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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홍콩일까. 잘 정비된 도로와 번쩍이는 고층빌딩, 호화로운 아파트가 있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왜 한 해에도 수많은 여행자들이 홍콩을 찾는 걸까.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떤 곳도 따라올 수 없는 화려함과 함께 평화로운 분위기까지 한데 간직하고 있으니 홍콩을 향한 자유여행자들의 발걸음은 오늘도 계속된다.
거리를 한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활력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오전은 따뜻한 날씨를 즐기고 있는 가족들로 북적댔고, 오후에는 쇼핑백을 주렁주렁 손에 맨 관광객들로 정신없었으며 저녁에는 맥주 한 잔을 손에 쥔 외국인들로 가득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다녀온 홍콩이기에 색다른 모습을 보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발걸음은 어느새 세련된 쇼핑센터와 아름다운 야경이 보이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홍콩에 기대하는 것, 홍콩을 다시 찾는 이유를 떠올려보니 결코 이곳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자유여행자가 되어 도심 속을 거닐었더니 홍콩에 대한 그리움이 꽤나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 돌아온 지 시간이 꽤 지난 오늘까지도 홍콩의 마천루와 마음껏 누렸던 자유를 찾아 서울 한복판을 한없이 허우적거리고 있는걸 보니 말이다.
센트럴 역 주변 풍경. 고개를 높이 들어야만 끝이 보이는 건물과 빨간 택시로 가득하다. |
흔히 ‘소호’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곳은 런던 혹은 뉴욕의 소호. 뉴욕 소호가 사우스 오브 하우스턴South of Houston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면 홍콩의 소호는 사우스 오브 할리우드 로드South of Hollywood Road의 약자로 할리우드 거리 남쪽 일대를 뜻한다. 예술과 패션을 사랑하는 이들의 여행에서 뉴욕 소호가 빠질 수 없듯이 홍콩의 소호 역시 마찬가지다. 할리우드 로드를 비롯해 남쪽 스턴톤 스트리트Staunton Street, 셀리 스트리트Shelley Street 주변에는 독특한 미적 감각을 뽐내는 상점과 각기 다른 취향을 충분히 만족시키고도 남을 만한 볼거리들이 많다. 홍콩 소호거리의 특징은 전 세계 음식점이 한데 모여 있다는 것인데, 특히나 엘긴 스트리트Elgin Street 양 옆으로 늘어선 레스토랑의 대부분은 홍콩 내에서도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란다. 노호North of Hollywood Road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관광객뿐만 아니라 젊고 예쁜 현지인들이 많은 걸 보니 여전히 홍콩에서 가장 핫한 거리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소호의 아기자기한 건물 사이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프린지 클럽. 내부는 크지 않지만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곳으로 홍콩 특별 행정구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다. |
800여 미터에 달하는 긴 에스컬레이터지만 센트럴 역부터 언덕 끝까지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대를 구석구석 둘러보기에 좋다. |
자유로운 분위기에 매료돼 발 닿는 곳으로 가고 싶을 땐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Mid-Levels Escalator를 타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이곳을 가장 잘 둘러보는 방법. 1㎢당 5만 명에서 많게는 8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홍콩 도심에서 가파른 지형과 좁은 공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800여 미터의 긴 에스컬레이터다. 언덕 위에 사는 현지인들에겐 출퇴근 시간을 단축해 주는 훌륭한 이동수단이면서 여행자에게는 홍콩의 세련된 거리를 둘러볼 수 있는 낭만적인 수단. 에스컬레이터의 시작지점에서 노래 한 곡에 반복재생 버튼을 꾸욱 눌렀다. 영화 [중경삼림]의 메인 주제곡 ‘캘리포니아 드림California Dreamin’. 영국 지배 시절부터 중심지였던 센트럴과 소호의 화려한 풍경 사이로 이따금씩 보이는 클래식함과 이토록 잘 어울리는 노래가 또 있을지 싶다. 영화에 등장해 더욱 유명해진 에스컬레이터는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는 홍콩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시작부터 끝나는 지점까지 진지하게 에스컬레이터만 탄다면 총 20분이 걸리지만 이곳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다 보기에는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 하더라도 한참이나 부족한 시간이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시원한 지역을 찾아 언덕에 집을 지었고 그래서 계단도 많다. 하지만 주변이 모두 고급상점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이곳의 특징이다 |
전 세계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소호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모인다. |
넓고 깨끗한 하버시티는 쇼핑을 위한 최적의 공간. |
1881 헤리티지는 쇼핑몰보다는 관광지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빅토리아 양식의 예쁜 건물에는 레스토랑과 브랜드샵 등이 있다. |
스타의 거리에서 포즈를 잡고 있는 아이. |
세계적인 규모의 명품샵이 들어선 캔톤로드. |
다시금 그리워지는 홍콩의 풍경에는 높게 솟아오른 빌딩과 세련된 거리 외에도 느긋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었던 스탠리Stanley가 있다. 도시 중심에서 버스로 40여분 떨어진 곳에 있는 조용한 해안가의 풍경은 화려한 삶을 동경하는 도시여자의 머릿속에도 그만큼 깊이 각인됐다. 소호와 센트럴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고급스러움은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19세기 중반, 영국인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 때 남기고 간 것. 당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이국적인 풍경은 그대로다. 고급 상점과 유럽 명품 브랜드로 가득한 센트럴보다 더 유럽 같은 스탠리의 아침은 한적했다. 그나마 조금 시끌벅적한 곳이 있다면 스탠리 마켓Stanley Market 정도. 그마저도 홍콩의 다른 시장과 비교하면 어색할 정도로 차분하다. 200여 미터 짧은 시장은 다른 야시장과 분위기는 다르더라도 다루고 있는 상품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전에는 마을 주민들을 위한 갖가지 생활용품을 판매했지만 현재는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과 액세서리가 훨씬 많다. 무엇보다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호객행위가 덜해 편안하게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스탠리 마켓의 가장 큰 장점이랄까.
주말의 스탠리는 아이와 산책을 나온 가족이 많다. |
활기찬 에너지로 가득한 스탠리를 보고 싶다면 일요일에 방문하는 것이 제격이다. 모두가 쉬는 날이라 평일보다 사람이 훨씬 많고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현지인이 대부분이라 부유한 해안마을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 서서히 빈자리를 메꿔가는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을 지켜보다가 커피 한잔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작은 마을이니 금방 둘러보고 오겠지' 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계획했지만 여유에 목말라 있던 도시 여자에게 스탠리에서의 산책은 가뭄에 단비이자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중심지로 돌아가는 길 이층 버스의 유리창 밖으로는 빗방울이 흩뿌려지고 있었지만 우산도 없이 다시 스탠리로 향하는 것을 고민했을 만큼 달콤한 그런 산책.
스탠리의 메인 스트릿이라고 해도 좋겠다. 해안 산책로를 앞에 둔 노천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고 점심 때에 가까워질수록 가장 사람으로 붐비는 곳이다. 음식의 가격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싼편. |
결혼 1주년을 기념해 홍콩을 다녀온 친구가 있었는데, 여행 직후 툭 던진 그녀의 한마디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신용카드가 없으면 홍콩에 가는 걸 다시 생각해봐. 그것도 아주 한도 높은 걸로. 거긴 쇼핑을 위한 곳이거든.” 학창시절에는 그 말의 뜻을 몰랐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홍콩에 온 지금, 무언가에 홀린 듯 한도 빵빵한 신용카드를 들고 향한 곳은 카오룽Kowloon반도의 침사추이Tsim Sha Tsui. 평일 낮 한적함을 기대하며 스타페리 선착장에서 불과 3분도 채 되지 않는 하버시티Harbour City 입구까지 의욕 넘치게 달려갔다. 하지만 쇼핑의 천국이라 불리는 홍콩, 그것도 쇼핑의 중심지라 불리는 이곳에 인파가 적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 아니었을까. 소호와 센트럴이 홍콩을 대표하는 화려한 이미지를 지닌 곳이라면, ‘홍콩=쇼핑’의 이미지는 하버시티에서 완성된다. 총 4관이 이어져 있는 거대한 쇼핑타운에는 700여 개의 매장이 들어서 있는데, 저가부터 쉽게 만나볼 수 없는 부티끄 명품까지 우리가 아는 모든 브랜드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쇼핑에 소질 없는 기자는 안내 책자를 가지고 있음에도 몇 번이나 길을 잃고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아 다녔지만 쇼퍼홀릭이라면 길을 잃어도 마냥 행복할 그런 곳이다. 단지 원하는 아이템을 찾으러 가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린다는 게 흠이겠지만 말이다.
스탠리마켓이 좋은 점은 쇼핑을 방해하는 듯한 시끄러운 호객행위가 덜하다는 것. |
해안산책로를 걸으며 맞은 선선한 바닷바람 덕분에 마음에는 여유가 찾아왔다. |
쇼핑의 열기는 캔톤로드Canton Road로 이어진다. 세계적인 규모를 갖춘 수십 개의 명품 매장 앞에서 눈이 휘둥그레져 서있기를 몇 분. 이쯤이면 쇼핑센터는 다 둘러봤다 싶었는데 과거 해양경찰 본부로 사용되었던 1881 헤리티지1881 Heritage도 2009년부터 고급 시계, 주얼리 브랜드를 내세운 쇼핑몰로 탈바꿈했단다. 도무지 쇼핑이라는 키워드 없이 침사추이를 말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지만 사실 쇼핑을 하지 않아도 올 이유는 충분하다. 페리 선착장 근처에는 해안 산책로와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스타의 거리가 펼쳐져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보는 야경은 그저 아름답다고만 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다. 매일 저녁 8시에 펼쳐지는 레이져 쇼, 심포니 오브 라이트에 맞춰 방문한다면 더 큰 감격을 느낄 수 있다. 캔톤로드 뒤쪽 네이던로드Nathan Road에서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낡은 건물과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보던 퇴폐적이면서도 매혹적인 골목을 마주하게 된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루에도 수 만 명의 소비가 이루어지는 쇼핑센터와 녹슨 간판의 철골이 그대로 드러난 거리를 품고 있는 침사추이는 홍콩의 축소판이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보는 홍콩의 야경. 밤뿐만 아니라 일몰 시각에도 사람들로 붐빈다.
홍콩 행 캐세이패시픽 기내, 옆자리에 앉은 현지인 할아버지가 말하길 자신이 홍콩에서 단 한 곳만을 가야 한다면 무조건 빅토리아 피크Victoria Peak로 향할 거라고 했다. 홍콩에서 5년을 산 에어비앤비 호스트 맥스도 빅토리아 피크를 말하며 엄지를 치켜세우기는 마찬가지였다. 높은 건물이 일색인 곳에서 홍콩의 전체적인 풍경을 볼 수 있을 만한 곳을 떠올려보니 역시나 답은 그들과 같았다. 빅토리아 피크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왕복 중 한 번쯤은 피크트램Peak Tram에 탑승하기를 추천한다. 19세기 풍의 빨간 열차는 승객들을 싣고 7분 만에 산 중턱에 도착하는데, 올라가는 길의 경사가 다소 가팔라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다. 피크타워의 옥상 스카이 테라스에 도착하면 눈앞에 펼쳐지는 홍콩의 마천루에 자연스레 탄성이 터져 나온다. 반짝이는 홍콩의 야경이 360도로 펼쳐지니 사람들은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뒷전으로 하고 너도나도 플래시를 터트리는데 열중한다. 아쉽게도 기자가 방문한 날은 비가 온 흐린 날이었지만 안개도 홍콩의 아름다운 밤을 전부 가릴 수는 없었다.
1888년에 만들어진 피크트램은 한때는 언덕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교통수단이었다. 현재는 전기로 운행하지만 당시에는 석탄을 이용했었다고. |
란콰이퐁에 위치한 하드록카페. 이른 저녁에는 사람이 없지만 10시가 지나면 빈자리를 찾기 힘들다. |
화려한 불빛에 취해있다가 보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러나 조금 피곤할지라도 란콰이퐁Lan Kwai Fong으로 가는 계획에는 이상이 없다. 시원한 맥주 한 잔과 가슴까지 울리는 음악이 쌓인 피로를 단번에 녹여줄 테니까. 란콰이퐁에 가기 위해 다시 센트럴 역에 도착. 낮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활력 넘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1980년대 노천 카페를 시작으로 하나 둘씩 식당과 카페, 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홍콩에서 열정적인 밤을 즐기기에 이만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크게 발전했다. 문이 없는 노천 술집에서는 맥주 한 병을 든 외국인들이 리듬에 맞춰 술잔을 기울인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은 것은 축제에 온 것 같은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오래된 친구처럼 말을 건네는 이들 덕분. 초저녁에는 사람도, 문을 연 클럽도 많이 없으므로 빅토리아 피크에서 야경을 보고 란콰이퐁으로 넘어오는 것이 좋다. 금, 토요일이면 새벽까지 영업하는 곳이 대다수이므로 한국에서 홍대나 이태원에서 불타는 주말을 보냈던 이들이라면 고민할 필요없이 란콰이퐁이다. 몸은 지치더라도 홍콩의 밤 앞에서는 없던 불면증도 생겨난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는 시간까지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잠들지 않는 도시, 홍콩만이 가진 특별한 힘이다.
홍콩의 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면 첫째, 센트럴 역으로 간다. 둘째, 역에서 나와 직진한다. 셋째, 주저 말고 란콰이퐁의 펍으로 향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