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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형통
제목 : 형통한 삶으로 가는 길
성경 : 잠 3:1~10
찬송 : 384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30108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잠 3: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잠 3:2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잠 3:3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잠 3:4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잠 3: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잠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잠 3: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계묘년 새해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형통한 삶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해 드리려고 합니다.
형통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여 그의 형통함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보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금년 한해도 형통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런데 형통한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형통한 삶에도 일정한 원칙과 기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줍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법(法)을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잠 3: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부모의 권고는 자녀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내 아들아!”라고 사랑하는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는 아들의 행복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가르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과 명령은 무엇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잊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법과 명령을 행동으로 옮길 때 우리는 형통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잠 3:2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그리하면’은 결과 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주어질 복이 무엇입니까?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장수하기를 원하십니까? 요즘은 100세 시대입니다. 장수가 복이 되기 위해서 동반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평강’입니다. 질병과 전쟁, 다툼과 공포가 가득한 장수는 많은 해를 누릴수록 고통을 더할 뿐입니다.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보십시오. 최대 피해자는 어린이와 여인들 그리고 노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지켜 행하는 것은 평강을 동반한 장수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노년을 잘 준비하려면 젊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늙어서도 장수와 평강의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평강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앞으로 살아갈 해가 많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384장을 비롯해서 많은 찬송시를 지은 Fany J Crosby 여사가 있습니다. 그는 생후 6주 만에 소경이 되어서 세상을 구경하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할머니께 성경을 배웠으며, 15세에 맹인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가 94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기까지 9000편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가장 불행한 여인이었던 그녀가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모양이 있고 또 사람마다 사는 의미나 목적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이 짧은 일생동안에 때로는 웃기도 하고 때로는 울기도 하면서,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었는가 하는 것은 삶의 의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의미를 알건 모르건 간에 공통된 것은 여러 개가 아니라 '행복'이란 단어 하나입니다. 행복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 종류도 다르지만 그러나 행복을 위하여 살려고 애쓰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불행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합니다. 사람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행복을 찾아 애쓰고 노력한다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잘되고 형통하고 내 마음대로 되었을 때는 웃음이 나오고 감사가 나오고 그것이 행복인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 환난이나 슬픔을 만날 때는 그 행복이 다 달아나 버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형통 즉 행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 3:3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잠 3:4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인자와 진리’(헤쎄드 베에메트)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고 했는데 ‘인자’(헤쎄드)가 무엇입니까? 인자(헤쎄드)는 “은혜, 충성, 선함”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인자는 사랑에 근거한 언약적 충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진리’(에메트)는 “진리, 성실”이란 뜻으로 정직과 성실을 겸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언약 관계에 따를 충성과 헌신을 가리킵니다. ‘인자와 진리’는 성도의 내적 특성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와 진리’는 먼저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났습니다. 이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자녀들에게도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성품이 바로 인자와 진리입니다. 마음 판에 새겨진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목에 맨 것과 마음에 새긴 것은 어디를 가든지 함께 가고 어디에서나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숨길 수 없습니다. 인자와 진리가 내게서 떠나지 않도록 하나님을 대하든 사람을 대하든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값비싼 보석보다 더 귀한 아름다운 것이 인자와 진리로 장식한 성도의 외적 모습과 내면세계입니다. 목에 매는 것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라면 마음 판에 새기는 것은 내면을 의미합니다. 목에 매라는 것과 마음 판에 새기라는 것은 결국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라는 말의 강조적 표현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이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일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의 삶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만 잘하고 사람들에게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는 후하게 드리면서 부모에게 드리지 않는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마 15:5-6). 인자와 진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는 성도의 신앙과 삶에 풍성하게 드러날 때, 결국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통한 삶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법을 마음 판에 새기십시오. 그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항상 볼 수 있도록 목에 매고 다니십시오. 즉 삶으로 보여 주라는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이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마음과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도록 할 때 형통한 삶으로 가는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려면 마음을 다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요동치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백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인간적인 논리와 계산에 입각해 행동하고 실천에 옮길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보다는 호흡 있는 인간을 의지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의뢰한다는 것은 단순히 믿는다는 차원을 떠나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지 않은 마음이 나옵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으로 구하였으면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의심하는 것은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약 1:6-7절).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보다 왜 그 일을 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대하25:2). 사람은 외모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태도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잘못된 동기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또한 옳지 못한 일을 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는 일의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태도를 형성하고 결정짓는 것이 바로 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사가 과거에 얼마나 병을 잘 진단했는지 상관없이 그가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순전히 요행을 바라고 진단을 하여 환자를 치료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어떤 환자가 의사를 찾아가겠습니까? 일의 과정도 그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과 사랑 이외의 어떤 다른 동기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발전시켜 나가려 한다면, 그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사랑까지도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단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의 분깃은 그의 백성이라(신33:21)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바로 당신을 원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공경하시렵니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공경합시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10: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잠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려면 자신의 지혜나 명철을 포기해야 합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배는 선장을 잘 만나야 무사히 목적지까지 안착할 수 있습니다. 항해를 잘못하면 암초에 부딪힐 수도 있고 엉뚱한 방향으로 항해할 수도 있습니다.
'인정하라'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다에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알다'라는 뜻의 '야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앎은 경험적인 앎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그분을 우리 삶의 선장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머리로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한 번 되돌아보십시오. 과거에는 잘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간섭하시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지나고 보니 “아! 그렇구나!”라는 깨달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십니까? 이것은 말은 쉽지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누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도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것은 우리가 좋은 일이 있을 때나, 좋지 않은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요셉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스는 83세 때 안 질환으로 실명선고를 받았습니다. 아들 브람웰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부스는 아들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네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뜻이로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부스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두 눈을 가진 상태에서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일은 일단 끝났다. 이제부터는 두 눈이 없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지"
윌리엄 부스는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명을 당하고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새로운 봉사를 다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이 범사에 그를 인정할 수 있을까요? 범사에 그분을 인정한다는 것은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을 때 그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지도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체코가 자랑하는 작곡가로서 안혼 드보르작이 있습니다. 주옥같이 아름다운 여러 음악을 작곡했는데 그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신세계교향곡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작곡한 악보를 보면 어떤 곡이든지 곡 끝에다가 'Thanks be to God'이란 말을 넣었습니다. 힘들여 만든 음악의 말미에 Thanks be to God(하나님께 감사를)을 넣은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재능을 주셔서 이토록 좋은 음악을 작곡하게 되었는데, 또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건강과 환경을 주셨는데, 내 음악의 뿌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그분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라고 했다 합니다.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임자가 있습니다. 한 낱 미물인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안다고 했는데(사1:3)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내 삶을 창조하신 분이 계십니다. 내 삶의 뿌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상/세 어머니를 예비한 하나님 - 펄벅 여사의 양녀 줄리 헤닝)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범사에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형통한 삶으로 가는 길입니다.
셋째, 첫 열매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삶은 사람에게 기쁨과 평안을 줍니다. 마음의 기쁨과 평안은 사람에게 최고의 양약입니다.
√잠 3: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반면에 자신을 의뢰해 고통 받고 절망하는 삶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잠 14:30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물 또한 사람이 잘 다룰 때 복이 됩니다.
√잠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잠 3: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솔로몬은 아들에게 첫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곡식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출 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대하 31:5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첫 열매들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첫 열매를 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열매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자들에게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가득히 차고 넘치는 축복이 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를 맞이하여 진정 형통한 삶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를 꼭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법을 마음 판에 새기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라, 첫 열매로 하나님을 공경하라. 이 세 가지 원칙을 꼭 붙들어 형통한 삶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