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떨어진 샛노란 은행잎의 언어
- 임덕기의 시
오홍진(문학평론가)
임덕기 시인은 생존을 향한 뭇 생명의 지독한 열망을 깊이 있는 언어로 그리고 있다. 풀잎은 햇볕을 받아들이려 악착같이 푸른 하늘로 몸을 뻗는다. 살아 있어야만 다음 시간을 기대할 수 있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역사에서 다음 시간이란 곧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징표와도 같다. 생명이란 저마다 다음 시간을 열망하지만, 인간을 중심에 세운 근대는 이러한 생명성을 짓밟은 자리에서 피어났다. 지금 당장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근대 문명이 불러낸 생태적 위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자연의 위기는 문명을 건설한 인간-생명의 위기로 곧바로 이어진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신념은 이제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망집이 되어버렸다. 자연이 파괴되면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인간 또한 살아남을 수 없다. 임덕기 시에 두루 펼쳐지는 자연 사물의 알레고리는 이런 맥락을 품고 있다고 보면 좋겠다.
생명을 낳는 터전이 죽음의 감옥이 되어버린 상황을 다룬 「가두리 양식장」을 먼저 보자. 이 시에서 시인은 “잿빛 천장이 보이는 곳”으로 근대 문명의 터전을 형상화하고 있다. 숨 막히게 좁은 이곳에서 생명은 온종일 동그라미를 그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동그라미’를 그려야 좁은 통 속에서나마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햇살 대신 조명이 환히 켜진 곳에서 생명은 “먹이를 잡지 않아도/ 끼니때가 되면 사료를 던져주”는 상황에 적응해야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사료를 던져주는 존재는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는 생명에게는 관심이 없다. 사료를 먹고 살아남으려면 생명은 끊임없이 동그라미를 그려야 한다. 드디어 조명으로 밝혀진 좁은 터전을 나와 “구름 사이에 짙푸른 하늘이 고여 있”는 장소로 떠날 날이 왔다. 바람에 묻어오는 짭짤한 갯내를 맡은 생명은 본능적으로 ‘바다’를 떠올린다.
드넓은 바다에 이르렀다는 걸 입증하기라도 하듯, 주위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닌다.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 숨 막히게 좁은 곳을 빠져나온 생명은 흐뭇한 마음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인가. “그런데 불쑥 그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물은 이쪽과 저쪽을 나눈다. 그물 밖으로 나가려면 그물을 찢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입으로 물어뜯어도 그물 밖으로 나갈 구멍은 뚫리지 않는다. ‘가두리 양식장’이라는 좁은 터전에 갇혀 있던 물고기는 그보다는 큰 “바다감옥”으로 나왔을 뿐이다. 물고기의 터전인 ‘바다’는 왜 ‘감옥’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바다를 감옥으로 만들어야만 인간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이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 인간은 이익이 되는 것과 이익이 되지 않는 것으로 자연-생명을 나눈다. 근대정신의 이분법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근대인이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에 익숙해질수록 자연은 더욱더 파괴될 수밖에 없다. 「개미들의 행진」에서 시인은 무궁화나무와 개미들에 빗대어 문명과 자연의 관계를 시화하고 있다. 때가 되면 개미들은 진딧물 농사를 지으려고 나무우듬지를 오른다. 그런데 진딧물이 보이지 않는다. 작은 발들을 재바르게 움직여 우듬지까지 올라왔으니 그냥 내려갈 수는 없다. “개미들은 무궁화꽃 속에 들앉아/ 꽃가루를 묻힌 채 널브러”진다. 무궁화를 향한 개미들의 집념은 해마다 깊어지고, 그럴수록 “무궁화나무의 한숨소리” 역시 깊어진다. 시인은 “영악한 개미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영악한 개미들은 나무의 한숨 소리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이익이 되는 농사를 짓기만 하면 된다. 자연을 파괴한 자리에 문명을 세운 인간 또한 개미처럼 자연이 내뿜는 한숨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드높은 하늘로 뻗어가는 근대정신의 바벨탑을 포기해야 한다.
이분법에 충실한 근대정신의 맞은편에 시인은 쏟아지는 햇살을 향해 목을 길게 늘인 ‘벌개미취의 발돋움’을 내세우고 있다. 「벌개미취의 발돋움」에 나타나는 벌개미취는 베란다 화분을 터전 삼아 고된 삶을 살고 있다. 벌개미취의 감각은 오로지 쏟아지는 햇살을 향해 있다. 창밖에서 쓰르라미가 열띤 소리로 울고 있지만, 벌개미취는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창틀에 박힌 모기장을 뚫으면 햇살이 쏟아지는 세계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모기장을 뚫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창밖 햇살을 향해 발돋움한 벌개미취는 “아슴푸레한 지난 기억을 더듬어 떠나온 숲속을” 그저 헤맬 뿐이다. 말 그대로 벌개미취는 지난 기억으로 그려진 환상에 빠져 있다. 환상에 깊이 빠질수록 “벌개미취 연보라 낯빛”은 환해지지만, 돌려 말하면 그것은 그만큼 벌개미취가 지난 기억의 환상에 묶여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가두리 양식장을 나온 물고기가 그물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공룡시대 화석이 살아있다
살아서 천년의 삶을 이어간다
더 이상 진화가 필요치 않다고 거부하며
홀로 기품있게 살아간다
홀로 서서 고독을 즐기는 명상가이다
친척도 없이 처음 태어난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잘 버티고 사는 것은
철저한 계획과 준비성으로 태어난
완벽을 추구한 부모 덕분이다
급변하는 계절변화에도 휘둘리지 않는
끈질긴 고집 덕분이다
갈바람이 불어 은행알이 땅에 떨어지면
누구도 해치지 못하게 악취를 풍겨
처음부터 접근을 막아버린다
이중 잠금장치 안에 열매를 숨겨두고
비로소 안심하는 완벽주의자다
바람에 샛노란 은행잎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길게 살려면 철저한 준비성이 필요하다고
바닥에 떨어진 잎들이 넌지시 제 속내를 드러낸다
- 「은행나무의 속성」 전문
공룡시대의 화석을 품고 있는 은행나무는 지금도 살아 천년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시인은 기품 있는 삶을 홀로 실천하는 은행나무를 “홀로 서서 고독을 즐기는 명상가”로 형상화한다. 은행나무가 처음 태어난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원천은 무엇일까? 시인은 “철저한 계획과 준비성으로 태어난/ 완벽을 추구한 부모 덕분”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완벽을 추구하는 삶은 “급변하는 계절변화에도 휘둘리지 않는/ 끈질긴 고집”을 낳았다. 구체적으로 갈바람이 불어오면 은행나무는 은행알을 땅에 떨어뜨려 악취를 풍긴다. 향기로 벌 나비를 불러들이는 꽃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은행나무는 천년의 삶을 사는 길을 열어젖힌다. 시인은 은행나무의 삶을 통해 문명과 대적하는 자연의 이치를 드러낸다. 은행나무는 다른 생명의 삶에 한눈을 팔지 않았다. 부모가 물려준 완벽한 삶을 끈질기게 고집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문명을 건설한 인간은 늘 자연을 정복했다고 외쳐왔지만, 때가 되면 펼쳐지는 자연의 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 급변하는 자연변화에 휘둘리지 않는 은행나무와 달리 인간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을 온전하게 다룰 힘이 부족하다. 인간의 과학기술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시인의 말마따나 자연은 “이중 잠금장치 안에 열매를 숨겨두고/ 비로소 안심하는 완벽주의자”를 지향한다. 자연의 완벽주의를 넘어서려면 인간 또한 완벽주의자가 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신이 되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당장 햇빛이 이 세상을 비추지 않으면 인간은 곧바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다. 때를 맞추어 비가 내리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비가 많이 내려도 문제가 발생하고, 비가 적게 내려도 문제가 발생한다. 자연 속 사물은 그저 자연 이치를 따라 움직일 따름이다.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라고 다르지 않고, 백 년을 사는 인간이라고 다르지 않다.
‘완벽’과 ‘고집’으로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를 백 년을 사는 인간들은 어떻게든 굴복시키려 한다. 자연 이치를 거부하는 자리에서 비롯된 문명의 힘은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여전히 자연의 힘에 휘둘리고 있다. 시인은 그 까닭을, 부는 바람에 떨어진 샛노란 은행잎의 언어로 들려준다. 때가 되어 피어난 잎들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바닥에 떨어졌다고 생명으로서 사는 삶이 끝나는 건 아니다. 자연 이치를 기꺼이 따른 생명은 지금 이 죽음이 천년의 삶을 낳는 새로운 시작점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알기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은 “길게 살려면 철저한 준비성이 필요하다”라는 속내를 드러낸다. 자연 이치를 거스른 생명이 어떻게 다음 시간을 준비할 수 있을까? 문명의 힘으로 자연을 지배하려는 환상에 빠진 근대인은 바로 이 지점에 눈을 감아버린다. 정확히 말하면 근대인은 자연 이치를 따르는 생명의 힘을 전혀 모른다.
자연 이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거쳐 시나브로 이루어졌다. 꽃이 떨어지는 때가 있으면 꽃이 피어나는 때도 있다. 자연 이치 속에서 이것과 저것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길을 여는 힘으로 작동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자연의 힘을 역행하려고 할 뿐이다. 「지구 모퉁이에는」이라는 시에 나타나듯, 코로나 팬데믹을 가혹하게 겪었으면서도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는 생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잘 썩지 않는 플라스틱과 비닐이/ 지구 모퉁이마다 쌓여”가는 현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인간은 늘 자신을 중심에 세우고 생명 세계를 판단한다. “바다에 떠도는 플라스틱 쓰레기 산”을 두 눈으로 보고, “오염된 바다의 물고기”가 목을 죄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인간은 애써 그 상황을 외면하려고 한다. 문명의 힘으로 이룩한 풍요로운 삶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은 과학기술의 힘으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망상을 굳게 믿는다. 인간은 이미 자연이 그어놓은 생명의 선을 넘어버렸다.
지구의 자연 질서를 파괴하면 그 안에서 사는 인간에게도 당연히 위해(危害)가 뒤따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위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인내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자연은 문명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파괴력으로 인간의 삶을 무너뜨린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현혹되어 있다. 쓰레기 섬이 바다 위를 유유히 떠다녀도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아직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강 건너 불처럼” 여긴다. 총을 든 포수를 피하려고 수풀 속에 머리를 처박는 꿩과 무엇이 다를까? 눈을 질끈 감으면 쓰레기 섬이 사라질까?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화려한 문명을 건설했다. 문명의 힘으로 자연을 통제하리라는 환상에 빠져 눈을 질끈 감은 채 풍요로운 삶을 즐겼다. 인간은 이제 자연 앞에 그 대가를 내놓아야 한다.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내놓지 않”으면 자연은 막강한 힘으로 인간의 삶터를 가차 없이 파괴할 것이다.
오염된 바다의 물고기가 인간의 목을 죄는 이 상황에서 시를 쓰는 일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임덕기는 “바다감옥”에 갇혀 고통받는 물고기들에 진중한 마음으로 다가갔고,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향해 묵묵히 몸을 내뻗는 벌개미취의 모습에 눈길을 던졌다. 개미들의 횡포에 짓눌린 무궁화나무의 “한숨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완벽한 삶을 추구하는 은행나무의 “끈질긴 고집”에서 자연 이치에 스민 거대한 생명력을 찾아내기도 했다. 임덕기는 인간을 중심에 세운 문명의 시선이 아니라 자연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들여다본다. 근대정신의 뿌리를 형성하는 인간의 시선을 내려놓음으로써 시인은 자연의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는 시적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인간의 시선에 매이면 자연으로 가는 길은 이내 막혀버린다. 임덕기에게 시작(詩作)이란 이리 보면 자연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무궁화나무가 내뱉는 한숨 소리를 듣고, 은행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는 시 쓰기란 시인 스스로 양식장에 갇힌 물고기가 ‘되어’ 이 세계를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쳐 이룩된다. 자연의 시선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은 그러므로 타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타자의 귀로 세계를 듣는 데서 비롯된다. 감옥에 갇힌 물고기의 삶을 뛰어넘어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의 삶으로 나아가는 임덕기의 시는 이로써 자연 속에서 인간의 삶을 재구축하는 예술적 단서로서 제시된다. 자연을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생명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삶터를 잃어버린다. 풍요로운 문명의 환상에 빠진 인간은 어쩌면 가두리 양식장에 갇힌 물고기의 삶과 자연 이치를 따르는 은행나무의 거룩한 삶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의 시선으로 인간 문명을 묘파하는 임덕기의 시는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