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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에서 이민수가 번역한 책,징비록에 실린 글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본도의 수륙의 장수들은 모두 겁을 집어먹었다. 수군만 보더라도 좌수사 박홍은 군사를 내지 않았다.
우수사 원균은 비록 수로가 좀 멀다고는 하지만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배가 많고 또 적들이 하루나 이틀 동안에 몰려온 것도 아닌데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위세를 보이고 단 한 번만이라도 싸웠던들 적들은 뒤를 염려해서 그토록 몰려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데 먼 데서 바라보기만 했지 나와서 교전한 사람은 없었다.(83쪽)
- 원균옹호론: 초기 원균 승전론: 이 은식의 <원균,그리고 이순신>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발령이 난 것은 임진난 발발 2개월 전이었다. 그만큼 준비가 미비할 수 밖에 없었다. 1592년 4월 13일 왜는 전선 350척을 거느리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왜는 4월 14일 부산 동래성을 함락하고 보름 만에 서울에 입성할 정도로 초기 군세가 도도했다. 수군에서도 경상좌수영 박홍이 이끄는 부대가 싸움도 하지 못 하고 궤멸 당했다. 이 때 원균은 전함 4척과 보조전선 10척을 가지고 첫 전투에 나서 적선 10여 척을 파괴하는 전공을 세웠다. 원균은 전라 우수영 이순신과 전라 좌수영 이억기와 함께 치른 옥포해전(5월7일)에서 선봉에 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초기 원균은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자신의 관할을 지키는 것도 어렵다는 회신을 받고 거의 20일 동안 홀로 왜 수군의 서진을 막았다. 원균은 이에 단독으로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5월 6일에 조정은 이순신에게 출정명령을 내렸다. 이에 24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이순신이 출진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옥포해전이다. 이 해전을 시작으로 5월 29일 사천포 해전,6월 2일 당포해전, 7월 8일 한산도 대첩,9월 1일 부산포해전을 치르게 된다.
- 재반론: 블로그 <을파소의 역사산책>에서
일본군은 상륙 이후 한동안은 경상우수영 관할 해역으로는 진출하지 않았다. 경상좌수영이나 경상도내 육군이 나중에 흐지부지 흩어지기는 해도 처음의 동원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은 물론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역시 정상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였고, 경상도의 육군들도 일단 병력 동원만큼은 제대로 이뤄졌다. 그런데 유독 적과 교전하지도 않았는데 경상우수영만 동원체계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만일 그런 거라면 지휘관의 역량문제에 해당한다. 결국 적의 기세에 지레 겁을 먹은 원균이 수군을 동원할 생각도 못 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마땅하다.
그렇다면 원균은 소규모 함대를 이끌고 적선을 분멸하는 전과를 올렸는가? 이에 대한 기록은 난중일기와 실록에 나타난다.
4월 29일 [양력 6월 8일]<무오>
< 장계에서> 정오에 경상우수사 원균(원균)의 회답 공문이 왔다. "적산 500여 척이 부산 ·
김해 ·양산 ·명지도 등지에 정박하고, 제 맘대로 상륙하여 연해변의 각 관포와 병영 및
수영을 거의 다 점령하였으며, 봉홧불이 끊어졌으니 매우 통분하다. 본도(경상우 도)의 수군
을 뽑아내어 적선을 추격하여 10 척을 쳐부수었으나, 나날이 병마사를 끌여들인 적세는 더
욱 성해져서 적은 많은데다 우리는 적기 때문에 적을 맞아 싸울 수 없어서 본영(경상우수
영) 도 이미 함락되었다. 귀도(전라좌도)의 군사와 전선을 남김없이 뽑아 내어 당포 앞바다
로 급히 나와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순신 <난중일기>중에서
상이 이르기를,
“아군(我軍) 중에 계속 오는 자가 있었는가?”
하니, 종신이 아뢰기를,
“원균(元均)이 바다에 나가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천안(天安)에 이르니 병사 신익(申翌)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방어사 이옥(李沃)과 이세호(李世灝) 등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신이 익(翌) 등에게 ‘성상께서 이미 거둥하셨는데 어찌하여 경성으로 가지 않는가?’ 하였더니 이옥(李沃)의 말이 ‘그 말이 옳다. 군사를 인솔하고 전진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은 또 길에서 심대(沈岱)를 만나서 역시 같은 말을 하였더니 심대 역시 밤을 무릅쓰고 달려갔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5월 10일 기사 중에서
또 의병장 조경남이 남긴 <난중잡록>도 근거로 제시한다.
나는 전라도(全羅道) 남원(南原)에 있었으므로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의 일과 본부(本部)의 일을 모두 알고 있다.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원균(元均)은 적을 많이 잡았으니 승성(勝聲)이 크게 떨쳤다. 이로 인하여 민생들은 각자 모두 마음놓고 생업(生業)에 종사하고 서로 경동(驚動)치 않았다
-조경남 <난중잡록>중에서
이걸 본다면 원균의 초기 전공을 이순신도 인정하고 국가도 인정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기록을 보자면 원균의 전공이 10척과 30척, 어느 것인지 알기 어렵다. 그리고 위의 기 기록 모두 ‘원균이 그랬다고 하더라.’ 라는 식의 기록이지 원균의 전공을 직접적으로 입증해주는 기록은 아니다. 이런 단편적인 말을 제외한다면 원균이 적선을 분멸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원균이 제시한 적의 수급이나 전리품도 없음은 물론 일본 측 기록에도 이에 대한 흔적은 없다. 이 시기까지 일본 수군이 서진을 한 흔적도 없다.
거기에 뒤에서 다룰 이순신 함대의 1차 출전에서 진행된 전투 과정을 보면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에 대한 경계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가 공격을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기습을 받아 배를 버리고 달아나고 그 빈 배를 불태우는 양상의 제대로 된 해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전투가 진행된 것이다. 게다가 전쟁 초기 수군인 와키자카 야스히루가 육전에 참가하여 용인에서 조선의 근왕군을 대파하는 전과를 올리는 상황을 본다면 초기에는 조선 수군을 아예 신경 쓰지도 않았던 것 같다.
더군다나 원균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난중잡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나온다.
-경상도 연해의 왜적이 거제도(巨濟島)로 향하니 원균(元均)은 우후(虞侯)한테 군영을 지키게 하고는 배천사(白川寺)까지 달려갔는데, 우리나라 어선을 보자 왜적의 배인 줄로 생각하고 창황히 달아나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식을 듣고 나가길 독촉하니 온 성 안의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어지러이 길을 꽉 메웠다. 그러자 우후는 다함께 피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활을 당겨 마구 쏘아대자, 임신한 두 여인이 한 화살에 맞았는가 하면 그 밖에도 무고하게 죽은 자가 퍽 많았고, 온 섬의 장병들이 모두 소문만을 듣고도 흩어져 버렸다. 남해 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사르고 달아났는데, 왜적은 아직 남해 땅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삼도(三道)의 해군 함대[舟師]가 가덕도(加德島) 앞바다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이기다. 이에 앞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해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오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 흩어져 가버렸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하였으나, 옥포만호(玉浦萬戶)이운룡(李雲龍)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원균이 이운룡 등의 몇 척의 배와 함께 노량(露梁)에 퇴각해 있는데 적병이 뒤따라 좇아오자, 이운룡이 전라도의 해군에 구원을 청하고자 곧 작은 배 하나를 타고 달려갔다. 그런데 당시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해군 함대를 거느리고 좌수영(左水營)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척후병(斥候兵)이 외쳐 보고하기를, 작은 배 한 척이 와두해(瓦頭海)로부터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히 척후선을 시켜 물어본즉, “경상도 옥포만호 이 모요. 적병이 가득히 몰려와 여러 진(鎭)이 와해됐소. 우수사 원 모가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퇴각하여 노량을 지키고 있는데, 흉악한 왜적이 뒤쫓아 와서 이미 사천(泗川)과 남해(南海) 바다에 가득 차 있소. 전라도의 함대가 그 선봉을 격파하여 주기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영남의 바다는 끝장이 나고 화가 호남으로 닥쳐올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 장군께서는 이 점을 숙고하시오.” 하였다
-조경남 <난중잡록>중에서
이를 보면 조경남도 결코 원균의 호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며 처음에 언급된 원균에 유리한 기술은 단순히 풍문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경남이 수군의 전투 현장에 있었던 건 아니며 난중잡록은 하나의 야사이니 원균에 불리한 내용도 믿기 어려운 게 아니냐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투경과를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보고내용이 국가의 공식기록, 즉 실록에 실린 경우라면 어떨까?
김수가 치계하였다.
“수영(水營)의 조라포(助羅浦)·지세포(知世浦)·율포(栗浦)·영등포(永登浦) 등 진이 이미 텅 비었는데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만이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있습니다.【준민이 계미년 북도(北道)의 싸움에 며칠 길을 걸어서 들어가 싸웠는데 용맹이 삼군(三軍)에서 으뜸이었다. 원균(元均)은 준민이 즉시 수군(水軍)으로 달려나오지 않는다 하여 준민을 간사하게 여겼으니 잘못이다.】 원균은 수군(水軍)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內地)로 피하고, 우후(虞候) 우응신(禹應辰)을 시켜 관고(官庫)를 불태우게 하여 2백 년동안 저축한 물건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져버리게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 기사 중에서
원균의 승전 얘기는 한마디도 안 하고 자기 몸 피신한 얘기만 한다. 또한 이후 선조의 발언들을 보아도 원균의 임진년 초기 승전론은 근거가 희박하다. 선조는 원균에게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한 공’이 있다면서 그를 옹호하낟. 그런데 정말 원균이 단독으로 이겼다면, ‘임진년 첫 승전을 거둔 건 원균이다.’라고 말하면 된다. ‘구원을 청한 공’을 강조하는 것 보다 ‘첫 승전의 공’을 강조하는 게 더 확실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런 사실이 없음을 본다면 원균을 띄워주려던 선조도 원균이 임진년 초기 승전했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70여척의 함선을 전투도 없이 침몰시킨 죄가 더 크다. 그것도 아직 적군의 전 병력이 넘어오지 않았고 특히 점문수군병력도 도착하지 않았을 때 대규모 병력을 전투도 없이 해산하여 조선 수군은 어이없는 전력 타격을 입고 말았다. 만일 경상우수영이 건재하였다면 전라좌수영과 연합 시 100척에 육박하고, 여기에 전라우수영이 2차 출전 당시 합류한 만큼만 가세하더라도 120척 가량, 전라좌우수영 병력을 대부분 동원하여 경상우수영과 합세하면 140여척의 대병력으로 일본 함선들을 위협할 수 있었지만 원균 덕에 그 기회는 놓쳐버렸다.
그래도 경상좌수사 박홍은 아주 도망 가버렸는데 그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를 보면 원균은 차라리 박홍 따라서 도망 가버리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전라수군 절도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전라우수사 이억기등과 함께 거제 앞바다에서 적병을 크게 쳐부수었다. 처음에는 상륙하는 적병을 본 원균이 그 형세가 매우 큰데 놀라서 감히 나가 싸우지도 못하고 전선 백여 척과 화포,군기등을 바다 속에 내다 버렸다.
그는 수하 비장 이영남과 이운룡등만 데리고 배 네 척에 나누어 타고 황망히 도망쳐 곤양 바다 어귀에 상륙하여 적을 피하려 했다. 이리하여 그가 거느린 수군 만여 명은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본 비장 이영남이 말했다.
"공께서 수군절도사라는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이렇게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피하시고 보면 후일 조정에서 죄를 물을 적에 무슨 말로 이것을 모면하려 하십니까? 제 생각으로는 전라도에 군사를 청해 한번 싸워 본 다음에, 만일 그 싸움에 이기지 못하거든 퇴군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이 말을 듣자 원균은 이를 좇았다. 즉시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우리에게는 각각 책임을 맡은 분계가 따로 있는 것이오. 그런 터에 조정의 명령도 없이 어떻게 내 맘대로 지경을 넘어갈 수가 있겠는가?"하면서 한마디로 거절했다. 원균은 5,6차레나 이영남을 보내어 간절히 청했다. 또 이영남이 이순신에게 다녀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통곡했다.
이윽고 이순신은 몸소 판옥선 40척을 가지고 이억기와 함께 거제로 나와 군사를 합쳐 적과 싸우게 되었다. 이리하여 적병을 견내량에서 만났다.
이순신은 원균을 보고 말했다.
"이곳은 바다가 좁고 물이 얕아 배를 돌릴 수가 없소이다. 우리는 거짓 도망하는 체하여 적병을 유인해서 넓은 곳으로 가서 싸우는 것이 좋겠소."
그러나 원균은 급한 마음에 금세 나가 싸우려 했다.이순신이 다시 주장했다.
"그대가 용병할 줄을 알지 못하니, 이러다가는 반드시 패하고 말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깃발을 흔들어 지휘해 거짓으로 패해서 달아나는 체했다. 적병은 크게 기뻐하여 그 뒤를 급히 따라왔다. 이윽고 넓은 바다에 다다라 북소리가 한 번 울리자 이순신의 군사는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바다 위에 열을 지어 벌려 섰다. 이때 적선과의 거리는 불과 수십보 밖에 되지 않았다.
원래 이순신은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판자로 배 위흫 깔아 그 모양이 마치 거북과 같고 전사와 노 젓는 수부들은 배 안에 들어가 있고 전후좌우로 화포를 싣고 있어 물 위를 마치 베 짜는 북과 같이 마음대로 종횡했다.
적선을 만날 때마다 화포를 쏘는데 여러 배가 동시에 공격을 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고 적의 배는 그 속에서 수없이 불타고 침몰했다. 이때 적의 정수가 탄,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고 붉은 비단으로 두른 배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배 역시 거북선의 화포에 맞아 깨졌다.적의 군사는 모두 물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 뒤에도 여러 번 싸울적마다 적은 이순신에게 패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부산과 거제로 도망쳐서 다시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이순신은 싸움을 지휘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날아오는 탄환이 이순신의 왼편 어깨에 맞았다. 피가 팔꿈치까지 흘러내렸지만 이순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싸움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칼을 가져오라 해서 살을 가르고 두어 치나 깊이 박힌 탄환을 꺼냈다. 옆에서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얼굴빛이 변하고 아연했으나 이순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이야기하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이 싸움에서 이겼다는 첩보는 바로 조정에 전해졌다. 임금은 매우 기뻐하고 이순신에게 일품의 벼슬을 주려 했으나 주변 사람들이 반대했다. 이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겨우 정헌대부로승급시켰다. 또 이억기와 원균등은 가선대부로 승급시켜 주었다.
이보다 앞서 적의 장수 평행장이 평양에 이르러 우리에게 글을 보내 위협했다.
"일본 수군 십여 만이 지금 서쪽 바다로 오는 중이오. 그렇게 되면 대왕의 행차는 장차 어디로 가시렵니까?"
원래 적들은 수륙 양면으로 군사를 합하여 서쪽으로 치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과의 싸움에 패해서 그들은 위세를 크게 꺽이고 말았다. 그래서 평행장이 평양을 얻기는 했으나 형세가 외로워 감히 더 진격하지 못했다. 우리 국가가 보존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에 전라도와 충청도로부터 황해와 평안 각 도의 연안 일대에군량을 준비시키고 전령을 내려 중흥을 도모했던 것이다. 또 요동과 천진등지에 적의 발자국이 들어가지 못한 까닭에 구원병이 육로로 나와 적을 물리친 것 또한 모두 이순신이 이 싸움에 이긴 공이었다. 이 어지 하늘의 도움이 아닐까 보냐!
이 뒤로 이순신은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적들이 서쪽으로 오려는 길을 막았다.(156쪽)
원균은 한산에 부임하자 이순신이 쓰던 전법을 모두 바꾸고, 이순신에게 신임을 받던 부하들을 쫓아 버렸을 뿐 아니라,이영남이 지난번에 자기가 패하던 전말을 모두 알고 있다 하여 더욱 미워하는 등 지휘관답지 않은 통솔을 했다. 이로 인하여 군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자자했으니, 이 사움은 처음부터 승산이 있을 리 없었다.
이순신이 한산에 있을 때에는 운주당이란 당을 짓고 밤낮으로 거기서 모든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의논했을 뿐 아니라 하졸이라도 군사에 관한 의견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와서 군정을 통하도록 했었다. 또 전쟁에 임할 때에는 모든 장수들을 모아 계략을 세운 다음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원균은 이와는 반대로 자기의 애첩과 이 당안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자연 부하 장수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고, 더구나 그는 술을 좋아 해서 날마다 술에 취해 있기 일쑤였다. 그는 술에 취하면 공연한 형벌로 군사들을 못 견디게 하였다. 그래서 병졸들은 서로 쳐다보며,"만일 적병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하고 수군거렸다.
장수들은 장수들대로 또한 원균을 비웃어 마지않으니, 통제사의 위품은 찾을 길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명령이 설 리 없었다.
이때 적병이 다시 쳐들어왔다.
평행장은 요시라를 다시 김응서에게 보내어 허위 정보를 제공하게 해서 "왜선이 모일에 나올 것이니 조선 수군은 이를 맞아 쳐 없애라"하고 꾀었다.
도원수 권율은 이 말을 그대로 곧이들었다. 더구나 지난번에 이순신이 주저하고 나가 싸우지 않다가 득죄한 것을 생각하니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원균을 시켜 즉시 나가 싸우라고 했다. 원균 역시 평소에 적을 보고도 나가지 않은 이순신을 탓해 왔던 터라, 이제 그의 소임을 대신 맡은 마당에 왜적과 싸워 이길 승산은 적으나, 무엇이라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배를 이끌고 군사를 거느려 바다로 나갔다. 이즈음 언덕 위에 있던 왜영에서는 바다로 나오는 우리 배를 내려다보고 그때그때 형세를 일일이 자기네 본영에 보고하여 정세를 낱낱이 탐지하고 있었다.
원균의 배가 절영도에 다다르자 풍랑이 일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날이 저물어 왔다. 배를 대어 쉴 곳도 없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왜선이 출몰하는 것이 보였다. 원균은 제군을 재촉해서 앞으로 나갔다. 군사들은 한산에서부터 종일토록 노를 저어 오느라고 힘이 빠져 피로하고 기갈이 심해 배를 저을 기운도 없었다. 모든 배들이 서로 앞서가다 뒤로 밀려나기도 하고 옆으로 처지기도 하는 등 방향없이 풍랑에 흔들려 가뜩이나 지친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왜적들은 우리 군사를 더욱 피로하게 하고자 거짓으로 가까이 나타났다가 달아나는 체하면서 교전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이때 밤은 점점 깊고 바람은 갈수록 드세어, 우리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찾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 원균은 간신히 남은 선척을 수습해서 겨우 가덕도에 다다랐다. 군사들이 기갈을 참지 못해 앞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을 마시느라 부산했다.
이때 왜병들이 섬 속에 숨어 있다가 일제히 내달아 사로잡으니 이 싸움에서 장병 4백여 명을 잃었다. 원균은 겨우 사지에서 벗어나 거제 칠천도에 이르렀다. 이때 권율은 고성에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급히 원균을 불러 매를 때리고 다시 나가 싸우라 했다. 원균은 군중에 돌아와 홧김에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장중에 누워 버렸다. 더더구나 장수들이 군사 일을 의논코자 했으나 만나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날 밤중에 왜선이 쳐들어 왔다. 원균의 군사는 또다시 크게 패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이 꼴을 당한 원균은 도망쳐 해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올라 비둔한 몸을 이끌고 둔한 걸음을 재촉하였다. 소나무 아래 이르러 잠시 숨을 돌릴 동안에 좌우 사람들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원균이 이곳에서 혼자 있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하기도 하고,혹은 여기서 피해 살아 달아났다고도 전하는데,확실한 것은 알 길이 없다.
이억기는 배 위에서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배설은 원균의 계교가 그르다고 여러 번 간해 오던 터 였다. 이때에도 찰천도란 데가 물이 얕고 협착해서 배를 댈 곳이 못 되니 딴 곳으로 옮기자고 말했으나 원균은 한 번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배설은 생각다 못해 자기가 거느린 배 몇 척을 적병에 대비시키고 있다가 적이 오는 것을 보고 항구를 벗어나 먼저 달아났기 때문에 유독 그 군사만은 화를 면하였다. 배설은 한산도에 다다르자 불을 놓아 군기와 양곡, 여사를 불사르고 남아 있는 섬 주민들을 피난시켰다.
우리가 한산도에서 이미 패하자 적들은 승세하여 서쪽을 향해 쳐들어 가니 남해와 순천이 차례로 함몰되었다. 다시 적선은 두치진에 이르러 육지에 올라 남원을 포위했다. 이 때문에 충청,전라 지방이 일시에 흉흉해졌다.
임진년에 우리나라를 침범한 이후로 오직 수전에서만 여러 번 참패를 당했기 때문에 평수길은 이를 항상 분하게 여겨 왔다. 그는 행장을 책망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분풀이를 하라고 했다. 이에 행장은 김응서를 교묘한 방법으로 꾀어서 이순신으로 하여금 죄를 얻어 파면 당하게 하고, 다시 원균을 유인하여 바다 가운데로 나오게 해서 그의 허실을 낱낱이 탐지해 냈다. 그러고 나서 불시에 원균을 엄습했다. 계교가 그렇게도 간교해서 우리 모두가 그들의 계교에 빠졌으니 슬픈 일이로다.(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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