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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2019년을 마무리하면서, 2020년 새 해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해의 끝자락에 설 때마다, 희망보다는 절망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런던의 케이 미술관에는, “프레드릭 왓츠”의 작품인 “소망”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둥근 지구 위에, 연약한 여인이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이 여인은, 눈에 수건을 싸매고 있습니다. 즉, 앞을 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조그마한 비파를 잡고 있습니다. 비파의 줄은 본래 일곱 줄이지만, 여인의 손에 있는 비파의 줄은, 단 한 줄 뿐입니다. 다른 여섯 줄은, 이미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남겨진 한 줄로 계속해서, 비파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프레드릭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믿던 모든 것이 끊어진다하여도, 한 가닥 소망의 줄이 남았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모든 것을 이기고 나갈 수 있음을 작품을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인 우리에게 있는 한 가닥 소망의 줄은 어떤 줄입니까? 시 37: 4을 보시면,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합니다. 또, 마 15: 28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합니다. 이 앞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방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지만, 예수님은 냉정하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며 거절을 합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는 겁니다. 이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 처참하게 거절당하는 가운데서도, 예수님께 간청하는 모습 속에서, 시 27: 9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라고 간청하는 기도가 연상됩니다. 이 여인에게 남은 한 가닥 비파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빌 2: 13을 보시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지냈던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송년주일로서, 새 해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주일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절망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셨기 때문입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병남 집사님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 분은, 교통사고로, 척추에 금이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담당의사가, 뼈에 금이 갔는데, 이 틈이 너무 많이 벌어져서, 수술을 해도 하반신 마비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겁니다. 이로 인해, 조 집사님은 절망 속에 묻혔습니다. 그 속에서, 주일예배에 참석했는데, 목사님이 “등뼈가 아픈 사람이 나았습니다”라고 하시는 데, 그 말씀이, 꼭 자신에게 하는 말씀과도 같아, “아멘”이라고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약 보름 후, 진료를 받았던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는 가운데, 담당의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오더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데, 다른 병원에서 어떤 치료를 받았습니까?”라고 묻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불가능하여도,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은, 이겁니다. 요한복음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시며,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를 증거합니다. 그러기에, 20: 31을 보시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복음서로 말하면, 마태, 마가, 누가와 함께 4복음서이지만,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에 초점을 두는 반면, 요한은, 이 사건들이 전하는, 그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면, 공관복음서에는, 사건에 대한 기록만 있지만, 요한은, 그 사건 후, 예수님이 모인 무리에게, 이에 대해 말씀하신, “생명의 떡”에 대한 말씀을 기록함으로, 이 사건에 담긴 의미를 전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본문 1절을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본문에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그리고, “태초”라는 말은, “처음,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한 헬라어 “아르케”는, 추상명사로 “기원, 원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창 1: 1에서 시작되는 “태초”와 동일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에 의해 제일 먼저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어서 보시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태초 안에, 창 1: 1의 태초가 포함됩니다. 즉, 본문의 “태초”는, 창 1장에서 말하는 시간적 개념으로서의 태초가 아닌, 시간 이전의 “영원”에 해당되는 “태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만물이 있기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히 1: 3을 보시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합니다. 또 계 22: 13을 보시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합니다. 본문 이하의 14절을 보시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은, 우리와 동거한다는 겁니다. 요 14: 20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동거한다는 것은, 함께 생활한다는 겁니다. 가족은 한 곳에서 함께 지냅니다. 그러기에, 서로가 서로를 압니다. 서로의 취향, 성격, 입맛을 알고, 재능도 압니다. 하지만, 타인은 가끔, 함께 할 뿐이라, 잘 모릅니다. 가족이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듯,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동거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요 10: 14 – 15을 보시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요 17: 5을 보시면,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유대의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갈릴리 나사렛의 목수아들이라는 것을 벗어나서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세계의 4대 성인 정도로만 아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있겠습니까? 믿음이 있겠습니까? 빌 2: 6 - 8을 보시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갈 1: 4 – 5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조차,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만이, 우리를 온전한 성도의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요 16: 28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하며, 요일 1: 2을 보시면,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재였던 때와 장소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도 그 곳에 함께 계십니다. “메리 스티븐슨”이 쓴, “모래위의 발자국”이라는 시를 보면, 해변의 모래로 난 발자국이 하나인 것을 보고는, 곰곰이 생각했더니, 그 때는 자신이 가장 힘들었고,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제가 주님을 따른다면, 주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죠. 그러나 나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나타난 모래 위에는, 오직, 한 사람만의 발자국만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주님은 나를 떠났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의 귀하고 소중한 자여,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너를 조금도 떠나지 않았단다. 너의 시련의 때, 너의 고통의 때, 네가 본, 오직 한 쌍의 발자국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었느니라. 그 때,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희망이 있음을 기억하여, 다윗과 같이, 어떤 자리에서나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께, 우리를 위한 계획이 있습니다.
본문을 증거하는 곳이, 창 1: 1입니다. 보시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근원이 되십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헬라라 불리는, 그리스에서는, 우주 만물의 기원에 대한, 여러 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탈레스”는 만물의 기원을 “물”이라고 하였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 하였으며,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만물의 기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태극”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 곳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근원으로 증거합니다. 롬 11: 36을 보시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성자이심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은 것이 하나도”라는 말은, 사람이나 천사도 예외가 아님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 하여, 그 분을 우리와 동일 선상에 둔다는 것은, 신성 모독입니다. 그러므로, 고전 8: 6을 보시면,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 하며, 골 1: 16 – 17을 보시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합니다. 또, 계 3: 14을 보시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여러분, 본문이 증거하는 것을 한 마디로 일축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겁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창조사역을 행하셨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대단하게 보이는 것이나, 하찮게 보이는 것이나, 세상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겠죠?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하심으로,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또 하나는, 시간의 우연 속에서,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의 인생관은 다릅니다. 우연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품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준비하신 계획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며, 그것을 이루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이사장을, 목사님으로 둔 대학에서,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사장님은 졸업생들에게 축사를 하셨는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러나 졸업에 앞서 여러분은 이제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직장을 얻은 뒤에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결혼을 한 다음에는 자녀를 어떻게 가질 것인가,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이 모든 질문에 답을 내렸다면 이제 여러분은 남은 노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간다면, 결국 죽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이런 질문들에서 벗어나 보다 고귀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인도를 받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주시는 고귀한 목적을 향해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충만한 기쁨과 평강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가끔, 절망적인 상황을 만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도 만나고, 기도해도 변하지 않는 상황, 더 악화되는 상황도 만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절망적인 회의를 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요셉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전혀 엉뚱하게 노예로 팔렸고,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옥살이를 했습니다. 이렇게 보낸 세월이 한 해, 두 해입니까? 우리는 하루 이틀도 못 기다리는 데, 요셉은,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상황에 따른 절망적인 회의에 빠질 것이 아니라, 마인드 컨트롤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라는, 소망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생명”은, 요한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서, 본서에서만, 36번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들은, “영생”을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만 “영생”이 있습니다.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생명은 온갖 재보의 최고로 삼는다”라고 하였고, 또, 프랑스의 시인 “레니어”는, “임종에 있어서 사람이 애석해하는 것은 목숨이 아닌, 생명 그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 19: 16을 보시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합니다. 고래로,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영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해답을 앞에 두고도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의 지도자들은, 마 23: 2을 보시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서, 백성들을 가르쳤지만, 영생의 길을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 23: 15을 보시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자들이, 백성들에게, 영생의 길을 알려주지 못한 것에 대해, 예수님이 호되게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딤전 1: 7을 보시면,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하며, 약 3: 1을 보시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하였던 겁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왜? 석가나 공자, 모하메드는 안되고, 꼭 예수만 믿어야 하는가?”라고 합니다. 또, “종교는 다 똑같은데, 굳이 예수만을 고집하는 것은, 편협이고 독선적인 생각이다”라며, 비판합니다. 이러한 주장에, 일부 기독교인들도 동조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명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 14: 6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된 우리는, 영생의 길을 압니다. 요 3: 16을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며, 요 6: 51을 보시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행 4: 12을 보시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끝에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한 겁니다. 빛이 없기에,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방황하는 가운데,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1: 15에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를 믿는 자에게 생명이 되셨습니다. 올 2019년을 보내고, 2020년을 맞이하는, 교차로에 있는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그 소망을 어디에 두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