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녀(狂女) 메나데스의 웅변
─『천문』(창비, 2010)
조연호
밤의 허공이라는 압연기(壓延機) 밑에서 교양의 노래가 들려온다하여도 나를 원하고 있고 내가 원하는 신분들은 어느덧 자신의 교양보다 못한 분쇄에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또 다른 진의가 자기 무지의 한계에서 인육극의 한계로, 또 다른 형상이 입체의 한계(메논)에서 평면의 한계로 치솟는다고 여기는 영광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교양의 노래가 아직 신과 그 외 피조물들에게조차 비웃음을 받으며 사색하기를 원할 때마다 인간의 몸은 자기 척도가 없는 무너짐을 반복하는 것으로 자신의 고결에서 조금씩 떠나는 명예로운 야만을 하는 것이다. 한편, 교양에 대한 탐독은 전적으로 ― 시와 같은 방식으로 ― 자기의 과제와 임무가 무엇을 이행하는지를 유혹적으로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일반적 질문을 완성해왔다. 그러므로 죄를 끌어안지 못한 자가 사색과 명상을 더 절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 생각이 눈부시게 자연의 회의능력을 부추겨주고 있다는 생각 너머로 자기 생각을 밀고나갈 수는 없다고 믿는 악의 그런 무능력이 한 시인에게는 일용적 교양이 되는 것이다. 어느 날의 악마들이 그러했듯 신은 나를 단 한 번도 유혹하지 않는 것으로 나를 지옥에 발 딛게 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무관심조차 신과 악마에 의해 협조적으로 밤하늘을 자신의 각성보다 더 끔찍한 것으로 만들었노라고 칭찬하느라 모든 시간을 우월에 쏟아붓는 배반으로 자아에 희생당하지 않았던가! 난곡(難曲)이기 때문에 하늘이 노래에게 패배의 징조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면, 묘지가 되어가는 이 교양과, 밤과 낮의 결혼, 사색과 염상(念想)으로 재주 부렸던 곡예 앞에서 우린 어떻게 경련해야 하나. 그렇게 장애물은 가장 우아한 방법으로 시라는 불구의 놀이에서 벗어난다.
강신술은 기억이 관여한 흔적을 따라 범람하기 위해 이 계절에 찾아와 우리를 낙종(落種)했다. 그 밀보리가 모두 허공에 떠서 검게 다가오는 천궁의 수확철을 자기 양육자의 과녁에 결코 빗나가지 않게 하는 죽음을 하고 있다. 영세(領洗)가 나의 사색을 중독된 탯줄로 망쳐놓고 있으니, 낭독하는 사람이여, 너는 학식의 종말을 슬프게 바라보는 마지막 사원(寺院)이 되기 위해 두 눈을 뽑아 허공에 던지는 이중주를 재건한다. 진실된 결투를, 일방적인 성실을,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자들의 세계와 겨뤄왔다. 광녀 메나데스가 말했다. “첫 시집은 첫 번째 죄 같았는데, 이것은 벌써 세 번째 죄. 내 얼굴에 베이지 않도록 나는 조심해야 한다. 자기 목 대신 악절(樂節)을 끊어버린 처량한 악사의 오류처럼, 전혀 소망하지 않는 귀가 탄생했으니 갈대여 발작하여라. 진정한 밤의 일향(一向)으로 뿌리 뽑혀서 백작이나 남작이 더듬을 거라 믿었던 나의 천족(賤族)아, 검음을 해변으로 칠하고 거기에 뛰어들어 익사하여라.” 그렇게 말한 여자에게 나라는 고함꾼이 있었다. 지혜의 고독 속으로 도피해 버린 당신을 쫓기 위해 나는 당신 산후(産後)의 일부를 기다려왔다. “죽은 사람에게 자기 아름다움을 보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자기를 돌려보내려 하지 않으리라, 심지어 죽음에게조차 세상은 여러 개의 색지를 붙이고 나타나 색깔이 아닌 힘으로 번식하는 모든 빛의 종식을 음미하게 될 터이니, 이제 인간은 신의 전신으로 밤을 닦아내고 돌아오리. 물론 나는 비겁하고도 일방적인 전능함을 나의 지옥에 선고한다.”
전염병은 새로운 서사시적 은폐였다. 이것은 환자라는 신체적으로 동일한 장소에 타인을 상상으로 넣어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에 대한 질투를 유발하게 했고, 더불어 뽑힌 눈은 잠깐 동안 순(順)과 잡(雜)의 애정을 자신의 서품에 펼쳐놓았으며, 지금껏 이성을 괴롭힌 지성을 당신의 성부에 올리며, 이런 구원일지라도 덜 익은 피조물로 빛을 기다리듯 나의 병은 단지 잠깐이라도 추물 가까이 성육(成肉)을 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로 다가가는 시기를 유족의 쌀뒤주 속에 내던져진 새로운 쌀벌레의 정신이라 부를 것이다. 이것이 옳지 않다면 타인의 귀신을 귀신의 타인으로 바꾸는 창조가 나에게 멈춘 심장을 달아줄 것이다. 돌로 치라!는 최고의 작품이 당신에겐 너무 경건하다하여도 우리의 교양은 아직 미천함의 관조로 채워진 것이니, 오, 피로 덧입은 나의 이마는 저녁을 목말라 죽게 하리라. 인간의 적을 인간의 글자에게서 찾는 목마름으로 청중의 기쁨을 낮추리라. 여름 숲은 수많은 자조와 회의를 그늘 뒤편에서 들려오게 하고도 지치지조차 못하는 슬픈 입으로 으깨어지는 이러한 영광을 연습하러 왔다. 당신의 무분별은 정녕 아름답군요, 손을 잡아주고 싶은 잔인들아, 너희는 내게 결투를 신청하러 저녁놀 아래 모였다. 맷돌로 밤을 가루로 만들고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던 시대의 열정에게 칼질이 베풀어졌다. 그러한 위협 아래 고함꾼이 있었다. 청동기의 비극처럼 질그릇 가면을 쓰고 메나데스가 불러버렸던 미래의 비탄 속에서 그는 눈을 까뒤집고 고요히 사색했다.
조연호
충남 천안 출생.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 『저녁의 기원』, 『천문』.
―『시에』2010년 가을호
첫댓글 읽으며 경련하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