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 | 일과 |
06:00 ~ 06:10 | 기 상 |
06:50 ~ 07:00 | 출 근 |
07:00 ~ 07:30 | 독 보 회 |
07:30 ~ 08:00 | 작 업 준 비 |
08:00 ~ 12:00 | 오 전 작 업 |
12:00 ~ 13:00 | 점 심 |
13:00 ~ 14:00 | 오 침 |
14:00 ~ 18:00 | 오 후 작 업 |
18:00 ~ 19:00 | 작 업 총 화 |
19:00 ~ 22:00 | 학습회 및 강연 |
22:00 ~ 23:00 | 퇴 근 |
※ 퇴근 후 한잔 하기 (박스처리)
남한의 노동자들처럼 북한의 노동자들에게 하루 일과 끝난 후 술 한잔은 고된 육체적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중요한 청량제와 같은 것이다. 북한주민들에게 술은 일상적으로 즐기는 기호식품으로 남쪽 사람들이나 북쪽 사람들 모두 술마시기 좋아하는 것은 공통적인 민족적 습성인 것 같다. 특히, 술은 주민들 간의 친선도모를 위한 중요한 매개체로서 남쪽 사람들이나 북쪽 사람들이 주고받는 술잔 사이에서 정이 쌓이는 것은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북한에는 남한처럼 상업적으로 운영하는 술집이 흔치 않기 때문에 대부분 주민들은 각자의 집에서 사람들을 초대해 술을 마신다. 지난 2000년 노동당 창건 55주년(10.10)을 기해 평양시 세 곳에 선술집을 개점한 데 이어 앞으로 평양시내 300곳에 `생맥주 판매소'의 문을 열 예정이다. 이렇게 북한에 선술집이나 생맥주집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통하여 주민들의 생활여유가 다소 나아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주민들은 우리 남한에서처럼 집집마다 각종 열매를 이용하여 술을 담궈 마시거나 국가가 배급하는 각종 대중 술들을 주로 소비하고 있다. 대표적인 대중술은〈평양소주〉와 <대동강소주>가 있다. <평양소주>는 옥수수 73%, 입쌀 25%, 기타 찹쌀과 보리를 원료로 하고 평양지방의 지하천연수를 이용해 제조되고 있으며 주정은 25%이다. 소주 한병의 값은 종래에는 국정가격으로 1원80원 정도이었으나 7.1경제개선조치 이후에 1리터에 43원으로 인상되었다.
소주 못지않게 맥주 역시 소비가 날로 증가할 만큼 인기가 높다. 현재 평양맥주공장과 룡성맥주공장 등 4∼5곳에서 맥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룡성맥주>가 유명하다. 최근에는 평양시 사동구역에 건평은 2만㎡에 종업원 수가 총395명에 이르고 연간 7만㎘의 생산능력을 갖춘 대동강맥주공장이 2002년 11월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서 평양시의 150여개의 생맥주집에 생맥주를 공급하고 있어 퇴근길에 오고가는 주민들의 발길을 잡고 있다. 맥주산업은 2001년 8월 러시아를 방문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발티카' 맥주공장을 방문하면서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3) 생산의 생산체계
북한의 생산체계는 아래부터 작업반→직장→분공장→공장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이 공장․기업소가 여러 개 묶여 연합기업소를 구성한다. 분공장은 자체적으로 1개의 상품을 만들어 공장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도 하고 근로자들의 생필품 같은 것을 만들어 공급하기도 한다. 분공장 아래에는 여러 개의 직장이 있고 직장은 다시 4~5개의 작업반으로 나뉜다. 보통 작업반은 25~30명 정도, 직장은 100여명, 분공장은 200~300명으로 구성된다.
공장․기업소의 생산체계에서 가장 기초 단위인 작업반은 작업반장 및 6∼7명의 생산담당 책임자, 출근 및 노임 담당자, 공구 담당자, 절약초소원, 생산문화 담당자, 안전 및 검사원 등을 두고 있다. 그러나 협동농장의 경우는 기초 생산단위가 공장과 기업소처럼 작업반이 아니라 분조이다. 즉, 협동농장의 작업반은 공장과 기업소의 직장과 같은 위치에 있으며, 분조가 공장과 기업소의 작업반 역할을 한다. 또한 작업반에는 원칙적으로 관리자을 두지 않으나, 협동농장의 작업반에서는 공장과 기업소의 직장과 같이 관리자가 작업반장과 함께 통계원과 기술지도원을 가지고 있다.
작업반의 형태에는 전문작업반과 종합작업반이 있는데, 전문작업반은 같은 직종의 생산자들로 조직된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공장과 기업소, 협동농장의 축산, 공예작물 재배 부문 같은데서 조직된다. 종합작업반은 기본직종 생산자들을 중심으로 연관된 여러 직종의 생산자들로 함께 조직된 것으로, 탄광, 광산과 건설 기업소, 농업생산 부문에서 흔히 조직된다.
4) 생활비
북한은 근로자의 임금을 ‘생활비’라고 부른다. 생활비는 기본노임, 가급금, 상금 및 장려금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노임은 직종과 소속 산업부문, 노동부류에 따라 정액 임금제와 도급임금제로 구분된다. 각각 공통적으로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 차등화되어 있다. 가급금은 기본노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속연한, 특수 노동조건, 기술자격 등이 고려되어 추가되는 임금이다. 상금은 국가가 특별히 설정한 일정한 지표를 달성한 집단이나 개인에게 지급하는 추가적 생활비다로, 우리로 치면 일종의 보너스이다. 장려금은 노동의 양과 질, 설비, 이용률을 높여 생산을 정상화하면서 생산계획을 초과달성 했거나 자재를 합리적으로 이용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지불하는 추가적 생활비로, 일종의 포상금과 같은 것이다.
생활비는 원칙적으로 도급임금제의 적용을 받는다. 다만 노동정량을 정확히 계산할 수 없거나 노동의 결과를 수치적으로 평가하기 힘든 부문의 근로자는 정액임금제를 적용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무원들은 정액임금 근로자이다. 물론 정액임금제에서도 작업한 노동시간과 기능, 기술, 자격정도에 따라 기본노임 액수가 다르다. 그러나 사무원 중에서 당 관료, 행정기관의 사무직 종사자의 경우에는 정액 임금제의 적용을 받고, 기관․기업소의 관리자나 사무직의 경우는 소속 직장의 생산직 종사자의 도급임금에 준하여 지급하는 도급임금제의 적용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와 사무원과 달리 협동농장 농장원들의 기본노임은 결산분배에 의해 현물과 현금으로 지불받는다. 다만, 국영농장 농장원들은 일반노동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결산분배대상에 해당되지 않고 국가로부터 매월 생활비를 받는다. 결산분배 통상 추수와 탈곡이 끝나게 되는 11월 이후에 실시된다. 분배 몫은 협동농장 총수입 중에서 국가납부 생산비를 공제한 다음 협동농장자체 공동 축적기금과 각자 일년간 작업에 참여한 노력일 총수에 따라 분배된다.
북한은 사회주의정권 수립 직후인 1949년 내각결정 제196호를 통해 임금기준을 정했는데, 일반적으로는 경노동보다는 중노동일수록 더 많은 임금을 받도록 되어 있다. 또한 대체로 사무직이 기술직보다 임금수준이 낮다. 이러한 원칙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북한당국은 이미 일찍부터 대충 일하고도 매월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과 똑같은 생활비를 받아가는 소위 ‘건달’들을 양산시키는 ‘평균주의’적 분배에 대해서 비판하며 ‘일한 것만큼, 번 것만큼’이라는 분배의 원칙을 지키도록 각 공장과 기업소에 지시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배의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국가가 임금을 유일적으로 통제하고 있고 보수체계의 물질적 유인이 부족하며 평균주의적 분배 관행이 쉽게 사라지지 않아 결국 노동생산성의 저하와 생산목표의 차질을 초래하게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북한당국은 드디어 지난해 개혁의 칼을 뽑아들고 기존의 경제관리체계를 대대적으로 손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해 ‘7.1조치’ 이전의 북한 노동자의 평균 생활비는 매월 80∼100원(기준환율로 남한의 36,400∼45,500원) 정도이었다. 그러나 ‘7.1조치’에 의해 인상된 물가에 맞춰 근로자들의 생활비도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다. 인상폭은 기존 생활비에 대비하여 평균 18배 정도로 인상되었다. 따라서 한 가정에서 평균 2명 정도 일하는 것으로 보고 노동자, 사무원 한 사람의 한 달 생활비는 평균 2000원 정도이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기술자, 고급 기능공, 과학자, 기술자들의 생활비는 더 높게 책정되었다. 특히, 이번 생활비 개정에 의해 탄광, 광산을 비롯하여 어렵고 힘든 부문에서 일하거나 국가의 전략물자들을 생산하는 근로자들 경우에는 생활비를 20~25배 정도 더 높게 책정되었다.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기사와 연구사, 설계원, 대학교원 등 전문가들의 생활비는 17배 정도로 책정되었다. 또한 사회적으로 과학기술중시 방침에 따라 새로운 과학기술로 경제발전에 공헌한 경우에는 그 가치에 따라 3년동안 그 연구자와 연구집단, 해당 단위에게 자금을 지원케 하였다.
농민들도 과거에 노력일수에 따라 분배하던 것을 없애고, 농장에 나가 실제로 자신이 낸 성과물에 따라 분배평가를 받게 하였다. 또한 농업생산을 빨리 늘리기 위해 국영농장의 농민들의 한 달 생활비는 평균 2300원 정도로 노동자, 사무원들보다 더 높게 책정되었다.
군인의 생활비는 선군시대의 요구와 사기 진작의 필요성에 의해 25배~31배까지 가장 큰 폭으로 인상되었다. 특히, 적과 직접 대치하여 경계근무를 수행하는 군인들과 중요부문,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든 부문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의 생활비는 일반 병종부문 군인들의 생활비보다 더 높게 책정되었다.
중앙일보가 최근에 공개한 7.1조치 이후 북한의 ‘노동자 생활비 기준표’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서 고액의 임금을 받는 계층은 굴진·채탄, 제철·제강·제련, 카바이트·농약·인조섬유 생산 등의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로 고급기능 보유자의 경우 굴진·채탄 노동자는 5천6백80~6천원, 제철·제강 노동자 4천8백40~5천2백50원, 카바이드 생산노동자 4천5백80~5천원, 화력발전소 보일러 운영 노동자는 4천4백50~4천7백80원으로 북한 노동자의 평균 임금(2천원)보다 약 2~3배의 고임금을 받고 있다.
이에 반해 경공업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훨씬 낮은 임금을 받고 있다. 특히 노동자 임금은 같은 직종이라 할지라도 기능의 유무나 차이에 따라 약 30%의 격차가 났다. 예를 들어 탄광 측량 노동자의 경우 무(無)기능자는 1천4백20~1천8백60원, 기능자는 2천3백~2천7백40원, 고급기능자는 3천1백80~3천4백원으로 차이가 있다.
또 최근 북한당국이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정보기술(IT)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고급기능을 보유한 컴퓨터 운영노동자의 임금이 1천7백60~1천9백원에 불과해 예상했던 것에 비해 낮은 편이었다. 이는 비록 촉망받는 IT분야 관련 기술자일지라도 기본적으로 육체노동이 아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전반적인 근로자들의 생활비 인상에 의해 더 이상 생활에서 ‘공짜’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북한 주민들은 생활의 전반을 국가에 의존하였지만 이제 7.1개선조치 이후 북한의 근로자들도 자신이 번 돈으로 식량부터 모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서 써야 하게 되었다. 가령, 기존에는 근로자들의 실질 생계비에서 식량값이 차지하는 몫이 불과 3.5%밖에 되지 않았다면, 이제 식량값이 차지하는 몫은 50%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이제 북한의 근로자들도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고 많은 성과를 내어야만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국가의 복지혜택마저 줄어든 것은 아니다. 7.1개선조치이후에도 무상 치료제, 무료 의무교육제, 사회보장제, 영예군인 우대제 등의 사회적 시책들은 계속 실시되고, 오히려 연금이나 생활보조금은 인상되었다. 또한 고아나 가족이 없는 노인들을 데려다 부양하는 세대들에는 부양자 1명당 매달 300원 정도의 보조금을 더 주며, 아이들만 사는 세대, 자식없이 노인들만 세대, 부부가 모두 아파서 일할 수 없고 아이들만 있는 세대에는 가족 1명당 한 달에 600원 정도의 생활보조금을 주도록 하고 있다.
<‘7.1조치’ 이후 북한 노동자의 생활비 기준표> 단위: 원
부문 | 생활비(최하-최고) | 부문 | 생활비(최하-최고) |
석탄공업 | 1420-6000 | 자동차운수 | 1100-3000 |
광업 | 1400-5520 | 농업 | 1100-2480 |
임업 | 1330-3500 | 수산업 | 1100-3800 |
금속공업 | 1210-5250 | 해운 | 1100-4100 |
전력공업 | 1140-4780 | 체신 | 1100-2340 |
기계공업 | 1140-3600 | 혁명사적 | 1100-2660 |
전자공업 | 1140-2400 | 문화 | 1000-2490 |
화학공업 | 1210-5000 | 양정 | 1000-1800 |
경공업 | 1100-2800 | 도시경영 | 1000-2100 |
건설․건재공업 | 1100-3600 | 국토관리 | 1000-1900 |
제약공업 | 1100-3720 | 상업 | 1000-1900 |
인쇄공업 | 1100-2100 | 급양 | 1000-1800 |
철도운수 | 1100-4000 | 편의(서비스) | 1000-2160 |
5) 생활총화
북한의 집단주의를 지탱케 하는 조직생활에는 크게 강연회, 학습회, 생활총화가 있다. 학습은 김일성의 혁명노작과 사회주의 등을 공부한다. 강연회는 당의 유일 체계를 튼튼히 세우고, 당 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당 선전 사업이다.
생활총화는 모든 기관, 단체별로 진행하며, 주 생활총화, 10일 총화, 월 생활총화, 분기별 총화, 연 생활총화 등이 있는데, 생활에서 나타난 자신의 결점과 과오를 스스로 비판하고 비판받는 자리이다. 주 및 월 총화는 초급단체별로, 분기와 연 총화는 조직별로 진행하며, 10일 총화는 모든 단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농업근로자동맹과 같은 사회근로단체들에서 실시하고 있다.
생활총화는 구성원 100% 참석을 원칙으로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과 결부한 사상 토의, 참석자들의 자기비판 및 상호비판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절차와 진행방법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생활총화 토의결과는 직속 상급단체에 보고된다. 초급단체별로 진행하는 생활총화는 참가인원이 많을 때는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비서, 부비서 주관하에 2-3개조로 나눠서 진행되기도 한다. 총화 시간과 장소는 단체와 조직별로 상황에 맞게 진행하는데, 초급단체별로 진행되는 주 및 10일, 월 총화는 통상 30분-1시간, 조직별로 진행되는 분기, 연 총화는 한나절에서 하루 정도 진행된다. 출장, 휴가, 휴양, 요양 등 각종 사유로 생활총화에 참석하지 못할 때는 현지에서 진행하는 총화에 참석토록 하고 있다.
6) 직장내 여가생활
북한 노동자들이라고 하루종일 일만 하고는 살 수 없다. 직장에서의 여가생활은 힘든 노동의 피로를 해소시켜주고 즐겁게 노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청량제와 같은 것이다. 북녘의 직장내 여가생활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북한당국의 1인1기 문화교양사업 덕분에 노동자 대다수는 악기를 다룰 줄 알고 춤과 노래를 즐기기 때문에 직장에서 함께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다. 매주 수요일을 ‘문화의 날’로 정해 취미, 오락생활을 하는 직장들도 많고 평양 청년문화회관에서는 주말마다 무도회가 열린다. 또 문화회관에는 탁구대, 장기판 등이 마련돼 있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탁구를 치기도 하고, 명절엔 직장 대항 탁구시합을 가지기도 한다. 축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노동자들의 가장 인기있는 여가생활 중 하나로서, 축구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인기는 대단해 북한의 성인 축구팀은 4․25팀, 평양시팀, 압록강팀 등 42개나 되며 일반 대중적인 팀까지 포함한다면 2천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여자 축구팀도 평양에만 6개나 된다.
또한 직장에서 한달에 1~2회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기도 한다. 영화 관람 외에 교예 관람도 인기가 높다. 종종 나가는 합동야유회도 제마다 장기를 자랑하며 즐기는 직장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국제노동자절(5․1절)은 노동자들에게 일년중 최고의 축제일이나 마찬가지로 이날에는 각종 경축행사가 진행되고 축제 한마당이 펼쳐진다. 각 공장, 기업소마다 5․1절을 기념하는 그림판이 세워지고 모두가 어울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달리기, 씨름, 밧줄 당기기 등 다양한 체육 오락 경기를 여는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TV에서도 이날만큼은 5․1절 행사 소식으로 채워진다.
한편, 80년대 이후 일반 오락 붐과 함께 대중 체육 보급에서도 변화가 나타나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쿠바와 중국 다음으로 북한이 야구와 소프트볼을 도입하였다. 88년 10월 남포시에서 처음으로 전국야구대회가 열렸고, 91년 6월 일본의 니가타시에서 열린 5개국 국제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92년에는 김일성 주석의 80회 생일에 맞춰 평양에 전용구장이 완공되었다. 이외에도 94년 2월 14일 볼링과 수상스키, 수영, 전자오락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종합 레저스포츠 시설인 ‘낙원관’을 완공하는 등 북한 주민들의 체육․오락생활이 다채롭게 변화하고 있다.
7) 휴양소
북한에는 모범근로자를 선발해 직장 및 협동농장별, 가족별로 포상휴가 성격으로 일정기간 동안 휴양소를 이용토록 하는 ‘정․휴양제’가 있다. 휴양권 및 정양권은 각 직장마다 일정량이 배정되나 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노력영웅이나 모범근로자 또는 열성당원들에게 우선적으로 배정된다. 정․휴양에 관한 인원배정은 조선직업총동맹(직맹)에서 하고 있으며, 대략 100여명의 종업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직장은 분기마다 2-3명정도 배정된다. 휴양기간은 5일, 15일, 20일, 30일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보통 2주간의 휴양권을 많이 이용한다. 휴양권을 배정받으면 정기휴가는 갈 수 없다.
전적으로 국가비용으로 이루어지는 휴양소 시설은 현재 가족휴양소, 농민휴양소, 군인휴양소 등 전국에 110여개가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대동강 휴양소, 묘향산 가족휴양소, 고방산 휴양소, 김정숙 휴양소 등이 있다. 이들 휴양소는 대개 목욕탕, 한증탕, 오락시설, 체육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일부 휴양소의 경우에는 당 간부와 일반 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구분돼 있기도 한다. 휴양소에서의 생활은 지정된 일과표에 따라 진행되며, 아침 6시에 기상, 밤 10시에 취침하며 급식은 다른 곳과 비교해 질적, 양적으로 좋은 편이다.
최근 북한은 대대적으로 휴양시설을 신축 및 확충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2001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휴양소, 정양소, 병원들을 비롯한 문화후생 및 보건시설들과 현대적인 살림집들을 더 많이 건설하여 노동자, 농민들이 그 덕을 보게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이에 따라 내각은 동년 1월에 전원확대회의를 열어 휴양소ㆍ정양소 등 문화복지시설 건설을 경제과업의 하나로 설정하고 휴양시설 신축 및 확장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휴양소의 관리ㆍ운영 및 건축은 북한 내각 노동성 휴양관리국에서 맡고 있다.
8) 컴퓨터 배우기
우리 사회에서 컴퓨터를 모르고는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들 듯이 북한에서도 컴퓨터 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뜨겁다. 노동신문 등 북한의 모든 언론매체들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컴퓨터 관련기사를 게재하고 있고, 각급학교나 기관들에서는 ‘컴퓨터학습의 날'까지 만들어 컴퓨터교육을 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이러한 컴퓨터 열풍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사고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컴퓨터 기술과 같은 선진과학기술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경제재건이 어렵다는 현실 인식 아래 ‘21세기는 컴퓨터시대’라고 규정할 만큼 정보화 산업을 선도산업으로 육성해 나가고 있다.
북한 언론매체들에 의하면, 각급 연구기관들과 각지의 공장, 기업소 등 모든 생산현장에 컴퓨터가 도입되어 생산과 경영활동에 크게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산․경영활동에서 컴퓨터 도입은 기술적 공정에서뿐 아니라 ‘일(日) 생산총화'와 ’일 재정총화', 그리고 자재소비 및 자재 입․출고 정형들을 파악하는데도 모두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각 공장․기업소의 일군들은 실생활에서 공장 노동자들에게 컴퓨터에 대한 지식을 넓혀주기 위한 기술학습계획을 단계별로 세워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과학원 산하 컴퓨터 과학연구소 등 각급 연구기관의 연구원과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희천공업대학 등 각 대학의 교원, 연구사, 학생들이 각지 공장. 기업소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파악해 연구를 추진하거나 생산현장에 직접 나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기술도 지도하고 공장. 기업소의 기술개건을 위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또한 노동자들이 다니는 공장대학에서도 최근 컴퓨터 교육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실례로, 대안중기계연합기업소 기능공과 근로자들이 다니는 대안공업대학에서는 컴퓨터 전공학과를 신설하여 교육의 전 과정을 컴퓨터로 진행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매년 2회 이상 공장기술자들에게 컴퓨터 재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제 북한에서도 남한에서처럼 ‘컴맹’인 자는 살아가기 힘든 시대가 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북한에서 컴퓨터 보급이 급속도로 확대됨에 따라 이와 관련한 직업병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오랜시간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사용하는 근로자들 사이에서는 허리통증 등을 호소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어, 월간 '천리마'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척추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컴퓨터 산업과 관련하여 ‘컴퓨터 조종운영기사', ‘컴퓨터 타자수', ‘컴퓨터 프로그램 작성원' 등과 같은 새로운 직업들이 등장하였다. ‘컴퓨터조종운영기사’란 자동화된 생산공정 전반을 지휘조정하는 사람이며, ‘컴퓨터 타자수’는 컴퓨터 조작자, ‘컴퓨터 프로그램 작성원'은 프로그래머를 말한다. 이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지능 노동’에 종사하는 근로자들로 불린다.
9) 공장대학
북한은 사회의 모든 성원들의 문화지식 수준을 대학졸업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한다는 ‘온사회의 인테리화’ 정책에 따라 고등교육기관을 대대적으로 늘이고,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를 확립시켰다. 이러한 인텔리 정책과 교육방침에 따라 1951년 7월에 첫 공장대학이 설립된 이후 현재 규모가 비교적 큰 공장, 기업소들에 100여개의 공장대학들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공장대학은 해당 공장이 책임지고 관리운영하며, 교육내용에 대한 중앙이 통일적 지도는 맡아한다. 공장지배인은 대학의 학장을 겸임하고 공장의 유능한 기술자, 전문가들이 겸임교원으로 사업하며 전임교원들도 배치한다. 공장은 또한 대학생들의 실험실습조건으로 보장하고 있다. 공장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생산에 종사하고 있는 실정을 고려하여 강의를 조직하며 이론교육에 큰 비중을 돌림으로써 이론교육과 실천교육을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학사편제는 본학부와 예비과 및 관리일꾼 양성반 등으로 나뉘며, 본학부와 예비과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지망학과와 동일직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를, 관리일꾼 양성반은 중학교 졸업한 공장의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모집한다. 수업은 학생들의 작업교대에 따라 주,야로 나뉘어 2부제로 운영, 수업일수는 본학부와 예비과는 주 5일, 관리일꾼 양성반은 주4일로 되어 있고, 1일 강의는 90분씩 4회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10) 금요노동
북한은 1970년대 후반부터 당ㆍ정 간부 및 사무원들을 대상으로 매주 1회씩 금요일에 의무적으로 육체노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금요노동’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금요노동 때에는 간부들도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 건설장 등에 나가 일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땅도 파고 짐도 나른다. 이것은 사무실의 근로인테리들이나 고위직 간부들과 같이 정신노동을 주로 하는 사람들에게 혁명의 주력세력인 노동자 계급의 육체노동의 의미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계급정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금요노동은 일찍이 전후복구사업 시기에 고급간부들도 전부 노동현장에 나가 인민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던 전통에서 기인한다. 노동일수는 통상 연 4∼6주로 되어 있으며 노동에 대한 보수는 없다. 금요노동과 관련된 조직사업은 직맹에서 관할한다. 또한 분기에 한번씩 ‘금요노동경쟁총화’라는 것을 하여 우수한 단위들에 상품을 주기도 한다. 이때 상품 구비에 따른 재정은 직총중앙위원회의 문화사업비에서 충당한다.
70년대 말 김정일이 당중앙위 조직담당 비서 겸 선전선동부장으로 있을 때 중앙기관 책임간부들이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며 금요노동에 나가지 않거나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가 하면 일부 단위에서 한낮때가 다 되여서야 작업장에 도착하여 별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 되면 일찍 집에 돌아가는 등 금요노동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금요노동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강조한 바 있다. 금요노동에 나갈 때에 간부들이 자동차를 타고가거나 뿔뿔이 흩어져 가지 않고 대열을 지어 깃발과 구호판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며 가게 하였다. 또한 이때 당․정 간부들뿐만 아니라 문화예술부문, 과학부문의 간부들, 공장․기업소의 사무원들도 모두 금요노동에 참여해야 하며, 심지어 출장자들도 해당 출장 지역에서 금요노동에 참가하도록 하는 등 금요노동의 실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의사는 금요노동에서 유일하게 제외되었다.
특히, 90년대 들어서는 매년 첫 번째 금요노동에 즈음해 각종 선전매체들을 동원하여 당ㆍ정 간부 및 사무원들이 금요노동에 참여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함으로써 인민들에게 노동의욕을 고취시키고 있다. 북한의 언론매체들에 의하면, 최근 당․정 간부들과 사무원들은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건설’과 ‘토지정리사업’ 등에 금요노동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지원노동을 하였다.
11) 봉사활동
우리로 치면 서비스활동을 북녘에서는 편의봉사활동이라고 부른다. 특히 1984년 김정일이 발표한『인민생활을 더욱 높일데 대하여』가 발표된 이후 80년대 중반부터 인민생활 분야에 많은 관심이 기울여짐으로써 편의봉사부문, 즉 서비스 부문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지금의 내각에 해당되는 정무원에 인민봉사위원회가 있어 주민들에게 위생, 가공, 수리, 미용․이발 등 각종 서비스 시설을 제공하기 위해 전국 시·군마다 ‘편의봉사 관리소’를 두었다. 편의봉사 관리소는 1개소당 15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임자(지배인)는 거의 대부분 여자들이다. 관리소 운영은 독립채산제(독립경영)에 따른다. 즉, 소속 종업원들은 연간 금액으로 정해진 목표계획에 의한 ‘도급노동제’에 따라 자신의 월 생활비을 받는다. 따라서 동일한 편의봉사 관리소에서 동일한 직종에 종사한다고 해도 받는 노임이 다르다. 7.1조치 이후 노동자 생활비 기준표에 따르면 편의봉사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월생활비는 1000~2160원 수준이다.
대표적인 편의봉사시설은 평양시 보통강구역 위치한 ‘창광원’으로 대중탕·독탕·가족탕·한증탕 등 목욕탕과 수영장, 미용실, 청량음료점, 의무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하루에 1만명 정도가 이용가능하며 수영장만해도 2천여명을 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이다. 7.1조치 이전에 목욕 및 이발 요금은 2원이었다. 북한에서는 목욕탕뿐 아니라 이ㆍ미용실, 양복점, 사진관, 청량음료 판매점 등 종합적인 편의봉사시설을 갖춘 대규모 대중목욕탕에 ‘원'(院)자를 붙인다. 창광원외에도 평양에는 ‘어은원’ ‘락랑원’ ‘문수원’ ‘북새원' 등이 더 있다. 창광원이 개원된 이후 각종 탕과 종합 편의시설을 잘 갖춘 ’창광원식 목욕탕'을 평양과 지방 각지에 대대적으로 건립하여, 현재는 약 200여개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와 협동단체에서 운영하는 편의봉사 외에도 84년 김정일의 발기로 시작된 ‘8.3인민소비품생산운동’을 계기로 ‘가내편의봉사업’이 활발하게 조직되었다. 이것은 직장에 다니지 않고 집에 있는 가정부인들과 은퇴한 노인들로 하여금 인민들의 생활상 편의를 제공하게 하고 그들에게는 부수입을 얻도록 하는 목적에서 시작한 개인부업의 한 형태이다. 가내편의봉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내편의봉사원이라고 한다. 가내편의봉사원은 주변의 폐기물, 재활용품, 유휴자재, 농산물 등을 이용하여 인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일용잡화나 가재용품, 부식물들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기술을 이용하여 수리․수선 등을 하거나, 미용․세탁 등을 하기도 한다.
12) 출장
일반노동자들은 출장이 거의 없지만 각 기관 및 공장․기업소의 간부들의 출장은 잦은 편이다. 특히 ‘군중에게로 들어가서 군중의 소리를 듣고 군중으로부터 배우는’ 군중노선에 따라 중앙단위에 있는 간부들은 수시로 생산현장에 내려가서 현실 정태를 파악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보고․처리해야 한다. 또한 아래 단위의 간부들도 해당 단위의 생산에 걸리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나 강습회, 각종 회의 등에 참석하기 위해 자주 출장을 간다.
출장을 갈 경우에는 반드시 소속 사회안전부에서 발행하는 통행증과 출장지에서 매식할 수 있도록 소속 직장에서 ‘양표’라는 양권을 미리 발급받아야 한다. 특히, 공무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일지라도 공민증, 신분증, 신임장, 출장증 등과 같은 각종 증명서류를 소지해야 할 만큼 주민의 이동은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한편 출장기간에도 금요노동과 생활총화는 빠질 수 없으며, 해당 지역의 기관에서 진행하는 금요노동과 생활총화에 참가해야 한다. 특히, 대외활동을 주로 하는 외교관들이나 무역 일군들 경우에는 더욱 생활총화를 철저하게 한다. 최근 북한당국은 출장 등 각종 공무로 이동하는 군인들을 위해 각지에 군인봉사정류소를 설치하는 등 군인들에 대해 특별히 교통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각 시․군 안전부 교통지휘대 소속의 사회안전원들이 이동하는 군인들을 군인봉사정류소를 통해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있다.
(숙박과 교통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자료를 구하지 못했음)
13) 집회참여
북한의 헌법은 모든 공민은 언론, 출판, 집회의 시위와 결사의 자유를 가지며, 국가는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의 자유로운 활동조건을 보장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대내외적으로 주요 정세가 발생할 때나 국가나 기관․단체의 중요한 정책적 결정에 대해 주민들의 결의나 지지를 표시하기 위해 ‘군중대회’라는 것을 개최한다. 우리로 치면 일종의 집회와 같은 것이다.
군중대회는 흔히 직장이나 기관, 단체, 지역별로 이루어지는데, 반미․반일투쟁, 6.25미제반대투쟁과 같은 군중대회는 전국 범위로 이루어지는 대규모 집회이다. 최근에 벌어진 군중대회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개최된 대회는 지난 1월 11일 북한의 NPT(핵무기확산방지조약) 탈퇴를 지지한 평양시 100만 군중대회이다. 평양시의 전체인구가 250만명이라고 할 때 이 규모는 평양시 주민 2명중 한명이 모두 참가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대규모의 인구가 NPT탈퇴 선언이후 단 하루만에 모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북한주민들의 조직생활이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북한 주민들은 직맹․농근맹․여맹․청년동맹․소년단과 같은 사회단체 중 어느 것이든 하나에라도 꼭 가입되어 있으며, 모든 주민들은 인민반에 조직화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중앙의 지시에라도 신속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사안에 관련된 군중대회는 일반적으로 각 지역별로 개최되며, 직맹․농근맹․여맹과 같은 사회단체별로도 다시 개최한다. 군중대회가 열리면 해당 지역의 인민위원장이나 사회단체장들이 나와서 연설을 하고 그 밖에도 다른 간부들이나 일반 근로자들이 계속해서 나와 투쟁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같은 주제의 군중대회는 하루동안에 모두 개최되는 것이 아니라 며칠씩 지역과 단체별로 잇달아 계속해서 개최된다.
가장 최근에는 ‘6.25 미제반대투쟁의 날 군중대회’가 평양시뿐 아니라 각 시와 도별로 대대적으로 잇달아 개최되었는데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북한내에 반미 분위기가 얼마나 고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14) 세대갈등
우리 사회에서 주요한 사회문제 중 하나가 세대갈등이듯이 북한에도 전쟁세대와 전후세대간의 갈등이 중요한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북한의 세대는 일제하 항일혁명운동을 했거나 그 시대를 살았던 1세대, 청년시절 6.25 전쟁을 겪은 2세대, 고난의 일제시대나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전후세대인 3세대, 그리고 이제 막 사회의 문턱에 들어서는 20대인 4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구세대들은 항일혁명이나 한국전쟁과 같이 배고프고 힘든 시기를 거친데 비해 젊은 세대들은 구세대들이 이룩해 놓은 풍요 속에서 여유있게 자란 세대로서 역사적 경험의 차이로부터 세대갈등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북한이나 남한이나 마찬가지이다. 즉, 구세대의 눈에는 젊은 세대들이 공명주의와 물질적 욕망만을 쫓는 반면 힘든 노동은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비친다. 반대로 젊은 세대 눈에는 구세대가 보수적이며 관료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세대 갈등은 간부층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특히 김정일의 후계체계가 구축되어 가기 시작한 70년대 중반이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종래와는 달리 ‘당성’보다는 ‘전문적 실무능력’이 더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국가기관 종사자, 대학생, 공장․기업소의 기술자․과학자 등의 젊은 미혼남녀를 대상으로 꾸려진 사상․기술․문화 3대혁명소조가 모든 분야에 파견되어 당정책 관철을 명분으로 간부들의 보수주의․경험주의․요령주의․기관본위주의․관료주의 등을 개조하기 위해 사상투쟁을 벌린 ‘3대혁명소조운동’으로 인해 젊은 소조원들이 공장․기업소의 노간부들을 드러내고 비판하며 몰아세움으로써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김정일은 간부대열을 ‘노(老), 중(中), 청(靑)’으로 잘 배합하여 꾸릴 것을 강조하며 구세대는 사회주의혁명 건설의 선구자들이라고 치켜세우며 젊은 간부들의 사업작풍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80년대 말이후 사회주의진영의 체제전환을 목격하면서 외부의 변화에 민감하고 사상적으로 해이해지기 쉬운 젊은 세대에게 항일혁명전통 학습을 더욱 강화하였다.
3. 북녘 기업의 조직과 운영
1) 연합기업소
연합기업소는 1973년에 이미 등장했으나 공업관리의 기본단위로 전면적으로 도입한 것은 1985년 7월 이후이다. 연합기업소를 도입한 것은 공업규모가 커지고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부문간, 지역간, 기업간의 생산연관이 복잡 다양해진데 따른 변화를 수용한 것으로서, 예전에 성, 위원회에 의해 관리되던 기업소가 독자적으로 생산경영활동을 할 수 있도록 분권화된 것이다.
이와 같은 연합기업소관리체계는 내각의 성, 위원회와 연합기업소로 구성되게 되어 있다. 성, 위원회는 부문별 중앙지도기관으로 내각의 통일적 지도 아래 장기발전 및 기술발전에 주력하면서 산하 연합기업소의 생산과 경영활동 전반을 지도관리한다. 일부 지방의 중소규모 연합기업소(예:지방건설건재총국)는 도인민위원회가 지도한다.
연합기업소의 형태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형태는 국민경제적으로 중요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모체기업을 중심으로 그것과 생산기술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부문의 공장, 기업소로 조직·편성한 것이다. 예를 들면 제철소를 모체기업으로 관련된 원료(철광업소)와 수송수단으로 편성된 연합기업소다.
두 번째 형태는 일정 지역내에 같은 부문의 여러 기업과 그들과 공통의 연관을 가진 보조부문의 공장·기업소로 편성·조직된 것이다. 이 형태의 연합기업소 채굴공업 부문에 많은데 탄광, 콘크리트와 갱목제조공장, 설비보수사업 등을 포함한 연합기업소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형태는 전국적 규모에서 부문별로 전문화된 공장과 기업소를 망라한 조직형태이다. 예를 들면 기계총회사와 같은 전국의 공작기계공장과 베어링생산에 관련된 공장·기업소를 결합·조직한 형태이다. 이 형태는 주로 기계공장과 경공업부문에 많이 조직되어 있다. 왜냐하면 제품의 종류가 많고 품질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에 생산의 전문화와 협업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합기업소는 경영규모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며, 계획과정에서 국가계획위원회가 직접 계획대상으로 삼는 것도 있고 반면 지구계획위원회가 하는 것도 있는 등 형태와 명칭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연합기업소이던 국가계획지도 아래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생산과 경영활동을 조직하고 집행하는 계획단위, 생산단위, 집행단위로서 기능을 수행하는 새로운 기업소 조직형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연합기업소들은 다음과 같다.
△기계공업부문: 낙원기계연합기업소, 대안중기계연합기업소, 룡성기계연합기업소
△광공업부문: 서천지구광공업연합기업소, 양강도광업연합기업소, 황남흑색광업연합기업소, 혜산지구광업연합기업소, 무산광산연합기업소, 강동지구탄광연합기업소, 강서지구탄광연합기업소, 순천지구탄광연합기업소, 안주지구탄광연합기업소, 덕천지구탄광연합기업소
△제철공업부문: 김책제철연합기업소, 남포제철연합기업소, 성진제강연합기업소,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청진제강연합기업소, 황해제철연합기업소, 강선제강연합기업소
△건설건재공업부문: 김책세멘트연합기업소, 순천세멘트연합기업소, 2.8세멘트연합기업소
△전력공업부문: 북창화력발전연합기업소, 청진화력발전연합기업소
△화학공업부문: 2.8비날론연합기업소,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사리원카리비료연합기업소, 청진화학섬유연합기업소, 신의주화학섬유연합기업소
2) 대안의 사업체계
북한은 공업관리에 있어 처음에는 ‘지배인 유일관리제’를 채택하여 지배인이 관리·운용의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배인 유일관리제는 관료주의와 기관본위주의(기관이기주의)와 같은 개인의 독단과 주관이 개입될 뿐만 아니라 기업관리에 하부직원의 직접적인 참여가 곤란하다는 결함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기 위하여 도입된 것이 1961년 12월 김일성이 대안전기공장 현지지도에서 제시한 ‘대안의 사업체계’이며, 이 공업관리체계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흔히 대안의 사업체계는 공업관리체계이고, 청산리방법은 농업관리체계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북한에서 청산리정신․청산리방법은 북한의 모든 부문의 경제관리에 있어 기본적 지침으로서, 주체사상과 군중노선에 기초한 대중지도사상이며 방법이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공장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 하에 모든 경영활동을 진행하고, 정치사업을 앞세우며, 상급기관이 아래 단위를 책임적으로 도와주고, 잘 아는 사람이 잘 모르는 사람을 가르쳐주는 집단주의 원칙과 군중노선의 구현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62년부터 실시된 대안의 사업체계에 따라 공장과 기업소는 공장당위원회에 의해 조직화되어 있다. 공장당위원회는 최고 정책결정기관으로서, 당간부, 행정간부, 지배인, 기사장, 기술자, 근로자(생산핵심당원) 등이 참여한다. 따라서 모든 공장과 기업소의 생산 및 관리활동은 공장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와 책임 아래에 이루어진다. 기사장이 생산지도부, 계획부, 기술부, 공무동력부와 같은 참모부서들을 틀어쥐고 생산 및 기술 사업을 통일적이고 집중적으로 지도한다. 지배인은 자재공급사업, 후방공급사업 등 공장관리 전반에 대한 행정 및 경제활동을 지도한다. 당책임비서는 공장의 전반 사업들이 원활히 잘 진행되도록 정치 사업을 수행하며, 하부조직으로 조직부, 교육부, 선전선동부 등이 있다. 조직부는 당 조직사업 특히 간부사업을 주로 하며, 선전선동부는 당원들과 종업원들 속에 당 정책을 홍보하거나 당의 사상을 교양하는 사업을 한다. 교육부는 공장대학을 비롯한 공장에서 운영하는 각 학교와 노동자구에 있는 모든 교육기관들을 맡아 지도한다. 이와는 별도로 대안의 사업체계 안에는 직맹, 여맹, 사로청 등의 당조직이 있다. 이러한 사회단체들은 노력경쟁운동의 성과를 올리는 정치 사업을 맡고 있다. 마지막으로 조직구성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당과 노동자를 연결하고 조정역할을 하는 당세포가 있다.
<대안의 사업체계 공장당위원회 조직표 그림 삽입>
특히, 기존에는 자재보장을 상급단위가 책임지지 않고 생산자들이 책임지게 함으로써 관료주의가 극심하였는데, 대안의 사업체계에서는 자재를 상급단위가 책임지고 아래 단위에 현물로 직접 가져다주게 되어 있다. 또한 기존에는 노동자들의 생활에 대해 책임지는 기관이 없었으나 대안의 사업체계에 의해 공장에 ‘로동자구 경리위원회'가 설치되어 공장후방공급을 부지배인이 책임지고 수행함으로써 근로자들의 생활이 보장받게 되었다.
한편 7.1조치 이후 기업의 운영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기업의 평가 기준이 생산량에서 ‘번 수입'으로 바뀌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 자재 확보를 위한 기업간 치열한 경쟁이다. 좋은 자재를 확보해 제품의 질을 높여 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받는 것이 대단히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과거에는 무역회사들이 외화를 벌면 중앙에 전액을 보냈으나 최근에는 필요한 자재를 구입하는 데 일정 부분을 사용할만큼 각 기업소의 자재 확보가 중요해졌다. 또 다른 변화는 각 기관․기업소가 선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주문제 생산’이 적극 도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문제 생산은 수요에 맞춰 제때 생산하여 공급하기 때문에 재고량을 줄일 수 있어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게 된다.
또 한편 기업 운영의 중요한 변화는 과거에는 기업평가가 주로 계획된 생산량이 얼마나 달성되었는가가 가장 중요했던 것에 반해, 7.1조치 이후에는 생산량 달성 여부와 함께 기업이 벌어들인 현금 번 수입이 얼마인가가 기업평가의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경쟁력을 얻기 위해 품질 좋은 제품을 많이 만들어 많은 이윤을 남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기업소의 지배인도 기업의 번 수입을 늘려 기업의 평가도 좋게 받고 노동자의 생활비도 늘리기 위해 부업을 꾸리는데 발벗고 나서게 되었다. 최근 조선신보에 소개되어 화제가 된 사례를 들면, 발포제 생산 업체를 운영하는 락연합작회사의 이순희(52, 여)사장의 경우, 수확기에 싼 값으로 고구마를 사들여 봄철에 평양의 최대 주택가인 통일거리에 16개소의 군고구마 매대(판매점)를 열고 64명의 가정주부를 판매원으로 채용하여 비싼 값으로 군고구마를 팔아 많은 차익을 얻었다. 李사장은 번 이익금 가운데 법인세에 해당하는 ‘기업이득금'과 제반 비용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1인당 5천원씩 판매원에게 분배했다. 7.1조치 이후 노동자의 월평균 생활비가 2천원이라고 할 때 이 분배금은 상당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3) 기업 구조조정
97년 IMF사태 이후 기업의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였던 때가 우리에게 있었던 것처럼, 북한에서도 최근 몇 해 동안 `기술개건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헌법 개정(’98.9)과 인민경제계획법(’99.4) 채택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대적으로 공장․기업소의 구조조정이 추진되어 여러 개의 산업체들이 통ㆍ폐합되었다. 이와 같은 산업체 구조조정은 북한이 발전전략으로 표방하고 있는 ‘강성대국 건설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산업부문 구조조정과 기술개건사업은 철저하게 실리 위주로 진행되고 있으며, 중공업 분야보다는 주민생활과 직접 연관된 경공업과 정보기술 산업 분야에서 더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산업체의 구조조정을 위해 북한당국은 공장ㆍ기업소의 인력ㆍ시설ㆍ재무 구조를 전면적으로 분석한 후, 부분적으로 개조할 공장과 완전히 폐업할 공장을 선정․분류하고, 경제계획 기관의 권한을 일선 기관에 위임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공장ㆍ기업소 운영 개선안과 산업체 분업ㆍ전문화안 및 현대화ㆍ정보화안 등을 체계적으로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과정에서 `유리산업의 어머니 공장'으로 불리던 북한 최대규모의 남포유리공장을 비롯한 여러개 공장이 정보화ㆍ현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돼 문을 닫은 반면 강계포도술공장(자강), 구성공작기계연합기업소(평북), 신의주화장품공장(평북), 라남탄광기계연합기업소(함북) 등은 모범기업소로 판정받았다.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도 지난해부터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4) 임금인상 (※ 3장의 “생활비” 부분과 일부 중복)
북한에서는 노동계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의 계획에 따라 직장 배치가 이루어지고, 임금도 국가가 통일적으로 결정한 임금체계에 따라 지급을 받게 된다. 또한 노동계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임금인상 등 을 요구하는 파업 역시 없다. 특히 북한에서는 파업을 자본주의나라에서 노동자들이 정치경제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계급투쟁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노동계급이 정권을 전취한 사회주의국가에서는 파업이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북한에서 임금인상은 우리사회처럼 사업장별로 사용자와 협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특정한 시기에 통일적으로 실시한다. 92년에 노동자, 기술자, 사무원 등의 생활비가 전반적으로 43.4% 인상된 이후로, 지난해에 다시 200~250%가 인상되었다.
북한은 임금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대신 ‘생활비’ 또는 ‘노동보수’라는 용어를 쓴다. 생활비는 직종 및 직제, 기술기능 자격과 급수, 노동조건 등에 따라 차등하여 지급하는 소위 생활비 등급제가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노동보수제도는 외국투자기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외국투자기업 로동규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최저임금제가 적용되고 있다는 점과 초과 이윤달성에 따른 상금을 종업원에게 지급할 때에는 직업동맹조직과 협의한다는 점이다.
‘7.1경제관리개선조치’에 의해 지난해 7월부터 인상된 물가에 맞춰 근로자들의 생활비도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다. 인상폭은 기존 생활비에 대비하여 평균 18배 정도로 인상되었다. 따라서 한 가정에서 평균 2명 정도 일하는 것으로 보고 노동자, 사무원 한 사람의 한 달 생활비는 평균 2000원 정도이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기술자, 고급 기능공, 과학자, 기술자들의 생활비는 더 높게 책정되었다. 특히, 이번 생활비 개정에 의해 탄광, 광산을 비롯하여 어렵고 힘든 부문에서 일하거나 국가의 전략물자들을 생산하는 근로자들 경우에는 생활비를 20~25배 정도 더 높게 책정되었다.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기사와 연구사, 설계원, 대학교원 등 전문가들의 생활비는 17배 정도로 책정되었다. 또한 사회적으로 과학기술중시 방침에 따라 새로운 과학기술로 경제발전에 공헌한 경우에는 그 가치에 따라 3년동안 그 연구자와 연구집단, 해당 단위에게 자금을 지원케 하였다.
농민들도 과거에 노력일수에 따라 분배하던 것을 없애고, 농장에 나가 실제로 자신이 낸 성과물에 따라 분배평가를 받게 하였다. 또한 농업생산을 빨리 늘리기 위해 농민들의 한 달 생활비는 평균 2300원 정도로 노동자, 사무원들보다 더 높게 책정되었다.
군인의 생활비는 선군시대의 요구와 사기 진작의 필요성에 의해 25배~31배까지 가장 큰 폭으로 인상되었다. 특히, 적과 직접 대치하여 경계근무를 수행하는 군인들과 중요부문,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든 부문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의 생활비는 일반 병종부문 군인들의 생활비보다 더 높게 책정되었다.
이와 같이 전반적인 근로자들의 생활비 인상과 함께 더 이상 생활에서 ‘공짜’는 없다는 것이 북한당국의 강한 의지이다. 기존에는 생활의 전반을 국가에 의존하였지만 이제 7.1개선조치 이후 북한의 근로자들도 자신이 번 돈으로 식량부터 모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서 써야 하게 되었다. 가령, 기존에는 근로자들의 실질 생계비에서 식량값이 차지하는 몫이 불과 3.5%밖에 되지 않았다면, 이제 식량값이 차지하는 몫은 50%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이제 북한의 근로자들도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고 많은 성과를 내어야만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국가의 복지혜택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7.1개선조치이후에도 무상 치료제, 무료 의무교육제, 사회보장제, 영예군인 우대제 등의 사회적 시책들은 계속 실시되고, 오히려 연금이나 생활보조금은 인상되었다. 또한 고아나 가족이 없는 노인들을 데려다 부양하는 세대들에는 부양자 1명당 매달 300원 정도의 보조금을 더 주며, 아이들만 사는 세대, 자식없이 노인들만 세대, 부부가 모두 아파서 일할 수 없고 아이들만 있는 세대에는 가족 1명당 한 달에 600원 정도의 생활보조금을 주도록 하고 있다.
<직종별 임금인상 내역(2002.7.1)>
구분 | 월 생활비 지급액 | 인상폭 | ||
인상 前 | 인상 後 | |||
노동자 | 중노동자(탄광 등) | 240~300원 | 6,000원 | 20~25배 |
일반 노동자 | 110원 | 2,000원 | 18배 | |
비생산부문 노동자 | 100원 | 1,700원 | 17배 | |
사무원 | 당지도원 | 150~200원 | 3,500원 | 20배 |
중간 관리자 | 120원 | 2,400원 | 20배 | |
전문직 | 교수 | 270원 | 4,000원 | 15배 |
대학 강사 | 230원 | 3,500원 | 15배 | |
군인 | 대좌 | 219원 | 5,830원 | 27배 |
상좌 | 197원 | 5,270원 | 27배 | |
중좌 | 185원 | 4,610원 | 25배 | |
소좌 | 163원 | 4,130원 | 25배 | |
대위 | 149원 | 3,780원 | 25배 | |
상위 | 130원 | 3,510원 | 27배 | |
중위 | 107원 | 3,240원 | 30배 | |
소위 | 95원 | 2,970원 | 31배 |
4. 만남, 결혼, 그리고 헤어짐
1) 결혼연령
북한에서는 가족법(제9조)에 의하여 남자는 18살, 여자는 17살부터 결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혼 연령의 규정과 동시에 가족법(제9조)은 “국가는 청년들이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사회와 집단을 위하여 보람있게 일한 다음 결혼하는 사회적 기풍을 장려한다"고 규정하면서 늦게 결혼하도록 유인하고 있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자 30~31세, 여자 28~29세경에 결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은 60년대까지는 노동인력 확보를 위한 인구증대를 꾀함에 따라 다산모에게 영웅칭호를 수여하는 등 출산장려사업을 벌임으로써 만 17세이상의 공민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결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부터는 정책을 바꾸어 산아제한을 권장하면서 결혼연령을 구체적으로 제한했다. 결혼연령을 최초로 제한한 것은 1971년 6월 21일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제6차대회에서이다.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연설을 통해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에 결혼을 하면 혁명과업수행에 지장을 주게 된다고 지적하며 남자는 30세, 여자는 28세가 된 다음에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언급하였고, 이후로 이와 같은 결혼 연령을 준수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북한 청년들의 경우 중학교를 졸업한 후 약 10년간의 군복무를 하고 나면 현실적으로 30세전에 결혼하기가 불가능하다.
2) 배우자 선택
1970년대까지는 주로 배우자 선택이 중매로 이루어졌으나, 1980년대 이후부터는 연애결혼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북한의 가족법(제8조)도 “공민은 자유결혼의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에는 북한의 젊은층은 학교 친구나 직장 동료간에 연애를 하는 경우가 많아져 평양의 대동강이나 보통강 주변에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청춘 남녀의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북한의 젊은이들의 데이트는 흔히 산보를 하거나 강가에서 배를 타는 정도이며, 평양 젊은이들이 가장 자주 찾는 데이트 코스는 모란봉공원, 평양체육관 광장, 대동강변 오솔길, 보통강변 등이다. 그러나 대학생의 경우 대학에서 연애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소문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도둑연애를 하기도 한다. 우리 남쪽에서는 결혼전에 배우자의 사주나 궁합을 보는 풍습이 여전히 만연해 있는데 비해 북쪽에서는 사주와 궁합이 사회주의 생활방식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금지하고 있다.
한편, 법적으로 자유결혼이 보장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북한의 젊은이들은 결혼하는데 아직 정치적·사회적으로 많은 제한을 받고 있다. 우선은 출신성분에 따른 제한이다. 북한에서는 당사자들간에 아무리 좋아해도 해당조직에서 성분문제를 들어 반대하면 결혼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특히 당원이나 간부 경우에는 배우자의 출신성분이 더욱 엄격히 적용된다. 다음은 지역적 제한이다. 북한에서는 농촌 처녀들이 도시생활을 희망하여 도시 총각에게 시집가려는 경향이 강하며, 반대로 평양 여성들은 지방 남자들과의 결혼을 기피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평양의 인구증가를 막고 농촌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촌 처녀와 도시 남자가 결혼하면 남자가 농촌으로 이주토록 하는 등의 정책을 세우고 있다. 농촌기피현상을 막기위해서 북한 당국은 ‘도시처녀 시집와요'와 같은 영화 등을 통해 도시 여성들을 농촌으로 시집보내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이외에도 군수공장과 같은 비밀이 요구되는 특수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보안상 타지역에 있는 여성과의 결혼이 제한되기도 하며, 비행기조종사나 해외파견원 등의 결혼상대자는 보다 철저한 신분상의 제약을 받는다. 또한 근친간의 결혼도 금지되어 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 기준으로 거주지, 출신성분, 당원 여부 등이 중시된다. 따라서 지방 도시보다는 평양을, 농촌보다는 도시에 거주하는 배우자를 더 선호한다. 또한 당간부의 자녀의 경우는 최고의 배우자감으로 인기가 높은 반면에, 지주, 월남가족, 종교인 등의 출신 자녀는 일반적으로 기피된다. 직업과 관련해서는 여성들 사이에서 과거에는 안전보위부나 사회안전부와 같은 권력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이 가장 인기가 있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외교관, 무역회사 직원, 운전수 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늘고 있어,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도 사회적 권위보다는 경제적 수입이 좋은 ‘실리’ 중심으로 변화가 생기고 있다. 신부감으로는 판매원, 요리사 등 서비스업 종사자들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배우자의 용모는 비교적 덜 중시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경우는 둥근 얼굴에 쌍꺼풀진 얼굴의 여자가 인기가 있으며, 남자의 경우는 키가 크고 튼튼한 남자가 선호되고 있다. 또한 양부모가 모두 생존해 있는 것을 더 희망한다. 이와 같은 배우자 선택에 대한 선호도는 남녘이나 북녘이나 다를게 없는 듯 보인다.
3) 결혼풍속도
결혼할 배우자가 결정된 청춘 남녀는 각각 해당 직장의 당책임자 또는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책임자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는 강제 규정이라기보다는 신상에 관한 변화를 소속기관의 책임자에게 알리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는데 따른 것이다.
결혼 승인을 얻으면 양가 부모의 상견례, 간단한 예물교환, 결혼식 순으로 혼례를 치른다. 신랑과 신부는 3~5일간의 휴가를 얻거나 공휴일 또는 근무시간 외의 시간을 택해 양가 가족과 친척, 친구, 동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린다. 최근에는 결혼하기 전에 친척, 친구들과 함께 모란봉공원이나 문수공원과 같은 경치 좋은 곳에서 야외촬영을 하는 신세대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야외촬영은 199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결혼식은 대체로 신랑집이나 신부집, 직장 또는 문화회관과 같은 공공시설을 빌려 진행된다. 북한에서 최고의 결혼예식장은 평양시 보통강구역 경흥거리에 있는 ‘경흥관'이다. 이곳은 1987년 첫 결혼예식장으로 신설됐으며 4개의 실로 만들어져있고, 각 실마다 한번에 20~40명씩 하루 두 차례에 걸쳐 손님을 받을 수 있다. 각 실에는 신랑․신부와 양측 가족의 좌석과 초대받은 하객들을 위한 식탁이 마련되어 있고 병풍과 오디오도 설치되어 있다. 대리석이 깔린 홀에는 대형 컬러TV가 설치되어 있고, 여러 대의 승용차와 사진사도 대기하고 있다. 한 해에 1천400여 쌍의 신랑, 신부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한다. 평양시에는 경흥관외에 대동강구역 문수거리에 전문 결혼식장이 설립되어 있고, 최고급 식당으로 알려진 청류관, 옥류관, 청춘관 등에서도 결혼식이 이루어진다. 남녘처럼 교회나 성당, 사찰, 야외공원 등에서 결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북녘의 결혼식은 우리 남쪽처럼 서양예식이나 전통예식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양가 가족과 친척, 친구, 동료들이 음식을 먹고 노래를 부르는 등 피로연 형식으로 간소하게 치러진다. 결혼식의 사회와 주례는 대체로 결혼 당사자의 직장책임자 또는 간부, 친구가 1인 2역을 맡는다. 결혼식날 신랑은 보통 테트론양복을 입고 왼쪽 가슴에는 김일성빼지를, 오른쪽 가슴에는 꽃을 단 차림을 하며, 신부는 연분홍빛 짧은치마와 저고리 차림으로 역시 왼쪽 가슴에 김일성 빼지를 단다.
결혼식 날 신랑은 직장에서 차를 빌려 신부를 데리러 간다. 신랑 신부가 신랑집에 도착하면 음식을 가득 차린 큰상 앞에서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큰상에는 옥청(사탕으로 많든 결혼축하 장식품)을 비롯하여 문어, 돼지머리, 갈비, 생선, 각종 과일, 그리고 고급술이 놓여 있어야 한다. 사진 촬영후 하객들은 음식을 먹는다. 손님이 많을 경우에는 이웃집이 방을 빌려 주기도 한다.
결혼식장에서 예식을 할 경우에는 신랑신부가 동시에 입장하며 주례는 하객을 기립시킨 상태에서 성혼선언을 한다. 이어 신랑과 신부는 “수령님과 지도자동지에 대한 충성의 한길에서 영원한 부부로서 혁명의 가정을 꾸려나갈 것을 다짐한다"는 내용의 결혼서약을 한다. 예식이 끝나면 통상 20여명 정도 참여하는 하객들을 위해서 신랑과 신부측은 각각 따로 피로연을 개최하며, 신랑친구들이 신부측 피로연장으로 가서 노래를 시키는 등의 신랑다루기를 하기도 한다. 손님들이 대부분 돌아갈 무렵에는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모여 뒤풀이 시간을 갖는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5원~15원 정도의 축의금을 내는데, 이는 지난해 7월 임금인상이 되기 전의 노동자 월급의 10%에 가까운 큰돈이다. 직장에서는 대체로 회람을 돌려 축의금 액수를 적고 나중에 임금에서 공제하기도 한다. 남쪽과 마찬가지로 이 축의금은 상부상조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어서 언젠가는 나 역시 그런 큰일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축의금은 돈외에 쌀, 술, 음식, 옷감 등 현물로 하는 경우도 많다.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 신부는 3~4일간의 휴가를 얻어 신혼살림을 꾸리는데 신혼여행은 거의 가지 않는다. 신혼여행 대신 대체로 인근의 김일성동상을 찾아가 참배하고 공원이나 유명장소에 들르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으로 되어있다.
결혼비용과 신접살림살이는 양가에서 부담하거나 소속직장에서 약간의 도움을 주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신접을 시댁에 꾸리는 경우가 많고 주택도 국가에서 공급받고 있어 내집 마련에 대한 고통이 크지 않다. 혼수는 생활용품 위주로 준비하며 신랑의 경우 옷감과 화장품 등을, 신부는 장롱과 재봉틀, 그릇, 이불 등 생필품 등을 각각 준비한다. 신부측은 여유가 있으면 가전제품을 장만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서는 아직 예전의 결혼풍속이 남아있는데 함경북도 등지에서는 남자는 일체 결혼준비를 하지 않고 여자가 모든 준비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결혼식을 한 부부는 결혼등록을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부가 된다. 북한의 가족법 제11조에는 “결혼은 신분등록기관에 등록을 하여야 법적으로 인정되며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결혼등록을 하지 않고 부부생활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여자가 타지역으로 시집을 갈 때는 결혼식을 올린 후 전에 살던 직장에 사직원을 내고 새 거주지에서 직장을 구해 취직한다.
4) 내집 마련하기
우리 남쪽에서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나 신혼부부 사이에서 가장 고민사항이 내집 마련인 것처럼, 북한에서도 주택부족 사정이 심각한 편이여 신혼부부의 경우 4∼5년 정도 기다려야 주택을 배정받을 수 있다. 일반 주민들의 경우 방 1개, 부엌 1개의 2칸 주택이 보통이고, 주택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방 2개, 부엌 1개의 3칸 주택에 2가구가 동거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북한의 민법 제50조에 “국가는 살림집을 지어 그 리용권을 로동자, 농민, 사무원에게 넘겨주며 그것을 법적으로 보호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주택공급은 중앙에서 일정한 기준에 따라 일괄적으로 이루어지며, 일반주민에게는 소유권이 아닌 이용권만이 있다. 따라서 주민들은 계층과 직위에 따라 규격화되어 있는 각 등급의 독립가옥이나 아파트 등을 임대형식으로 할당받아 사용하고 있다. 사는 동안 이용권은 입주자에게 있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 그 집에 대한 이용권의 효력은 끝난다. 아파트 내부를 치장하거나 꾸미는 것은 입주자 개인이 하고 전기세, 물세, 관리비 등은 집의 크기에 따라 내게 되는 이것을 ‘아파트’ 사용료‘라고 부른다. 사용료는 한달 생활비의 약 8% 정도이다. 지난해 ‘7.1경제관리개선조치’에 의한 인상 기준에 따르면, 주택사용료는 한 세대당 60㎡인 경우 한 달에 78원 정도이다. 그러나 농촌주민들은 도시주민들과 다르게 주택사용료를 내지 않는다.
주택은 주로 아파트와 2∼3세대용 연립식주택으로 되어 있으며, 입주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계층에 따라 그 형태 및 구조를 각각 달리하고 있다. 주택형은 대체로 당·정 부부장급 이상 고급간부 등이 거주하는 특호로부터 일반근로자와 협동농장원에게 배정되는 1호주택에 이르기까지 5단계로 구분되어, 계급과 성분에 따라 차등 배정되고 있다. 신형아파트는 대부분 당·정고위간부들이나 특수계층의 사람들 위주로 배정되며, 평양의 경우 중구역 창광거리는 중앙당 및 내각 간부들이, 중구역 안상택거리는 국가에 외화를 헌납한 재일동포가족들이, 만경대구역 광복거리는 인민군 고위군관이나 출판보도부문 종사자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 북한당국은 주택문제 해결을 위하여 평양에 1981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10만여 세대의 주택을 문수·창광·광복·통일·안상택 거리 등에 대규모 고층 아파트를 건설하였으나, 그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한편 원산·함흥·청진 등 지방도시에도 평양과 같은 시기에 3,000여 세대의 아파트·공동주택이 건설되었으나, 공급부족 현상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직도 주택사정이 크게 개선되지 않고 주택건설계획도 많은 차질을 빚고 있는 이유는 북한이 현재 주택문제 보다는 먹는 문제와 입는 문제의 해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고, 경제 악화로 주택 건설을 위한 자재 확보나 국가 재정이 부족한 현실 때문이다.
주택배정은 최초의 입주자에게 주는 입사권과 이후 입주자에게 방 한칸을 주는 ‘동거살이’ 등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동거살이란 주택난으로 새로운 세대에 대한 주거확보를 위해 북한이 만들어 낸 특이한 주택배정 제도이다. 입사권 배정 등 주택관리에 대한 제반 사항은 각 시·군의 행정경제위원회의 도시경영과에서 관장하며, 직장이동 등으로 이사할 경우에는 입사권을 관할 도시경영과에 제출하여야 한다. 그러나 주택배정 과정에서 영예군인 등 국가 유공자들에게는 우선권을 준다.
한편, 주택사정이 심각해지자 북한당국은 원칙적으로 주택의 개인소유는 물론 개인의 주택건축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내각의 과장급 이상 각급 공장 및 기업소의 당비서급 이상 간부들에게 택지를 공급해주고 개인적으로 주택을 건축하도록 유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건축자재 확보능력이 없는 대부분의 당간부들은 직접 주택건설에 나서지 않은 채 비교적 재력이 있는 일반주민이 살고 있는 주택을 인계받고 그 대가로 택지를 양도해주고 있다. 택지를 양도받은 일반주민은 필요한 건축자재를 암거래로 구입하여 공사를 완공한 후 입사권을 발급받기 위해 해당 시·군 도시경영과 실무자에게 뇌물을 주는 등 주택마련을 둘러싸고 부정행위가 발생하기도 한다.
경제난 이후 대부분 일반주민들의 경우 국가에서 배정받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동거인으로 등록 후 세대주를 변경하는 등의 편법을 통해 돈을 주고 집을 구입하고 있다. 이러한 편법매매는 주택에 대한 개인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사회에서 불법으로 되어 있으나 그 동안 사실상 묵인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편법매매가 공공연하게 확산되기 시작하자 당국의 처벌이 강화되고 있다. 북녘이나 남한이나 모두 일반주민에게 내집 마련의 꿈은 험난하고 먼 것 같다.
5) 이혼
북한은 이혼을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비교적 이혼율이 낮은 편이다.
북한이 1956년 3월 합의에 의한 이혼제를 폐지하고 재판에 의해서만 이혼을 허용하는 제도를 채택(내각결정 제24호)하고 있다. 또한 북한당국은 이혼을 재판에 의해서만 할 수 있도록 명문화하고 있는 것과 함께 이혼사유를 제한하거나 이혼신청서의 수입인지를 고가(남녀 각각 50원-2002년 7월 물가인상 이전 기준)로 책정하는 등으로 이혼을 정책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혼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북한주민들은 이혼사유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쉽게 이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혼사유와 관련된 가족법 제21조에서는 “배우자가 부부의 사랑과 믿음을 혹심하게 배반하였거나 그밖의 사유로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에는 이혼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성병 등의 건강상의 이유를 비롯해 여자의 부정, 남자의 폭행, 그리고 특별히 법적으로 용납못하는 경우 등에 이혼사유가 국한되어 있다. 여기서 ‘그 밖의 사유'는 “부부관계를 계속할 만한 정치도덕적 기초를 상실한 경우로서 이혼이 사회와 혁명에 이로울 때에는 용인하고 해로울 때에는 부인한다"고 해석하고 있어, 이혼 판결시 정치적 측면이 고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혼에 관한 재판은 원칙적으로 인민재판소에서 담당한다. 그러나 두 번 이상 이혼을 하는 자는 상급재판소인 도재판소에 청구하여야 한다. 이혼 판결에서는 자녀의 양육문제, 부부 합동재산의 분배, 이혼후 배우자간의 부양의무에 대한 문제 등을 결정한다. 이혼재판에서는 통상 이혼했을 경우 여자가 불리한 점을 감안해 남자가 이혼을 청구할 경우는 이루어지기 어려우나 여자가 청구할 경우는 비교적 쉽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자녀문제는 이혼 당시의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는 재판소가 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부득이한 사유가 없는 한 3살 미만의 자녀는 어머니가 양육하도록 가족법(제22조)으로 명시해 놓고 있다. 자녀를 양육하는 당사자는 양육하지 않는 당사자에게 자녀가 노동을 할 나이가 될 때까지 양육비를 요구할 수 있다. 양육비는 자녀수에 따라 월수입의 10~30% 범위에서 재판소가 정한다. 양육비는 지불당사자가 소속한 직장에 직접 급료에서 떼어 양육자에게 전달한다. 양육비를 지불하던 당사자가 노동능력을 잃거나 자녀를 맡아 기르던 당사자가 재혼하여 그 자녀가 계부모의 부양을 받을 경우 이해관계자는 재판소 양육비면제를 요구할 수 있다.
5. 가정생활
1) 가족계획
(1) 출산정책의 변화
남한 정부는 지난해 심각한 출산률 저하로 인해 노동력 감소, 노인부양비 부담 등의 사회적 문제가 야기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지난 40여년 동안 유지해온 출산통제정책을 폐지하고 출산장려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북한 역시 90년대에 출산장려 쪽으로 인구정책을 바꾸었다. 북한의 출산장려 정책은 지난 98년부터 시행됐고, 그해 9월 열린 ‘전국어머니대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가시화 됐다. 이 대회에서 ‘조선민주녀성동맹'(여맹)의 천연옥 위원장은 연설을 통해 “아이들을 많이 낳아 훌륭히 키우는 것은 조국의 융성번영과 혁명의 휘황한 앞날을 담보하는 중대한 사업이며 우리 어머니들의 숭고한 의무이고 행복이고 기쁨"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 자리에서 천연옥 위원장은 다산을 국가적,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장려키위해 ‘모성영웅제도'가 새로 만들어졌음을 밝혔다. 이와 함께 아이를 많이 낳는 여성에게 여러 가지 ‘국가적 혜택'을 주는 조치도 발표됐다.
이 ‘국가적 혜택'은 우선 아이를 많이 낳아 키우는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물질적 대우를 높여 주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젊은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건강보호대책, 어린이 영양식료품 생산 가지수 증가 및 증산, 공급 정상화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 아이를 4명 이상 낳아 키우는 여성들에게는 특별보조금을 지급하고, 아이가 3명일 때부터는 산후 4개월부터 12개월까지의 유급휴직제를 실시하며, 아이를 3명 또는 그 이상 낳아 키우는 세대들에는 주택을 우선적으로 배정하는 것은 물론 명절배급상품도 아이 수가 많은 세대부터 공급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북한의 출산 장려정책은 최초로 지난 61년 11월에 열린 ‘제1차 전국어머니대회'를 통해 가시화됐는데, 그 배경은 6·25전쟁으로 인해 빚어진 노동력 부족 현상과 군병력 유지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북한 당국은 출산 장려책으로 임산부를 우대하고 이혼은 억제했었다. 그러다가 70년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출산억제정책을 실시되었다. 이것은 사회주의공업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여성인력으로 충당하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80년대에는 “하나는 좋습니다. 둘은 많습니다. 셋은 양심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지침서가 하달될 만큼 강력한 출산억제 정책이 실시되었다.
한편 최근 90년대부터 장기화된 식량난으로 인한 영아 사망률 증가와 인구의 자연감소로 다시 다시 출산장려 쪽으로 정책이 선회하였다. 영아사망률의 증가와 관련하여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국제인구연구소(PRB)가 발표한「98년 세계인구의 영아사망률 통계분석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94년 1천명당 26.8명이던 북한의 영아사망률이 98년들어 39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12.2명이나 늘었다. 따라서 여성과 어린이들의 건강을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된 지난 90년 1월에 설립된 북한 가족계획협회는 본부 서기국과 12개 지부 사무소, 가족계획진료소, 이동봉사대, 공장과 농촌에 ‘여성위생선전실’을 두고 최근 여성들에 대한 각종 의료지식을 널리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 협회는 임산부의 건강지식을 홍보하고 주변 환경개선을 위해 녹화물과 정기간행물, 홍보전단을 제작, 배포하는가 하면 공연활동을 통한 홍보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적극적인 출산장려 정책에도 불구하고 남한과 마찬가지로 오랜 인구억제정책의 영향, 여성들의 사회진출의 증가, 경제생활의 불안정 등의 요인들로 인해 북한의 출산율은 쉽게 높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북한 가정에는 일반적으로 자녀가 1~2명 정도이다.
(2) 피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녀를 하나 또는 둘 정도만 낳기 때문에 당연히 피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피임은 거의 여자가 하며, 남자들은 대체로 콘돔(북한에선 ‘사꾸’라고 부름)등과 같은 피임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여성용 피임기구는 “루프"로 식량난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무료로 병원에서 시술해주었으나, 아사자가 증대하여 인구가 많이 감소하자 출산장려정책으로 전환되면서 96년경부터는 무료시술이 중단되었다. 물론 낙태 역시 금지되어 있다.
북한에서의 성교육은 남한처럼 남녀가 모두 받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 중심으로 성교육이 진행된다. 90년대 이전까지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여학생 실습시간’에 여자들의 위생유지와 건강지키기, 아이 기우기 등만 배울 뿐 임신과 출산과정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성문화가 급격히 개방화되어 90년대 중반부터는 여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기 시작하여 남녀간의 신체구조 차이와 각종 성병, 생리현상 및 피임방법, 이성교제시의 주의점 등에 관한 전반적 교육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2) 여성의 생활상
(1) 가정주부의 가사노동
북한의 가정에서 가사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지만, 가사노동의 상당한 부분이 사회화되어 있다. 북한당국은 여성 노동력의 동원을 높이기 위해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을 펴고 있다. 가사노동의 사회화 정책은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현실화된다. 첫째는 지역이나 공장단위로 가사노동을 대체하는 기구를 형성하여 대단위 작업을 실시하는 가사노동의 집단화 또는 공동화이다. 그러한 작업의 예로는 ‘장공장’, ‘밥공장’, ‘반찬공장’ 등을 시․군 급양 관리소에서 운영하여 가정부인들이 직장에서 퇴근하는 길에 이러한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두 번째는 가사노동의 기계화와 자동화이다. 3대기술혁명의 하나로 ‘가정으로부터의 여성해방’이 제기되어 각종 가전제품을 생산하고 농촌에 수도를 설치하고 위생시설을 추진하여 여성들의 가사노동을 상당 부분 줄였다. 세 번째 방법은 세탁소, 옷수선집, 목욕탕, 이발소 등 편의시설을 확대하는 등 가사노동의 서비스 산업화이다.
이와 같은 가사노동의 사회화 정책이 어느 정도 북한 여성들의 가사노동의 부담을 덜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가사노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거나 남녀간의 평등한 가사노동의 분업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가사노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전통적인 의식이 뿌리깊게 박혀있다.
남편들의 가사일 분담은 집집마다 다르다. 어떤 집은 세대주(남편)가 호령만 하고 도와주지 않는 집도 있고, 어떤 집은 너무할 정도로 도와주는 세대주도 있다. 특히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에는 남편이 부모의 눈치를 봐서 잘 도와주지 못한다. 이런 풍경은 남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남과 북이 비록 체제는 다르지만 생활에서 나타나는 가족내 역할과 의식은 공통적으로 전통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회적 노동에 남성과 평등하게 참여하고 있는 여성들은 휴가(연 14일) 역시 가사노동에 바쳐진다. 북한 여성들은 대부분 휴가를 김장철이라든가 가사일이 많은 시기에 신청하기 때문에 본래의 휴가의 의의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기혼여성들은 직장노동과 가사노동이라는 이중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2) 직장세대 여성의 하루 일과
세대주가 아침 6시 30분이면 출근하기 때문에 여자는 아침 5시 30분쯤에 일어나야 한다. 식구들의 아침식사와 점심 도시락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에 부엌일이 바쁘다. 직장에서 가정부인(주부)들은 독신보다 출근시간을 30분 늦춰줘서 8시 30분까지 출근한다. 직장에 출근할 때는 대체로 버스를 이용한다. 출근할 때 버스요금은 국가에서 버스권을 주지만, 사적으로 버스를 탈 때에는 개인이 부담한다.
가정부인인 경우 퇴근은 다섯 시에 한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들은 대체로 6시 30분에 퇴근한다. 퇴근시간은 여름과 겨울, 해길이에 따라 늦어졌다가 빨라졌다가 한다. 세대주는 보통 8시 30분에 집에 돌아온다. 저녁을 먹은 후 가족들과 함께 텔레비전도 보고 오락도 한다.
<북한 직장세대 여성의 하루 일과표>
시간 | 일과 |
05:30 ~ 06:30 | 기상, 아침식사 준비, 청소 |
06:30 ~ 08:30 | 식사, 설겆이, 아이 등교준비, 출근(탁아소에 아이 맡김) |
08:30 ~ 12:00 | 오전 작업, 유아 수유(30분) |
12:00 ~ 13:00 | 점심, 유아 수유(30분) |
13:00 ~ 17:30 | 오후 작업, 유하 수유(30분) |
17:30 ~ 19:30 | 퇴근(탁아소에서 아이 찾음), 저녁식사 준비, 아이 숙제 도와주기 |
19:30 ~ 20:00 | 저녁식사 |
20:00 ~ 22:00 | 가족과 함께 시간보내기(오락, TV보기 등) |
22:00 ~ | 취침 |
(3) 직장에서 여성의 위치
원론적으로 북한에는 실업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일반인들은 모두 노동을 통해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남성과 여성 모두가 동일하게 노동에 참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북한에서는 이념적으로 제도적으로 여성해방, 남녀평등을 실현하려는 목적과 당면한 경제 과제 달성을 목적으로 여성을 적극 생산현장에 참여케 하는 여성의 노동계급화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이러한 여성의 노동계급화정책은 1958년 ‘인민경제 각 부문에 여성을 더욱 인입시킬데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고, 60․70년대의 경제계획에 따라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90년대 3대 기술혁명의 추진은 여성 노동력의 수요를 절실하게 요구하였다. 1978년 4월에 제정된 ‘사회주의로동법’은 여성 근로자들이 사회적 노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보장하고 직장에 나가지 못하는 가두여성들에게는 가내작업반과 가내협동조합을 통해 일할 수 있게 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만18세 이상이 되면 부양가족 앞으로 나오는 식량의 배급이 되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중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교육기관에 진학을 하거나 군대를 가거나 아니면 직장을 배치받아야 한다. 결혼한 여성의 경우에는 사정상 가정에 머무르면 남편의 부양가족으로 등록되어 식량이 300g씩 배급되지만, 만18세 이상이 된 미혼여성은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서 취업을 해야 한다. 기혼여성의 경우에도 남편이 일반사무원이나 노동자일 경우 직장이나 가내작업반에서 일을 해야 한다.
북한에서 여성 노동력의 비율은 1991년 현재 49%이다. 이처럼 여성 노동력 비율이 높은 것은 북한 전체 인구의 6%, 남자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남자가 군대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군인의 수중에서 노동력이 왕성한 16~28세 남자의 42%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여성 노동력으로 메우고 있다.
여성들의 직업별 구성을 보면 1987년 현재 국영기업소 노동자 57%, 공무원 16.8%, 농장원 25.3%, 협동기업소 노동자 0.9% 등이다. 같은 해 여성 노동력의 분포현황은 농업 55.5%, 공업 45.5%, 탄광 노동 20%, 중공업 15%, 경공업 70%, 임업 30%를 차지한다. 특히, 교육분야에서는 여교사의 비율이 소학교 80%, 중학교 35%, 기술계통학교 30%, 대학교 15%이다. 이처럼 북한 여성의 노동력은 주로 농업이나 경공업 부분에 집중되어 있으며, 교육분야에서도 주로 유치원이나 소학교와 같은 낮은 교육기관에 집중되어 있고 고등교육기관일수록 여성의 비율이 낮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을 힘든 노동으로부터 보호하고 여성의 사회참여를 확대한다는 취지를 가진 북한의 여성노동정책은 결과적으로 직종간 성별분업 현상을 낳고 있다.
노동력의 배치 과정에서 생기는 성별 분업 현상은 임금차별에까지 이어진다. ‘사회주의노동법’(제37조)에서는 남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근로자들은 현실적으로 노동의 차별적 배치정책에 의하여 임금차별을 받고 있다. 북한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급수가 높을수록 많아지고 노동 강도가 강할수록 높아지는데, 여성들은 대다수가 낮은 급수의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즉 여성근로자들은 낮은 기술도와 숙련도, 낮은 사회적 평가가 따르는 직종에 배치되며, 그만큼 여성근로자들의 임금수준도 남성근로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한편 성차에 따른 임금차별 외에 북한 여성들은 승진기회에서도 차별을 받고 있다. 이는 전체 노동력 중 여성 노동력이 49%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위직에 있는 여성의 비율은 현저히 낮은데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정규직장보다 연금 등의 복지혜택이 없는 가내작업반이나 무보수 지원반에 많은 여성들이 동원되는 등 여성의 노동조건은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일부 여성근로자들 경우에는 남자들도 꺼리는 중노동에 지원하기도 한다. 여성들도 못할 일이 없기 때문에 대등한 입장에서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여성근로자들은 광산의 착암수, 트렉터나 기중기 등 중장비 운전수, 제철소의 보일러공, 금속공장에서의 선반공이나 프레스작업 등과 같은 중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평등한 노동생활을 하기도 한다.
(4) 여성 복지정책
<여성노동보호 제반 제도>
1946년 7월 30일에 제정된 ‘남녀평등권법’에 따라 북한의 여성근로자들은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남자와 똑같은 권리를 보장받고 특별한 노동보호 특혜를 받고 있다.
노동법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다른 체질적, 생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성으로서의 부담을 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근로자들의 직장내 배치 문제부터 위생시설의 보장, 노동시간과 작업조건, 어린이 양육조건의 보장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노동보호 특혜정책을 규정하고 있다.
우선, 노동법은 여성근로자들이 남자들보다 체질적으로 힘이 약하고 생리적으로 다르다는 특성을 고려하여 여성근로자들에게 맞는 직종 배치와 배치할 수 없는 작업부문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중금속이나 유독한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작업, 방독면을 쓰고 일하는 유해작업, 작업장의 온도가 지나치게 뜨겁거나 찬곳에서 특별한 보호대책이 없이 하는 작업, 유해광선을 다루는 작업, 심한 진동속에서 하는 작업, 물속에 들어가 하는 작업, 20㎏ 이상의 물건을 하루 4시간 이상 다루는 작업 등에는 여성들을 배치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음으로, 임신한 여성들과 젖먹이를 가진 여성들에게는 야간작업을 시킬 수 없다. 또한 임신 4개월이 넘는 여성을 이동작업이나 출장을 보낼 수 없다. 모든 기관, 기업소, 단체들에서는 한살아래의 젖먹이 아이를 가진 여성근로자들에게 노동시간안에 30분씩 하루 두 번 젖먹이 시간을 보장하여야 하며, 임신 6개월이 되는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산전휴가를 받을 때까지 보다 헐한 일을 시킬 수 있다. 임신한 여성근로자들에게 3미터 이상의 높은 곳에서 작업을 시키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생리휴가와 산전․산후 150일간의 휴가가 허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노동법은 기관, 기업소, 단체들내에 규정기준에 따라 여성개별위생실을 꾸려주며 탁아소․유치원․어린이병동․각종 편의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임신한 여성들이 정기적인 신체검사와 건강검진을 할 수 있도록 해당 보건기관들에 의무화하고 있다.
<출산휴가제도>
지난해 11월이 되어서야 남한의 근로여성들이 종래의 60일에서 90일의 출산휴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에 비해 북한에서는 이미 정권 수립 초기인 1946년 6월에 근로 여성들은 산전 35일, 산후 42일간의 출산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58년에 농업협동화가 완성된 이후에는 농촌여성들에게도 처음으로 60일간의 유급 출산휴가제도가 실시되었다. 심지어 86년부터는 산전 60일, 산후 90일 등 총 150일간의 출산휴가를 받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다. 이 기간에는 월기본생활비의 100%에 해당하는 산전산후보조금을 지급받을 뿐만 아니라 식량도 똑같이 배급(1일 700g)받을 수 있다. 이러한 출산휴가제도는 모자보호 차원에서의 국가적 배려뿐만 아니라 여성의 노동력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동원해 내기 위한 목적이 함께 결합된 정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탁아소 운영>
출산휴가와 함께 직장여성들을 위한 북한의 양육제도에서 평가할만 한 것은 탁아소 운영이다. 북한에는 여성들이 자녀양육 문제에 대해 해방되어 걱정 없이 직장을 다닐 수 있도록 전국의 모든 동(洞), 중대형 공장ㆍ기업소, 협동농장 작업반별로 탁아소가 설립돼 있으며 규모에 따라 여러 개가 설치돼 있는 곳도 있다. 중대형 공장ㆍ기업소의 경우 소속 여성에 국한하지만 동 탁아소는 지역내 기관ㆍ공장ㆍ기업소에 근무하는 여성의 자녀를 모두 수용토록 의무화하고 있다.
탁아소 운영에서 가장 잘 주목할 만한 부분은 직장여성들이 근무시간에도 자녀들에게 모유를 먹일 수 있는 체계가 마련돼 있다는 것이다. 산후휴가를 마친 여성들은 모유를 먹이는 시기인 생후 8개월 정도까지 2시간에 한번씩 20∼30분동안 탁아소에 와서 자녀에게 모유를 먹이고 돌봐줄 수 있다. 또한 이유식을 먹는 1년 정도까지는 오전ㆍ오후 각각 한 차례 탁아소에 와서 자녀를 봐주며 1년반까지는 하루 한번씩 다녀갈 수 있다.
탁아소에서는 어린이의 생후 개월수에 따라 한방에 2명의 보육원을 두고 15∼20명을 수용하는데 모유에서 이유식, 이유식에서 밥 먹이기, 용변 가리기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가르친다. 출근이 늦는 여성들을 위해서는 방 하나를 별도로 내서 마지막 남는 한명까지 돌봐주고 있다. 탁아소마다 의무실(양호실)과 의사가 배치돼 있고 일본뇌염, 간염, 감기 등 각종 예방주사를 놓아주도록 하고 있다. 또 비록 남한에 비하면 질이 좀 낮을지라도 아이들에게 우유, 이유식, 쌀밥 등을 공급해 왔으며, 최근 식량난으로 사정이 어려울 때에도 탁아소 어린이들에게는 식량공급이 우선적으로 지급되었다.
이와 같이 탁아소 운영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 여성들은 집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보다 탁아소에 보내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으며 직장에 나가지 않는 여성들도 탁아소에 맡기려 하고 있다. 탁아소의 한달 비용은 7∼8원(7.1경제관리조치 이전) 정도이며, 아이를 처음 받을 때 부모로부터 기저귀, 장난감, 타월 등 양육에 필요한 물품이나 그에 해당한 비용을 얼마간 받는다.
비록 이와 같은 자녀양육을 위한 북한의 복지시책이 부족한 노동력 때문에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일지라도, 출퇴근 시간마다 어린 아이를 어딘가에 맡기고 찾아오는 문제 때문에 매일 전전긍긍하는 남한의 근로여성들에게는 적어도 아이들 양육문제에서 해방되어 마음놓고 직장일을 할 수 있는 북한의 여성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3) 직장세대(맞벌이 부부)
남한에 `맞벌이 부부'이가 있다면 북한에는 `직장세대(世帶)'가 있다. 북한에서는 맞벌이 가정 또는 맞벌이 부부란 말을 않고 부부가 모두 직장에 다니는 집을 가리켜 직장세대라고 부른다. 여기서 세대란 말은 우리의 가구, 즉 한 살림을 이루고 있는 가정을 뜻한다. 북한 여성의 사회진출은 1994년말 현재 전체 산업체 노동인력의 53.8%가 여성이 차지할 만큼 매우 활발하며, 따라서 직장세대 역시 그 만큼 매우 많다.
북한이 아무리 남녀가 평등한 사회주의사회라고 할지라도 남쪽과 마찬가지로 비록 직장세대일지라도 가사노동은 여성의 몫이다. 직장세대 여성은 아침에 일어나 아침식사와 청소, 아이들 옷과 세대주 옷 등을 챙기고, 가족들과 함께 식사한 후 부엌청소를 마치고 9시까지 직장에 츨근, 오후 5시 반에 직장에서 퇴근하여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아이들 공부를 봐준다. 세대주가 돌아오면 함께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한 후 세대주와 함께 아이들 숙제를 도와주거나 오락시간을 가진 후 10시 정도에 잠자리에 든다.
결혼 전 연애시절에는 세대주(남편)가 요리나 청소 등을 다 거들어 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결혼한 후에는 남자와 여자의 일을 구분하며 남편이 가사일이나 아이들 양육에는 무관심한 것은 남쪽이나 북쪽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4) 자녀 교육
남쪽의 부모들은 엄청난 자녀의 교육비를 감당하느라 허덕이고 있는 반면에, 북쪽의 부모들은 최소한 자녀의 교육비 부담에서는 해방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전반적 11년제의무교육제 가 실시되기 때문에 중학교(남쪽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합한 것)까지는 모든 청소년들이 무료로 교육을 받는다. 또한 대학을 다니는 경우에도 김일성장학금, 사로청장학금, 무의탁장학금, 국가장학금, 특수장학금 등 다양한 장학금이 지급되고 기숙사 생활비나 최소한의 일용필수품 구입비 등이 장학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에 대학의 등록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남쪽과 마찬가지로 학력은 사회적 지위의 이동에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학생 당사자나 부모에게 있어 고등교육기관으로의 진학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좋은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북쪽의 청소년들도 입시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1) 입시
남한의 고3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하듯, 북한의 청소년들도 대학에 입학하려면 수능시험과 비슷한 ‘예비시험'을 치러야 한다. 과거에는 대학진학이 추천 방식이었지만 주민들의 불만이 생기고 우수한 학생들이 탈락하는 경우가 많아 남쪽의 수능시험과 같은 일종의 국가고시제인 ‘대학추천을 위한 예시시험’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는 1991년 공식 채택되었으며, 당해 연도 중학교 졸업생 전원을 대상으로 실시해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만 대학 추천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준다. 나머지 추천을 받지 못한 학생들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에 가거나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
각 시, 군, 구역의 교육위원회가 주관하는 예비시험은 매년 10월 말에 중학교 졸업생(6학년)을 대상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수험과목은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 문학, 수학, 화학, 물리, 영어 등 6개 과목이다. 시험은 이틀 동안 오전에만 치러지며 하루에 과목당 45분씩 3개 과목을 친다. 예비시험이 끝나면 내각의 교육성은 도별로 각 대학․전문학교 등에 본시험을 위한 수험생 수를 정해주고 시․군 인민위원회의 대학모집과는 도에서 할당한 인원수를 바탕으로 예비시험에 합격한 학생 개개인에게 입학시험 수험통지서를 발급해 준다. 보통 성적순에 따라 입시를 치를 대학이 지정된다.
예비시험을 통해 대학 추천을 받는 학생은 전체 중학교 졸업생의 약 20% 정도이며, 이 중 입학시험에 합격해 바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평균 10% 수준이다. 보통 이렇게 중학교를 졸업하여 바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을 ‘직통생’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직통생들은 이공계통이나 예체능계통에 집중되어 있다. 그 외에 군대나 기업소에서 추천(일명 ‘폰트’)을 받은 사람들이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게 된다. 7~8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흔히 ‘제대군인'이라고 불리고, 군복무 도중 들어온 학생은 ‘현역', 직장생활을 하다가 입학하면 ‘사회출신'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는 학생들이 입학시험을 보기위해서 직접 대학을 찾아가 입시원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다. 각 중학교가 응시자의 출신성분과 성적 등 신상자료를 기밀서류로 분류, 등기우편으로 해당대학에 보내기 때문이다. 입학시험 통지서를 받은 학생은 이듬해 1월 해당 학교에 가서 접수를 마치고 기숙사에서 며칠간 머무르면서 시험을 치르게 된다. 입학시험은 신체검사, 100m․1500m달리기(여자의 경우 800m 달리기), 현수(팔굽혀펴기) 등 체육시험과 필답시험, 그리고 개별 및 집체담화(면접시험)로 이루어진다. 필답시험 과목은 예비시험과 같은 6개 과목이다. 시험문제는 교육성에서 일괄적으로 출제하는데 출제위원들은 보안 유지를 위해 입시4~5일 전부터 일정 장소에 모여 숙식하며 문제를 출제하고 밤새워 이를 인쇄해 각 대학에 보낸다. 필기시험은 하루 두 과목씩 사흘간 치른다. 문제는 모두 주관식이고 점수는 과목당 5점 만점이다.
입학시험의 채점은 필기시험이 끝나는 즉시 대학별로 시험지를 교환해 채점한 후 다시 해당 대학으로 돌려보내 채점을 점검하도록 함으로써 비리 발생의 소지를 없애고 있다. 채점은 시험 당일 모두 끝내도록 되어 있다. 면접고사는 10여명을 동시에 앉혀 놓고 개개인에게 한 두개씩 질문하는 등 다분히 형식적인 것이어서 당락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는다. 최종 합격 여부는 일차적으로 시험성적이 좌우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생 개개인의 출신성분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간부 자녀나 혁명유자녀 등은 대학입학에서 특혜를 받으며, 반면에 출신성분이 나쁜 학생은 시험성적이 우수해도 대학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게 북한의 현실이다.
(2) 과외
남한에서 말하는 공교육 외에 사교육을 의미하는 과외가 북한에도 존재한다. 북한의 소설을 읽다보면 1980년대 이후의 책들에 과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처럼 주위에 흔하게 있는 것은 아니며, 남한의 아르바이트하는 것처럼 돈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주로 생필품 등의 현물을 주로 받는다. 예를 들어 고위직에 종사하는 자녀들의 교육을 김일성종합대학 등에 다니는 유능한 학생에게 부탁하고는, 공부를 돌봐준 학생에게 필요한 생필품이나 공산품을 준다.
그러나 북한에서 공식적인 의미로서 과외학습은 남한의 과외와 성격이 다르다. 평양학생소년궁전, 만경대학생소년궁전, 2.16학생소년궁전 등은 초ㆍ중등학생의 대표적인 과외 교육기관이다. 이들 `궁전'들에서는 우수한 실력과 재능을 갖춘 학생들이 각종 소조(동아리)활동을 통해 다양한 과외학습을 받고 있다. 즉, 과외학습 역시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인 것이다. 이러한 청소년들의 과외학습 기관은 평양뿐만 아니라 각 도와 시․군 단위에도 학생소년궁전, 소년단야영소와 같은 형태로 100여 곳이 설립되어 있다.
특히, ‘지ㆍ덕ㆍ체 교양의 전당'으로 불리고 있는 학생소년궁전에서는 각지에서 선발된 소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개발하는 다양한 학습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 궁전에는 음악ㆍ무용ㆍ수예ㆍ태권도ㆍ권투ㆍ물리ㆍ화학ㆍ수학ㆍ생물ㆍ전자계산기ㆍ지리 등 각종 소조가 조직되어 있고, 최근에는 정보화시대에 발맞춰 `컴퓨터수재 양성기지'도 개설되었다. 평양학생소년궁전과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우수한 지도교사들과 함께 최신식 실험실습 기재와 설비, 교재물 등 최상의 교육시설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규모도 가장 큰 곳으로 유명하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의 경우 연건축 면적이 10만㎡에 이르고 한꺼번에 수천명의 학생들이 소조활동을 할 수 있는 700여 개의 크고 작은 학습실을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이 북한 각지에 학생소년궁전을 설립하게 된 배경은 어린이들을 ‘나라의 왕'으로 내세우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기에 의한 것이라고 북한 언론매체는 전하고 있다.
5) 배급
북한은 1952년 5월 식량배급제를 도입한 후 1957년 11월 양곡의 자유 판매와 개인 상행위까지 금지시켜 부식류와 함께 철저한 식량배급제도를 정착시켰다. 식량배급에서 협동농장원은 제외되며, 농장원들은 연말 ‘결산분배’를 통해 분배받는다. 배급량은 60년대 중반까지 일률적으로 동일하였으나 그 이후 직업, 연령, 주거지 등에 따라 차등을 두게 되었다.
일반주민들의 식량 배급절차는 15일마다 매월 2회 1인당 700g씩 각 직장에서 발급하는 배급표를 가지고 리․동에 있는 배급소에서 수령하도록 하고 있다. 배급 식량의 쌀과 잡곡 비율은 지역과 신분에 따라 다르다. 또 식량사정에 따라서도 수시 변한다. 정상적으로 배급제가 실시되었을 때 곡물 비율은 평양과 휴전선 인접지역의 경우 쌀과 잡곡이 6:4, 기타 지역은 3:7정도 이다. 출장이나 여행을 할 때에는 ‘양표’라고 불리우는 양권을 미리 발부받아 매식시 양권과 식대를 함께 지불해야 한다. 만일 양표를 발급받으면 다음의 식량배급에서 그만큼 공제하게 된다. 즉, 양표 발행시 미리 소속 직장에서 받은 배급표와 교환하게 되어있다. 이것은 식량의 2중 배급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양표는 100g, 200g 2종이 있다.
종래에 쌀의 국정가격은 1kg에 8전이었고, 옥수수는 6전이었다. 물론 이러한 가격은 실제 국가 수매가보다 턱없이 낮은 것이다. 북한당국은 농민우대원칙과 저가의 식량공급정책에 따라 농민들로부터는 쌀을 ㎏당 82전에 수매하고 주민들에게는 8전에 판매하였었다. 이에 따른 가격손실은 국가재정으로 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격왜곡이 결국에는 생산과 소비, 수요와 공급간의 불균형을 야기시켜 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판단하여, 7.1경제관리조치 이후 쌀의 국정가격은 ㎏당 44원으로 무려 550배 올랐고, 옥수수도 24원으로 대폭 올랐다. 물론 국가 수매가도 ㎏당 쌀은 40원, 옥수수는 20원으로 올랐다.
식량 이외 부식물 역시 공급제로 운용된다. 부식물은 가구별로 가족수에 따라 배급량을 규정한 할당표(구매카드)를 지급하여, 이 한도내에서 국정가격으로 구입하게 된다. 된장, 간장, 식용유, 소금 등의 부식물은 인민반을 통해 배급표가 나와 식료품 국영상점에서 구입하며, 김치, 콩나물, 두부, 야채 등과 같은 기타 부식물의 경우는 농민시장에서 구입하거나 자체적으로 만들어 먹는다.
세대당 간장은 월 1ℓ, 된장 500g이 공급되고 있으며, 소금은 8월초 양배추가 나올 때 1인당 1kg 정도, 10월말 김장 때는 1인당 2kg가 공급된다. 배추, 무우는 김장 때 가구당 60-70kg 공급되며, 식용류의 경우는 세대당 월 400g을 공급받는다. 생선은 가구당 월 1kg이 원칙이지만 보통 3-4개월에 한번 정어리나 명태로 대체될 뿐이다. 육류는 국가적 명절에 특별배급을 통하여 할당되는데, 이를테면 김일성부자 생일, 노동당창건일 등에 세대당 돼지고기 등을 수급사정에 따라서 공급품목과 수량을 다소 달리하여 배급하고 있다.
6) 물가
북한당국은 지난해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발표함으로써 곡물을 비롯하여 농산물의 수매가격을 다시 정하고, 그에 기초하여 식량가격을 기준으로 시초원료로부터 소비품, 운임과 요금에 이르기까지 가격을 전반적으로 개정하고 그에 맞게 근로자들의 생활비도 인상하였다. 이러한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하게 된 배경에는 경제에서 실리를 내야하며, 그 실리는 돈으로 계산되고, 그 밑바탕에는 올바른 가격이 있다는 인식의 전환에서 비롯된다. 현실을 무시한 가격왜곡으로 인해 국영상점에는 상품이 부족한데 농민시장에는 상품이 쌓여 있는 상황이 초래되고, 결국 생산과 소비, 수요와 공급간의 불균형을 이루되어 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현실 인식 하에 모든 가격을 종전보다 평균 25배 정도 인상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북한당국은 ‘가격인상’이라고 부르지 않고, 가치를 정확히 계산해 ‘본래 가격’을 표시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종래에는 가격제정이 식량과 석탄, 전력과 같은 시초 원료를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에 반해, 이번에 개정된 가격의 기준은 물질생활에서 가장 선차적이고 필수적인 식량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식량생산에서 실리를 보장하고 농민들을 우대하는 원칙에서 수매가를 흰쌀 1㎏에 82전하던 것을 40원으로, 옥수수 1㎏에 49전하던 것을 20원으로 대폭 올렸다. 돼지고기나 닭고기도 농민시장의 가격보다 더 높은 1㎏에 각각 170원, 180원으로 수매가를 올렸다. 동력이나 연료로 이용되는 공업제품이나 수입제품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높게 정하였고, 철도여객 운임은 35.8배, 시내버스 운임은 20배 올렸다. 또한 주택사용료도 한 세대가 60㎡인 경우 한 달에 78원이고, 난방 사용료는 한 달에 175원으로 인상하였다.
북한 정부는 앞으로도 상품의 수요와 공급이 변동되는데 따라 상품가격을 고정시키지 않고 능동적으로 계속해서 조절해 나간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물가인상 내역(2002.7.1)>
구분 | 종전가 | 개정가 | 인상폭 | ||
식량․식료품 | 쌀(㎏) | 수매 | 82전 | 40원 | 49배 |
| 판매 | 8전 | 44원 | 550배 | |
옥수수(㎏) | 수매 | 49전 | 20원 | 41배 | |
| 판매 | 6전 | 24원 | 400배 | |
돼지고기(㎏) | 7원55전 | 170원 | 23배 | ||
닭고기(㎏) | 4원55전 | 180원 | 40배 | ||
된장(㎏) | 20전 | 17원 | 85배 | ||
콩기름(㎏) | 4원 | 180원 | 45배 | ||
담배(갑) | 35전 | 2원 | 6배 | ||
소주(ℓ) | 2원50전 | 43원 | 17배 | ||
생필품 | 남자운동화(켤레) | 3.5원 | 180원 | 51배 | |
세수비누(개) | 2원 | 20원 | 10배 | ||
칫솔(개) | 1.5원 | 15원 | 10배 | ||
공공요금 | 시내버스 | 10전 | 2원 | 20배 | |
철도(평양-청진간) | 16원 | 590원 | 37배 | ||
전기사용료(㎾) | 0.035원 | 2.1원 | 60배 | ||
원자재 | 석탄(t) | 34원 | 1,500원 | 44배 | |
베아링 | 2~5원 | 20~100원 | 10~20배 | ||
디젤유(ℓ) | 40원 | 2,800원 | 70배 | ||
휘발유(ℓ) | 65원 | 4,500원 | 70배 |
그러나 이와 같은 가격현실화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물자의 공급부족으로 인해 실제로 농민시장에서 거래되는 물품의 가격은 여전히 높다. 최근 농민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쌀은 1㎏에 185~195원, 옥수수 100~105원, 돼지고기는 1㎏에 300~330원, 운동화는 400~1천원 등 인상된 국정가격보다 3~5배정도 더 높게 거래되고 있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최근 낸 연구보고서 「북한 민주화와 탈북자문제」에 따르면, 4월말 현재 함경남도 리원군의 농민시장에서 거래되는 공산품과 식료품 등 주요 물품의 가격은 아래와 같다. 북한의 물가가 흔히 중국 접경과 가까울수록 싸고, 황해도 등 내륙지방으로 내려갈수록 비싸다. 리원군의 경우는 바다를 끼고 있는 농어촌 지역으로 북한에서는 비교적 생활수준이 넉넉한 것으로 소문나 있다. 따라서 리원군의 농민시장 가격은 전체 북한의 농민시장 물가와 비교하여 중간 정도 수준이거나 싼 편에 속한다.
<함경남도 리원군의 농민시장의 물가>
물품종류 | 물품명 | 농민시장 가격 |
가전제품 | 중고 흑백TV(대당) | 1만5천원 |
중고 칼라TV(대당) | 4만~8만원 | |
중고 냉장고(대당) | 5만~6만원 | |
중고전기밥솥(대당) | 6천원 | |
잡화류 | 벨트(중국산) | 250원 |
배낭(小) | 250원 | |
세수비누(개당) | 80원 | |
세탁비누(개당) | 120원 | |
양말(1켤레) | 150-200원 | |
담배(北 대덕산) | 150-160원 | |
담배(영국 로스만) | 350원 | |
천류 | 정장 1벌 옷감 | 3천~4천원 |
신발류 | 운동화 | 400~1천원 |
아동운동화 | 500~600원 | |
장화 | 1천~1천200원 | |
구두(남, 여) | 2천~4천원 | |
겨울용 솜신발 | 2천500~3천원 | |
기타 공산품 | 중고 자전거 | 2만5천~5만원 |
손수레(리어카) | 2천~5천원 | |
곡물류(㎏당) | 쌀 | 185~195원 |
옥수수 | 100~105원 | |
육류 | 닭(1마리) | 1천200원 |
돼지고기(㎏당) | 300~330원 | |
쇠고기(㎏당) | 330~350원 | |
수산물 | 게(㎏당) | 3천500~4천500원 |
문어(㎏당) | 1천400~1천500원 | |
명태(3마리) | 600~800원 | |
기타 식품 | 설탕(㎏당) | 200~300원 |
콩기름(㎏당) | 1천200원 |
※ 농민시장 (박스처리)
농민시장은 농민들이 협동농장에서 분배받은 것들 중 일부 자가소비하고 남은 여유 농산물이나 개인 터밭을 일궈 얻은 농산물을 도시에 직접 가지고 나와 팔 수 있도록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허용한 공간이다. 농업의 협동화와 함께 상업 분야도 국영화되면서 개인의 상업 유통망이 국영상점이나 협동단체의 상점으로 흡수되었고, 대신 농민시장이 국가공급망의 보충적 역할과 농가의 부수입 보장이라는 취지하에 개인의 경제활동 공간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농민시장의 거래되는 형태는 우리의 일반적인 시장의 모습과 같다. 다만 다른 점은 해당 지역의 ‘행정및경제지도위원회’의 상업과에서 지정한 매대(판매점)에서만 판매가 가능하며, 일정 정도의 매대사용료를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쌀이나 옥수수와 같은 식량, 공산품, 의약품, 주류 등과 같은 일부 품목들은 거래가 금지되어 있다.
농민시장은 판매자인 농민들과 구매자인 도시구민들의 편의를 다같이 고려하여 군소재인 읍과 노동자구, 큰 도시들의 구역 단위에 각각 하나씩 설치하였다. 시장은 10일장 형태로 개장되었는데, 이유는 협동농장의 근로가 매달 1일, 10일, 20일에 쉬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국가의 경제사정이 좋고 국영상점을 통한 공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던 60, 70년대 시기에는 국영상점에 밀려 농민시장의 이용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사정이 악화되고 배급이 끊기고 국영상점이 텅비어가자 주민들은 농민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시장이 급속도로 양적으로 확대될 뿐만 아니라 당국의 통제를 벗어나 금지된 품목들도 공공연히 거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보고도 당국은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배고픔과 생활고로 지친 주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일종의 안정화 기제였던 것이다. 한때 경제가 회복되면서 90년대 말에 무질서해진 농민시장을 다시 통제하기도 했으나, 이미 한번 터진 봇물을 다시 막으려는 것은 또다른 부작용만을 야기시킬뿐이며 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 농민시장의 영향력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북한당국은 농민시장의 현실적 존재를 인정하고 통제보다는 적극적인 이용 쪽으로 정책을 전환한 듯 보인다. 실제로 지난해 발표된 7.1조치에서 물가 인상의 폭은 농민시장의 가격이 크게 반영되었으며, 심지어 지난 4월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국가계획위원회 최홍규 국장은 농민시장을 ‘시장’으로 바꿔 부르기로 했으며 이제 농산물만이 아니라 각종 공업제품도 거래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하며 시장을 사회주의 상품유통의 일환으로 인정한다고 하였다. 이제 북한에서도 계획경제와 시장경제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북한당국의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활용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 7·1 조치 이후 중구역을 제외하고 평양의 전 구역에 현대적인 시장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있으며, 중국 조선족이나 재일동포 기업가들과 합작으로 평양 시내에 대규모 상점을 개설키고 계약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종래에 일정 액수의 매대사용료를 일률적으로 징수했던 방식이 아니라 ‘시장 사용료’를 판매량에 따라 정확히 받는 등 시장 기능을 적극 활용해 재정수입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고 있다.
이와 함께 주민들의 의식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일반 노동자들뿐 아니라 전문직․사무직 종사자들도 부업을 해 돈을 벌겠다며 노동의욕을 높이고 있다. 일반 주민들뿐만 아니라 간부들도 ‘장사를 잘해 인민과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한다. 여기에는 돈을 많이 벌되 어디까지나 개인주의에 기초한 시장경제가 아니라 집단주의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를 하려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집단주의적 가치를 본질적 특징으로 하는 ‘우리식 사회주의’에서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병행이라는 실험이 또다시 시험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7) 저축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북한에서도 개인소유를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개인소유가 가능한 대상은 근로자들이 받는 임금이나 노동의 대가로 받는 분배 몫, 그리고 그것으로 구입한 소비품들이다. 구체적으로 생활비, 저축, 가정용품, 일용소비품 등이 개인소유가 가능하다. 이러한 개인소유물은 그 소유자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상속권도 인정하고 있다. 북한의 각종 수매기관과 농민시장은 개인소유물을 처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개인소유가 가능한 대상 중 저축에는 저금과 예금이 있다. 저금은 일반 주민들이 자율의사에 따라 여유 화폐를 금융기관에 맡기는 것이고, 기업․기관의 의무적인 은행예치금은 ‘예금’이라고 한다. 주민들은 은행에서 개인적으로 대출을 받지 못한다. 단지 저금을 할 뿐이다. 가축을 키우거나 부업을 통해 목돈을 마련하면 주민들은 동네 저금소에 저축을 한다. 다른 동네의 저금소에 저축할 수는 없다. 통장에는 각각의 고유번호가 있다. 돈을 찾으려면 저금통장과 공민증, 도장을 지참해야 한다. 비밀번호는 없다.
조선중앙은행은 시·군마다 지점을, 마을에는 저금소를 두고 있다. 저금소에는 소장과 부기원(경리원) 2명 정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규모가 큰 곳은 직원이 5명인 곳도 있다. 저금소 직원들은 관할구역만 상대하기 때문에 예금주는 물론 가족까지도 잘 파악하고 있다. 아이들이 부모의 돈을 몰래 빼 쓰려고 통장을 들고 나가도 저금소 직원들은 부모에게 연락을 해 본다. 낯선 사람이 남의 통장을 갖고 와서 돈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현금이 비교적 잘 도는 평양에서는 주민들의 은행을 활발히 이용하는 편이지만, 지방으로 내려가면 은행 창구는 한산하다. 지방 저금소는 운영 시스템이 낙후하고 현금 흐름이 좋지 않아 주민들이 현금을 찾으러 와도 제때 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큰 돈을 만지는 장사꾼들일수록 돈을 제때 찾을 수 없는 은행 저축을 기피한다. 목돈이 국경지대로 몰리고 은행으로 잘 유입이 되지 않자 북한 당국은 ‘추첨제 저금’과 같은 이벤트를 만들어 저축을 장려하기도 한다. 분기별로 예금자를 복권식으로 추첨해 1등은 원금의 100%, 2등은 80%, 3등은 50%를 상금으로 지급한다.
당국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은행예금은 저조한 편이다. 주고객은 가정주부들로 대부분 관혼상제를 대비해 저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가정주부들이나 직장여성들 사이에는 은행 저축보다는 계모임이 더 활발하다. 은행에 돈을 저축해도 필요할 때 찾아 쓰기 어렵고, 대출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목돈 마련을 위해서 계모임을 더 활발하게 이용하고 있다.
은행에 저축할 경우 저축액이 노출될 뿐 아니라 필요시 즉시 인출이 어렵기 때문에 북한주민들은 은행에 저금하기 보다는 현금으로 집에 보관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에 따른 통화과잉현상 문제도 심각한데, ‘7.1경제관리개선조치’에 관한 내부 지침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개인들 수중에 있는 통화량은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이 발간한 『북한의 사(私)경제부문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가구당 보유하고 있는 현금 규모는 월급의 78배(북한 원화 기준 1만4069원)나 되고, 달러와 엔화 등 외화(外貨)를 저축수단으로 보유하기를 좋아하여 가구당 평균 3만7632원(월급의 209배)에 달하는 외화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인민생활공채 (박스처리)
올 상반기 ‘로또’의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로 한동안 남한 전역이 시끄러웠던 것처럼, 지난 5월부터 북한에서도 복권의 일종인 ‘인민생활공채’를 사려는 주민들이 줄을 서고 있다. 북한당국은 지난 3월 26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6차 회의에서 ‘인민생활공채’ 발행을 결정하였다. 발행 목적에 대하여 북한당국이 “강성대국건설에 필요한 방대한 자금수요를 원만히 보장하기 위한 사업”이며, “주민들속에 있는 여유 화폐자금을 동원하고 화폐유통량을 계획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바와 같이, 인민생활공채 발행은 7.1경제관리개선조치의 후속 조치로서 국가의 재원조달과 인플레 억제를 위한 통화량 조절에 목적이 있음이 분명하다.
인민생활공채의 발행은 2003년 5월 1일 시작하여 2013년 4월 30일까지 10년을 만기로 하고 있으며, 500원, 1천원, 5천원 등 세 종류가 있다. 원활한 공채 판매를 위해 중앙과 도․시․군에 ‘비상설인민생활공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아래에 인민생활공채상무를 두며, 모든 기관․기업소들과 리․읍․구․동사무소들에 공채협조상무를 조직하였다. 인민생활공채는 해외동포들도 구매가 가능하며 국가 공식환율에 따라 외화로 살 수 있고 그 상환도 외화로 한다. 또한 인민생활공채를 많이 구매한 사람들은 애국자이며, 정치적으로 물질적으로 높이 평가한다고 공언하였다.
이에 북한의 관영 중앙통신은 5월 1일 판매가 처음 시작된 후 이틀만에 인민생활공채 수십억원어치가 팔리는 등 주민의 호응이 크다고 전했다. 5월 31일 현재 약 2천만매의 인민생활공채가 판매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듯 주민들이 활발하게 공채를 구매하는 이유는 북한당국이 공채를 많이 구매하는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높게 평가해주고 여러 가지 국가적 혜택을 주는 우대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매한 인민생활공채를 다시 국가에 무상으로 헌납하는 주민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북한 언론매체들은 선전하고 있다. 지난 5월 18일 양창윤 재정성 부국장은 조선중앙TV에 출연하여 “인민생활공채 발행사업이 시작되자 각지 일꾼들과 근로자들 속에서 거액의 자금을 나라에 무상으로 바치는 소행들이 나오고 있다"고 강조한 바 있으며, 지난 6월 12일에는 조선중앙TV는 “엄정록 동무가 지배인으로 일하는 사업소 부원 안혜영씨가 부강조국의 내일을 위한 일에 남보다 먼저 발벗고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저축했던 돈으로 많은 양의 공채를 구매, 이를 전량 국가에 헌납했다"고 소개했다. 따라서 인민생활공채를 많이 구매하고, 다시 그것을 국가에 헌납하는 사람이 21세기에 새로운 유형의 영웅이자 애국자인 것이다.
※ 환율 (박스처리)
최근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공개한 북한의 무역은행이 작성한 ‘외환교환시세표’에 따르면, 유로화는 1유로 당 북한 원화는 살 때 158원 팔 때는 161.6원이고, 달러화는 1달러 당 북한 원화는 살 때는 147.056원, 팔 때 150.4원이다. 이 시세표에 의하면 주요 12개국 통화와 북한 원화 환율 중 이전까지는 미 달러화가 첫 번째 자리에 올라왔던 것과 달리 지금은 대 유로화 환율이 첫 번째 자리에 올라가 있는 반면, 대 달러화 환율은 12번째에 올라와 있다. 따라서 이 시세표는 지난해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북한원화의 대외 환율이 현실화됐다는 점과 북한이 지난해말 대외 거래에서 유로화를 기본 통화로 지정했다는 점을 공식 확인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식환율과 달리 농민시장에서 거래되는 평균 거래환율은 2월 현재 1달러당 670원선인 것으로 전해진다.(연합뉴스, 2003.5.18)
한편, 지난해 7.1경제관리개선 조치 이후 북한은 기존의 고정환율제에서 시장시세에 따라 환율을 조정하는 ‘변동환율제'를 도입하는 등 금융개혁에도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은 2002년 9월 북한의 김용술 무역성 부상이 일본에서 열린 비공개 세미나에서 “앞으로 시장시세에 따라 환율(거래환율)을 조정해 나갈 방침"이라고 언급하면서, “현재 1달러당 150원으로 시작한 환율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장시세에 따라 200원 혹은 120원 등으로 그때그때 조정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1달러당 150-200원 정도의 환율은 나진․선봉특구의 환율 수준과 같은 것이어서 북한 당국이 시장경제를 따르는 특구를 경제 운용에 참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외환관리는 재정부의 철저한 관리하에 조선중앙은행 및 무역은행이 전담하고 있다. 이 외에도 무역상사의 대외결제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금강은행과 대성은행이 있으며 조선중앙은행을 제외한 이들 3개 은행은 모두 국가은행으로 중앙은행의 지도 하에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수출이나 기타 대내외 거래를 통해 획득한 일체의 외환은 모두 조선중앙은행이나 무역은행에 반드시 매도해야 하며, 수입 등 대외지급을 위해 필요한 외환 역시 무역은행을 통해 할당·배정되고 있다. 수입에 대한 대금 지급은 무역부, 재정부 또는 중앙은행의 허가를 받아 이루어진다.
합영기업에 대한 외환관리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규제나 별도의 인센티브를 부여하지 않으며, 북한국영기업과 동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합영기업도 외환의 국가 집중 관리원칙을 지켜야하며 전체 외환수급계획하에서 운용되고 있다. 외국인은 개별적으로 중앙은행 또는 무역은행에 외환구좌를 개설할 수 있으며 수표소지도 가능하다. 그러나 입국시 반드시 외환신고를 해야 한다.
10) 여가 생활
(1) TV보기
저녁식사 끝나면 으레 가족성원들이 TV 앞에 모여 앉아 드라마나 뉴스를 보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여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우리 남녘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은 북녘의 여느 가정집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 퇴근 후 저녁에 가족들과 함께 TV를 보는 것은 북녘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여가 생활 중 하나이다. 흔히 북한의 TV는 주로 사상교양이나 당정책의 선전선동 위주로 방송이 편성되어 있어 천편일률적이고 재미가 없다고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도 이제는 옛말인 듯하다.
최근 북한의 방송국도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예술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를 다양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8시 뉴스가 끝난 이후 ‘텔레비젼 연속소설’ 형식의 드라마를 방영하는데 우리로 치면 8시 30분에 방영하는 일일 연속극과 같은 것이다. 이 시간대는 북한에서도 주민들이 가족들과 함께 가장 많이 TV를 시청하는 황금시간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내용과 형식은 많이 다르지만 연속극이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은 남이나 북이나 똑같다.
특히 90년대 들어와서는 스포츠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어 독특한 소재와 파격적인 장면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예를 들어 수중무용(수중발레)선수들의 애환을 소재로 한 ‘갈매기’, 예술체조 선수들의 애환을 다룬 '휘날리는 댕기' 등이 청소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생동감 넘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고 여성들의 노출도 과감해지는 등 북한의 TV방송에서도 변화의 바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오락프로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데, 노래와 교예로 꾸며지는 ‘명랑한 TV무대’, 시청자들의 애창곡을 접수받아 가수들이 무대에 직접 출연하여 노래하는 ‘요청무대’, 우리로 치면 코미디물인 재담극(촌극) 등이 많은 인기를 얻었다. 비록 오락물에 비해 인기는 떨어지지만 교양물도 여전히 북한 주민들의 주요 시청프로이다. 북한의 TV 방영프로의 비율은 보도에 15%, 음악에 22%가 할당돼 있으며, 나머지는 예술영화, 텔레비젼 소설, 아동용 프로 등으로 편성되어 있다.
북한에는 중앙TV와 개성TV 외에 토․일요일에만 방영하는 만수대TV 등 모두 3개 TV방송국이 있고 월-금요일까지는 하루 7시간, 토․일요일에는 8시간 방영된다. 북한의 컬러방송은 우리보다 훨씬 앞선 1974년 4월 15일에 시작되었다.
(2) 휴일보내기
북녘 노동자들도 일주일에 하루는 일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휴일날 평양 대성산 유원지에 나가 보면 한쪽에서는 노래자랑이나 춤판이 벌어지고 또 한편에서는 주패놀이(서양의 카드놀이와 유사)나 장기, 윷놀이 등에 열중해 있다. 남쪽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고스톱은 일제의 잔재라고 하여 못하게 해서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대동강변에서는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보통강가의 벤치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청춘남녀들도 쉽게 눈에 띈다.
북한 주민들에게 영화나 연극 관람, 교예 관람, 음악 감상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여가생활이다. 특히 영화감상은 아주 인기가 높아 휴일에 새로 상영되는 영화가 있으면 극장 앞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기도 한다. 평양시민들이 휴일에 즐겨 찾는 곳은 대성산유원지, 만경대유희장, 능라도유원지, 모란봉공원 등이 있다. 또 지방에는 강원도의 명사십리와 송도원, 함경남도의 마전, 남포의 와우도, 황해남도의 몽금포 등이 유명하다. 특히 대성산유원지는 오락시설물이 잘 갖춰진 북한 주민들의 대표적인 휴식처로 날씨가 좋은 날에는 몇 만명의 인파가 모여들어 그곳에서 전자오락도 하고 전동열차를 타거나 모의사격연습 등을 즐긴다.
이밖에도 휴일을 이용하여 직매장이나 농민시장으로 생활필수품이나 일용잡화를 사기 위해 쇼핑을 하기도 하고, 가정에서 집수리를 하거나, 그동안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기 위해 낮잠을 실컷 자기도 한다. 물론 신문이나 TV를 보며 집안에서 뒹굴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없지 않다. 또 미용원이나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단정하게 손질보기도 한다.
(3) 휴가 보내기
북한의 노동법은 노동자들이 생활비 100%를 지급받으면서 일정기간 쉴 수 있는 정기휴가와 보충휴가를 규정하고 있다. 정기휴가는 모든 근로자들에게 적용되며 그 기간은 연간 14일이다. 보충휴가는 어렵고 힘든 부문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에게 적용되며 그 기간은 7~21일이다.
정기휴가는 기관, 기업소에 입직하여 11개월이 경과하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누구나 신청할 수 있으며, 일요일을 포함하여 14일간이다. 또 휴가는 기관, 기업소, 단체의 실정과 본인의 요구에 따라 한번에 다 받거나 나누어 받을 수 있다. 보충휴가는 정기휴가를 받은 다음에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법적 보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근로자들은 직장의 계획과제 완수 및 노력동원 등으로 휴가를 반납한다. 휴가를 반납하고 계속 출근하여 일을 할 경우, 노동한 대가는 3개월 평균임금을 일자로 나누어 14일간의 임금을 가산해 준다. 법정휴가외에 ‘사결’이라 하여 개인의 사정에 따라 상사의 허락을 받고 쉴 수는 있으나 노임과 배급량은 쉬는 날 만큼 공제된다.
한편 북한 주민들은 우리처럼 여름에 몰아서 휴가를 가지는 않는다. 휴가를 이용하여 직장이나 조직에서 단체로 견학을 가는 경우도 있고, 가까운 지역의 유원지나 명승지를 주로 찾는다. 우리처럼 가족이나 친지, 친구 등과 함께 휴식을 위해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한 휴가는 주로 관혼상제나 김장철 때 주로 활용된다.
(4) 외식
북한 주민들도 때로는 매일 먹는 가정집 식사가 지겹거나 오랜만에 기분전환으로 가족들과 함께 바깥에 나가 외식을 하기도 한다. 이미 북한에는 1985년부터 평양역 근처나 창광거리 등에 식당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그만큼 주민들의 외식 수요가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들 식당들에서는 접대원들의 접대를 받아가면서 식사를 즐길 수 있으며, 차츰 전문요리를 내놓는 식당도 생기고 중국이나 재일동포와 합작한 식당들도 속속 문을 열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외식으로 주로 이용하는 식당은 이미 우리 귀에도 익숙한 옥류관, 청류관, 평양면옥, 평양온반집, 평양메기탕집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평양 곳곳에 외식이 가능한 여러 봉사망과 식당들이 차려져 있다. 보통 평양주민들이 애용하는 메뉴는 냉면, 단고기(개고기), 막국수, 비빔밥, 만두 등인데, 이들 음식값은 비교적 비싼 편이다. 특히 우리 남한에선 여름철이나 복날에 주로 보신탕을 먹는데 비해, 북한주민들은 단고기를 일상적으로 먹는다.
특히 방북 경험이 있는 남한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맛보았을 평양의 ‘옥류관’은 냉면으로 유명한데, 하루에 판매되는 식사량이 1만 그릇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옥류관은 대중식사실, 가족식사실, 연회장과 야외식당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1층에는 1백석 식당 2개와 8∼40석 식당 6개가, 2층에는 6백석 규모의 대연회장 등 2천2백50석을 갖추고 있으며, 야외식당은 1천4백석 규모이다. 또한 옥류관은 당·정간부들의 연회 및 외국인 접대장소로도 자주 이용되고 있다.
평양 통일 거리에 위치한 ‘평양단고기집'도 북한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대표적인 식당이다. 특히, 이곳에는 단고기 코스 요리가 유명하며, 6백30여석과 별도의 연회장, ‘화면음악설비'(노래방 시설), 최신식 공기정화기, 냉․온풍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옥류관과 함께 평양단고기집은 남한 사람들이 방북했을 때 자주 찾는 대표적인 음식점이다.
이밖에도 최근 자장면이 북한 주민들에게 외식으로 인기있는 음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아직 외식으로 할 수 있는 자장면집이 손으로 꼽을 정도로 매우 적지만, 평양의 광복거리에 있는 ‘청춘관'과 종로 사거리에 있는 `옥류교자장면집'이 유명한 자장면집이다. 그외에 보통강기슭에 있는 `청류관'과 같은 고급 음식점에서도 자장면을 만든다. 그중에서도 옥류교자장면집이 자장면의 원조라고 할 정도로 수십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맛 또한 좋기로 유명하다. 심지어 소문난 자장면 맛을 보려고 평양을 찾은 지방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매일 1천여그릇의 자장면이 팔려나간다고 한다. 특히 이 자장면집은 청춘관이나 청류관 등과 같은 고급 음식점과 달리 평범한 음식점이어서 일반 주민들도 비교적 쉽게 다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가 높다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또 이 자장면집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자장면을 잘하는 식당이라고 높이 평가했을만큼 단연 북한에서 최고의 자장면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11월 양강도 대홍단군 현지 지도때 군(郡)간부들과 함께 자장면을 먹으면서 주민들이 자장면을 많이 먹을 수 있도록 감자농사 외에도 밀농사를 잘 해야 하며 각지의 기초식료품공장에서 된장 생산을 정상화해야한다고 강조할 만큼 자장면 보급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13) 김장하기
북한에서 김장은 빼놓을 수 없는 겨울준비중 하나이다. 김장은 10월 중순에 북쪽지방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점 남쪽지방으로 내려와 11월 중순까지 이어진다. 북한에서는 김장담그는 것을 ‘김장전투’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는 흔히 중요한 일에는 ‘전투’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봄에 모내기 전투, 가을에 가을걷이 전투와 함께 김장도 ‘전투’ 반열에 올라 있다. 북한에선 김장은 ‘반년식량’이라고 하는데 그해 늦가을부터 다음해 이른봄까지 김치가 거의 유일한 반찬이기 때문이다.
김장철이 되면 온 동네는 배추바다로 변한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씻고 양념을 무치느라 온 가족이 총동원된다. 김장철이 되면 가정주부들에게는 3일간의 휴가를 별도로 준다. 남자들에게도 노력동원을 거의 없애고 집에 가서 돕도록 배려한다. 그야말로 온 가족이 달라붙는 김장전투가 되는 것이다.
도시나 노동자구에서는 공장, 기업소별로 각 협동농장의 배추, 무 밭이 미리 배정된다. 각 기업소들은 자기들이 먹을 배추, 무의 수확량을 높이기 위해 비료 등을 별도로 구입해 뿌리는가 하면 아예 노동자가 나가 직접 관리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확철이 다가오면 농장원을 믿지 못해 기업소 노동자가 경비를 서기도 한다고 한다.
김장철이면 포전마다 저울을 가져다 놓고 밭에서 직접 배추와 무를 개인에게 분배한다. 배추의 경우 어른 1인당 70~80kg, 무는 15~25kg 정도를 배급받는데 무가 배추보다 귀해 모자라는 경우가 많다. 개별적으로 뙈기밭에서 기른 배추까지 합치면 1인당 약 100kg 정도의 김장을 하게 된다. 대가족인 경우에 1톤 이상의 김장을 담는 집도 드물지 않다.
김장 배추의 수송을 위해서는 군 단위에서 보유하고 있는 비상용 기름까지 사용되며, 자동차와 트랙터는 물론 소달구지 지게 등 모든 운송수단이 총동원된다. 운반작업은 밤을 새며 진행된다. 캄캄한 밤에 횃불을 켜고 배추, 무를 지키는 사람들도 흔히 볼 수 있다.
고춧가루와 양념은 각자 해결한다. 김장철이 되면 소금값, 고추 값과 마늘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특히 김장철에 소금이 부족해 몹시 애를 먹는다. 일조량, 토양, 조수간만의 차 등 자연조건에 있어 소금을 생산하는데 불리한 조건에 있는 북한은 만성적으로 소금 부족을 겪고 있다. 배급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때는 매년 20kg정도 국영 식료상점을 통해 국정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지만, 배급체계가 무너지면서 농민시장에서 비싼 가격(1㎏당 쌀값의 1/3정도)으로 사거나 개인적으로 바닷물을 퍼다가 끓여서 소금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그야 말로 ‘소금전쟁’을 치른다. 얍삽한 장사꾼들은 돈이나 식량을 갖고 서해안의 소금밭(염전)에 가서 소금을 도매로 구입하여 매점매석하여 이때 한 몫 잡으려 한다.
김장담그기가 끝나면 가정주부들은 며칠씩 앓아 눕는다. 그리고는 김치가 맛이 들 무렵이면 자기집 김치를 옆집에 나누어 주면서 다른 집의 김치 맛을 본다. 그러면서 이웃간의 정을 확인한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김장풍속도 많이 변화했다. 종래에는 각 기관이나 직장별로 하던 김장을 동·인민반별로 하고 있다. 이처럼 제도를 바꾼 것은 지역단위로 묶어 김장용 배추와 무우의 수송문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최근 들어 김장채소를 나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자동차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동·인민반별로 휘발유를 자체 조달하여야 하며, 운전사들에게 술과 담배 등과 같은 뇌물을 주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배급받는 배추와 무 양도 크게 줄어 이웃간에 나누어 먹는 인심도 사라지고 최근에는 김치도둑도 극성하여 김칫독을 지키기 위해 자물쇠를 채우기도 한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김장김치로 통김치, 석박지, 보쌈김치, 동치미 등을 주로 담근다. 김장김치의 기본인 통김치는 지역에 따라 젓갈이 다르다. 동해안 일대의 함경도와 강원도에서는 동태를 쓰고,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는 흔히 젓갈을 넣는다. 석박김치는 김장김치에 앞서 먹는 김치로 어느 지방에서나 담그어 먹는다. 보쌈김치는 개성지방의 보쌈이 유명하다. 동치미의 경우, 평양지방에서는 배추보다는 무우로 동치미를 해먹는다.
14) 이사
북한 주민들은 직장을 배치받은 후 직장 부근에 배정된 주택에서 생활한다. 개인은 살고 있는 집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거주지가 싫어 이사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이사갈 수는 없다. 비록 헌법에는 공민의 거주와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거주지를 옮기기 위한 퇴거증명서를 받으려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북한사회는 직장과 조직, 국가기관이 유기체처럼 얽혀있기 때문에 이사는 곧 직장 이동을 뜻한다. 가령 부모, 형제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하고 싶을 경우에도 우선 이사갈 지역의 인민보안성과 해당 직장에서 받아들이겠다는 승인서가 있어야 한다. 직장의 지배인(사장)이나 당비서의 승인을 받은 뒤에도 여러 가지 서류를 준비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증명서는 조직이동증과 군사이동증, 식량정지증명서 등이다. 당, 직맹, 농근맹, 청년동맹, 소년단 등 소속 조직에서 조직이동증을 발급 받으면 옮겨갈 해당 조직으로 조직생활을 어떻게 해왔는가를 적은 개인평정서가 발송된다. 그리고 나서 해당 인민위원회 군사동원부에서 군사이동증을, 양정사업소에서 식량정지증명서를 발급받는다. 양정사업소에서 발급하는 식량정지증명서에는 언제까지 배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다른 지역에 가서 배급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세대주는 부양가족들의 식량정지증명서를 함께 챙겨야 한다.
모든 서류를 준비한 후 인민보안성에 가면 이사갈 해당지역 보안성과의 최종 협의를 거쳐 거주이전을 승인받게 된다. 서류가 다 구비돼도 보안성에서 퇴거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으면 이사를 갈 수가 없다. 퇴거증명서를 발급받은 후 15일 이내로 거주 등록을 하지 않으면 인민보안성이나 보위부의 집중감시와 추적을 받게 된다.
이러한 절차 외에도 시·군 인민봉사위원회 도시경영사업소에서 살고 있는 주택의 관리상태를 확인받아야 한다.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입주할 지역에 주택을 배정받는다. 또한 주택관리 상태를 검사하여 문제가 발견되면 불합격증을 부착하거나 벌금을 부과시키기도 한다.
첫댓글 정성희 소장님....정창현 소장님의 귀한 글, 저희 남북교육연구소 카페에도 옮겨 올려놓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