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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과 유묵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 대원수(大元帥) 동상-상무대 육군보병학교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 대원수(大元帥)
고구려의 옛 강토인 북녘의 실지를 회복하여 민족전성시대(民族全盛時代)를 구현하겠다는 웅국(雄國)아래 삼십만 대군을 이끌고 두만강 건너 7백리까지 진격하시어 여진을 정벌 천리변경에 9성을 쌓으시고 사십만의 남방민을 그곳에 이주시킴으로써 민족 발전의 기틀을 이룩하신 문숙공(文肅公)이야말로 이 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척지회강(拓地恢疆)의 위업을 성취하신 위대한 영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려 예종 2년(1107년) 10월 20일 마침내 여진 대 정벌의 묘의(廟議)가 결정되니 문숙공(文肅公)은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임명 받으시고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역사적인 북벌의 장도에 오를 만반의 태세를 갖추시었다. 문숙공(文肅公)은 왕명을 받자와 황공 감격하여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선왕의 밀지를 받들고 지금 또 엄명을 받자오니 어찌 감히 삼군을 통솔하여 적의 소굴을 소탕하고 우리의 강토를 개척하여 나라가 받은 치욕을 씻지 않겠나이까』하고 왕께 맹세하시었으니 이 여진 정벌이야말로 국운을 걸고 결행하는 일대 장거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어 11월 25일 예종이 친히 서경의 위봉루(威鳳樓)에 거동하여 문숙공(文肅公)에게 생살권(生殺權)을 맡기는 부월(斧鉞)을 하사하고 즉일로 출사케 하니 공은 그동안 맹훈련을 거듭한 신기(神騎) 신보(神步) 강마군(降魔軍) 등 삼십만 대군을 이끌고 즉시 수륙양면에 걸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리하여 공 휘하의 고려 대군은 5군으로 나뉘어 노도와 같이 진격하여 천리변경(千里邊境)의 수많은 여진 촌락들을 석권하면서 연전연승 두만강 북방 칠백리까지 여진군을 무찌르니 적군은 충용무쌍(忠勇無雙)한 우리 군사의 기세에 놀라 모조리 도망하고 가축만이 빈 들판에 몰려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한 사가(史家)는 이때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천 여리 강토를 순식간에 점령하여 수백년동안 잃었던 땅을 하루아침에 회복하니 윤관장군(尹瓘將軍)의 기쁨은 한량없었고 모든 장수와 군사의 기뻐하는 모습은 말로 다 할 수 없더라. 윤장군이 승전고를 울려 승리를 자축하니 장수들은 기뻐 뛰어 나라의 강성함을 축하하고 승전을 축하하는 군사들의 고함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더라』
문숙공은 되찾은 북녘 땅에 재빨리 영주(북청)<英州(北靑)>, 복주(단천)<福州(端川)>, 웅주(길주)<雄州(吉州)>, 길주(경성)<吉州(鏡城)>, 함주(함흥)<咸州(咸興)> 및 공험진(연길)<公鎭(延吉)>에 6성을 쌓고 두만강 북쪽 칠백리의 선춘령(先春嶺) 아래 공험진(公鎭)에 비(碑)를 세워 정계(定界)를 삼으시고 나서 종군중인 아드님 시어사(侍御史) 언순(彦純)公을 보내어 국왕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성인의 덕은 진실로 천지에 합하고 인의의 군사는 이미 오랑케를 평정하였습니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기뻐서 환호성을 올리고 있습니다. .......... 신이 절술(節)의 대명을 받자옵고 북을 울리면서 당당하게 진군하였습니다. 기세는 군중(軍中)에 움직이고 위엄은 적에게 가해졌나이다. 강하(江河)가 구령에 닥치는데 한치 아교로 능히 막지 못하고 하석(石)이 산봉우리에서 구는데 빈알(허란<虛卵>)이 결단코 깨어지는 것입니다. 포로가 반만(半萬)이 넘고 적을 베인 것이 5천에 가까우며 쌓은 곡식은 마을마다 흩어지고 달아나는 사람은 길이 엇갈렸나이다. 산천이 험하매 성지(城池)가 인하여서 높고 깊으며 원야(原野)가 기름지어 전정(田井)을 또한 갈고 팔 수 있습니다. 옛적에는 사람이 구하여도 얻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이것을 하늘이 주심을 이미 취하였나이다. 위로는 족히 종묘(宗廟)의 재천하신 영(靈)에게 사례하고 아래로는 족히 조정의 적년(積年) 수치를 씻었나이다.』
공은 또 병마영할(兵馬鈴轄) 임언(林彦)을 시켜 그 일을 영주청벽(英州廳壁)에 기록하게 하니 그 글에 말하기를 『수사도중서시랑평장사(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을 명하여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를 삼아 정병 삼십만을 거느리고 여진 정벌을 전담케 하였다. 양공(兩公)이 일찍이 이에 뜻이 있었으므로 명을 받고 분발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으로 내려가서 군사를 내는 날에는 몸소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기도 전에 감개한 눈물을 뿌리니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적경에 들어감에 있어서는 삼군이 용맹을 떨치어 한 사람이 백을 당적하니 마른 가지를 꺾고 대(竹)를 쪼개인들 어찌 이보다 더 쉬울 수 있으리오. 60여명을 참수하니 궁시(弓矢)를 싣고 전진에 와서 항복하는 자가 5천을 넘었으며 전진(戰塵)을 바라보고 간담이 떨려서 도망쳐 달아나는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아아! 여진이 완고하고 어리석어 그 강약과 중과(衆寡)의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함을 취함이 이와 같도다. 그 지방의 산천이 수려함과 토지의 기름짐은 가히 우리 백성을 살게 할만 하며 본래 고구려의 소유이라 그 고비(古碑)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대저 고구려가 전에 잃었던 것을 지금 임금이 뒤에 이것을 얻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리요』라고 하였다.
공이 이어 40만에 달하는 남방민을 되찾은 북녘 땅에 이주시켜 거기에 터전을 잡게 하는 한편 의주(宜州)(덕원<德源>), 통태(通泰)(혼춘거양성<琿春拒陽城>) 및 평융(平戎)(경원영험<慶源嶺?>)의 3성을 더 쌓음으로써 이미 쌓은 영주, 복주, 웅주, 길주, 함주 및 공험진을 합하니 모두 9성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예종은 공(公)을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임명하고 내시랑중(內侍郞中) 한격여(韓激如)를 보내어 조서(詔書)와 고신(告身) 및 자수안구(紫繡鞍具)와 궁중의 말 2필을 가지고 웅주에 가서 하사케 하였다.
예종3년 4월 공이 개성으로 개선(凱旋)하매 왕이 명하여 고취(鼓吹)와 군위(軍衛)를 갖추고 맞이하도록 하고 대방후보(帶方候)와 제안후서(齊安候壻)(왕제<王弟>)를 보내어 동교(東郊)에서 위로 향연하였다. 공(公)이 경령전(景靈殿)에 나아가 복명하고 부월(斧鉞)을 다시 바치니 왕이 문덕전에 거동하여 인견하고 변방 일을 묻고 밤이 되어 파하였다. 같은 해 7월 공이 다시 웅주에 집결한 적을 토벌하시고 돌아오시자 왕은 공에게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식읍(食邑) 2천5백호(戶) 식실봉(食實封) 3백호(戶)를 봉하였다.
또 이듬해 여진이 길주를 포위하자 왕은 다시 공을 보내어 이를 치게 하니 이로써 공은 결국 4차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시었던 것이다. 공께서는 여진을 토벌 작전 중 산악지대의 험로를 행군할 때 군마가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말에게 씌운 칡 짚신을 철(鐵)로 바꾸어 귀는 마철대갈(馬鐵代葛)을 창안하시어 오늘날까지 대갈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공(公)의 휘(諱)는 관(瓘)이요 자(字)는 현동(同玄)이시고 호(號)는 묵재(?齋)이시며 시호(諡號)는 문숙공(文肅公)이신데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의 현손(玄孫)이시고 아버님은 문정공(文靖公) 휘(諱) 집형(執衡)이시오 어머님은 신라(新羅)의 최종왕(最終王)인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傳)의 손녀(孫女)이시다.
고려(高麗)의 파평현(坡平縣)(파주<坡州>)에서 탄강(誕降)하시었는데 함안파(咸安派) 언전(諺傳)의 문숙공(文肅公) 사주(四柱)에 따르면 정종6년(서기1040년) 경진(庚辰) 6월1일 사시(巳時)에 탄생하시었다고 전한다.
각문의 혈통과 파평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태어나신 문숙공은 자라나심에 따라 비범하고 총명하시었으며 특히 학문을 좋아하시어 서책을 놓지 않고 항상 휴대하시었다. 그러기에 문무를 겸비하신 공께서는 훗날 시문에서도 명인으로 꼽히시었고 더구나 공께서 7세때 뽕나무를 글제로 해서 지으셨다는 다음 시는 당시의 세인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葉養天防雪寒(엽양천충방설한) 뽕잎은 누에를 길러 추위를 막게 하고
枝爲强弓射犬戎(지위강궁사견융) 가지는 굳센 활로 오랑케를 쏠 수 있네
名雖草木眞國寶(명수초목진국보) 이름은 비록 초목이나 참으로 국보일세
莫剪莫折誠兒童(막전막절성아동) 베거나 꺾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타일러야 되리
문종27년(서기1073년)에 공은 진사과에 급제하셨으며 다음해 4월에 대과에 급제하시고 또 왕명 세자복시(世子覆試)에 문과 장원으로 뽑히시어 장사랑(將仕郞) 비서동정(秘書同正)이 되셨다.
의종 원년에 예빈사주부(禮賓寺主簿)가 되시어 과거의 시관이 되셨다. 동2년에는 십유지제고(拾遺知制誥)가 되시고 그 다음해 3년에 은중내급사(殷中內給事)가 되셨으며 서경유수판관이 되셨다. 동4년 12월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광충청주도(廣忠淸州道) 출추사(出推使)를 임명 받으셨고 그 후에 보궐(補闕)로 옮기셨다. 동8년에는 은중시어사(殷中侍御史)에 제수되시어 비금어대(緋金魚袋)를 받으셨다. 동11년 5월에 시관(試官)으로서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에 임명되시고 12월에는 상서이부원외랑(尙書吏部員外郞)을 더 하셨다.
헌종원년(서기1095년) 10월에는 좌사랑중시어사(左司郞中侍御史)로서 헌종의 종표(宗表)를 가지고 요(遼)나라에 특사로 파견되시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시었다. 그때 왕께서 병으로 정사를 볼 수 없어 신왕에게 양위한다는 뜻과 겸하여 곧 즉위한다는 뜻의 글을 지닌 것으로 임의(任懿)를 부사로 삼으시었다. 12월에는 요나라 왕의 회조(回詔)를 가지시고 귀국하시어 어사에 제수되시고 곧 지수주사(知樹州事)에 제수되셨다.
숙종 원년에는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가 되셨고 숙종2년(1097년) 12월에는 철로 만든 돈을 만들어 통용케 하는 주전법(鑄錢法)을 제정할 것을 건의하여 왕이 이를 윤허함으로써 역사상 국내 최초로 주전도감이 시치(始置)되어 화폐 주조의 신기원을 마련하였다.
공은 또 숙종3년 7월 왕의 친서를 가지고 송나라에 가시니 송조에서 크게 환영하고 환대하였는데 그 곳에 체류 중 그 나라의 석학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의 두 학자는 공의 고매(高邁)한 박식에 놀랐다고 하며 서로 시를 창화(唱和)하시며 공이 그 곳에서 지으신 다음 응제 시는 그 글귀를 지금까지도 중국인이 외우고 있다 한다.
誰道芳辰難再遇(수도방진난재우) 누가 좋은 때를 두 번 만나기 어렵다 이르뇨
我今三遇帝都春(아금삼우제도춘) 내 이제 세 번 제도 봄을 만났노라
이 시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문숙공은 세 차례나 사신으로 가시어 외교 활동에도 진력하신 것으로 짐작된다.
숙종4년 4월에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제수되시어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가 되셨다. 동6년 9월 왕이 양주에 도읍지를 설치할 것을 명하심에 따라 공(公) 等이 삼각산 아래 오늘의 서울에 남경을 세울 것을 상주하시어 왕이 그대로 창설토록 하여 동9년 5월에 공이 개창도감(開創都監)으로 지휘 감독하신 남경의 궁궐이 이룩되었다. 한편 숙종6년에는 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임명이 되셨으며 이듬해 7년 3월에는 지공거이굉(知貢擧李宏)과 더불어 진사를 시험보아 뽑으셨다. 그해 11월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되셨다. 또 12월에는 어사대부가 되셨고 동8년 2월에는 이부상서지추밀원사(吏部尙書知樞密院事)가 되셨고 6월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에 배명(拜命)되셨다.
동9년에는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 대학사(大學士)가 되셨고 2월에는 참지정사(知政事)로서 동북면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발탁 임명되시어 제1차 여진정벌의 장도에 오르시게 되셨다. 공은 적과 싸워 30여명을 죽이는 등 분전을 하셨으나 적은 반유목민인 무리로서 기병(騎兵)인데 반(反)해 고려군은 보병이어서 당할 수가 없어 부득이 그들과 화맹(和盟)을 맺고 돌아오셨다.
동10년에는 태자태보(太子太保) 판상서병부(判尙書兵部) 한림원사(翰林院事)에 배명되시고 11월에는 중서시랑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가 되셨다.
여진과의 첫 대전에서 돌아오신 공께서는 저쪽은 기병인데 우리 쪽은 보병이라 적수가 되지 않음을 강조하시고 별무반을 창설할 것을 건의하시어 말 가진 자는 신기군으로 편입시키고 말 없는 자는 신보병으로 삼고 그밖에 도탕(跳蕩), 경궁(梗弓), 정노(精弩), 발화(發火)들을 각군에 배치하고 문무산관이서(文武散官吏胥)와 모든 상인 그리고 비복들도 동원하여 편입시켰으며 승려로서는 강마군(降魔軍)을 편성하시었다. 강마군의 첫 편성은 승병의 호국의병으로 후일 임진왜란때 문숙공의 유업(遺業)으로 계승되기에 이르렀다.
여진 정벌의 숙원을 풀지 못하고 숙종이 승하한 후 예종(睿宗)이 즉위한 다음해인 1106년 11월 문숙공(文肅公)은 오연총과 더불어 그동안 맹훈련을 거듭한 신기군, 신보군을 숭인문 밖에서 사열하시어 그 다음 해에 결행되는 북벌작전을 앞두고 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돋구시었다. 그리하여 한해가 지난 예종2년(1107년) 10월에 이르러 드디어 역사적인 여진 대 정벌의 용단이 내려진 것이다.
문숙공의 4차에 걸친 여진 정벌로 심대한 타격을 받고 궁지에 몰린 여진은 예종4년 6월 당황한 나머지 사신을 보내어 대방(大邦)(고려<高麗>)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배반치 않고 대대손손 조공을 바치겠다는 조건하에서 9성을 여진에 돌려줄 것을 빌기에 이르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을 시기하는 나약한 문신들이 9성 환부를 극력 주장하였고 심지어는 공을 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까지 있었다. 이리하여 이해 7월에 이르러 드디어는 중신회의에서 9성 환부가 결정되어 공이 심혈을 기울여 1년7개월간 쌓아 올린 9성을 여진에 돌려주었으니 이는 고려사상 일대 통한사라 아니할 수 없다.
공의 인품과 위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끝까지 공을 옹호하던 예종도 끝내는 문신들의 완강한 고집에 못 이겨 공의 공신호(功臣號)만 거두고 공에게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의 관직을 재배(再拜)하였으나 공은 이를 사퇴하셨다. 예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간곡히 말하기를 『옛날에 한나라의 이광리(李廣利)(이사장군<貳師將軍>)가 대완국(大宛國)(서역<西域>)을 정벌하였을 때 겨우 기마 30필을 얻어 왔으나 무제는 만리 밖에 나가서 정벌하였다 하여 그 과실을 기록하지 않았고 진탕(陣湯)이 질지국(支國)(서역<西域>)을 토벌하였을 때에도 왕의 명을 받지 않고 함부로 군사를 일으켰는데도 선제는 나라의 위엄이 백만(百蠻)에 떨치었다 하여 열후(列候)에 봉하였던 것이다. 경이 여진을 정벌한 것은 선고의 유지를 받들고 과인의 계술(繼述)하는 일을 체(體)하여 몸소 칼날과 화살을 무릅쓰고 깊이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 죽이고 사로잡음이 이루 헤아리지 못하며 광대한 땅을 개척하고 9주의 성을 쌓아서 나라의 묵은 수치를 씻었으니 경의 공이 가히 크다고 이르겠다. 그러나 오랑캐는 본래 사람의 얼굴이나 짐승의 마음이라 배반하고 항복함이 무상하므로 그 남은 무리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졌기 때문에 추장이 강서를 바치고 화친을 청하매 여러 신하가 편하다 하고 과인도 또한 차마 하지 못하여 드디어 그 땅을 돌려주었거늘 유사들이 법을 지켜 자못 탄핵함이 있으므로 그 벼슬을 거두었으나 과인은 끝까지 경을 허물하지 않고 맹명(孟明)(춘추시대 진나라 사람으로 진인에게 세 번 패하였으나 목공<穆公>이 그대로 등용하여 결국 진을 파하고 서융<西戎>에서 패권<覇權>을 잡음)이 다시 강을 건넘이 있기를 바라노라. 이제 과인이 경에게 주는 것은 곧 경의 본래의 벼슬이니 어찌 족히 사양하리오. 마땅히 돌보는 마음을 살펴서 속히 그대 벼슬에 나아갈지어다.』라고 하셨다.
참으로 그 신하에 그 임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종은 그 후 9성의 환부를 크게 후회하였고 서경에의 이도(移都)를 계획한 일이 있으며 원래가 여진족(女眞族)인 김태조(金太祖)가 중화(中華)의 양자강 이북을 병합하여 대금제국(大金帝國)을 건설한 후에도 김태조(金太祖)에게 『그대의 나라가 우리나라에서 나왔으니 그대는 우리의 속국 운운....』하는 국서를 보내어 그들의 노여움을 산 일이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일은 공의 아드님이신 문강공(文康公)(언이<彦>)이 금국(金國)에 굴종하는 것을 분개히 여겨 민족자주성을 천명하는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을 주창하였으니 이 또한 여진을 정벌하여 국의를 크게 선양하신 아버님 문숙공의 구국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 하겠다.
예종6년(1111년) 5월 8일 공께서는 강웅지(疆雄志)가 좌절되는 천추의 한을 품으시고 영서(永逝)하시니 파평현(坡平縣) 분수원(焚修院) 북양원(北良原)(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現 坡州市 廣灘面 汾水里>)에 예장(禮葬)되시었다. 시호는 당초 문경(文敬)으로 내리시었으나 인종때 수능(綏陵)(예종비<睿宗妃>)의 휘호(徽號)를 피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치었다.
공의 배위는 국대부인(國大夫人) 인천이씨(仁川李氏)로서 그 아버님은 상장군(上將軍) 성간(成幹)이고 조부는 대장군(大將軍) 눌(訥)이며 증조부는 상서좌복야소성현개국백(尙書左僕射邵城縣開國伯) 허겸(許謙)이요 외조(外祖)는 고려왕(高麗王) 태조(太祖)이시다. 국대부인(國大夫人) 묘소는 연안 자달동 문정공 묘소 앞이라 하나 실전되었다.
공은 7남 2녀를 두시었는데 장자 언인(彦仁)은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그 아드님은 덕첨(德瞻)이고 덕첨공의 아드님은 위(威)로서 시랑(侍郞)이니 남원백이 되시어 남원윤씨의 시조가 되시었고 그 아드님 극민(克敏)은 태학사(太學士)이며 극민공의 아드님인 돈(敦)은 시중으로서 일찍이 함안백(咸安伯)이 되시어 함안윤씨의 시조가 되시었다. 둘째는 언순(彦純)으로 남원부사(南原府使)로서 5남 1녀를 두셨고 셋째는 언암(彦巖)으로서 흥왕사 주지였고 넷째는 휘(諱)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선사(禪師)이고 다섯째는 언식(彦植)으로서 좌복야(左僕射)이며 4남 3녀를 두셨고 여섯째는 언이(彦)로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이며 7남 4녀를 두셨고 일곱째 언민(彦旼)은 상의봉어(尙衣奉御)이셨다. 큰 따님은 尙書右丞 黃元道(상서우승 황원도)에 출가하셨고 둘째는 平章事 任元濬(평장사 임원준)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그 후 인종8년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셨고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문종2년에는 숭의전에 또한 배향되셨다. 세종19년에는 9성 옛터 일부에 6진을 개척한 김종서장군이 함경도경성(咸鏡道鏡城)에 공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드렸는데 처음에 이를 노당(蘆堂)이라 불렀으며 선조16년에 중수되어 시중묘(侍中廟)라 개칭되었고 경종 원년에 윤문숙공묘(尹文肅公廟)로 고치었다가 헌종11년(1845년)에 이르러 정북사(靖北祠)로 개칭하였다.
영조께서는 갑신년(1764년)에 문숙공 묘소에 치제(致祭)하였고 광무황제도 융희3년(1909년)에 지방관을 보내어 공의 분묘에 치제(致祭)하였다.
고종35년(1898년)에는 북청에 만뢰사(萬賴祠)가 건립된데 뒤이어 분수영당(여충사)<汾水影堂(麗忠祠)>, 조양사(평북가산)<朝陽祠(平北嘉山)>, 수벽사(함평)<修闢祠(咸平)>, 화남재(예천)<花南齋(醴泉)>, 호남사문숙공영정각(청주)<湖南詞文肅公影幀閣(淸州)>, 서강사(광주)<瑞岡祠(光州)> 등 공(公)을 모시는 사우(祠宇)가 전국 각지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공의 묘소와 사당이 모셔있는 파주의 (汾水齋)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정화공사가 많이 되고 있다. 또한 공의 869주기일인 1980년 5월 8일에는 마침내 공의 우람한 동상이 통일로 곧바로 통하는 서울 의주로의 서소문 공원에 건립되어 2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후손뿐 아니라 모든 국민은 밤낮으로 공의 위용을 우러러 보며 거룩하신 척지진국(拓地鎭國)의 정신을 길이 되새기게 될 것이다.
또한 청사에 빛나는 문숙공의 위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역사소설 『천년한(千年恨)』이 중진작가 유현종(劉賢鍾)씨의 집필로 우리나라 최고의 신문인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가 상,중,하 3권으로 발간되었는데 이 역사소설의 연재된 발단은 전 대종회장 남희(前 大宗會長 南儀)씨의 주선과 아울러 대종회 부회장 영갑(永甲)씨의 오랜 시일에 걸친 자료모집 및 유적답사 등 물심양면의 정성 어린 집념과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국왕의 치제문(致祭文)
영조대왕께서는 갑신년(1764년)에 문숙공 묘소에 치제(致祭)하였고, 광무황제도 융희 3년(1909년)에 지방관을 보내어 공의 분묘에 치제하였다.
○ 치제문(致祭文) 갑신 영조어제( 甲申 英祖御製)
조선국왕(朝鮮國王)은 견도승지(遣都承旨) 윤동섬(尹東暹)하여 치제우 고려시중문숙윤관지묘(致祭于高麗侍中文肅尹瓘之墓)하노니 우차유공(?嗟惟公)은 파산대족(坡山大族)으로 전조수공(前朝樹功)하니 육진회척(六鎭恢拓)이라 자고흘금(自古?今)에 세기팔백(歲己八百)이요 후손번연(後孫蕃衍)하여 금대교목(今代喬木)이로다. 사록유경(沙麓有慶)하니 사광보첩(四光譜牒)이요 공묘언재(公墓焉在)요 분수지북(汾水之北)이로다. 세칭교총(世稱橋塚)을 영역지측(瑩域之側)이나 전문난빙(傳聞難憑)하여 진위막득(眞爲莫得)이러니 건도소소(乾道昭昭)하여 교연차일(皎然此日)하니 불각흥창(不覺興愴)하여 원명수칙(爰命修飭)하고 친철기문(親綴其文)하여 근시짐작(近侍斟酌)하노니 광세감여(曠世感予)라 서기래격(庶幾來格)인져.
제사를 드리는 글(치제문 해설)
조선 국왕은 신하 도승지 윤동섬(尹東暹)을 보내어 고려시중 윤문숙공의 묘소에 제사를 드리노라. 아아! 생각건대, 공은 파평의 대족으로 전조(고려를 말함)에서 국토를 회복하고 6진을 개척하여 큰 공을 세웠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8백년이 되어, 후손이 번성하여 이시대의 큰 인물이 되고, 왕비를 탄생한 경사가 있고 네 번이나 보첩이 빛나도다. 공의 묘는 분수의 북쪽이로구나, 세상에서 이르기를 가마무덤이 영역의 곁에 있도다. 전해들은 것이 참과 거짓을 증거가 없어 알 수가 없더니, 하늘의 도가 밝고 빛나 오늘에서야 묘를 찾을 수 있었노라, 슬픈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제 묘를 수축할 것을 명하고 친히 이 글을 지어서 가까이 있는 신하로 잔을 드리오니 세상에 다시없을 이번 일에 나는 감격하노니, 바라건대 강림하여 응감하시라.
문숙공 묘표
우리 선조 고려태보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오 휘는 관(瓘)이오 자는 동현(同玄)이오 관향은 파평(坡平)이시다. 공훈이 삼한에 덮히고 명성이 백대까지 미치시니 그 산소도 마땅히 후세에 나타내서 후손으로 하여금 향을 올리게 하고 지나는 사람들도 공경하게 하는 것이 천도와 신의 도리에 당연한 일이거늘 세대가 점점 멀어지자 남들이 침식해 들어와 장사지내게 되어 옛날 자리를 살필 수가 없으니 우리 종족의 통한하고 아프기가 수백년 동안을 하루같이 하였었다. 그러더니 이제 21대손 면교(勉敎)가 여러 종인과 더불어 방편을 마련하여 산소자리를 찾아내고 그 봉축한 것을 다시 개축하여 선세를 추모하니 일이 비로소 자리가 잡혔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진실로 우리 후손들이 더 할 수 없는 큰 경사이다. 이 어찌 우리 선조의 혁혁하신 영혼이 어둡지 않게 계셔서 음으로 도우신 바가 있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고조의 휘는 신달(莘達)이시니 고려태조를 도와서 우리나라를 통일하여 벽상공신으로 책록되시고 벼슬은 태사(太師)이시니 우리 시조가 되시고 증조의 휘는 선지(先之)이시니 역시 벽상공신이시고 조부의 휘는 금강(金剛)이시니 벼슬이 상서좌복야이시고 고의 휘는 집형(執衡)이시니 벼슬은 검교 소감이신데 증직이 우복야이시고 시호는 문정공이시다. 공이 일찍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호화스러우시고 여러번 옮겨서 이부상서 한림학사 승지에 이르시고 숙종10년에는 참지정사 한림원판사 태학사까지 되셨다.
이때 여진족이 북방에서 노략질 해 온지가 오래였다. 예종초에 정주에서 비적이 소란을 부려 관문(나라의 출입구)의 형세가 심히 막히니, 이에 공을 명하여 도원수로 삼고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서 부월(살생의 권한을 부여하는 도끼같은 증표)을 주어 보내니 공이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가서 오랑케 고장까지 쳐 들어가서 적을 만나 크게 부수고 또 금성에 이르러 부수고, 또 석성에 이르니 적들이 달아나서 험지를 의지하여 굳게 지키니 군사들이 막히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공이 장수들을 격려하여 좌우로 협격하여 대파해서 하루도 안 되어서 두 성을 무찔러 버렸다. 또 모든 장수들을 시켜서 모든 통로를 막게 하고 나누어서 공격하여 에워들어 잡아서 육천여명을 베이니 모든 군사들의 기세가 살아나고 부러진 칼과 힘없는 무리들이 우수수 쏟아지듯 하니 적들이 기운이 죽어 소리치고 도망하고 달아나서 궁지에 빠지고 패하고 활과 칼을 거두고 진 앞에 항복하는 자가 또한 속출하더라. 공이 스스로 노포(露布=승전하고서 그 공훈서를 조정에 올리는 것)를 만들어 하례하니 왕이 글을 내려 포상하고 고유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황하 물이 구렁에 치닫는데 한치의 푸레를 가지고 능히 막아낼 수가 없고 돌덩어리가 산봉우리에서 굴러 내리는데 속이 빈 알이 틀림없이 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귀가 웅장하고도 굳세어서 사람들이 지금껏 전하여 외우고 있다. 땅 칠백여리를 개척하였고 아홉 개의 성을 쌓고 국경에 경계 빗돌을 세우니 왕이 공을 책록하여 「추충좌리 평융척지 진국공신」을 삼고 「문하시중 지군국중사」를 배수하고 개선하여 돌아오는데 악대를 갖춘 군대로써 호위해 맞이하고 교외에서 위로의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그 후 얼마 아니해서 여진족이 또 쳐들어오니 공을 보내어 치게 하고 귀 베인 것을 받치자 영평현 개국백으로 더하여 봉하고 실봉으로 삼백호를 채식케 하고 또 「태보 상주국 감수국사」를 배수하고 돌아가시니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가 뒤에 수릉(綏陵)의 휘호를 피하여 지금의 시호 문숙(文肅)으로 고치게 되었다.
공이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진중에서도 오경을 휴대하였다. 후진들이 재주와 학문이 있는 이가 있으면 칭찬하기를 좋아하시니 이러므로 어진 이를 좋아하는 것이 당시에 제일이었다. 예종의 사당에 배향되시고 조선조에 또한 숭의전에 배향되셨다.
아들은 여섯인데 맏아들 언인(彦仁)은 벼슬이 지후(祗候)이니 그 후손들은 남원(南原)과 함안(咸安)의 두 본으로 나누어서 대대로 계승되어 오고 여섯째 언이(彦頤)는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이요 시호는 문강(文康)이니 지금 파평으로 관향을 한 사람은 모두 그 후손이다. 공의 공훈에 이미 나타나고 복택이 먼데까지 미쳐서 안팎 자손이 번성하고 귀하고 현달해서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리고 네 번이나 사록과 경사(왕비를 탄생하는 경사)가 있어 성인(임금의 존칭)을 탄생하여 동방의 억만 세대에 이어가는 기업이 왕성하였는데야 더 말할 수가 있겠는가? 산소는 파평 분수원의 북쪽에 있는데 보책과 여지승람에 실려 있고 그곳 백성들도 문숙공 알기를 군졸들이 사마(군사를 맡아 보는 벼슬)를 알 듯 하였는데 모두 문숙공의 산소가 심가 무덤 있는 산에 있다고 말하였다. 심가 무덤 밑에 묵은 묘 하나가 있는데 뒤에 굽은 담이 있고 앞에 돈대 하나가 있는데 역시 이르기를 윤시중의 교자총이라 하니 우리 종인으로 산 밑을 지나가는 이 마다 가리키면서 슬프게 느낀지가 오래이다. 그 후 홀연히 이씨라는 자의 비가 무덤 앞에 서 있으니 이는 전에 없던 것이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의혹하게 하고 우리 종중과 심씨가 서로 힐난하여 임금의 귀에까지 들으시게 되니 임금께서 바로 가까이 뫼시는 사람을 보내어 그 사실을 조사하라 하시고 따라서 교시를 내려 말하기를 「칠백년 묵은 옛 무덤에 만일 비가 있었다면 사람들이 누가 보지 않았겠는가? 이제 세웠으니 하늘이 세운 것이냐? 아니면 귀신이 세운 것이냐?」하니 사람이 알아듣기에 어렵지 않았다. 산소 앞에 작은 개울에서 비 하나를 주었는데 비록 부러지고 긁히고 깨어지기는 하였으나 공훈의 호와 벼슬과 시호와 성자가 완연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러하되 심씨는 오히려 다시 서로 논란하여 두 집이 거듭 부르짖으니 임금이 또 교시하여 말하기를 「옛 정승이 아신다면 마음이 어찌 편할 수 있겠는가? 자손 된 자가 그 조상으로 하여금 신령을 편안히 못해 드리면 어찌 사람의 도리이겠는가? 만일 이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내 마땅히 엄하게 처벌할 것이다.」하고 친히 글을 지어서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공의 산소에 제를 드리게 하였다. 제문에 이르기를 「공의 무덤이 어디에 있느냐? 분수의 북쪽이로다. 세상에서 일컫는 교자 무덤은 산소 영역의 곁이로구나. 하늘이 도가 밝고 밝아서 빛나는 해와 같도다. 슬픔이 일어남을 깨닫지 못하여 이에 수축할 것을 명한다」하였다. 그런데도 그 수축함에 있어서 심가들이 오히려 희미한 것을 잡고 어지러움을 일으키니 임금께서 성이 난듯하여 친히 물으시니 심정최가 비를 묻은 일과 다른 묘의 돌을 옮겨 세운 사실을 아뢰었다. 그런 즉 충성치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교훈이 있었으니 심하다. 심씨의 모양스럽지 못함이여! 심씨가 우리 윤씨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심씨도 또한 스스로 말하면서 도리어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심씨 무덤을 오히려 옮기지 아니하여 묘가 가까워서 수축하는 데에 모습을 갖추지 못하겠으니 어찌 아프지 않겠는가? 슬프다! 공이 조정에 벼슬하여 산소가 수백년이 지난 뒤에 우리 임금께서 오랜 옛날 것에 감동을 일으켜서 이미 묘를 수축하라 명하시고 또 친히 글을 만들어서 제사하시니 공의 위대한 업적이 다시 나타나고 이미 잃었던 산소자리가 다시 드러나시니 임금의 글이 빛나기가 별과 해가 걸려 있듯 밝아 후손이 감동하고 칭송함이 하해와 같아서 헤아릴 수가 없노라. 문강공의 산소는 보첩에 역시 이르기를 「지금 심정승 지원의 산지가 되었다.」하였는데 아직도 찾을 수가 없으니 이는 곧(자손의) 성의가 미치지 못하고 인력으로 다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우리 종중 후인들은 마땅히 명심할 것이다. 이제 장차 우선 표석부터 세우려는데 모든 종인들이 종중에 모여 의논해서 영부사 동도(東度)로 하여금 봉구(鳳九)에게 돌에 실릴 글을 위촉하니 봉구가 오랫동안 글이나 글씨를 폐한 뒤에 받아서 선세를 추모하는데 효력이 있는 것이니 이것을 버리고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삼가 행장과 전기에 의해서 거두어서 글을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데는 문헌이 가히 증거 할만한 것이 없고 평소의 문장과 사업과 공적은 만분의 하나도 칭찬할 수가 없었노라.
승정원기원후 셋째 병술(丙戌) 월 일
21대손 정헌대부전공조판서겸세자시강원찬선 鳳九는 삼가 찬한다.
22대손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동지춘추관사 東暹은 삼가 전면을 쓰다.
22대손 통정대부사간원대사간겸지제교 坊은 삼가 후면을 쓰다.
문숙공 신도비명
해는 어두운 구름 사이에서 한결 더 빛나고 영웅은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더욱 더 우뚝하다. 어허 역사의 구름을 뚫고 해와 같이 빛나는 민족의 영웅 한 분이 눈부신 업적을 백세에 끼치고 거룩한 뜻과 이름을 천추에 드리운 채 여기 파산(坡山)의 기슭아래 고요히 잠들어 계시니 이가 바로 저 여진족(女眞族)을 물리치고 동북으로 국토를 널리 열어 거기 아홉성을 쌓아 겨레의 살터를 마련하고 나라의 위엄을 떨친 윤관공(尹瓘公)이시다. 일찍 우리 민족은 아시아의 동방에 나라를 세우고 반만년의 역사를 누려오는 동안 이웃에 있는 강대한 여러 민족과 더불어 피의 항쟁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겠지마는 우리는 실로 굴욕을 모르는 민족이어서 남의 침략 앞에 고개를 숙여 본 일이 없었고 다시 한편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민족이어서 나아가 남을 침략해 본 일도 없었다. 여진족(女眞族)은 본시 말갈의 끼친 종족들로서 우리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의 지배 아래서 살더니 고려(高麗)초엽에 이르러서는 차츰 그 세력이 커져 국토의 동복과 서북일대에 퍼져 들어와 자리를 잡고 도리어 고려(高麗)를 배반하고 침략하기를 시작하므로 덕종(德宗)께서는 그들을 막기 위하여 유소(柳韶)를 시켜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게도 하고 또 문종(文宗)때에는 문정(文正)등을 보내어 그들을 무찌르기도 했으나 새로 일어난 완안부(完顔部 )추장 오아속(烏雅束)이 다시 쳐들어옴으로 숙종(肅宗)은 임간(林幹)等을 보내어 그들을 섬멸하라 했건 만은 불행히 패전하고 돌아 왔었다. 몇 날이 지난 뒤 숙종(肅宗) 9년 2월21일에 왕은 당시 추밀원사(樞密院事)이었던 公으로써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을 삼아 출정케 했으나 公도 역시 전세가 불리하므로 방편상 화의를 맺고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公은 돌아와 왕에게 별무반(別武班) 조직을 진언하고 여진(女眞)을 토벌하기 위해 군비를 확충하기에 전력을 기울이니 별무반(別武班)의 편성 내용은 보직 없는 문무산관(文武散官)과 이서(吏胥)로부터 상고들과 노복들과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사람은 신기군(神騎軍)에 편입하고 말을 못 가진 자와 또 20세 이상 되는 남자로 과거 안보는 자는 신보군(神步軍)에 입대시키며 또 특과대(特科隊)로 도탕(跳蕩)과 경궁(硬弓)과 정노(精弩)와 발화(發火) 등 네반을 두는 한편 승려로써 강마군(降魔軍)을 만든 것들도 거의 거국적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왕은 천지신명께 고하되 원컨대 도움을 입어 적을 쓸어버리게 된다면 그 땅에 절을 짓겠나이다 하며 분한 맹서를 짓더니 원통하게도 큰 뜻을 풀지 못하고 이듬해 10월에 승하하고 그 아들 예종(睿宗)이 뒤를 이었다.
그 또한 선왕의 뜻을 받들어 여진(女眞)의 동향을 살피기에 게을리 아니하더니 변방 장수로부터 침략의 보고를 받자 분연히 일어나 뜻을 정하고 公으로써 원수(元帥)를 삼고 오연총(吳延寵)으로써 부원수(副元帥)를 삼은 뒤 다시 서경 지금 평양(平壤)으로 나가 위봉누(威鳳樓)에서 생살권을 맡기는 도끼를 주어 가게 하니 때는 예종(睿宗) 2년 서기1107년 12월 1일이었고 병력은 17만 대군이었다. 公은 1년을 두고 훈련을 거듭한 정예의 대군을 이끌고 정주(定州) 지금 정평(定平)에 이르러 12월14일로써 전투를 개시하였는데 公의 본군과 중좌우군(中左右軍) 수군(水軍) 등 다섯 부대로 나누어 진공하자 적들은 거센 기세에 놀라 모조리 도망하고 가축들만 빈 들판에서 몰려다닐 뿐이었다. 다시 보니 적들이 문내니촌(文乃尼村) 지금 함흥(咸興) 운흥리(雲興里) 부근에 이르러 동음성(冬音城)에 들어가 성문을 닫고 숨어 버리므로 公은 특과대(特科隊)의 날랜 부대를 동원하여 성을 깨뜨려 달아나게 하고 또 좌군(左軍)과 힘을 합해 석성(石城) 지금 함흥 고양리(高陽里) 부근을 쳐서 적의 전부를 섬멸시켰다. 이리하여 고려(高麗) 군대가 여진족(女眞族)들의 촌락을 불사른 것이 135촌 목 벤 것이 4,540명, 사로잡은 것이 1030명에 달했던바 公은 그것을 조정에 보고함과 동시에 여러 장수들을 파견하여 국경을 획정케 하고 몽라골령(蒙羅骨嶺)아래 영주성(英州城)을 화관령(火串嶺) 아래 웅주성(雄州城)을 오림금촌(吳林金村)에 복주성(福州城)을 궁한이촌(弓漢伊村)에 길주성(吉州城)을 쌓고 다시 이어 영주성(英州城)안에는 두 절을 지어 숙종(肅宗)의 맹서대로 이뤄 드렸다. 해가 바뀌어 왕의 3년 1월에 公은 8천명을 이끌고 가한촌(加漢村) 병목 좁은 길을 치다가 오아속(烏雅束)의 포위를 입어 위태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며 적장 간새(幹塞)의 무리들이 기병 2만명을 이끌고 와서 영주성과 웅주성을 칠적에도 매양 곤경에 빠졌지마는 그때마다 녹사척준경(錄事拓俊京)의 용맹으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3월에는 앞의 네 성과 함주 공험진 등 여섯 성을 새로 쌓은 뒤에 아들 언순(彦純)을 보내어 헌공표(獻功表)를 올리고 또 임언(林彦)을 시켜 영주청(英州廳)벽에 성 쌓은 사실을 적어 붙이게 하는 한편 남방으로부터 무릇 6,466호의 인민을 옮겨와 거기에 터전을 잡게 하고 또 의주(宜州) 통태(通泰) 평융(平戎) 등 세 성을 더 쌓아 모두 아홉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公에게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의 직함을 주고 4월 9일 개경으로 개선했을 때에는 상하의 온갖 융숭한 환영을 이를 길이 없었다. 돌아온지 몇날이 못되어 여진족들이 웅주를 포위하므로 公과 오연총은 다시 나가 큰 공을 세워 公에게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을 봉했으며 이듬해 4월 5일 길주 싸움에서는 크게 이긴 그대로 두만강 건너 선춘령에 비를 세워 여기까지가 고려의 경계니라고 큰 글자를 새겨 고려혼(高麗魂)을 외친 이거늘 어찌해 운명의 신은 시기하기 시작하던고 이때 여진은 아홉 성을 돌려주면 신사백세(臣事百歲)하겠습니다 하고 고려 조정에 애원하자 나약하고 公을 질투하는 평장사 최홍사(平章事崔弘嗣) 등 28인은 9성 반환을 극력 주장하고 다만 예부의 박승중(朴昇中)과 호부의 한상(韓相)만이 반대할 따름이라 대세로 결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7월에 철수를 단행했는데 아홉 성 중에서 의주 공험진 평융진은 빠지고 숭녕 진양 선회진 등 딴 이름이 고려사에 적힌 것은 아마 뒤에 새로 쌓은 것이리라. 公은 3천리 밖에서 이 명령을 받고 분함을 머금고 회군했는데 왕은 사신을 보내어 떠날 때 내려준 도끼마저 중도에서 도로 거두어 가는 것이므로 복명할 겨를도 없이 다만 쓸쓸히 집으로 돌아간 채 공신호(功臣號)조차 삭탈당했던 것이다. 그 심정 어떠했으랴. 그 위에 음해하는 대신들은 公에게 죄를 주자고까지 했으되 왕은 듣지 아니하였다. 한해가 지나 5년 겨울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임명했으나 公은 거듭 사양하다가 왕의 뜻을 받들어 전날의 통분을 되새겨 재기의 뜻을 품던중 이듬해 6년 서기1111년 5월 8일에 말없이 눈을 감으니 향년은 자세치 않고 처음 시호는 문경(文敬)이요 뒤에 문숙(文肅)이라 고치고 인종8년에 예종의 사당에 배양하였고 이조에 와서는 숙종께서 숭의전에 公을 배양하셨다. 公의 본관은 파평 자는 동현(同玄) 호는 묵재(黙齋) 삼한공신 휘 신달(莘達)의 5세손으로 부친은 검교소부소감문정공(檢校少府少監文靖公) 휘 집형(執衡)이었다. 公은 일찍 젊어서 문과장원에 올라 십유보궐(拾遺補闕)을 거쳐 송나라에 사신도 갔고 동궁시강학사어사대부이부상서(東宮侍講學士御史大夫吏部尙書)를 지나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를 역임하며 평소에 어진이를 사랑하고 의리를 숭상하여 들어와선 대신이 되고 나가서는 장수가 되었던 문무를 겸전한 민족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부인은 인천이씨(仁川李氏)로서 교려상장군 성간(成幹)의 따님이요 7남2녀를 낳았는데 一남 언인(彦仁)은 합문지후(閤門祗候)요 二남 언순(彦純)은 남원부사요 三남 언암(彦巖)과 四남은 출가했으며 五남 언식(彦植)은 수사공(守司空)이요 六남 언이(彦頤)는 정당문학판호병형부사상주국문강공(政堂文學判戶兵刑部事上柱國文康公)이요 七남 언민(彦旼)은 상의봉어(尙依奉御)로 서화의 명인이었다. 날 자손들이 번창하여 이제 와서는 남원과 함안과 덕산과 화산 곧 신령 등으로 나뉘었으나 모두가 문숙공의 후예이니 그야말로 뿌리깊은 큰 나무인지라 꽃과 열매가 풍성하게 열림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公은 다만 어느 한 가문의 인물이 아니라 민족정기의 표상이었던 분이니 그러므로 公의 의기는 그대로 민족의 의기요 公의 한됨은 또한 민족의 한인 것이다. 겨레의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금옥같은 아홉성을 여진의 갈라전(曷懶甸)땅으로 내어주고 일세의 개선장군이 하루 아침에 패전장의 누명을 쓰게 될적에 얼마나 분했으랴만 그것은 결코 개인의 영욕무상이 아니라 실로 민족사의 방향을 좌우했던 것이다.
간신배들의 승리는 公을 중심으로 한 당시 화랑 계통의 민족노선을 짓밟은 것이니 公의 뜻이 꺾임은 그대로 치솟아 올라가던 민족 이상의 탑이 밤새에 무너진 것이라 생각할수록 통분하기 짝이 없거니 어찌 천추의 한이란 말로만 그치고 말 것이랴. 9성을 철수한지 겨우 6년에 완안부(完顔部)추장 아골타(阿骨打)가 일어나 금(金)나라를 세웠거니와 우리가 그 땅을 지켰던들 契丹을 엎지를 자가 저들이 아니요 우리가 아니었겠느냐. 뒷날 세종때 김종서장군이 경성(鏡城) 서조에 있는 승암산(僧岩山) 위에 公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했으며 그 뒤로는 사당 이름을 노당(蘆堂)이라 부르며 향불이 끊어지지 아니하였고 선조때에는 시중묘(侍中廟)라 사액까지 했으며 영조께서 분묘에 치제(致祭)하셨고 광무황제는 특히 지방관 홍우관(洪禹觀)을 보내어 公의 무덤에 제사하는 등 역사를 통해 公을 추모하기를 말지 않았음을 보거니와 다시한번 생각건대 옛날 金장군의 육진(六鎭)개척도 公의 9성을 다 못 찾은 것임을 보면 9성은 과연 역사적인 장거요 또 고구려 옛 땅을 되찾을 수 있는 발판이기도 했건만 슬프다 꿈은 사라지고 오늘은 그나마 길도 끊어져 소식조차 알 길 없음을 어찌 하랴. 이제 나는 파주의 옛터를 찾아와 公의 무덤과 오랜 영정 앞에 머리를 숙여 분향하고 풍우속에 흘러간 구백년 세월을 더듬어 公을 그리며 삼가 노래를 마친다.
갈라전(曷懶甸) 눈얼음 박차고 삼군병마(三軍兵馬)를 몰아치던 날
고각(鼓角)소리 구름을 찟고 오색(五色) 깃발 바람에 얼어도
영웅의 불타는 정렬에 강산은 되레 후훈했으리
두만강(豆滿江) 건너 七百리를 달려 선춘령(先春嶺)아래 큰 비를 세워
여기까지가 고려(高麗)땅이라 굵은 글자로 새기고서
팔들고 외치시던 님 그 모습 지금한번 보고 싶구려
동북 몇 고을 귀해서리까 대륙 되찾은 발판이었소
땅조각 잃은게 분함 아니라 역사 죽은게 통분해서요
세월은 九百年이나 흘러도 님의 정한은 달랠길 없소
이 무덤에 몸을 끼쳐도 혼이사 九城에 가 게시리오
오늘은 붓을 쥐고 님의 묘비에 글을 쓰오니
뒷날에 막대를 던져 북녘구름을 헤치오리다.
全州后人(전주후인) 李殷相(이은상) 글
三十代孫(삼십대손) 錫五(석오) 글씨
一九六六年 十月 日
二十九代孫(이십구대손) 敬秀(경수) 세움
개국 대신 고려 신하의 길을 택하신 문숙공 윤관장군
고려가 건국된 이래 숙종-예종 때처럼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겠다는 열망과 그 실행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적은 한국 역사상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이 배후에는 윤관이라는 천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대영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바로 두번째 북벌영웅이었던 것이다.
- 윤관은 태조 왕건에 나왔던 장군 윤신달의 후손으로, 당시 고려의 대표적 명문귀족 중의 하나였던 파평 윤씨의 일족이었다. 비록 고려의 지배층으로서 충분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이 가문은 유달리 무장의 기질이 다분했다. 그래서 대대로 파평 윤씨가문은 고구려의 후예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고 나아가 언젠가는 꼭 북방의 광활한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이러한 가문의 기질이 윤관대에 와서 꽃을 피웠던 것이다.
- 젊었을 적 윤관은 고려 국경을 벗어나 백두산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며 장군의 꿈을 키우곤 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당시 여진족의 땅인 만주를 두루두루 살펴보며 많은 모험을 하면서 여러 영웅들을 만나 동질감을 키우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고려와 여진족은 반드시 하나가 되어 고구려를 재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여진족이 누구였던가? 종래의 역사인식은 일반적으로 야만인 정도로 취급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진족은 곧 발해의 후손이었다. 다시 말해 발해가 망한 이후 그 유민들을 '여진족'이라 불렀던 것이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거란은 발해의 땅에 '동단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워 태조 야율아보기의 장남인 야율배를 그 왕으로 삼았으나 잇다른 발해유민들의 저항에 도저히 발을 못붙이고 쫓겨나기도 하였다. 거란은 어차피 발해를 멸망시켜 동아시아의 맹주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므로 그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더 이상 만주땅에 별 미련이 없었다. 과연 거란의 의도대로 옛 발해의 광대한 땅덩어리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일명 '발해열국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 이후 후발해국, 정안국, 오사성발해국 등등 수많은 왕국들이 만주에서 명멸하며 약 2백년동안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그동안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고 이들 왕국들과 단편적인 교섭들을 하였으나 적극적으로 이들을 아우를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신라계의 폐해였다.
- 이것이 당시 숙종이 추진하던 북벌계획 당시 여진족의 상황이었다. 윤관 또한 일찌기 만주 땅을 섭렵하며 이들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윤관은 관직에는 선종 때부터 등용된지 오래였으나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역시 숙종 때였다. 윤관은 자신이 품고있던 오랜 야망을 숙종을 통해서 펼쳐보이리라 다짐했다. 윤관은 이를 위해 제왕의 기상이 넘치던 숙종의 곁에서 보좌하며 그의 즉위에도 적지않은 공헌을 하였다. 때문에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 때마침 서기 1100년을 전후해서 오랜 분열과 전란에 시달리던 만주땅에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생여진 출신의 오야속이라는 인물이 점차 세력을 키워가며 여러 발해열국들을 통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야속은 남만주를 통합하자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려는 요량으로 남쪽의 고려의 국경을 건드렸다. 이때 숙종은 윤관을 보내 오야속을 상대하게 하였으나 결과는 뜻밖에도 고려군의 대참패였다. 여진족의 우수한 전략과 무기를 고려군이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 이때 받은 윤관의 충격은 대단했다. 뒤이어 그는 숙종과 의기투합하여 옛 고구려식의 군대로 고려군의 체질을 개선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평원지대에 맞는 기마병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쓸데없이 인력을 낭비하던 각 사찰의 승려들을 군대에 동원하여 대군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것이 일명 '별무반'으로 기마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어 여진족에게는 '신의 군대'로 알려지게 된다.
- 이런 와중에 직접 서경으로 가 대대적인 만주출병을 선포하려던 숙종이 갑자기 급사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장성한 왕우가 즉위하니 이가 예종이다. 예종은 저돌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아버지 숙종에 비해 매우 치밀하고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숙종의 유지를 받들어 만주출병에 만전을 기했다. 이미 이러한 대세는 약삭빠른 신라계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이때 만주에서는 오야속이 죽고 그 동생인 아골타가 여진왕으로 즉위하여 제국으로의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아골타는 노골적으로 고려에 국서를 보내 자신의 가문은 옛 신라왕자 마의태자의 후손이니 꼭 고려를 정복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같은 여진족의 발호는 고려의 조정을 경악시켰고 분노한 예종은 서기 1107년 10월, 드디어 윤관을 대원수로 삼고 오연총, 김한충, 문관, 김덕진, 척준경 같은 내노라하는 고려의 장군들을 총출동시켜 총 20만 대군으로 여진족의 경계에 이르게 하였다.
- 때마침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아골타도 이미 고려와의 일전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역시 마친채 25만 대군으로 남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종은 숙종의 숙원을 푼다는 의미에서 직접 서경으로 발걸음을 옮겨 동명성제의 제사를 무사히 올리고 만주로 출병하는 고려군을 격려했다.
- 여진족의 땅을 바로 앞에 두고 윤관은 설레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시작이구나! 드디어 선조들의 한을 풀때가 온 것이다!! 저들 여진족의 땅을 모조리 차지하여 옛 고구려의 영화를 되찾으리라!!! 살을 에이는 추위와 칼바람속에 그렇게 윤관을 비롯한 20만의 고려군은 끝없이 펼쳐진 만주평원을 바라보며 마지막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옛 발해의 후손들도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이 '성전(聖戰)'에 대대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고려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던 '만주출병'은 고려군의 선제공격으로 그 막을 올리는 것이었다.
- 발해가 만주를 다스릴때는 잘 정돈된 제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멸망 이후 분열되어 전란으로 지새다보니 교통과 질서가 파괴되었다. 그래서 여진족들은 모든 국가체제를 기동성 위주로 하다보니 유목왕국화하여 정주생활을 기피하게 된다. 따라서 국경이 있다해도 거기에 상주하는 인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주로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윤관이 20만 고려군을 휘몰아 여진왕국을 쳐들어 갔을때도 바로 이같은 상황이었다. 국경을 돌파하여 백두산 근처까지 와도 별다른 여진족의 저항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고려군에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은 광활한 개마고원의 고산병과 거친 자연이었다. 더우기 이제 공포스러운 북방의 겨울이 시작되는 때여서 고려군은 살인적인 한파와도 싸워야 하는 실정이었다.
- 이때 고려군에 다소나마 행운이 찾아왔다. 25만 대군을 이끌고 본거지인 완안부의 아르치카 유역(지금의 흑룡강성 송화강의 지류인 아집하)에서 남하하던 아골타는 거란군이 여진족의 서쪽에 대군을 운집하고 있다는 급보를 듣고 군대를 양분하여 자신은 거란의 국경으로 향했다. 아골타는 대군으로 고려군을 짓밟겠다는 계획을 수정하여 자신의 아우로 하여금 10만 대군으로 윤관을 치라고 명했다. 이는 고려외교의 개가였다.
- 한편, 어느덧 힘겨운 행군 끝에 고려의 대군은 백두산 기슭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직 싸움다운 싸움은 안해봤지만 배달겨레의 영산 백두산 앞에서 고려군은 윤관 대원수가 집전하는 천제를 치루고 각오를 새삼 다졌다. 그때 급보가 도달하기를 지금의 함경북도 해안 지대의 일부 여진족들이 군세를 모아 고려군의 배후를 친다는 소식이었다. 윤관은 고려군의 본진은 잠시 멈추게 하고 자신은 오연총과 임연, 척준경 등의 장수들과 함께 이들을 정벌하러 나섰다.
- 여진국의 대장군 고라는 아골타의 밀지를 받고 정주성과 장주성 두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고려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받은 고라는 휘하 장수들을 모아 윤관을 사로잡을 계책을 의논했다. 결과로 고라 자신이 항복사절로 몰래 변장해 윤관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벤다는 훨씬 과격한 행동지침으로 귀결되었다.
- 그러나 고라를 비롯한 여진족 장수들은 윤관이 이미 여진국의 주요 장수들의 초상화를 정확하게 그려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윤관은 정주와 장주의 두 성이 항복한다는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진족들은 사전에 사신을 보내 항복절차를 교섭하겠다고 하고 윤관은 이를 승낙했다.
- 사신으로 변장한 고라는 휘하 장수들을 하인으로 변장시키고 윤관이 베푼 위로의 잔치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면면을 꿰뚫고 있던 윤관이 술잔을 떨어뜨리는 것을 신호로 고라와 휘하 장수 4백여명이 한사람도 남김없이 목이 날아갔다. 이로써 동북지역 여진국의 방어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것이었다.
- 여진의 대장군 고라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여진족은 초반부터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여진의 10만 대군은 이미 지금의 연길 지역인 문내니성에 도착하고 있었다. 지도자를 잃은 정주와 장주성은 순식간에 고려군이 접수했다. 여기에 일부 병력을 남겨놓은 윤관은 재빨리 다시 본군과 합류했다.
- 윤관은 또한 지리에 익숙한 발해인과 많은 여진족들을 이미 포섭해놓고 있었다. 이윽고 여진의 10만 대군이 웅거하던 문내니성에 도착한 고려군은 주변의 지형을 연구한 끝에 수공을 결심했다.
- 우선 성을 겹겹이 둘러싼 고려군은 숫적인 우세로 여진군의 경거망동을 억제한 이후 비밀리에 주변 계곡에 여러 개의 둑을 만들어 강물을 저장해놓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달이 지난 후 둑에 물이 차자 윤관은 옛날 강감찬의 고사를 따라 일시에 둑을 터뜨렸다. 그러자 모든 물길이 문내니성으로 쏟아져 들어와 여진의 기마병을 무력화시켰다. 이로써 여진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고 아골타 자신의 아우도 이때 목숨을 잃는다.
- 여진의 잔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인근의 보동음성으로 피신했다. 반대로 초반에 엄청난 승리를 거둔 고려군은 한층 사기가 충천했다. 윤관은 척준경으로 하여금 여진족 잔당을 쳐부수러 보동음성으로 보냈으나 승리에 도취된 척준경은 그만 방심하다가 여진족의 반격을 받고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 척준경은 죽여달라고 했으나 이 와중에 아까운 장수를 함부로 처단할 수는 없었다. 윤관은 대신 척준경이 큰 공을 세워 이 수모를 씻어야한다고 엄하게 타일렀다.
- 윤관이 군사를 이끌고 보동음성에 도달하니 과연 철옹성이었다. 도무지 빈틈이 보이지 않아 할수없이 정공법을 명령했으나 괜히 애꿏은 군사들만 희생이 되었다. 윤관이 고민하자 척준경은 자신이 밤에 결사대를 이끌고 성벽을 넘어 성문을 열어보이겠노라고 장담했다. 윤관은 반신반의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양동작전으로 성안의 여진군을 다른데로 시선을 돌린다음 척준경을 투입하는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 척준경과 장군 이관진은 윤관이 성의 다른 쪽으로 공격을 개시하는 사이 비밀리에 횃불을 던져 수비병의 시선을 다른데로 돌린다음 재빠르게 성벽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그리하여 수비병을 순식간에 제거한 다음 성문을 열었다. 이때 대기하고 있던 고려군이 노도와 같이 성문을 통해 진입했다.
- 성문이 뚫리자 속은것을 깨달은 여진 장수들이 몰려와 척준경을 에워싸고 화살을 빗발처럼 날렸다. 그러나 척준경은 이를 뚫고 말을 달리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여진 장수들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초인적인 괴력을 발휘한다. 이로써 보동음성도 고려에 의해 함락되었다.
- 여진군의 본진을 이끌고 거란국경에 도달한 아골타는 이것이 고려와 거란의 합동 속임수인 것을 알고 분통을 터뜨렸다. 게다가 윤관을 치러간 자신의 아우와 10만 대군이 문내니성에서 궤멸당했다는 소식에 더더욱 경악했다. 아골타는 이제 고려가 자신의 목에 칼날을 겨누는 형국임을 깨닫고 급히 대군을 이끌고 이제 여진족 남방의 최대 요새인 이위동성으로 향했다. 이제 여진족의 대왕 아골타와 고려 제일의 명장 윤관과의 한판승부는 이위동성에서 가려지게 된 것이었다.
- 과연 아골타가 이끄는 15만 대군의 위용과 기동성은 놀라웠다. 거란과 접경하던 서쪽 변경에서 윤관이 진군하던 목표인 이위동성까지의 그 엄청난 거리를 단 4일만에 주파했기 때문이다.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하에 15만 기마군단을 이끌고 오는 아골타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제 옛 고구려와 발해의 뒤를 이어 나 아골타가 천하를 도모하는 마당에 남쪽의 고려군이 나의 발목을 이렇게 잡다니...)
그러했다. 아골타의 최종목표는 과거 고구려와 발해가 그러했던것 처럼 중국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본거지인 만주를 통일하여야만 했다. 만주를 차지하는 자가 곧 중국을 떨게할 수 있던 것이었다.
- 이위동성은 마치 반지의 제왕2에서 나온 헬름 협곡의 전투처럼 절벽을 양쪽에 끼고 웅거하던 천혜의 요새였다. 이윽고 이위동성에 다다른 윤관의 15만 대군은 그동안의 승승장구에도 불구하고 모두 사색이 되었다. 아무러한 윤관도 왜 이곳이 여진국 남쪽의 최대 방어 중심지였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윤관은 우선 척후병들을 사방에 보내 이위동성의 방어막에 약점은 없는지를 살펴보았다. 사실 이위동성이 윤관에게 생소한 장소는 아니었다. 이전 젊었을 적에 만주를 두루 섭렵하던 윤관은 천하의 요새라던 이곳도 방문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위동성은 아골타의 영도력하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철옹성으로 변해있었다.
- 척후병들의 보고결과도 암담했다. 성의 높이도 어마어마할 뿐 아니라 성의 후문도 좁은 오솔길이기 때문에 배후공격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오직 탁 트인벌판은 방금 윤관의 대군이 진군해온 거기밖에 없었다. 여진의 구원군이 온다면 이길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 고려군이 양면으로 협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윤관은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느끼고 일단 진지를 구축한 다음에 목책을 두르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일부 장수들은 이위동성을 포기하자고 했으나 윤관은 고개를 저으며 반대했다.
" 이위동성은 아골타의 본거지를 치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관문이오. 만약 이곳을 포기하고 우회한다면 지금껏 우리에게 복속했던 여진족들도 딴 마음을 먹게될 것이 자명하오. 난 오래 전에 여진의 땅을 주유해 그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소. 반드시 이곳을 함락하여 고려군의 위용을 그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어야 하오!"
- 그러나 미처 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후방에서 급보가 날라왔다. 아골타의 15만 대군이 불과 10리 밖에서 육박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군은 동요했으나 윤관은 이를 진정시키고 5만의 군사를 남겨 진지구축을 계속하게 하고 나머지 10만으로 맹활약을 펼친 척준경, 임언, 오연총 등을 대동하고 아골타의 대군을 상대하러 나섰다.
- 아골타의 대군은 전원이 기마병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윤관의 고려군은 조금 발걸음을 나서자 마자 지축을 뒤흔드는 엄청난 말발굽 소리에 위압당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상당수가 기마병이었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보병이었다. 이윽고 윤관의 눈에 저 멀리 빨간 망토를 입고 황금 갑옷에 첫눈에도 범상치 않은 풍모의 장군이 선두로 진격해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아골타였다.
- 아골타 역시 저 멀리 고려군의 모습이 들어오자 직접 말을 몰고 나서 고려의 대장군 윤관을 찾았다. 이윽고 두 영웅은 서로와 조우했다. 아골타가 먼저 날카롭게 물었다.
" 고려는 무슨 일로 우리 땅을 침범하였는가?"
놀랍게도 유창한 고려말이었다. 때문에 윤관의 첫마디도 그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 그대가 여진족의 왕, 아골타인가?"
"그렇다"
" 어떻게 고려말을 할줄 아는가?"
그러자 아골타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금새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 우리 선조가 고려땅에서 왔다. 당연히 조상님이 쓰셨던 말을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대의 선조가 신라의 마의태자였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미 신라는 고려에게 망한 지 오래다. 그런데 신라인의 후손인 그대가 왜 고려에게 반기를 들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인가? 이전에는 우리에게 공손하던 그대들이 아니었나?"
그 말을 듣자 아골타는 침을 밷으며 윤관을 노려보며 말했다.
"비록 우리 조상은 신라인이지만 여기는 엄연히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며 나도 당연히 그들의 후계자로 내 스스로 생각한다. 여진족은 모두 옛 발해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이제 힘을 모아 발해를 멸망시켰던 우리의 철천지 원수 거란놈들을 쓸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발해와 동족이라고 자칭하던 그대 고려인들은 왜 거란을 응징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공격하는 것인가?"
윤관도 지지않고 정연하게 대답했다.
" 이미 우리 고려제국은 고구려의 후예라는 자존심 때문에 백년전 거란과 여러번 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철천지 원수라도 영원히 싸울수는 없는 것. 그래서 우리 고려도 일단 고구려의 옛 땅인 여진족의 본거지를 점령하여 대제국을 이룬 다음 거란을 도모할 것이다. 그대는 이제 대의를 깨닫고 순순히 고려황제의 명을 따르라!"
"그렇다면 더 이상 할말이 없다. 내 아우를 죽인 네놈들은 결코 이곳을 한명도 살아돌아가 처자식을 보지 못하리라!"
그말을 남긴채 아골타는 자신의 군사들에게 돌아가 총공격을 명했다.
- 양군이 부딪친 곳은 허허벌판이었다. 그래서 15만의 여진 기마병이 돌진하는 모습은 고려군에게 공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윤관은 먼저 궁병을 앞세워 소낙비같은 불화살을 퍼붓게 해 일단 적군의 진격을 주춤하게 했다. 그 동안 윤관은 정예 기마병들을 후방으로 빼내고 보병들로 하여금 진형을 갖추게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때마침 폭우가 쏟아져 불화살도 무용지물이 되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여진의 기마병도 순식간에 흙탕물로 변한 벌판때문에 진격이 더디게 되었다. 거기다가 그들은 고구려식 갑옷으로 자신들과 말들을 무장시켰기 때문에 빗물에 더욱 약한 모습을 보였다.
- 이윽고 고려군에 돌진하는 여진족 기병은 특유의 기마전술로 원형을 그리며 고려군을 공격했으나 고려군 역시 큰 방패로 원형방어를 취하며 긴 창으로 기마병의 급소를 노렸다. 이는 그동안 여진족의 전략전술에 능통한 윤관 대원수의 군사훈련 덕택이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작이 더딘 여진 기마병들은 하나둘씩 말에서 떨어져 고려군의 밥이 되었다.
- 기마병을 돌진시켜 단숨에 고려군을 쓸어버리려던 아골타의 정공법은 예상외로 난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더구나 벌써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아골타는 기마병을 거두어 진을 치게 하였다. 어둠이 결국 양군간의 전투를 중단시킨 것이었다.
- 윤관은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횃불을 그대로 놓은채 밤 사이에 전군을 이위동성의 본진과 합류하게 후퇴시켰다. 소리가 나 발각될 우려가 있는 기마병들을 미리 후퇴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 이를 까맣게 몰랐던 아골타는 다음 날 동이 터서야 고려군이 진지만 남겨놓은 채 전군 철수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전군을 휘몰아 이위동성으로 달려갔다. 저 멀리 드디어 이위동성의 웅장한 위용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고려군의 본진이 보였다. 목책이 있었으나 말발굽에 짓밟으면 그만이었다.
- 여진의 정예 기병들은 무서운 기세로 곧바로 고려군의 본진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앞서 달리던 기병들이 고려군의 진지 바로 앞에 도달하자 모두 땅으로 비명을 지르며 꺼져갔다. 사람과 말의 비명이 어우러진 채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어갔던 것이었다. 이는 철저히 위장된 함정으로 윤관이 이미 어둠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파놓도록 한 매우 깊은 함정이었던 것이다.
-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던 여진의 기병들은 갑자기 말을 멈출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미노 현상으로 앞에서 멈추려던 기병들도 뒤에서의 압력 때문에 연거푸 함정 구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함정에 빠진 기병들은 곧 고려군의 불화살에 어육이 되어 죽어갔고 함정 구덩이는 금새 불에 타는 핏물로 가득하게 채워질 뿐이었다.
- 당황한 아골타는 화살을 쏘아 이위동성 안에 있는 여진군에게 성밖으로 나와 고려군을 치라 명했다. 그러나 기마병이 아니었던 이들은 성밖으로 나오자 마자 고려의 기마병들에게 여지없이 짓밟혔다. 간신히 성안으로 다시 도망치려던 자들도 고려군에게 모조리 사로잡혀 그야말로 이위동성은 어처구니없이 고려군에게 떨어졌다.
- 아골타는 눈 앞의 광경을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윤관이 이끄는 고려군이 자신의 정예기병들을 거의 섬멸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주변의 장수들은 일단 후퇴를 권했고 노련한 장수였던 그 또한 더 이상 후퇴를 늦출수는 없었다. 결국 이위동성을 고려군에게 어이없이 내준 채 공포에 떠는 여진의 잔군을 이끌고 아골타는 비참한 패전의 길에 올랐다. 급히 도주하면서 아골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처음 경험했던 사상 첫 패배였던 것이다.
- 이위동성 대전투 이후 아골타와 윤관과의 정면승부는 일단 소강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위동성에서 대패한 아골타는 일단 본거지로 돌아오자 자신의 제국을 추스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윤관 또한 그동안 정복한 여진의 땅을 고려의 영토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다. 어쨌든 이위동성 전투로 인해 여진족들 사이에는 고려군이 그야말로 불가능을 이룬 '신의 군대'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윤관은 발해인들을 앞세워 최대한 여진족들의 민심을 얻는데 주력했다.
- 결과는 고려의 입장에서는 대만족이었다. 고려군의 위용을 경험한 주변 여진족들은 무더기로 윤관의 군대에게 귀부를 청해왔고 앞서 아골타를 타도할 선봉에 나설것을 서로 자원했다. 여기에는 아골타의 여진통합시 반대세력으로 몰렸던 이들도 있었다. 반면 아골타는 주력이 섬멸당하고 군사력을 재건하려는 측면에서 지지세력들의 이탈은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그의 제국 자체가 존립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었다.
- 고려 조정에서는 윤관 대원수의 눈부신 활약에 크게 기뻐했고 신라계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만 갔다. 예종 스스로가 이제 만주 땅에 대제국을 이루면 옛 고구려의 전례에 따라 황도를 대륙으로 옮기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거란에서도 동쪽에서 발흥하던 여진족의 위세에 크게 긴장하고 있었는데 고려에서 뜻밖에 이러한 위험을 대신 제거해주고 있으니 싫을 이유가 없었다. 거란에서도 고려에 사신을 보내 윤관의 여진정벌을 축하했다. 100년전 고려와 피터지게 싸운 이후 거란은 고려를 동격의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있던 상태라서 고려 또한 거란의 호의에 답했다.
- 이제 사방에 적을 두게 된 아골타로서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일단 거란에게 사상 유례가 없는 저자세를 취했다. 이는 고려와 거란의 합동작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를 위해 아골타는 직접 거란의 황제 앞에서 춤까지 추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그에게 지금 당장 급한 것은 거란이 아니라 고려였다. 거란이야 대국의 예를 취하면 그만이었지만 고려는 바로 아골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 그다음 아골타는 윤관에게 사신을 보내 휴전을 제의했다. 그동안 쌍방의 피해가 너무 크니 잠시 서로 전력을 수습한 다음에 다시한번 자웅을 겨루자는 것이었다. 고려군의 일부에서는 이 여세를 몰아 아골타를 완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윤관은 이미 고려군의 보급로가 길어진 것을 염두에 둔 심사숙고끝에 이러한 아골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는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고 당시 양측은 모두 숨을 돌릴 여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 윤관은 이때를 이용하여 정복지를 고려영토로 바꾸는 작업을 개시했다. 우선 윤관은 사방에 부하 장수들을 보내 국경선을 정하였는데, 특히 서쪽 국경으로 새로 정한 몽라골령을 중요시해 그곳을 앞으로의 거점으로 삼을 대요새를 쌓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영주성이었다. 이밖에 다른 경계에도 고려의 큰 성들이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우뚝 솟아 여진족에게 새로운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윤관이 새로 개척한 고려의 영토는 대략 지금의 남만주의 중심부를 다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땅이었다. 말하자면 만주는 북쪽의 아골타와 남쪽의 윤관으로 양분된 형국이었던 것이다. 만주 서쪽의 요하를 낀 대평원지대는 아직도 거란의 영토였다.
- 윤관은 15만 대군을 각각 나누어 각 경계의 요새들에 3만씩을 배치하고 자신은 중앙군 6만을 거느리고 있었다. 게다가 협조를 약속한 여진족의 별동대까지 조직해 그의 군세는 다시 2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아골타의 입장에서는 일단 윤관의 이러한 군사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일환으로 그는 겉으로는 휴전을 유지하면서도 특공대를 보내 곡물창고 등을 불태우는 등 고려군의 보급품 체계를 아예 파괴하려고 기도했다. 이를 깨달은 윤관은 다시 장수들과 의논한 끝에 다소 무리가 있더라고 아골타의 본거지를 칠 장도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 북쪽 경계인 길주성을 나선 윤관의 10만 대군의 최종 목표는 이제 아골타의 본거지에 다름이 아니었다. 이때는 북방의 추위가 매섭게 들이닥치던 때로 아무러한 고려군도 크게 사기가 떨어졌다. 윤관이 자신을 향해 다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아골타는 비장한 각오로 역시 남하하기 시작했다.
- 아골타의 본거지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여진족의 또다른 요새인 가한성을 정복해야 했는데, 이 성으로 가는 길 자체는 아무러한 고려군이라도 대군을 이동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때 근처의 여진족 추장이 찾아와 근처에 고구려의 황실 후손이 있는데 그가 가한성 함락의 비책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윤관에게 말했다.
- 윤관은 귀가 솔깃했으나 이 추장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명장 오연총과 8천의 군사만을 이끌고 그 황실후손이 살고 있다는 병모가지 길 언저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또한 만에 하나 다른 장수들에게도 하루 간격으로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오라고 명했다. 8천이면 근처의 어떠한 여진족들도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이 물론 있었던 것이다.
- 병모가지 길은 매우 좁아 고려군은 일렬 종대로 지나가야 만 했다. 그때 북소리가 울리며 울창한 삼림속에서 여진족들이 벌때처럼 일어나 고려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골타는 고려군의 공격에 대비해 이미 모든 여진족들의 전력을 극비로 숨겨놓았고 고려의 척후병과 밀정들은 이를 미처 간파못한 것이었다. 병모가지 길을 공격하는 여진족은 무려 5만의 대군이었다.
- 여진족들은 우선 고려군의 앞뒤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바위와 나무들을 굴려 퇴로를 막는데 성공했다. 이어 사방에 널려있던 함정을 드러내어 고려군을 빠뜨렸고 거기에서 고려군은 독사들에게 물려 처참하게 죽어갔다. 게다가 여진족들은 호랑이나 곰같은 맹수들에게 불을 붙여 고려군에게 돌진하게 하였고 고려군은 미친듯이 뛰어드는 야수들에게 또다시 봉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 이어 죽음의 불화살과 독화살의 세례가 이어졌다. 한번에 쏟아지는 5만개의 화살에 고려군들은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고, 백병전을 하기도 전에 전의를 잃고 내빼는 고려군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윤관에게 더욱 불행했던 것은 때가 밤이 아니라 낮이라 그를 여진족들이 금새 식별할 수 있던 것이었다. 우선 그는 대장군 무장을 하고 있어 다른 병사들과 금새 차이가 났었고 윤관을 보호하기 위해 병사들이 방패로 진을 형성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 이같은 죽음의 공격으로 고려군은 적들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채 전멸의 위기에 직면했다. 오연총은 순간 혼란을 틈타 윤관의 깃발을 자신과 바꾸어 윤관이 집중적인 표적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자마자 곧 무수한 화살이 오연총을 향했다. 오연총을 보위하던 군사들은 곧 하나둘씩 쓰러져갔고 오연총도 날아드는 화살을 보검으로 막으며 필사의 항전을 펼쳤으나 그만 화살이 그의 왼쪽 눈에 박히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 이제 여진족들은 사방에서 윤관을 호위하는 10여명 남짓의 군사들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것이 남은 고려군의 전부였다.
(아,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죽는구나...!)
윤관은 앞이 깜깜했으나 이제 정해진 운명인 이상 부하들과 최후를 함께 할 것을 새삼 굳게 다짐하고 그들을 독려했다. 윤관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었다.
- 죽음의 계곡 병모가지 오솔길은 순식간에 고려군의 시체로 산을 이루며 피는 냇물을 이루기에 충분했다. 여진족의 살인적 기습에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던 고려군들도 남김없이 사로잡혀 즉석에서 목이 날아갔다. 때문에 절대절명의 순간에 처한 윤관을 도울 고려의 후방군에게 아무도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윤관이 병모가지 길에 접어들 무렵, 후방에서 뒤따라가던 척준경은 본능적으로 뭔가가 깨림직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고려군이 여진족 추장말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전장에서 겪은 동물적인 직감이었다. 그래서 그는 동생인 낭장 척준신과 함께 윤관의 뒤를 불과 10여명의 특공대와 함께 허겁지겁 달려갔다.
- 아니나 다를까. 그 좁은 오솔길을 여진족들이 새까맣게 뒤덮은채 가운데 방패로 원진을 만든 불과 10여명의 고려군을 향해 뒤덮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눈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진 장군도 보였다. 오연총이었다. 그리고 윤관은 방패진의 가운데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맞고 있었다.
- 척준경이 이끌고 온 병사들은 10여명이었지만 모두 힘이 절륜한 일당백의 장사들이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광경을 보고 척준경은 그냥 있을 수 없어 본능적으로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 때 동생 척준신이 그를 잡았다.
"형님, 아무리 대원수가 위급지경에 처했다고 하나 저 여진족의 대군을 우리 10여명이 무슨 수로 당해냅니까? 그야말로 자살행위입니다."
그러자 척준경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준신아. 대원수께서는 나의 허물을 아무런 조건없이 덮어주시고 나를 크게 써주신 분이다. 무릇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법. 나의 은인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이를 외면한다면 금수만도 못한 짓일 것이다. 설사 내가 죽더라도 나는 반드시 이렇게 할수밖에 없다. 너라도 여기남아 고향의 늙은 아버지를 부탁한다. 너희들은 어찌하겠느냐?"
"우린 모두 낭장과 생사를 같이 하겠나이다!"
용사들까지 척준경과 죽음의 골짜기로 들어가기로 맹세하자 척준신은 더이상 형을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 남아 형의 죽음을 지켜볼수도 없었다.
" 그럼 어서 가서 대원수님을 끝까지 지켜드립시다. 저도 형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준신아..."
이렇게 척준경 형제와 용사들은 용감무쌍하게 여진족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 포위망을 좁혀오면서도 여진족들은 각종 화살을 퍼부으며 원형방패진을 궤멸시키려 했으나 남은 이들도 죽음을 앞두고 악착같이 저항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한두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윤관은 자신 때문에 죽어가는 이들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피눈물을 흘렸다.
(아...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죄없는 이들이 이렇게 죽어가다니...)
그때 문득 적의 화살에 비참하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여진족이 바로 눈앞에 오자 장검을 빼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그러자...
"대원수, 저희들이 왔습니다!"
뇌성벽력과 같은 소리에 여진족의 시선은 모두 윤관을 향해 달려오는 척준경에게 돌려졌다. 척준경은 비호와 같이 여진족에게 달려들어 순식간에 여러 명의 목을 베고 윤관으로 향하는 길을 뚫기 시작했다.
- 여진족들은 척준경의 모습을 보고 지원군이 도착한 줄 알고 잠시 뒤로 포위망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척준경은 생각보다도 훨씬 수월하게 윤관의 겉으로 올 수 있었다. 이 와중에 결사대 10명 중 과반수가 목숨을 잃었다. 윤관은 척준경이 도우러 달려오자 잠시 삶을 놓겠다는 생각을 접고 합류한 용사들과 남은 장졸들과 함께 용기백배하여 여진족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진족들이 곧 척준경의 군사수를 파악하자 다시 포위망을 좁혀오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윤관은 척준경을 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척낭장, 이것이 마지막인가 보네...자네가 나 때문에..."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곧 구원군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참으시면 됩니다. 설사 그 이전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하여도 소장은 끝까지 장군을 따를 것이옵니다!"
윤관은 더 이상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 과연 척준경의 용맹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릇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평소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척준경의 경우는 이것이 더욱 여실했다. 달려드는 여진족들을 천하장사인 그가 보검을 휘두르면 추풍낙엽처럼 목이 날라갔고 나아가 여진족 장수들 몇몇도 쓰러뜨린 그는 빗발같이 쏟아지는 화살들을 신기에 가까운 무술로 다 막아내며 빼앗은 말을 타고 빙빙돌며 원형방패진을 방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여진족들은 혀를 내두르며 사기가 떨어지며 잠시 주춤하게 된다.
- 이렇게 여진족이 주춤하는 사이, 여진족의 포위망 후방에서 일대 소란이 일어나더니 일단의 고려군이 불화살을 방패진 주위로 집중사격하며 여진족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초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고려의 구원군이 척준경이 여진족에게 돌진하기 전에 보낸 전령의 급보를 받고 급히 병모가지 길로 달려온 것이었다. 여진족들은 이미 때를 놓쳤음을 통분하게 여기며 포위망을 풀고 아골타의 본군과 합류하기 위해 다시 북으로 발길을 돌렸다.
-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윤관 일행은 급히 오연총을 치료하며 영주성으로 되돌아왔다. 윤관의 일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대패를 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잠시 북으로 진군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동요하는 군심을 수습하는데에 주력했다. 한편으로 윤관은 생명의 은인인 척준경과 부자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척준경의 공로가 조정에 알려지며 예종은 그에게 합문지후에 임명되었다.
- 고려군이 병모가지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진족들은 다시 고려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천하의 아골타가 이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다. 이미 거란에 복속을 표시해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 그로서는 이제 휘하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윤관이 버티고 있던 영주성으로 향했다. 윤관은 이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휘하 장수들을 보내 이를 막으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많은 군사들을 잃고 말았다. 이같은 사태는 이어 여진족의 이탈을 부추기고 있었다. 끊임없는 악순환이었다.
- 아골타의 20만 대군이 영주성에 다달았다는 소식을 들은 윤관은 급히 영주성을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미 사방이 포위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자신의 편에 있던 여진족의 배신 때문이었다. 아골타는 이위동성의 치욕을 설욕하겠다는 각오로 혀를 깨물며 영주성 함락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윤관만 제거한다면 고려군의 철수가 있을 것임은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영주성을 지키는 고려군은 불과 수천이었고 설사 다른 곳에서 원군이 온다고 해도 아골타의 대군을 당해낼 방도는 없었다. 게다가 다른 요새들 역시 군사를 보낼 여건이 아니기도 했다. 윤관은 또한번 일대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 겹겹이 영주성을 포위한 아골타는 일단 포위된 고려군의 심리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그는 피리에 능한 군졸들을 뽑아 밤낮으로 피리를 불게 해 성안의 고려군으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케하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피리소리로 향수를 느끼기 시작한 고려군의 사기는 급속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 이제 윤관은 성밖의 적뿐만 아니라 성안에서 동요하는 장졸들을 추스려야 했다. 그래야만 무슨 계책이라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별다른 뾰족한 수를 내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척준경이 포위망을 뚫고 죽기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영주성의 장군들이 갑론을박하는 동안 그나마 영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급파된 고려군들이 아골타의 여진족에게 궤멸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실제로 아골타는 고려 장수들의 수급을 창끝에 매달아 자신의 승리를 증명하기도 했다.
- 어차피 영주성에서 농성한다 해도 전황은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고심끝에 윤관은 아골타에게 명예를 건 도전장을 보내 양쪽의 용사들로 하여금 자웅을 겨루자고 요청했다. 그래서 고려가 지면 윤관이 항복하고 여진족이 지면 아골타가 군사를 물린다는 조건이었다. 윤관의 제안을 받은 아골타는 손해볼 것이 없다는 계산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만에 하나 여진족이 진다해도 군사를 물리는 척 하다가 방심하는 고려군의 허를 찔러 영주성을 차지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아골타로서는 절대로 영주성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 아골타가 윤관의 도전장을 순순히 받아들이자 윤관은 이를 의심하면서도 척준경을 필두로 수십명의 용사를 뽑아 성밖으로 내보냈다. 이골타도 여진족 최고의 용사들을 뽑아 고려군의 장사들과 맞서게 했다. 이렇게 해서 북방의 광야의 뜨거운 햇볕이 차가운 대지를 내리쬐는 한낮에 고려와 여진의 색다른 한판 승부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 결투방식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양쪽의 용사들이 맞붙어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것이었다. 성안의 고려군과 성밖의 여진족이 서로 자기편을 응원하는 가운데 죽음의 결투가 무자비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 여진족 최고의 거한을 필두로 초반에는 여진족의 용사들이 고려군 용사들 20여명의 살과 뼈를 분지르며 기세를 제압해 나갔다. 그러자 척준경이 말을 타고 나오며 그의 장검으로 그 거한의 허리를 두동강내었다. 그러자 고려군의 기세가 다시 올라 양측은 사생결단으로 접전을 펼쳤다. 척준경도 여진 용사들의 화살에 팔뚝에 부상을 입었으나 굴하지 않고 비상한 무예로 여진족들을 제압해 나갔다. 여진족들도 무술의 고수가 많았으나 그 누구도 척준경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척준경이 홀로 남아 승리자가 되었다. 양측의 용사들 중 그가 유일한 생존자였던 것이다.
- 고려측에서는 영웅을 칭송하는 함성이 터져나왔고 여진족 측에서는 사색이 되고 그 많은 대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골타는 당초의 속셈데로 패배를 인정하고 군사를 물리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일단 군사를 되돌린 다음에 야음을 틈타 다시 기습하여 영주성을 함락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 윤관은 아골타가 순순히 물러나자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진족들이 용사의 패배로 수근거리는 상황을 이용해 몰래 후퇴하는 여진족들 틈에 자신편인 여진족들을 투입하여 온갖 괴소문을 내게 하여 여진족의 대군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려 획책했다.
- 이같은 윤관의 계책은 상상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막상 밤이 되자 아골타는 전군을 다시 돌려 영주성을 치려고 하였으나 이미 많은 여진족이 이탈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란과 고려의 연합군이 영주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괴소문 때문이었다. 아골타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군사들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이미 이 때 윤관은 최소한의 수비군을 남겨놓고 비장한 각오로 영주성을 박차고 나와 아골타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윤관이 아니었다. 그는 밤이라는 조건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북과 징소리로 여진족의 공포심을 조장했고 횃불을 많이 들게 하여 대군인 것처럼 여진족의 눈을 교란시켰다. 게다가 낮에 승리한 역전의 용사 척준경을 앞세워 여진족을 향해 짓쳐나가니 아무리 대군이라 해도 여진족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오합지졸떼들에 다름이 아니었다.
- 아골타는 눈앞의 영주성을 두고 쉽사리 또다시 패주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려군의 공격을 역이용하여 오히려 자신의 최정예군으로 길을 돌아 소수의 병력만이 지키고 있는 영주성을 함락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보는 윤관의 날카로운 눈매에 포착되었고, 윤관은 아골타의 이같은 움직임을 알면서도 그가 영주성 가까이로 접근하게 놔두었다.
- 이미 여진족 20만의 위세는 온데간데 없었고 아골타가 이끄는 2만 정예군만이 조용히 영주성으로 쳐들어가 공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영주성을 지키던 장군 임언은 윤관의 계책에 따라 자신의 거짓 죽음을 은연중에 여진족에게 퍼뜨리게 하였다. 그러자 용기백배한 여진족들은 아골타를 선봉으로 영주성을 넘는데 성공하였으나 고려군은 비밀리에 쌓아놓은 토산을 2차 방어망으로 삼아 저항하기 시작했다.
- 아골타가 영주성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전해받은 윤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영주성으로 들이닥쳐 후방의 여진족들을 궤멸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주성 안의 아골타만이 소수의 병력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자 토산으로 방어하던 고려군까지 공세로 전환해 아골타는 협공을 받으며 전멸 위기에 봉착했다. 숫자는 여진족이 월등하였으나 공성으로 체력을 소진하여 맥없이 궤멸당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 아골타는 사태가 급박해지자 다시 영주성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시도했으나 이미 역포위되어 이것마저 불가능했다. 여진족들은 성벽과 토산의 토루 등 높은 지대에서 화살을 퍼붓는 고려군에게 도륙당하고 있었다. 급박해진 아골타는 부하의 도움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병졸 복장으로 위장했으나 이미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윤관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윤관의 지시로 순식간에 아골타는 척준경에 의해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끌려나오게 된다.
- 윤관이 여진족의 대왕 아골타를 사로잡았음을 선포하자 나머지 여진족들도 저항의 의지를 잃고 집단투항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윤관은 이번 만주정벌의 최대 성과이자 훗날 금나라의 태조가 되는 영웅 아골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 아골타를 사로잡은 고려군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제 적의 수괴가 사로잡혔으니 여진족 전체가 고려에 항복하는 것은 시간문제라 여겼던 것이다. 모두들 이제 개선군으로 고려의 고향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 그러나 현실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비록 아골타가 사로잡힌 몸이었으나 아골타는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여 이미 점조직으로 여진족들이 지속적으로 고려군에 대항할 수 있는 제도적인 준비를 완료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영주성의 패전으로 여진족이 지리멸렬하게 흩어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들은 각자의 여진족 장수들의 통솔하에 다시 집합해 이제 이들 단위로 게릴라식으로 고려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 사실 이미 고려군은 너무나도 여진족의 땅 깊숙이 와 있었고 출병한 지도 이제 어언 반년이 다되가고 있었다. 보급로도 문제였지만 예정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여진족의 땅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의 사기도 점차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간헐적인 승전보와 요새의 건축도 어찌할 수 없는 군사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 이런 상황에서 아골타의 포획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이 항복할 기미가 안보인다는 것은 고려군 전체에게 일종의 절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는 천하의 명장 윤관조차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윤관은 사로잡은 아골타를 움직여 여진족의 항복을 받아내고자 시도했으나 포로가 된 아골타는 한마디로 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일부 장수들은 아예 아골타의 목을 베어버리자고 하였으나 장차 고려와 여진족의 통합을 생각하고 있던 윤관은 이를 결단코 반대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 여진족들이 계속 고려군의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윤관은 더 이상 현실에 안주할 수가 없었다. 고심끝에 윤관은 영주성에 고려군을 총집결시켜 아예 아골타의 본거지인 이르치카의 왕성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아예 적의 본거지를 완전히 점령함으로써 더 이상 여진족의 도발을 용납안하기로 한 것이다.
- 이미 12월에 접어든 북방의 겨울은 고려와는 비교도 안되게 매서웠다. 더구나 폭설이 빈번하여 영주성에의 고려군의 집결 또한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여진족이 수시로 이들을 기습해 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만의 고려군은 영주성에 집결하여 전원 기병으로 여진족의 왕성으로 쳐들어갈 군사를 일으켰다.
- 윤관이 총대장이 되어 척준경, 임언, 오연총 등의 장수들을 거느린 고려군은 속도전을 수행하여 순식간에 왕성을 에워쌌다. 이미 아골타가 없는 여진족들은 통일된 행동을 취할 수 없던 것이다. 게다가 더 정확한 이유는 윤관이 이끌고 온 고려군과 함께 아골타가 포로로 같이 종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은 사실상 길을 열어주면서 고려군을 왕성에 이르게 한 형국이었다.
- 뒤로 송화강을 낀 이르치카의 여진족 왕성은 뜻밖에도 평지에 자리잡은 평범한 성채였다. 이는 아골타가 이곳을 여진족의 가장 안전한 요새로 생각하여 별다른 방어시설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골타는 고려군이 자신을 이용하여 왕성까지 쉽사리 도달하자 피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여진족들이 자신이 끼어있는 고려군을 함부로 도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윤관은 왕성에 농성하는 여진족들에게 항복을 권고하자 여진족들은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흩어져있던 여진족들이 왕성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계속 방치하면 군사적으로도 여진족들이 고려군을 압도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를 간파한 지 오래였던 윤관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주변에서는 아골타의 목숨을 담보삼아 왕성의 성문을 열자고 했으나 윤관은 아골타같은 영웅을 그런 식으로 욕보인다는 것은 여러모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대했다.
- 그러나 왕성 공격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고려군 10만이 모두 기마병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기동력을 노려 왕성을 급습했기 때문에 장기전에 대비한 채비가 미비했다. 때문에 모든 것은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 한번 쓴 병법은 다시는 쓰지 않는 윤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진족 정벌의 대미를 장식할 왕성공략에는 새로운 방법을 써야만 했다. 겨울철이나 이미 송화강은 얼어붙어 수공도 불가능했다. 그때 윤관은 왕성에 집결한 여진족들이 불과 10일분의 식량밖에 없다는 고급정보를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고려군은 불과 1주일분밖에 없었다. 적이 굶주리기를 기다리다가 오히려 고려군이 먼저 전멸될 판국이었다. 게다가 계속 여진족들은 왕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급보였다.
- 뭐든지 빨리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러다간 고려군은 꼼짝없이 고립되어 인해전술의 제물이 될 판이었다. 결국 고려군이 기병이라는 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고려군은 왕성의 포위를 풀고 부대를 나누어 왕성 주변으로 다가오는 여진족 부대들을 소탕하기로 했다.
- 워낙 나뉘어 왕성으로 집결하던 여진족들은 고려군의 뜻하지 않은 기습공격을 받고는 형편없이 패퇴하여 지리멸렬해졌고 이를 응용하여 윤관은 이들 패잔병들을 앞세워 부락들을 돌아다니며 왕성안에 있는 여진족들의 가족들을 모으러 다녔다.
- 이윽고 왕성포위에 다시 집결한 고려군은 수많은 왕성의 여진족 가족들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왕성을 향해 애절한 통곡을 하며 여진족이 항복할 것을 권했다. 전시효과를 높이기 위해 윤관은 사로잡힌 아골타의 입을 봉한 채 왕성의 여진족에게 모습을 나타내도록 했다. 이런 광경들을 목격한 왕성의 여진족들은 순간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왕성 내부에서 커다란 싸움이 일어났다.
- 적들의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싸움은 한나절 동안 지속되고 성내에서는 불길마저 치솟아올랐다. 그러더니 성문이 열리고 투항파의 대표가 윤관의 말 앞에 무릎을 끓고 항복을 청했다. 그의 손에는 강경파 여진족 장수의 수급이 쥐어져 있었다.
- 순간 고려군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여진족 정벌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제 더 이상의 목표는 없었다. 고려군의 환호 속에 아골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왕성함락은 아골타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부재로 인한 여진족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왕성의 북문을 통해 일단의 여진족들이 말을 타고 얼어붙은 송화강을 건너 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윤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들이 장차 또 하나의 화근거리였다. 왜냐하면 이들 무리속에 있던 것은 아골타에 이은 여진족의 제 2인자였기 때문이다.
- 고려군은 이로써 아골타의 본거지까지 장악하고 사실상 북벌의 목적을 달성했다. 낭보는 고려조정에 전해지고 고려 또한 황제로부터 백성들까지 춤을 추며 축제의 분위기로 빠져들었다.
- 왕성을 접수한 윤관은 우선 여진족들을 위무하며 민심을 추스리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이윽고 서기 1108년 1월, 6성을 완성하고 이어 3월에 3성을 더해 9성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아골타의 왕성에 공험진을 설치해 여진족의 영토가 고려제국에 편입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 표현으로 윤관은 공험진에 비석을 세우고 국경을 확정했다. 송화강 남쪽의 광활한 만주벌판이 드디어 고려제국의 땅이 된 것이었다.
- 윤관과 수하 장수들, 그리고 고려군들은 몇일동안 잔치를 베풀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이제 그들 뇌리에는 당당하게 개선하여 고려의 영웅이 되는 생각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같은 시각, 고려에서는 멸문지화를 입었던 이자의의 종실인 이자겸의 딸이 예종의 황후로 입궐하였다. 서서히 윤관과 북벌의 운수도 절정의 순간에서 어느덧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르치카의 여진족 왕성을 점령한 대원수 윤관은 어느정도 새로운 영토에 대한 정비가 끝나자 다시 예종에게 표문을 올려 고려군의 개선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사이 고려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바로 신라계를 등에 업은 이자겸 일파의 득세였다.
- 사실 이자겸은 북벌에 반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전략적으로 신라계와 제휴한 것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자겸 자신이 북벌을 반대하는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 군사전략상으로 볼 때 고려군이 만주 깊숙이 들어가 고려땅을 넓힌 것은 제국의 경사임에 틀림없었으나 그만큼 치룬 댓가도 엄청났다. 우선 처음에 출발했던 20만 대군 중 9성을 쌓았을 당시에 남아있던 고려군은 불과 10만에 불과했다. 약 반년동안 무려 절반이나 북벌에 희생된 것이었다. 게다가 그 희생자들의 상당수는 승려들로 구성된 항마군이었다. 일찌기 숙종때 거의 반강제적으로 동원된 승병들이라 이들 항마군의 희생이 컸음은 곧 고려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던 사원세력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신라계와 더불어 자신의 또다른 한 축을 담당했던 사원세력의 이러한 분위기는 이자겸으로 하여금 다분히 반북벌의 여론을 일으킬 충분한 명분을 주었다.
- 윤관이 북벌에 종군하는 동안 고려의 황제 예종의 입장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새로이 부상하는 한안인을 영수로 하는 관료세력들이 예종으로 하여금 형제상속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북벌을 지지한 반면 이자겸을 영수로 한 외척세력은 그 반대였다. 예종은 물론 북벌을 지지했지만 이전 아버지 숙종이 자신을 황제로 세우기 위해 형제들을 척살한 것이 불과 얼마전의 일이었다. 그 또한 훗날 인종이 되는 아들을 다음 황제로 앉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자겸의 힘이 필요했다. 이자겸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북벌을 재고해야만 했다.
- 거란의 압박도 북벌포기의 또다른 변수였다. 거란은 윤관의 고려군이 불과 반년만에 송화강 이남의 만주벌판을 차지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자 장차 2배로 커진 고려제국과 자웅을 겨뤄야 할 부담감을 얻게 되었다. 거란의 대응책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 여진족에게 어느정도 자치를 허락하지 않으면 백년전의 승부를 다시 짓자고 협박을 해왔다. 이미 고려의 정예군이 윤관 휘하에 있는 고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이러한 여러가지 변수로 인해 최고결정권자인 예종의 마음은 괴로웠다. 그는 아버지 숙종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을 단행했고 또 그 꿈을 이루어 이제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를 거의 다 회복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실은 자꾸만 그에게 북벌을 포기하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관의 귀환상소를 받은 예종은 고심끝에 일단 윤관의 고려군은 정복지에 당분간 계속 주둔해 사태의 추이를 살피라는 결정을 내렸다.
- 황제의 뜻밖의 명령을 받은 윤관 이하 고려군은 어리둥절했다. 이것이 아닌데...그들은 당연히 고려로 개선하여 영웅대접을 받는 줄 알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대요, 더 많은 인내심과 기다림을 조국 고려는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목적을 달성한 이상, 이런 황제의 명령은 만주의 고려군의 엄청난 반발을 샀다.
- 그렇다고 계속 주둔해 여진족과의 융합을 도모하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북벌군의 내노라하는 장수들은 분노를 터뜨리며 그동안 고려조정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이제 고려군의 사기는 급속히 떨어져 점차 오합지졸이 되어갔고 군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 새로운 목표가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사태는 윤관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장수들의 누적된 불만은 이윽고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병모가지 전투에서 여진족의 화살에 한쪽 눈을 잃고 그 휴유증을 아직도 치료하고 있던 애꾸 오연총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맡은 영주성에서 허구헌날 휘하의 여진족들을 마치 짐승노예처럼 부리고 학대했다. 더 이상 참지못한 여진족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오연총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윤관이 있던 웅주성으로 쫓겨왔다.
- 영주성을 장악한 여진족들은 고려군들을 남김없이 살해해 무려 2만의 고려군이 죽었다. 이 엄청난 참화로 오연총은 윤관의 발 아래 엎드려 죽음을 청하였다. 그러나 윤관은 차마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해 온 동지를 죽일 수는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병모가지 전투는 윤관 자신의 불찰이 컸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오연총이 한눈을 잃은 것도 자신의 책임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윤관은 일단 오연총을 하옥하고 고려조정에 사태의 전말을 보고했다.
- 영주를 점령한 여진족들은 이제 이판사판 오연총의 일을 널리 소문을 퍼뜨렸고 순식간에 여진족들의 태도도 돌변했다. 밤에 고려군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살해당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이에 고려군들도 분풀이식으로 다짜고짜 여진족들을 보이는대로 죽이는 일들이 벌어졌다. 양측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길이 없었다. 윤관은 이윽고 8성에서 여진족들을 모두 추방하고 고려군만의 전투요새로 개조하기에 이르렀다.
- 만주의 정황이 험악하게 변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북벌에서 빼앗은 땅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고 평화를 택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전면에는 신라계와 사원세력의 지지를 업은 이자겸 일파가 나섰다. 이자겸은 특히 달변이자 두뇌회전이 빠른 김인존이라는 인물을 앞세워 이같은 여론을 형성해나갔다. 김인존의 언변은 급속히 고려조정을 장악해 나가 북벌을 유지하려는 예종의 입지를 급속도로 위축시켜 나갔다.
- 아골타의 잔당은 고려 내부에서 북벌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자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남은 여력을 총동원해 온갖 금은보화와 공물을 고려조정에 바치면서 만약 9성이 건설된 여진족의 옛 땅을 되돌려준다면 차후로 영원히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이같은 여진족의 외교적 총공세는 물론 이자겸 등을 비롯한 유력자들에게 별도의 뇌물을 바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사실 윤관도 오랫동안의 여진정벌로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다. 그도 그럴진데 그 휘하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은 밤낮으로 여진족들의 파상적 공세에 시달리는 한편, 본국에서도 이제 거의 지원이 오지않는 고립무원의 형세였던 것이다. 자살하는 고려군도 빈번했고 이제 윤관의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지도 못할 정도로 군율은 땅에 떨어졌다. 고향에 돌아가기 전에 모두 죽을 것이라는 공포심이 고려군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 어디서 잘못된 것인가? 윤관은 순간 분노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겨우 이것이었다는 말인가? 그 옛날 숙종과 함께 결의했던 북벌의 대망의 말로가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해도 고려는 스스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윤관은 그동안의 수많은 피의 댓가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 차라리 남은 군사로 고려로 쳐들어가 저 쓸개빠진 신라계와 이자겸의 목을 베어 버릴까? 아직도 윤관 휘하에는 수만의 군사가 남아 있었다. 그들에게 고향으로 간다며 회군하면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황도의 졸개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실제로 장수들 일부가 윤관에게 이같은 주청을 올렸던 바 있다. 그러나 윤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고려의 신하였다. 게다가 고려로 다시 들어가버리면 그동안 이루었던 북벌의 꿈은 그야말로 완전히 끝나는 위험이 있었다.
- 그렇다면 차라리 아골타와 함께 고려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제국을 세울까? 이는 특히 북벌군에 종군했던 발해계 장수들이 강력하게 윤관에게 주청했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은 죽었으면 죽었지 다시는 한심한 고려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윤관의 눈 앞에서 손가락을 자르며 맹세했다. 앞으로는 다시는 이같은 기회가 오지 않을것이라는 그들 나름대로의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윤관은 따를 수가 없었다. 그는 역시 고려의 신하였던 것이다.
- 이렇게 윤관이 점차 죽어가는 고려군의 기상을 목격하며 고민하는 동안, 북방에서의 무의미한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이윽고 서기 1109년 7월, 고려 황제 예종은 눈물을 머금고 북벌의 영토인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이는 예종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결론이었고 즉시 윤관에게도 전해졌다.
- 9성 반환과 고려군의 총퇴군의 소식이 알려지자 북벌군은 희비가 교차했다. 군사들은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기쁨에 젖으면서도 이제까지의 희생이 무의미했음을 허탈해했다. 과연 우리는 무엇때문에 싸웠는가? 여진족들은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고려군이 주둔하던 9성으로 몰려와 빨리 떠나라고 무력적 시위를 밤낮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 과연 고려가 전폭적으로 북벌의 마무리를 지원했다면 천운은 어떻게 되었을까? 윤관은 9성에서 고려군의 총철군을 명하기 전날 밤, 조용히 아직까지도 포로로 있었던 아골타를 불러 대작을 청했다. 아골타가 나타나자 윤관은 무표정하게 술을 권했다.
"여진족의 지도자인 그대의 원래의 지위를 회복해주고 내일 방면하라는 폐하의 조칙이요. 축하하오."
"고맙소."
"이제 그대를 놓아주니 고려는 앞으로 한시도 발을 뻗고 잘 수 없을 것이오."
윤관이 뼈 있는 농담을 던지자 아골타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미 우리 여진족은 그대의 나라 고려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약조하고 날 풀어주는 것이 아니오?"
"허울뿐인 것을...허허허..." 윤관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아골타는 그런 윤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대원수, 정말로 고려로 돌아가 그 소인배들에게 수모를 당할 참이오?"
윤관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나는 고려의 신하요."
"알고 있소. 그러나 그대와 같이 천하를 경륜할 수 있는 영웅이 이렇게 그 꿈을 포기한다는 것이 나로서도 가슴 아프오. 비록 현실적으로 그대의 불행이 나의 행운이지만 나 아골타는 그리 옹졸한 인간이 아니오. 나 또한 그대에게 적지않은 원한이 있는 바이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소. 어떻소? 대원수, 나와 함께 여기남아 고구려의 못다한 꿈을 같이 이루는 것이?"
아골타의 그러한 제안에 윤관은 지그시 눈을 감고 침묵을 지켰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 했던가...? 그동안의 온갖 북벌의 영광스러운 순간들이 대원수 윤관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 순간 그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장검을 뽑아들어 아골타의 목줄기에 갖다댔다.
"아골타, 나는 그대를 당장 죽일수도 있소!" 그러나 아골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응수했다.
"알고 있소. 허나 그대는 날 죽일수가 없소. 왜냐하면 그대는 영웅이기 때문이오!"
그 말을 듣고 윤관은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 이 또한 천운인 것을...인간의 힘으로 어이하랴...!"
- 다음 날, 대원수 윤관은 9성의 고려군에게 총퇴각을 명하기 전에 예우를 갖추어 아골타를 마중나온 여진족들에게 인계했다. 헤어지려는 순간, 아골타는 윤관에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지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앞으로 우리 여진족들은 그대 고려에게 기왓장 하나도 던지지 않으리다. 특히 윤관 그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잘 가시오, 고려의 영웅이여...북벌영웅이여!"
- 그 때 하늘에서 구름이 모여들더니 이윽고 천둥과 벼락이 치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윤관은 수많은 여진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저 멀리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아골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뇌까렸다.
"호랑이를 들판에 풀어주었으니...이제 고려가 그 호랑이에 떨 차례로구나...!"
사라지는 아골타의 모습은 곧 윤관이 평생동안 지녔던 야망의 종지부와 일치했다. 이렇게 두 영웅은 서로 다른 운명의 갈림길을 앞으로 가게 되는 것이었다.
- 서기 1109년 7월의 어느날, 윤관의 북벌군은 드디어 9성을 포기하고 우울한 철군의 장도에 올랐다. 서늘한 북방의 여름은 장마비와 천둥번개까지 퍼부으며 고려군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였다.
- 웅주성에서 출발한 윤관의 본군은 점차 고려국경쪽으로 남하하며 다른 성들의 고려군과 합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적대적인 여진족들이 간헐적인 게릴라식 습격을 가해 고려군을 더욱 당황하게 했다.
- 웅주성을 떠나올 때에 윤관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던 9성의 혼적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웅주성의 누대에서 몇 개의 빛이 번쩍거렸다. 고려로 귀환하기 거부한 일부 발해계 장수들이 윤관에게 경의를 표하며 장검으로 자살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있던 윤관은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남으로의 진군을 독촉했다.
- 자살을 택하지 않은 일부 발해계 장수들은 아예 아골타의 여진족에 투항해 장차 금나라의 주축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후 이들은 금나라가 중국을 도모하는데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금나라는 이후 황후쪽이 모두 발해계로 자리잡게 된다. 사실상 대금제국을 이끌게 되는 이들은 발해계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사실 여진족과 발해인들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그들은 사실상 같은 종족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려의 북벌이 좌절되자 고려에 몸담았던 발해계 장수들이 아골타에게 귀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감격한 아골타는 '발해인은 여진과 같은 형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전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발전을 하게 된다.
- 오랜 행군끝에 윤관의 북벌군은 황도 개경으로 개선했으나 성대한 환영은 없었다. 오히려 군대를 해산한 다음 조정의 대간과 간관들은 윤관 등의 장수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이는 모두 신라계와 이자겸의 농간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윤관 등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혔으나 이미 항변할 힘은 그에게는 더 이상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예종은 고심 끝에 영주성에서의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오연총 등을 파직시키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예종은 곧바로 북벌의 장수들을 비밀리에 불러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고 북벌철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윤관 이하 장수들은 그저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 고려조정이 비록 이자겸과 신라계에 의해 장악된 형편이었으나 당시 이자겸의 맞수였던 한안인등의 세력들로 인해 이자겸도 북벌장수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윤관이 철수한 이후 아골타는 윤관이 북벌 때 썼던 모든 전략과 전술을 참고하여 더욱 강대한 여진족을 형성해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여진족의 자체적 단결도 이전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즉, 여진족들은 윤관의 북벌을 겪으면서 더욱 강대한 세력으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들은 예종은 북벌철회를 뼈저리게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다.
- 비록 아골타가 강화조약의 약속대로 고려에 공물을 바치고 있었으나 예종은 이것이 일시적인 술책이라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국방과 국제정세에 어두운 이자겸 일파에게 이런 것들을 의지할 수는 없었다. 예종은 그래서 윤관을 자주 불러 여진족에 대한 자문을 구했으며 윤관은 황제의 부름에 응해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 윤관이 철수한 지 불과 1년이 지난 서기 1110년. 드디어 아골타는 고려에 대한 공납을 끊었다. 이제 고려가 다시 북벌을 해볼테면 해보라는 비아냥이었다. 이미 이자겸이 득세하던 고려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골타는 만약 고려가 또다시 여진족을 도모한다면 그때는 50만 대군으로 고려를 초토화시켜 버리겠다는 호언장담을 했다. 이같은 여진족 사신의 호언장담에 이자겸 일파는 찍소리도 못했다.
- 그러나 이같은 여진족의 오만은 황제 예종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예종은 한안인파의 도움을 얻어 이자겸파의 외교적 무능을 탓하며 이를 기화로 윤관을 문하시중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여진족을 견제하는 정치적인 제스쳐였을 뿐, 실제적으로 윤관이 다시 북벌을 도모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윤관을 중요직에 다시 앉힘으로써 과거 여진족을 떨게했던 그의 건재를 여진족에게 각인시켜 함부로 망동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 뿐이었다.
- 윤관은 문하시중에 오르자 즉각 직권으로 아골타에게 서신을 보내 부디 옛 약속을 지킬것을 재삼 요청했다. 그러자 아골타도 회신하면서 한번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윤관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아골타에게 보이기 싫어 이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아골타는 다시 서한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방침은 국시로 정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고려는 여진족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윤관은 이같은 아골타의 서신 내용을 조정에 알리고 신라계와 황제는 안도했다. 윤관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 여진족과의 외교마찰이 일단락되자 윤관은 황제에게 문하시중을 물러날 것을 청했다. 조정 돌아가는 꼴이 마땅치 않았던 것도 있었으나 그보다도 오랫동안 쌓인 회한이 병이 되어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하기에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진 윤관의 이러한 요청을 조정에서 거절할리가 없었다.
- 조정에서 물러난 윤관은 중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두문불출하는 그의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수많은 지사들이 그를 문병하기 위해 찾아왔으나 윤관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그러나 내심 아직도 고려에 희망이 있음을 느끼고는 흐뭇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어느덧 그의 병환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고 있었다.
- 여진족이 고려조정에 열심히 아부하고 공물과 뇌물을 보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로잡힌 아골타를 풀어준데에는 윤관 자신의 결단이 있었다. 마음만 먹었더라면 그때 아골타의 목을 베고 여진족을 다시 혼돈의 세계로 쳐넣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왜 그를 놓아준 것일까? 윤관은 고려가 북벌을 포기한 그 순간부터 이제 고구려를 제대로 부활시킬 역사적 사명은 아골타에게 있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배달겨레의 영광과 부활을 위해 대승적 측면에서 아골타를 놓아준 것이었다. 이는 아골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어느새 윤관의 입가에는 가는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인생역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기 1111년의 일이었다.
- 윤관의 죽음소식이 알려지자 예종은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영웅의 죽음을 슬펴했고, 수많은 백성들 또한 이를 통곡했다. 윤관의 죽음을 들은 아골타는 대규모의 조문사절을 보내 이를 애도했고, 고려 전국의 모든 무장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려의 진정한 영웅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 윤관이 죽자 아골타의 행보는 더욱 거침이 없었다. 그는 서기 1115년 1월 28일 옛 고구려의 부여성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연호를 '수국'(收國), 부여성을 황룡부라 고치고 새로운 제국을 세우니 이것이 금나라였다. 바야흐로 만주를 완전히 통일한 새로운 제국이 발해의 멸망 이후 약 200년만에 재탄생한 것이었다.
- 새로운 제국을 세운 아골타는 그동안의 거란에의 복속관계를 청산하며 옛 발해의 원한을 갚는다는 기치 아래 거란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선포했다. 동시에 고려에는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이제 큰형인 금나라가 아우 고려를 챙겨야겠다는 노림수였다. 고려는 아골타의 이러한 제안에 크게 분개했으나 이미 힘이 없던 고려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 아골타의 제국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일취월장하여 제국을 세운 지 10년 뒤인 서기 1125년, 거란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가 이끄는 120만 대군을 불과 2만의 군사로 격파하는 세계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두며 거란제국을 멸망시키는 눈부신 전과를 거둔다. 이어 1127년에는 중국의 송나라의 도읍인 변경으로 쳐들어가 송나라의 두 황제를 포로로 하여 지금의 함경도 일대인 오국성으로 끌고 와 연금시키고 송나라마저 무너뜨리는 괴력을 발휘한다. 이 모든 것이 윤관이 만주에서 물러난 지 20여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써 금나라는 중국의 북부를 차지하는 대제국을 이루었고 고려 또한 이같은 대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관이 일찌기 예언했던 '호랑이'가 적중했던 것이다.
- 돌이켜보면 여진족이 이렇듯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은 직간접적으로 윤관의 영향이 컸다 하겠다. 윤관의 전략과 전술이 당시 여진족을 크게 자극했으며 이어 아골타는 고려의 이러한 군사적 기술을 흡수하여 고려에서 투항한 발해인들을 앞세워 거란과 중국을 차례로 무너뜨리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진족이 대제국을 이룬 것도 어찌보면 윤관의 덕택이라고 볼수도 있겠다. 즉, 여진족의 거란과 중국정벌은 윤관이 고구려와 발해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북벌'의 연장선상에 서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윤관은 진정한 '북벌영웅'이었던 것이다.
출처 : 불멸의 이순신 공식 홈페이지
윤관장군과 충신론
1107년(고려 예종 2)에 元帥 尹瓘과 부원수 오연총(吳延寵)이 군사 17만을 이끌고 여진 정벌에 나서 발해 멸망 이후 지금의 함경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동북 여진을 몰아내고 9城을 쌓아서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공험진의 先春嶺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윤관이 북계에 여러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들을 옮겨서 이를 채웠는데, 공험진·통태진·평융진에는 각각 5,000호를 두었다고 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 의하면 공험진은 영가사오리참(英哥沙吾里站)의 북쪽, 蘇下江가에 있다고 했으며, 지리지·지도 등에는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 있는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공험진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으며, 두만강의 약간 북쪽 혹은 길주 이남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나는 이런 後者의 견해에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별무반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군17만(당시 고려인구를 600만으로 볼 때 17만은 대단한 수치임)은 두만강 북쪽 700리, 또는 소하강가까지 충분히 진출할 수 있는 병력인 것이고, 뛰어난 전술을 구사하는 윤관 도원수와 같은 줄충한 인물이 존재했는데 발해의 옛땅 북만주 회복이 뭐가 어려웠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공험진 등은 蘇下江가이며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이 맞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서경천도론을 1000년에 1번 있을까하는 큰일이라고 했지만, 묘청은 북방영토 수복에 대한 구상만 하고 실천을 옮기지 못했다. 그렇지만 윤관은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묘청의 서경 천도론보다 더 큰 사건이라고 간주하고 싶다. 또 우리 조선민족은 중세이후 타민족으로 부터 침략만 받았는데, 진취적 기상의 윤관장군에 의한 만주수복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만고의 충신인 윤관은 동만주 및 북만주 회복후, 왕과 조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동, 북만주를 다시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여러가지 국내외 정세의 복잡함은 있었겠지만, 어렵게 군대를 양성하여 회복한 땅을 포기한 것은 과연 충성스런 일일까? 이런 윤관의 영웅적 행위의 포기에 대하여 고찰해본다. 충신! 충성은 항상 바른 것인지에 대해서...
충신, 충성이란 어떻게 보면 당대의 임금과 조정에 대한 얘기일 것이고, 그 충성은 민족과 역사앞에서 충성과 항상 같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윤관의 북방영토 회복 결과가 고려에 부속되던, 윤씨를 왕조로 하는 2국체제로 가던, 후세의 사람 들에게 조선민족으로 이루어 졌다면 우리나라, 우리 역사라는 것에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만약, 영토회복 및 영토유지의 실력을 가진 윤관에게 묘청 정도의 역성혁명의 꿈이라도 있었다면 정벌한 영토의 유지를 넘어 나머지 고토의 수복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서 윤관은 그 당시 임금을 비롯한 조정에는 충신이겠지만, 조국과 역사 앞에 충성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또 윤관의 영토 포기는 金 태조 아구다[阿骨打]의 등장을 도우게 되어 우리의 조국 고려를 영원히 소국으로 전락하게 만들었으며, 만주를 우리의 민족사에서 멀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점들이 후세를 사는 우리에게는 상당히 아쉽게 느껴진다. 또 있다.
왕조에 충성과 조국과 민족에 충성 부분에서는 이순신 역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자결에 가까운 전사를 하지 말고, 능력과 실력, 자질을 두루 갖춘 상태에서 임란을 마무리 하면서 차라리 조선왕에 대한 의리나 충성을 넘어, 명의 요청에 따라 명과 청의 완충지대인 요동에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력을 확장, 광개토대제와 발해제국 이후 새로운 요동조선을 세워서 조선 민족에게 큰 영광을 선사할 수 있지는 않았겠는가 말이다. 아아 윤관의 꿈! 이순신의 꿈!
글쓴이: 德想 조 경 래(사법공안 4학기)
출처:http://cafe.daum.net/ckr1738/DjQP/138?q=%C0%B1%B0%FC+%C0%CC%BC%F8%BD%C5
파주의 사랑
글/ 강기옥
파주에는 성리학이 꿋꿋이 살아 있다. 이 땅에 성리학의 가치를 펼치기 위한 위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파주의 3얼이라 칭하는 황희, 이이, 윤관을 비롯하여 성혼, 백인걸, 최경창 등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요 정치가들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살아 남은 파산서원과 기호학파로서 서인의 학문적 구심체 역할을 한 자운서원이 아직도 이 곳의 성리학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파주에는 그보다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 시대를 초월한 감동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순수한 사랑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파주의 훌륭한 인물들이 펼치던 정치적 이상은 차치(且置)하려 한다. 그들의 사상이나 정치적 업적은 이미 많은 자료를 통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그런 내용을 소개한다는 것은 식상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국가의 기강으로 자리잡은 조선시대 대학자들은 어떤 사랑은 했을까. 그들의 영정을 보면 꼿꼿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있어 범접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엄한 격식을 중시하며 살았으리라는 추측에 인간적인 사랑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흐물거리는 진흙덩이는 한 줌의 흙을 퍼내도 그 모습으로 되돌아가지만 견고해 보이는 돌담은 중간의 돌 하나만 빼내면 쉽게 헐어져 버린다. 깐깐한 것 같은 양반일수록 의외로 돌담 같은 속성을 보인다. 그들에게도 인간적인 감성과 인정이 있기 때문이다. 형식을 중시하는 틀 속에서 살아도 체면이라는 허울만 걷어내면 오늘을 사는 우리나 다름없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파주에는 그 형식을 걷어낸 아름다운 사랑이 잠들어 있다.
내가 답사팀을 이끌고 파주를 안내할 때면 반드시 버스 속에서 그들이 남긴 연시(戀詩)를 감상하고 인간적인 면을 살펴 본 후에 현장을 답사한다. 그럴 때마다 훌륭한 인물에게서 새로운 면을 알게 된 만족감에서 답사의 눈초리가 더 진지해지는 것을 목도하곤 한다.
1. 장군의 사랑
제 3공화국 시절 국민의 가슴에 가장 깊게 각인된 이름은 이순신 장군이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무인들이 국민에게 이순신 장군과 같은 충(忠)을 요구했음인지, 아니면 자기들이 장군과 같은 충을 실천했음을 표방한 것인지 그 깊은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 시절에 이순신 장군은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들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인물로 알려졌다. 그 영향인지 장군 하면 이 순신을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전쟁의 상처가 깊은 파주에서는 윤관 장군을 떠올린다. 두 장군은 거의 490년의 시대차이를 보이며 각기 고려와 조선 왕조를 섬겼기 때문에 일직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고 그 반복성 때문에 책임과 교훈이 있는 것이기에 같은 내용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는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윤관은 이 곳 파주 태생이다. 본관이 파평으로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의 5대손이다. 고려 숙종과 예종대에 걸쳐 여진족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한 공로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의 훈호를 받았다. 그러나 전장에서 돌아오는 윤관은 예종이 친히 지휘권으로 주었던 부월(斧鉞)을 빼앗겨 장수의 지위를 박탈당함은 물론 궁궐에서 임금조차 배알하지 못하고 고향 파평으로 낙향하는 신세가 되었다. 선대왕 숙종은 林幹과 尹瓘이 여진족에게 연이어 패하자 천지신명께 고하여 도움을 청하는 서소(誓疏)를 지어 여진족을 정벌할 것을 맹세한 적이 있는데 예종은 윤관 장군의 출정식에서 이 서소(誓疏)까지 보이며 꼭 승리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기대한 대로 장군은 승리하여 9성을 쌓고 변방을 잘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여진족이 화의를 청해오는 바람에 조정에서 9성을 다시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윤관의 승승장구를 시기한 조정의 신하들은 윤관이 명분 없는 싸움에 국력을 낭비했다 하여 죄인취급을 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예종 5년(1110년) 5월에는 윤관을 처벌하자는 상소를 올렸는데 왕이 들어주지 않자 재상과 모든 간관(諫官)들이 집으로 돌아가 수십일 동안 집무를 하지 않는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래도 윤관의 업적을 잘 아는 예종은 그 해 12월 수상에 해당하는 문하시중의 벼슬을 내려 복직할 것을 권유했으나 윤관은 끝내 이를 거부하고 이듬해 5월 8일 (1111년)에 생을 마감했다.
"칼의 노래"가 있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시대부터 최후까지 2년 동안의 삶을 소재로 쓴 김훈의 소설이다. 여기에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있다. 그 소설에 돋보이는 것은 장군의 최후다. 이미 항간에 "이순신 장군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회자되었지만 소설의 한 장면에서 읽는 것은 훨씬 생동감이 있다.
"나의 전쟁은 나의 죽음으로써 나의 생애에서 끝날 것이었다."
두 장군의 생애는 그렇게 아름다운 최후 때문에 빛이 난다. 부산으로 출정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12차례나 어겼던 이순신. 이기기 위한 전쟁을 위해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것은 물론 외부의 압력, 정치와의 싸움에서 수없이 갈등했던 이순신이 더 살아서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면 그의 업적에는 많은 흠집이 남았을 것이다.
윤관 역시 왕이 부른다 하여 다시 정치판에 뛰어 들었다면 그의 업적도 역시 권력의 힘에 가려 인간적인 약점만 부각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는지 두 장군은 자신의 운명을 권력에 휘둘리는 정치판에 맡기지 않았다. 깨끗한 최후를 맞이할 줄 아는 혜안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충(忠)의 화신처럼 숭앙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상 적을 치고 승리한 적이 몇 번이나 있는가? 임진왜란을 당하고도 이를 교훈 삼아 다음의 국란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당색에 따라 싸우다가 정유재란을 맞는 한심한 민족이지 않았는가? 두 장군의 커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말로 우리의 무능을 미화한다. 그러나 이는 비굴한 말의 극치다. 내 마누라가, 내 여동생이, 내 조카가, 내 이웃이 겁탈 당하고 내 아버지가, 어머니가 정을 나누던 이웃이 칼에 맞아 죽었는데도 복수의 침략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말 뒤에 몸을 숨겨버린다. 힘없는 평화는 약자의 변명일 뿐이다. 더구나 위난을 대비할 수 있는데도 권력 싸움에 몰두하는 나라는 패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윤관 장군의 여진 정벌을 우리 민족이 이룬 장거(壯擧)의 하나라고 본다.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철저히 대비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은 이순신 못지 않은 역사의 큰 영웅이라 할 수 있다.
* 낙화암
그런 장군에게도 애틋한 사랑이 있다. 천현면 웅담리(熊潭里)에 낙화암에 그 사랑의 흔적이 남아있다. 꽃이 떨어졌으니 부여 낙화암과 같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윤관 장군이 함경도 행영병마절도사로 여진족을 정벌하러 전장으로 떠날 때 그의 애첩과 약속을 했다.
"싸움에서 이기면 돌아 올 때 붉은 기를 들고, 지면 흰 기를 들겠다."
여진족을 물리치고 기분 좋게 돌아오던 장군은 갑자기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붉은 기를 들어야 할 손에 흰 기를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전장에 보내놓고 애태우며 소식을 기다리던 여인은 멀리서 달려오는 군사들 위로 흰 기가 보이자 장군이 죽은 줄 알고 깊은 연못 위의 바위에 올라가 몸을 던졌다. 장군은 자신의 장난이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을 후회하여 낙화암이라 하고 비석을 세워 그의 사랑을 기렸다.
그 여인의 이름이 웅단(熊丹)인데 웅단이 빠져 죽은 연못을 웅담(熊潭)이라 하고 그 마을을 웅담리라 한다. 예전에는 사람이 빠지면 죽을 만큼 깊은 물의 소용돌이가 있었는데 지금은 제방을 돌로 쌓고 물길을 바르게 내면서 낮은 개울로 바뀌어 버렸다. 다만 윤관 장군이 尙書로 있을 때 자주 들러 시문을 읽고 휴식을 취하던 별저가 있었는데 후손들이 坡平尹公尙書臺라고 새긴 비석을 새겨 그 자취를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담장 안에 파평윤씨 조상 16위를 돌로 새겨 제사를 드리는데 그 위패의 서쪽에 웅단의 위패까지 모셔 장군과의 애틋한 사랑을 위로하고 있다. 지금도 상서대의 맞은 편 하천 절벽에는 낙화암 비가 장군을 기다리는 웅단의 모습으로 서 있다.
출처:http://cafe.daum.net/millennium7/5P2o/33?q=%C0%B1%B0%FC+%C0%CC%BC%F8%BD%C5
[출처]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 대원수(大元帥)|작성자 흑송 윤참봉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