꿀, 송이버섯, 한지를 꼽고 있으며,
한약재료인 복령, 지황도 유명하다고 하였다.
특히 지리산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임산자원과 다양한 야생화에서 채취하는
토종꿀, 봄과 가을에 채취하여 일 본으로 수출하는 송이, 복령· 도라지· 당귀·지초 등
전국 제일의 한약재, 일본·미국·홍콩 등으로 수출하는 한지 등은 오늘날까지도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전국 제일의 목기와 다과상 · 밥상 · 교자상, 태극선과 방구부채,식칼등은 옛전통 그대로 만드는
남원의 특산품이다. 여기에 무공해의 각종 질그릇과 금지면·송동면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새벽딸기, 캐나다 등으로 수출되는 황금배, 송동면 일대에서 재배되는 복숭아와 향이 뛰어나고
숙취가 없는 전통주 및 지리산의 정기를 받은 천연 고로쇠 약수 등도 일미(一味)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