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밭의 그리움 / 석애 김인숙
장마통 가슴에 묻어놓은
씨앗 하나 감자 캐낸자리에 심어놓고 다독다독
저 먼곳 산자락아래 묵밭
생강은 한달이 돼도 보이지않는구나 너무 멀리 보냈는지
빗속에 우듬지 순 잘라 심어도 뾰족히 순 내밀어 살아나는데
맘 졸이는구나
시간은 그리움
쏟아지는 빗줄기 만큼이나
빗속에서 기다린다
장마와 기다림의 존재론
― 석애 김인숙의 「묵밭의 그리움」평론
석애 김인숙의 「묵밭의 그리움」은 농촌의 일상적 풍경을 소재로 삼고 있으나, 그 풍경은 단순한 전원적 서정에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씨앗을 심고 싹을 기다리는 농부의 시간을 통해 인간 존재의 가장 오래된 감정인 '그리움'과 '기다림'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작품의 미덕은 농사의 실제성과 내면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포개어 놓았다는 점에 있다.
첫 연은 시의 정서를 단숨에 열어 보인다.
장마통 가슴에 묻어놓은
씨앗 하나 감자 캐낸 자리에 심어놓고 다독다독
'장마통 가슴'이라는 표현은 매우 독창적이다. 장마는 단순한 계절이 아니라 오래 눅눅하게 젖어 있는 마음의 상태를 상징한다. 그 젖은 가슴에 씨앗을 묻는 행위는 상실 이후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본능을 드러낸다. 특히 "다독다독"이라는 의성어는 농부가 흙을 다지는 손길인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위로의 몸짓으로 읽힌다. 이처럼 물성과 심리가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만나는 지점이 이 시의 첫 번째 성취이다.
둘째 연에서는 기다림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저 먼곳 산자락 아래 묵밭
생강은 한달이 돼도 보이지 않는구나
너무 멀리 보냈는지
여기서 '묵밭'은 단순히 오래 묵은 밭이 아니다.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마음의 공간이며, 기억이 잠들어 있는 시간의 들판이다. 생강은 원래 싹이 늦게 올라오는 작물이라는 점에서, 시인은 식물의 생태적 특성을 정서의 리듬으로 끌어온다. "너무 멀리 보냈는지"라는 구절은 농사의 실패를 걱정하는 말 같지만, 실은 떠나간 사람이나 지나간 시간을 향한 탄식으로 읽힌다. 대상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독자는 자신의 그리움을 그 빈자리에 자유롭게 투영할 수 있다.
셋째 연은 생명력의 역설을 보여준다.
빗속에 우듬지 순 잘라 심어도
뾰족히 순 내밀어 살아나는데
잘려나간 가지조차 다시 살아나는 자연의 회복력은 인간의 삶과 대비된다. 자연은 상처를 생명으로 바꾸지만 인간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이러한 대비는 시를 단순한 농경시가 아니라 존재론적 성찰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마지막 연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맘 졸이는구나
시간은 그리움
쏟아지는 빗줄기 만큼이나
빗속에서 기다린다
"시간은 그리움"이라는 한 줄은 이 작품의 시적 명제라 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시간은 흐르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이 시에서는 시간이 곧 그리움으로 치환된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리움도 깊어진다는 역설적 인식이 간결한 문장 속에 응축되어 있다. 마지막의 "빗속에서 기다린다"는 특정 대상을 기다리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삶 자체를 견디는 인간의 자세를 상징한다. 빗줄기는 끝없이 내리고, 기다림 역시 끝없이 이어진다. 이 열린 결말은 독자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다만 문학적 완성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보완점도 보인다. "너무 멀리 보냈는지"는 정서적으로는 아름답지만 다소 설명적인 느낌을 준다. 이 부분을 이미지 중심으로 조금 더 절제한다면 여백의 미학이 살아날 수 있다. 또한 마지막 연의 "쏟아지는 빗줄기 만큼이나"는 다소 익숙한 표현이어서, 시인의 개성적인 언어로 한 번 더 변주된다면 작품의 밀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럼에도 「묵밭의 그리움」은 농사의 언어를 통해 인간의 기다림을 노래한 수작이다. 흙과 씨앗, 장마와 생강이라는 구체적인 사물들이 단순한 소재를 넘어 기억과 상실, 희망과 인내를 상징하는 시적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묵밭'이라는 공간은 버려진 땅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생명이 움틀 것을 믿으며 기다리는 희망의 장소로 새롭게 해석된다.
이 시는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의 묵밭을 품고 살아간다. 어떤 씨앗은 오래도록 싹을 틔우지 않고, 어떤 기다림은 장마처럼 길어진다. 그러나 시인은 끝내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다. 빗속에서도 흙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언젠가 올라올 작은 싹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담담한 시는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