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오 7,1-5)
For as you judge, so will you be judged, and the measure with which you measure will be measured out to you.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앞으로 보여 줄 미지의 땅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아브람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길을 떠남으로써 신앙의 역사가 시작된다. 주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이 될 것을 약속하시며 복을 내리시고 모든 이의 축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잘 보지만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교만에서 나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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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가 살아가면서 평생 동안 직접 보지 못하는 얼굴이 있습니다. 늘 함께 있지만 오로지 거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얼굴입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은 직접 이리저리 살펴볼 수 있지만 자신의 얼굴은 반사경에 비추어 보아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사람들이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잘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논어』에 우리가 잘 아는 ‘일일 삼성’(一日三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모르고 삽니다. 남의 마음이나 행동은 무엇이 옳은지 평가를 잘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은 주관적 편견에 빠져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객관화하여 하루에 적어도 세 번은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얼굴은 얼마나 자주 살펴보고 있는지요?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을 잘도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행동과 태도는 얼마나 자주 올바르게 식별하고 반성하는지요? 우리가 하루에 거울을 들여다보는 횟수만큼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도 우리의 내면은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만큼만 자신을 되돌아보고 올바르게 행동하여도 우리는 누구보다도 성숙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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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을 지을 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바닥이나 천장에 대는 지지대를 ‘들보’라고 합니다. 금방 눈에 뜨입니다. 하지만 티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남의 눈의 티끌’은 쉽게 찾아냅니다. 그러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눈 속에 들보’가 있는 사람인지요?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타인을 심판하기는 쉽습니다. 본인이 없는 곳에서 허물을 말하기는 정말 쉬운 일입니다. 순간적으로 방심하면 누구나 빠지는 실수입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자신의 눈에 들보를 채우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할까?’ ‘어찌하여 저런 식으로 행동할까?’ 무의식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도 모르게 ‘비판의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꾸려면 ‘긍정의 시각’을 훈련해야 합니다. ‘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을 갖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만나는 이들에게 ‘당신의 힘’을 주셨습니다. 병자들은 병이 나았고, 악한 기운에 붙잡힌 이들은 자유를 선물받았습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판단하는 자체가 ‘삶의 기쁨’을 감소시키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알고 싶어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지.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왕은 은수자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은수자는 왕을 보고도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왕은 그가 일을 빨리 마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거들어 줍니다. 숲 속에서 부상자가 비틀거리며 나왔습니다. 왕은 그를 돌보아 주었고, 다음날 부상자가 자신의 정적임을 알게 되자 화해합니다. 은수자와 지내면서 왕은 스스로 깨닫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그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이구나.’ 톨스토이의 예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을 탓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잘 아는 사람을 심판합니다. 서먹한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친한 사람을 몰아붙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사랑하는 이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 사랑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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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많은 정보와 자료가 필요합니다. 그것으로도 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사형수들의 대부였던 김홍섭 판사는 자신의 판결이 항상 100점이라고 할 수 없으며 70점일 때도 있고 60점일 때도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잘못된 재판을 종종 봅니다. 예수님 역시 빌라도의 오판으로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시민 법정에서 잘못된 재판으로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잘못된 판단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아무런 죄가 없는데 죄인이 된다고 합시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뜻에서 판단하지 않기를 당부하십니다. 판단은 하느님께서만 정확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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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의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등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명령대로 그는 먼 길을 떠납니다. 위험도 확률도 결과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 순종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람의 결단과 순종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브람만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순응하고 살면 누구에게나 약속의 땅은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의 땅을 자주 청하면서도 정작 주어질 순간에는 망설이고 맙니다. 아브람처럼 떠나야 합니다. 망설이지 말고 출발해야 합니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떠났습니다. 나이의 불리한 여건을 극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늦었다고, 고통이 너무 많다고,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우리는 남의 약점은 쉽게 보면서 자신의 부족함은 잘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빼내라고 하시는 들보 가운데 가장 흔한 들보는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입니다. 먼저 내 탓으로 보고 내 몫으로 돌리는 것이 자신의 앞날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길입니다.
제 동창 신부와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휴대전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지 주머니를 뒤졌지요. 제 생각대로 없었습니다. 사제관에서 가져오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제 동창신부에게 말했습니다.
“휴대전화를 가져오지 않았나봐. 나 사제관에 다녀올 테니까 천천히 먼저 가고 있어.”
바로 그 순간, 제 동창신부가 제게 말합니다.
“너 지금 손에 휴대전화가 있잖아.”
맞습니다.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 한 손으로 휴대전화를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던 지요. 머리가 나빠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복잡한 문제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휴대전화가 떠올려서 이렇게 어이없는 행동을 취했던 것입니다.
사람 중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절대로 그럴 일이 없어!’라고 자신 있게 말을 하더라도 그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한 나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부족함을 잘 아시기에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신도 부족하면서도 끊임없이 심판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심판하면 할수록 나 역시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이나 잘못이 눈에 보이면 너무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허물과 잘못은 곧 내 허물과 잘못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내 허물과 잘못을 깊숙이 숨겨두어서 아무도 못 본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또한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를지 모르지만, 어디에나 계신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이런 태도에 어이없으셔서 웃으시지 않을까요?
허물과 잘못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즉, 허물과 잘못이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끝없이 용서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장 완전하신 주님께서도 겸손한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불완전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창조과정에서 어려운 일은 시작하는 것뿐이다. 풀잎을 만더는 것은 참나무를 만드는 것만큼 어렵다(제임스 러셀 로웰).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양승국신부-
<자연스럽게>
급류가 흐르는 강을 건널 때 반드시 필요한 노력이 있습니다. 급한 마음에 바로 질러가려고 한다든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한다면 헛수고만 실컷 할 것입니다. 급류에 저항하느라 힘이란 힘은 다 빠지고 결국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시간이 걸리고 돌아가더라도 물살의 흐름을 탈 필요가 있습니다.
바람과 조류의 세기가 만만치 않은 큰 바다에서 요트를 탈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바람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번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조류의 움직임을 잘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자연의 이치를 잘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움직임, 자연의 리듬을 잘 타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은 이치가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리듬을 잘 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 공동체 구성원들과 사사건건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원인분석을 해나가면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과오로 인해 내게 다가온 상처, 대화부족과 상호이해 부족으로 인한 고통, 최근 내 불편한 심기로 인한 부딪힘, 난데 없이 다가온 십자가...
그럴 때 마다 생각하셔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웃들과의 의견충돌이나 마찰, 그로 인한 상처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발버둥치다보면 결국 남는 것은 또 다른 상처요 또 다른 고통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지고,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열일 제쳐놓고 이제 하느님께로, 영적생활로 돌아가라는 표시로 보는 것입니다. 판단이나 단죄, 그로 인한 영적 고통의 길을 그만 접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라는 표지로 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서고 나서 계속되어야 할 영적 작업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보다는 침묵, 판단보다는 묵상, 단죄보다는 용서의 길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려운 작업이 남아 있습니다.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영적으로 재무장한 다음, 내적 평화를 되찾은 다음, 다시 한 번 이웃들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공동체 생활의 리듬, 사이클을 요약해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들과의 관계 안에서 입은 상처와 고통☞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표시로 인식☞침묵가운데 영적 생활☞내적평화의 획득☞다시 그 형제들에게로 돌아감.
이웃들과 내가 만나는 장소는 참으로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주님을 알아보는 장소입니다.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장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장소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이웃들의 요구와 상황에 무관심하고 공동체에 대한 내 사랑이 결핍되고 있다면 결코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행복 처방전
- 정명숙 수녀-
내 마음속 숨어 있는 병들을 바라보며 이름을 붙여봅니다. 판단의 병, 비방의 병, 불신의 병, 질투의 병, 시기의 병, 거짓의 병 …. 수많은 이 병들의 증상은 부정적인 시선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게 하면서 자신의 삶을 기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 병들을 위해 처방전을 내어놓으십니다. 바로 자유와 행복에 이르는 처방전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이 처방전을 받아들여 실천하기만 하면 나을 수 있는 병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삶의 지침 중 하나가 생각납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마라. 그대가 우주 안에 날려보내는 부정적인 생각은 몇 배가 되어 그대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왜곡된 판단과 심판은 내 안에 분열을 가져옵니다. 이 내적인 분열의 씨는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어 내 주변을 넘어 세상 곳곳으로 확장되어갑니다. 반대로 하나의 긍정적인 생각 역시 생명의 에너지가 되어 온 우주만물에 확산되어갑니다. 판단은 어떤 행위 이전에 우리의 ‘바라봄’에서 시작됩니다. 곧, 사랑의 행위보다 앞서서 나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과 선을‘바라보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이 행복 처방전은 내 안에서 그리고 세상 사는 이야기들에서 넘쳐나는 부정적인 생각과 시각과 판단에 지쳐 있는 우리를 다시 한 번 새로운 기쁨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별을 앞두고
- 김현정-
가족과 동료,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에서 매 순간 잊지 말자고 항상 다짐하고 되새기는 말씀이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영어전담 교사를 맡고 있어 원어민 교사와 종일 함께 지낸다. 오십 중반의 선생님과 함께하는 수업은 반 년 가까이 자리를 못 잡고 표류했다. 원어민 교사는 한국의 교육정책 비판을 시작으로 교과서가 형편없으니 아이들 실력도 형편없고 참여하려는 의욕도 전혀 없다며 투덜거린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이 선생님의 가르치는 기술이 말 그대로 형편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수업이 이루어지려면 가장 먼저 가르치는 기술인데 그는 그런 기술이 빵점이었다. 처음에는 원어민 선생님의 요구를 최대한 존중해 따랐지만, 본인이 스스로의 문제점을 모르는 상태에서 수업은 나아질 줄 몰랐고, 답답해진 나는 매번 대부분의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 대체 왜 저렇게 형편없는 교사를 보내주신 건가요?’ 하며 원망했다. 심지어 그는 ‘하느님이 자기더러 한국으로 가라고 했다. 가서 사람들을 도우라.’ 고 했다며 자기가 한국에 온 것은 하느님의 계시라고 했다. 영어를 하는 것이 신의 축복인 양 교만하게 구는 사람에게 이 나라는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국민의 소중한 세금을 낭비하는가 싶어 그 사람이 너무나 미웠다. 빨리 1년이 지나 떠나버렸으면 싶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그를 미워하는 내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를 미워하는 마음만이라도 버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내가 먼저 변하자. 그 뒤로 전보다 더욱 열심히 교재연구를 하고 업무를 미루더라도, 모든 수업의 지도안을 하루 미리 짜고 자료를 준비해 원어민 교사에게 따라줄 것을 요구했다. 수업 중에 수업 방법이 적절하지 않으면 바로 바로 지적해 수정하도록 부탁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지금은 3분의 2정도만 원어민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고 그런대로 수업에 만족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분과 재계약을 한다고 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은 내 마음을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추어 주님께 맡기고 싶다.
단죄하지 않을 수 있다면.
-김찬선신부-
고백성사 중에 가끔 듣는 죄의 고백이 판단을 한 죄입니다. 그런 죄를 고백할 때 저는 그것이 왜 문제이냐고 묻기도 합니다. 모든 판단이 다 죄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하려면 잘 판단해야 합니다. 무슨 병인지 잘 진단하지 않으면 치료는 애초부터 글렀지요. 따라서 정확한 판단은 치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이런 면에서 판단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지 말아야 할 판단이란 잘못된 판단이고 잘못된 판단이란 그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판단한 것이 아니고 편견, 미움, 좁은 안목 등 부정적인 자기 내적 이유에 의해 부정확하게 판단을 하는 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판단 중의 대표적인 것이 단죄입니다. 누구의 행위를 죄로 판단을 하고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을 죄인, 그것도 죽을 죄인으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단죄를 하는 사람 100%가 자신도 죄인들입니다. 죄인이긴 죄인이로되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죄인들입니다. 간음한 죄녀를 단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던 사람들에게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죄 없는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죄 없는 사람이 없으며, 자기 안에 죄가 있기에 그 죄의 눈으로 다른 이의 죄를 보고 자기 죄를 뉘우치고 용서하지 못하기에 다른 이의 죄를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모르는 아이는 남을 단죄하지 않지요. 아니, 아예 남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를 않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전삼용신부-
어느 날 나귀가 등에 짐을 잔뜩 지고 가다가 그만 개울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귀는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개울을 건너던 개구리가 허우적거리는 나귀를 보며 소리쳤습니다.
“아, 시끄러워, 이 바보 같은 녀석아, 개울에 빠졌다고 왜 그리 호들갑이야. 날 봐, 난 너보다 힘도 없고 몸집도 엄청 작지만 그래도 헤엄쳐서 잘 건너잖아. 그렇게 소리 지를 시간에 헤엄을 치려고 노력을 해 봐.”
사람은 대부분 이 개구리처럼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 다 못해도 내가 하나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그 판단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강냉이 장수 아저씨가 공짜로 강냉이를 나누어준다고 했을 때 빈손으로 나갔습니다. 그 아저씨를 그렇게 자비롭다고 판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내 자신이 자비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기준으로 그 아저씨가 내 손 가득히 강냉이를 주어도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밥그릇부터 시작하여 큰 대야까지 가지고 나왔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 아저씨는 각자 가져나온 그릇에다 강냉이를 하나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저는 겨우 손바닥에 조금만 담아올 수 있었습니다. 각자 그 아저씨를 평가한 대로 되돌려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하시며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심판하는 잣대로 하느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내가 남을 거짓말쟁이라고 심판했다면 하느님 앞에서 정말 완전히 거짓이 없는 한 나도 거짓말쟁이라고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나의 심판 기준으로 나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완전하게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 하느님도 나를 용서 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판단 잣대를 내가 버려서 하느님께서 나를 어떤 잣대로 심판해야 할지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잣대로 하느님만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 잣대로 심판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판단은 나에게 그대로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 오하이오주의 큰 농장에 한 초라한 소년이 찾아와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주인은 일손이 모자랄 때라 소년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3년 뒤 이 ‘머슴’이 자기 딸과 사귀는 것을 알고 내 쫓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뒤 주인은 낡은 창고를 수리하다 그 소년의 짐을 발견하고 내용물을 살피던 중 소년의 이름이 제임스 A 가필드라는 것과 현직 20대 미합중국 대통령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농장 주인은 대통령 사위를 맞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도 단점이 아주 많습니다. 노아도 술주정꾼이었고 모세는 말더듬이에 용기 없는 사람이었고 삼손은 호색가였으며, 다윗은 호색가에 살인자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호색가에 우상 숭배자였으며 우리의 첫 교황님인 베드로는 하루에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사람이고 바오로도 교회의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 역사의 큰 획을 그으신 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대한 인물로 세우셨는데 우리가 어찌 그들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자는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강도의 이야기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란 이름은 ‘늘리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앗티카라는 지방에 살면서 자기 영지를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 쇠 침대 위에 누이고 결박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몸을 잡아 늘여 침대 길이에 맞추고, 반대로 길이가 침대보다 길면 긴만큼 잘라버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이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 그가 여행자들에게 했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라는 말은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융통성이 없다는 뜻의 관용구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 안에 그런 침대가 있다면 빨리 버립시다. 언젠가 그 침대 위에 내가 누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조: 한태환, 예화포커스)
“형제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심판하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자가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정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이기에 이웃을 심판한단 말입니까?” (야고 4,11-12)
새벽을 열며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사람이 지혜로운 이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훌륭한데 저는 왜 그렇지 못할까요?”
그러자 지혜로운 이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데리고 자기 집 앞의 뜰로 나갔습니다. 뜰에는 크고 울창한 나무와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한동안 나무만 쳐다보고 있던 지혜로운 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지요.
“이 나무들을 잘 보시오. 이 나무는 크고 저 나무는 작지요. 그러나 두 나무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큰 나무가 작은 나무더러 ‘봐라, 난 커서 훌륭해.’라든가 작은 나무가 큰 나무더러 ‘난 키가 작아서 열등감을 느껴.’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아름답습니다. 큰 나무는 구름에 가깝게 있어 좋고, 작은 나무는 땅에 가깝게 있어 좋은 거지요.”
지혜로운 이는 자신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향해 빙긋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지요.
“오직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생명들은 가치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존엄성을 갖는 것이지요. 따라서 자신에 비해 남들이 화려한 빛깔을 낸다하더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나만의 빛깔’도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총총히 빛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살아있다는 사실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는 우리들의 잘못된 마음이지요. 즉,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 외의 것은 비교의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고 판단함으로써, 때로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못된 사람으로 또 반대로 나의 이웃을 가장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한 행동 하나 하나가 바로 하느님을 판단하고 하느님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음 자체가 얼마나 큰 감사함인지를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할 필요도, 판단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잊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랑하면서 살면 그만입니다.
빠다킹신부
경솔한 판단
-박영봉 신부-
사람들의 명예를 존중하려면, 그들에게 부당한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태도와 모든 말을 삼가야 합니다. 이웃의 도덕적인 결점을, 충분한 근거도 없이, 은연중에라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경솔한 판단의 죄를 짓습니다. 타인의 결점이나 과실을, 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유 없이 알리는 사람은 비방의 죄를 짓습니다. 허위로 다른 사람들의 명예를 해치고, 그들에 대해 그릇된 판단의 계기가 되는 사람은 중상의 죄를 짓습니다. 경솔한 판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웃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가능한 대로 좋게 해석하도록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선량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웃의 주장을 비난하기보다는 그것을 선의로 이해하도록 더욱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로운 심판에 맡김으로써, 이 지상의 삶이 끝날 때 받게 될 심판을 앞당겨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현세 생활에서 영원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며, 대죄를 지은 채로는 들어갈 수 없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회개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화가 날 때면 산책을 나가십시오 ♣
-양승국신부-
고령의 노인이 의사에게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아주 건강했습니다. 의사가 노인에게 건강하게 산 비결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50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는데, 결혼 초에 아내와 이런 약속을 했지요. ‘내가 화나면 당신이 부엌으로 비켜주고, 당신이 화가 나면 내가 산책을 나가겠소.’ 라는 거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정말 산책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건강해진 거지요. 하하.”(‘부부로 산다는 것’, 이즈덤 하우스 참조)
신혼 초에 내렸던 두 분의 결정,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지만 결혼은 현실입니다. 보통 현실이 아니라 쓰디쓴 현실입니다.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스파크가 번쩍 번쩍 튀는 꿈같은 나날은 한 순간이지요. 결혼은 매일같이 ‘사랑에 밥 말아서’ 먹고 사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일 년, 이년, 삼년이 지나가면 아무리 외면하려고 기를 써도 배우자의 결함이 슬슬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그 결함은 주로 어떤 것들입니까? 돌아보면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어서 웃음이 나옵니다. 마음 크게 먹으면 참아 넘길만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한두 번 조용히 말로 이야기할 때 마음에 안 드는 버릇 좀 고쳐주면 좋을 텐데, 죽어도 협조를 안 합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속상하게 하니 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속으로 판단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한심합니다. 한 평생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답답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마다 상대방을 마음속으로 심판하고, 단죄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밖으로 나가보십시오. 근처 공원을 거니십시오. 가까운 야산을 오르십시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과 접하십시오.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보십시오. 옹졸했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단죄한 일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부분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습득해온 버릇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인내와 기도로만이 해결 가능한 것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내 판단이 100% 잘못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 단죄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어쩔 수 없는가봅니다. 우리는. 자기 코가 석자면서도 늘 상대방에 신경 엄청 씁니다. 자기 정리도 안 되는 사람이 이웃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 날카로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지 모릅니다.
상대방이란 존재를 잘 견뎌내는 것, 이웃을 잘 참아내는 것은 덕 중에서 큰 덕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한 평생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입니다.
때로 상대방도 나를 순교자적 인내로 참아가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배우자를, 가족을, 동료를, 형제를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완전함과 거룩함에로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존심 강하고 콧대 높은 우리의 스승으로 배우자, 가족, 동료, 형제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나날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우리의 생활이 아무리 부끄러워도 하느님께서는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끝없이 용서하십니다. 자비를 베푸십니다.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할 일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을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 출발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들보란 건물의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crossbeam)를 의미합니다. 꽤 무겁고 큰 나무토막을 말함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는 아브람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떠나라고 하셨다. 아브람으로서는 아직 볼 수 없지만 미래에 주어질 땅, 아브람으로서는 불명확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하시고, 복을 주시며, 나아가 아브람을 유명하게 하여 그 이름을 길이 떨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사실 하느님의 약속대로 아브람의 이름은 위대하게 되었다.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17,4-5), 예언자(20,7), 하느님의 종(시편 105,5-6), 하느님의 친구(야고 2,23)라고 불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성조요,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으로서 길이 남게 되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며 전달자가 되도록 하시어 누구든지 아브람과의 관계에 따라 하느님께 축복과 저주를 받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종 아브람에게 복을 빌면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저주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하신 것이다.
이리하여 아브람은 하느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은 곧 행동기준이었다. 그가 가나안 땅을 지나 세겜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의 후손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훗날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출애굽의 원동력이 되었으며(50,24; 출애 3,15-20) 또한 민족의 일치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힘이 되기도 하였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단을 쌓아 주님께 바쳤다. 그는 다시 그곳을 떠나 베델과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치고 주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며, 예배드렸다. 그리고 아브람은 계속하여 다시 길을 떠났다.
아브람은 하란이란 도시에서 부족함이 없이 풍요롭게 살았다. 넉넉한 재산과 많은 종들을 거느리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도시란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다. 사람이 살기 편하도록 정비되어 있고, 문화시설이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넉넉하고, 그래서 사람이 모여서 도시가 된다.
더욱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브람이 175세까지 살았으니(창세 25,7) 이때는 중년기라고 할 수 있다.
중년기의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하고, 변화를 기피한다. 시력도 감퇴하고 근력도 약화되어 의욕도 줄어들 뿐만 아니라 의욕이 있어도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시기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편안히 안주하고 싶어 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체 없이 짐을 꾸려 식솔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난다. 정들었고 살기 편한 고장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머물 곳이 어디이며 언제 안주할 지도 전혀 모른 체, 오직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길을 떠난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무작정 길을 떠나는 아브람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용기와 신앙의 결단력을 보게 된다(마태 4,18-22).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이처럼 떠남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죄악이 가득한 곳을 떠나 하느님의 정의와 거룩함이 충만한 곳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는 역사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 역시 아브람처럼 현실과 편안함에 안주하지 말고, 하느님을 향해 떠나야 한다.
아브람처럼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나야 한다. 순례하는 가운데에서도 기도와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아브람처럼 하느님과 끊임없이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는 신앙인이 되자............◆
우리가 변화하는 순간 -이상영 신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 자기를 알 수 없게 하는 온갖 장애물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만들어낸 자신의 이미지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 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주 특별한 인간이며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면 거기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된 이미지들, 거짓된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 자신을 대단히 중히 여기는 등등의 생각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바라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타인 역시 밖으로 드러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허구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꿰뚫어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보더라도 그것은 부풀려집니다. 잘못되어 있거나 이상한 것은 언제나 상대방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편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자신이 선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사람 속에서 모든 잘못을 들추어 내는 것입니다. 선해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선하게 존재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선한 것, 두가지 입니다. 상대적으로 선하다는 것은 곧 상대방이 잘못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이 선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야 말로 악한 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현상입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타인이 악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이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토록 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악함을 과장시킬 수 있으며 우리가 과장시킨다 해도 그것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과장되고 투영된 다른 사람의 악함 앞에서 우리는 마치 순진무구한 사람처럼 비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게 평가를 하면 우리는 입에 힘을 주면서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독자적인 방식으로 많든 적든 소위 선한 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누구나 타인을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하는 순간 세계도 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 생명력으로 가득 찬 한 부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이 세상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단순하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그 변화는 우리가 허구를 떨쳐 버릴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만일 자신이 하찮은 존재임을 알게 되면, 우리가 만일 자신의 진실성 없는 삶을 알아차린다면 그런 허구들은 곧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우리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허구입니다. 우리는 사물들을 뚜렷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희미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부터 그 들보를 들어내면 우리는 비로소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에는 현미경이 있었습니다. 이 현미경은 참으로 신기했지요.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현미경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것들이 움직이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지요. 어린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습니다. 왜 직접 보는 것과 현미경으로 보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나냐고 말이지요. 제 형이 이렇게 말해주었지요.
“현미경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물체나 미생물을 확대해서 보여주는 거야.”
아무튼 신기해서 하루 종일 이것저것을 현미경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관찰을 하다가 문득 이러한 의문점이 생겼어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확대해서 보여준다면, 멀리 있는 것들을 망원경처럼 잘 보이게 하지 않을까?’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현미경은 가까이 있는 것들을 확대해서 보는 것이고, 망원경은 멀리 있는 것을 확대하여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현미경으로 곰팡이 같은 세균을 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망원경으로 세균을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망원경으로 세균을 보지 못한다고 이 망원경이 잘못되었다면서 따지면 어떨까요? 아마 이게 무슨 억지냐면서 무시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보라고 하시는데, 우리들은 이 세상의 시선으로만 보고 있으면서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 뜻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남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서슴지 않고 행하는 그 모습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렇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이제 제대로 좀 보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통해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처럼, 이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시선이 아닌 주님의 시선인 사랑으로 모든 것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시선만이 제대로 볼 수가 있으며, 주님의 뜻대로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러한 말씀을 하셨지요.
“마음이 좁쌀만한 사람이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의 크기도 좁쌀만 하고, 마음이 태산만한 사람이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의 크기도 태산만하다.”
나는 과연 하느님을 좁쌀만한 분으로 만들고 있을까요? 아니면 태산만한 분으로 만들고 있을까요? 내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만이 하느님을 크신 분으로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태산같이 크신 분으로 세상에 증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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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혹은 부정
-김대선 신부-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남의 이야기가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타인의 불행이나 잘못을 이야기합니다. 그 대상이 공인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결국 그러한 이야기들은 억측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대에게 큰 상처를 남겨주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이러한 모습은 ‘댓글’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댓글은 누군가의 의견이나 사건에 대해 자신의 객관적인 입장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우리들의 인터넷 문화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라 남의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언젠가는 나도 남의 심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 자신을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긍정적일 때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긍정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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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하지 마라
- 전봉순 수녀-
어렸을 때 고향집에는 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가을이면 어머니는 잘 익은 감을 읍내 시장에 가지고 가서 소매상인에게 내다 파셨다. 상인에게는 한 접(100개)씩 넘겼기 때문에 미리 숫자를 세어야 했다. 나는 감을 셀 때마다 신이 났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이제 그만 됐다.” 하실 때까지 몇 번이고 100개가 맞는지 세고 또 세었다. 어느 장날, 감을 팔러 시장에 가시는 어머니를 처음으로 따라 갔다. 어머니는 감을 소매상인에게 넘길 때마다 항상 몇 개를 더 가져가셨다. 그날도 다름없이 여유분을 가지고 가셨다. 나는 어머니가 후하셔서 소매상인에게 인정상 더 주시는 것이라 믿었다. 그날 나는 어머니의 시장주머니가 두툼해지는 것을 보면서 신이 났다. 게다가 우리 물건을 사 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고 어른들이 거래하는 모습도 참 신기했다. 나는 소매상인이 어머니의 감을 셈하는 것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내가 이미 세어놓은 것이기에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상인을 전혀 의심하지도 않았고 숫자를 헤아리는 데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 생각에 어머니는 그저 그 상인을 믿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상인은 다섯 개씩 헤아리면서 어떨 때는 큰 손으로 여섯 개를 쥐고도 다섯이라고 했다. 나는 어린 마음에 너무 화가 났다. 속임수라는 것을 그 상인한테서 처음 경험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어머니가 속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억울했다. 어머니는 “내가 잘못 헤아렸나?” 하시고는, 그 상인이 말하는 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여유분으로 가지고 온 것을 더 주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 꽤 억울하기도 하고, 상인의 정직하지 못한 태도에 실망해서 내가 본 사실을 그 자리에서도 나중에도 말씀드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속상하실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새로운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항상 여분의 농작물을 넉넉히 가지고 가시면서 속임수를 당할 때마다 그냥 말없이 채워주신다는 것을. 어머니가 사실을 알면서 그렇게 하셨는지, 아니면 정말 모르고 그렇게 하셨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일이 가끔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 상인의 속임수를 보고 어린 내가 느낀 분노가 꽤 컸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어머니께서 항상 개수는 넉넉하게, 곡식 되는 넘치게 되시던 것을 보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오늘 내가 복음을 사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따지지 않고 후하게 베풀고 그저 너그럽게 대하는 것! 그것이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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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기
-오상선신부-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 제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눈은 밖을 내다보게 되어 있지 안을 들여야보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눈이 침침해져 그 바깥도 더 잘 볼 수 없으니...
요즘이야 흔해빠진 것이 거울이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거울도 없었으니 제 눈에 뭐가 있는지 어찌 볼 수 있었으랴!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보면 어떨까? 내가 말하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다(肉眼). 마음으로 보라는 것이고(心眼), 영으로 보라는 것이다(靈眼).
마음의 눈으로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너의 눈이 보이게 된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거의 장님이 되고나서야 참으로 피조물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육신의 눈으로 꽃이 아름답고 자연이 아름답다고 노래한 것이 아니라 심안으로, 영안으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만물이 모두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음을 깊이 바라보게 됨으로써 그 신비에 놀라 <태양의 노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오늘부터 육신의 눈에 의존하여 거울만 바라보기보다 심안으로, 영안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노력을 하면 어떨까? 그래야 영이신 하느님도 볼 수 있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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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의 기준
-최성우신부-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듯이 자신에게도 그런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자신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겸손한 양 자신을 비하시키기가 쉽다.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사랑의 표현이 무시당할 때도 자신을 비난하면 상처만 입을 뿐이다. 물론 다른 이에게 화살을 돌린다고 해도 남는 건 상처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매번 경험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건 어떤 면에선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에서 나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방어를 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그렇게 한다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다.
못났으면 못난 대로 독특한 무엇이 있음을 감사하고 자연스럽게 살 수 있었으면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한계를 인정하면 소유와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겉꾸미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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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만을'을 버리면 -김찬선신부-
어제는 어떤 형제님이 저를 보고 더 건강해진 것 같고 행복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남자들은 이런 표현을 잘 안 하는데 예사롭지 않아서 그랬는지 전에는 지나치던 그 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그런가? 더 건강해질 것은 없을 것 같고, 그러면 더 행복한가? 뭐 더 행복할 이유도 없는데.......
한 달 전에 비하면 별 차이가 없는 삶이지만, 그러나 옛날과 비하면 분명 저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흡했던 행복의 조건이 이제 충족되었기 때문도 외부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제가 서서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보이는 것이 온통 나쁜 것, 잘못된 것들뿐이었습니다. 남이든 저든 나쁜 것과 잘못된 것들만 보이고 그 잘못도 크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서서히 바뀌더니 언제부턴가 좋은 점이, 잘하고 있는 것이, 애쓰는 것이, 예쁜 짓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최선만을 고집하지 않게 된 결과입니다.
남이든 저든 이렇게 긍정하고 칭찬하니 칭찬을 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기쁘고 행복해지고 무엇보다도 제가 행복해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나쁜 점이 많이 남아 있고 잘못하는 것은 여전히 잘못하고 또 그것을 보지만 이제는 티만 보거나, 티를 대들보로 보는 어리석음이, 티만 보고 사람은 보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음이 줄어든 것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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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만나는 가족과 이웃을 -기정만신부-
우리 성당 안에는 ‘사랑마을’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노인복지를 위해서 지어진 것인데, 매일 어르신들이 오셔서 점심을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봉사를 합니다. 이곳에 가면 ‘사랑마을’이란 이름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봉사자들이 기쁘게 봉사하고,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담소도 나누며 기쁜 시간을 보냅니다. 이 ‘사랑마을’에서는 비교나 질투 그리고 투정이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 자리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마을’을 이루어 가는 모든 이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마음으로 행하기에 그렇습니다. 웃으며 찾아오는 어르신들, 반갑게 맞이하는 봉사자들, 기쁨으로 음식과 재료를 내어놓는 이들로 이루어졌기에 이곳엔 늘 평화가 있습니다.
이 모습대로라면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리석음을 자처하는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판단하기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내어드린다면 판단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으로 채우지 못하고, 하느님께 봉헌하지 못할 때 우리 삶에 여러 부정적인 아픔과 상처를 만드는 판단이 자리하게 됩니다. 먼저 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만나는 가족과 이웃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판단으로 인한 시기·질투·미움과 분노가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을 통한 사랑과 평화가 우리 삶의 자리에 가득 피어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지난 토요일에는 어떤 선배 신부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 컴퓨터에 이상이 생겼다고 저에게 한번 와달라고 부탁을 하셨거든요. 사실 요즘 일이 많아서 가기 싫었습니다. 더군다나 큰 본당의 주임 신부님이시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시겠어요? 그리고 그분들 중에 설마 컴퓨터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분명히 저보다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신부님께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저에게 전화를 해서 컴퓨터에 이상이 있다고 꼭 좀 와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할 일이 태산같이 쌓였는데, 또한 강화에서 그곳까지 가는 시간도 꽤 되는데……. 이런 생각들로 ‘가기 싫다’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를 잊지 않고 불러주시는 신부님을 생각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전번과 마찬가지로 컴퓨터 자체에 커다란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대로 사용한다고 해도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제 나름대로 설명을 자세히 드린 뒤 성지로 돌아가겠다고 나오는데, 신부님께서 성지에서 얼마나 힘드냐면서 용돈 쓰라고 흰 봉투를 하나 내미시는 것이었어요. 저는 사양했지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심각한 고장을 고친 것도 아니고 그냥 컴퓨터 하드디스크만 정리했을 뿐이거든요. 그런데도 신부님께서는 많이 못줘서 미안하다면서 그 봉투를 저에게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성지로 다시 돌아오면서 신부님께서 저를 찾은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고치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후배 신부에게 용돈이라도 쥐어주고 싶으신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 마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지금 귀찮고 힘들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못된 놈인지요?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때, 바로 이렇게 못된 놈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여러분이 직접 목격을 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보기 싫지요. 보는 것 자체도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이렇게 보기 싫어하는 모습을 바로 내가 따르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못된 놈이 되길 원치 않으시지요. 그보다는 좋은 사람이, 사랑을 가득히 담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세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래서 못된 놈의 길에서 벗어나 주님의 길인 진정한 사랑의 길로 들어서길 원하십니다.
지금 나는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나요? 내가 서 있는 그 길이 바로 사랑의 길이 아니라면, 얼른 자리를 옮기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이해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네요.
빠다킹신부
누구나 가슴은 따뜻하다 -이봉하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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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는 1970-80년대를 지나오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각인되었고, 두 번에 걸친 교황님의 내한과 성체대회를 통해서 신자수 또한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늘어나는 숫자에 비해 교회는 신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교회는 ‘내 탓이요’라는 운동을 전개하여 큰 효과를 얻었고, 교회 내에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도 ‘먼저 너 자신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한 가운데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보다 남을 탓하고 단죄하는 행위는 창조 이래 변함없이 이어온 사람들의 단적인 모습이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죄의 한 조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모든 덕목 중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 우리는 스스로 소홀히 하게 됩니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상 자신의 치부는 감추면서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은 욕망이겠지요. 그러나 모든 것이 허구로 드러났을 때는 어떠합니까? 네 탓을 하기 전에 내 탓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사회는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고 또 하느님 나라가 바로 그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살아 있는 자신이 성전임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탓이 아닌 남의 탓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을 때는 우리가 오히려 이방인보다 못한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이기양 신부-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우리는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또 반대로 말 한 마디로 원수 관계를 만들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갈등과 싸움이 ?말?에서 시작이 되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싸움으로 치닫기도 하고 또 화해의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사람과의 관계 대부분이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위로가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하며,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쓰러뜨리기도 하지요.
지혜로운 말과 어리석은 말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남을 감싸주고 칭찬하는 말들은 지혜로운 말이지요. 남을 비난하고 헐뜯는 말들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요. 큰 전쟁이 일어날 뻔한 일을 막은 한 줄의 글을 소개합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양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국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으로 인해 오히려 두 나라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칠레의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 동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계신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상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뒷면은 칠레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칠레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케 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거칠어갔지요. 양국간의 감정이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이를 명쾌하게 극복하는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칠레의 한 기자가 신문에 쓴 재치 있는 기사였다.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여 서 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더 예수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칠레인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힐 만큼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긍정적이고 평화적인 글이 두 나라의 엄청난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담은 지혜로운 말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불에 기름을 끼얹듯 성난 국민을 선동하는 모난 기사가 실렸다면 아마도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7,1)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나쁘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쁘게 보고 말하고 생각하면 그 사람 또한 그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쁜 말과 행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누워서 침 뱉는 사람?이지요. 누워서 침을 뱉으면 그 침이 어디로 떨어집니까? 바로 내 얼굴로 떨어지지요. 남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면 나에게는 더 고약한 말이 돌아오는 법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남을 판단하고 나쁘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태도입니다.
특히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7,2)
그렇습니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이웃을 욕하고 저울질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저울질하시기 전에 벌써 이 세상에서 그와 똑같이, 어쩌면 그 이상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말을 조심하고 지혜로운 말로써 공동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여러번 말씀하셨지요.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오늘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마태7,3-4)
오늘도 우리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공격적인 말들과 사건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나가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휩쓸리면 같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요. 그 와중에서도 이웃을 살리고 희망을 주는 긍정적인 말들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 이것이 복음을 사는 방법입니다. 위로와 격려의 내 말 한 마디가 깨어지고 상처가 나서 보복하고 싶은 감정들을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기보다는 칭찬하고 격려하며 사랑의 언어만을 세상에 심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강민구 목사-
◆모든 일과가 끝난 주일 오후면 가끔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은 아닌가?’, ‘나도 실천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려고만 한 것은 아닌가?’, ‘내 속에 있는 들보를 못 본 체, 남의 티를 빼주겠다고 설치지는 않았나?’ 그런 생각들 가운데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중요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전에 갖추어야 될 마땅한 자세’에 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는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이나 잘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대로 하느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2절). 주님이 보시기에 안타까운 점은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를 구분하고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속에서 비교의식과 차별의식이 생기게 되고, 우월감과 열등감도 뒤따라오게 됩니다. 결국 ‘사람’의 온전한 모습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차이점 못지않게 공통점도 많습니다. 어쩌면 일치되는 면이 더 많고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고, 생명의 호흡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또한 맏형이신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며 사는 한가족 공동체, 한 주님을 모시고 사는 한몸을 이룬 교회입니다. 그러니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남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합니다. 내가 누구를 심판하면 나도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 안에서 하나인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를 잘 닦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당연히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강영구신부-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그대에게
저는 언제부터인가 누구를 만나면 그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눈을 쳐다보면 그 눈 속에 대체로 그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맑고 밝은 눈을 가진 사람, 가을 하늘처럼 투명하고 푸른 눈을 가진 사람, 사랑스러운 눈을 가진 사람, 풍덩 빠지고 싶은 호수처럼 그윽한 눈을 가진 사람, 별처럼 빛나는 보석 같은 눈을 가진 사람, 입으로 말하기보다 눈으로 말을 하는 사람, 입으로 웃지 않고 눈으로 웃는 사람, 언제나 글썽한 눈물을 가득 담고 말하기 전에 눈물부터 주르르 흘리는 사람,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눈을 가진 사람,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기대고 싶을 만큼 듬직한 눈을 가진 사람, 저는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눈을 가진 사람, 거짓과 교활함을 감춘 간사한 눈을 가진 사람, 미움과 증오를 담고 적개심으로 붉게 충혈 된 눈을 가진 사람, 죽은 동태눈처럼 흐리멍텅한 눈을 가진 사람, 무엇엔가 정신을 빼앗기고 초점 잃은 눈을 가진 사람, 저는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마태6,22) 당신은 어떤 눈을 가졌는지 보고 싶군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남을 나쁘게 판단하지 마라
◆ 이홍기 세례자 요한 몬 시뇰] ◆
1. 마태 오 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예수님의 주요 설교 모음집인 산상설교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이 들어 있는 7장부터는 설교의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그 대상도 주로 제자들, 곧 지역 교회의 공 동체 내부 사람들, 나아가서 모든 시대의 공동체 구성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본 당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보아도 됩니다.
오늘 복음은 남을 단죄하거나 나쁘게 보는 태도를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 다.” 여기서 ‘판단하다’는 단순하게 옭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자기 개인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나쁘게 비판하거나 죄인으로 단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은 우리가 대인 관계에서 흔히 저지르는 잘못을 잘 아시고 훈계하십니다. 우리는 입을 열었다 하면 남 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그것도 남을 칭찬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남을 욕하거나 결점을 드러 내기를 좋아하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때로는 남의 숨은 약점까지도 보태거나 과장해서 꾸며댑니다. 그러한 심리 이면에는 남을 깍아내리면서 자신을 치켜 세우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표현하자면 ‘너는 못나고 나는 잘났지’ 생각하는 이른바 엘리트 의식이라 할까요. 특히 그런 현상은 우 리 한국 사람들과 한국 교회 안에서 심한 편입니다.
모두 ‘내 탓’은 없고 ‘너의 탓’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높아지는 것은 결코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판단하 는 그대로 판단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저울질을 당할 것’이 라는 원칙으로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을 원문의 내용대로 표현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남에게 되어주는 되만큼 되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종 말 심판 때에는 남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크게 작용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동태보상률이라고들 합니 다.
하느님께서 심판 때에 각 사람에게 적용하시는 기준은 최소한 두 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 한가지는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의 기준이고, 다른 한가지는 당사자들이 이웃에게 적용한 엄격하고도 다소 왜곡된 판단입니다. 그러니 되도록 이웃을 나쁘게 판단하지 맙시다. 이웃을 좋게 보아서 손해보는 것은 없습니다. 남을 비판할 때에는 열 번 백 번 신중하게 생각하고, 나의 비판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를 살펴보고 하여야 합니다.
2. 또 예수님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에 든 티를 빼내주려는 태도를 책망하시면서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하십니다. 눈에 보일가 말가 한 작은 먼지같 은 남의 결점은 용케도 잘 보면서 그보다 훨씬 더 큰 자신의 결점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탓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마도 당대에 널리 알려졌던 격언이었던 것 같 습니다. 이 말씀도 앞의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경고의 연장선상의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을 비판할 때에는 그 사람의 결점은 크게 부풀어서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결점은 숨기거나 너그럽게 대하곤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서나 볼 수 있는 공통 현상입 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주로 일반 백성을 ‘땅의 백성’(암하아레츠)이라 하여 무시 하고 그들의 결점을 부각시키고 단죄하곤 하였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 들을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사들을 꾸짖으실 때에 흔히 쓰시던 말씀입니다. 지금은 비록 예수님 시대와 다르지만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도 언제나 남을 헐뜯고 욕하며 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바로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속하지나 않 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위험을 안고 사니깐요. 따라서 사랑이 넘치는 건전한 공동체 를 이루기 위해서 다음 몇가지 사항을 기억하고 실천합시다.
1) 먼저 다른 사 람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께 맡깁시다. 하느님만이 사람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십 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껴안으시고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르치기 쉽고, 흔히 색안경을 끼고 낮춰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2)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을 대할 때에는 자신의 부족을 잊어버리고 혼자 완전한 사 람인듯 착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남에 대해 불평 불만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 불완전하니까 우리의 비판이 때로는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남보다 더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함부로 남의 결점을 그렇게 선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못난 우리들을 잘 아시면서도 어여삐 보아 주시고 용서를 베푸시며, 벌을 주시면서도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고자 애를 쓰십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합시 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도 하느님을 닮은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
† 판단은 하느님의 몫 † -박상대 신부 -
마태오는 '판단하지 않으면 판단받지 않는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과 되어 주는 되많큼 되어 받는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 그리고 티와 들보의 상징어를 모두 어록에서 옮겨 썼습니다. "판단하지 말라"에서의 '판단'은 단죄를 뜻합니다. 이는 이웃을 단죄하면 하느님에게서 단죄를 받는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의 반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꼭 필요한 경우에는 잠정적으로 이웃을 판단하되 최종 판단만은 하느님께 맡기면 될까요? 대부분의 현대인이 이와같이 이웃의 잘못을 단죄합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의 유명한 율법학자인 힐렐은, "이웃의 상황에 있기 전에는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는 명언을 남깁니다.
오늘 산상설교의 테마는 판단과 교정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옳고 옳지 못한 것에 대하여 판단하고, 남의 잘못을 타일러 고쳐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남을 판단하려 들지 말고,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를 빼내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굳이 남을 판단해야 한다면 자신도 판단 받을 각오를 해야 하고, 남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려면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들보부터 먼저 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남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다보면 비판과 판단의 말도 섞여 나오기 마련이고,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그것이 필히 자기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2절)
우리가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지 못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다른 사람의 전체적인 사람됨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한 행동을 두고 보더라도, 그 원인과 경과를 알지 못하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만약 원인과 경과를 안다 하더라도 판단의 기준이 보편적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며, 자신만의 다양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는 불가능하며, 때로는 그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그런 판단의 권한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실 판단이나 심판은 하느님의 일이요, 그분만의 몫입니다.
남의 잘못을 교정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을 교정하자면 판단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눈에 온 지붕을 떠받치는 들보가 들어 있는데, 무슨 재주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이라도 볼 수 있겠습니까?(5절) 이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것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남보다 자신을 더 큰 죄인으로 여겨야 하는 미덕을 말합니다.
즉 남의 죄는 티끌이요, 자신의 죄는 들보로 자각하라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잘못을 교정하려면 할 수는 있으나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 용기는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고 빼내주기 위해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먼저 제거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용기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먼저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남을 판단하고 남의 허물을 탓하는 일에 나설 리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랍비는 그 사람을 창문가로 데려 가서는 창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고 대답하자, 랍비는 다시 그 사람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거울을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모습만 보인다고 대답하자, 랍비가 다시 묻습니다. "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창유리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거울에는 그대의 모습만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거울은, 거울의 유리 뒤에 칠한 수은 때문에 남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 볼뿐입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 뒤에 칠해진 이기심과 욕심과 아집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자신만 보게 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은 자기만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험담하고, 비방하며, 단죄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도록 요구하고 종용하며, 때로는 강요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네가 남을 단죄하는 일이 없다면 용서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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