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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얼마전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쇼킹한 증언을 하여 체포당한 조웅 목사의 정보라인이었던
문명자 기자의 취재 파일(단행본) 전문(全文)인데 분량이 많은 관계로 편의상 1, 2편으로
나눠 게시합니다.
1편(1~3부 수록), 2편(4~7부 수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문명자 지음
- 백악관 출입기자 문명자의 40년 취재파일
제2부 - 김대중 납치, 박정희와의 결별
존슨 부인, "전 세계 퍼스트 레이디 중 육 여사가 최고"
68년 말 존슨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퇴임을 며칠 앞두고 미시즈 존슨의 비서실장
엘리자베스 카펜터가 나를 불렀더.
-"미시즈 존슨이 이것을 쥬리에게 주라고 했어."
그것은 자개로 대통령 휘장을 꾸민 나전칠기 상자에 들어 있는 사진첩이었다. 67년 존슨 방한 때
육영수 여사는 미시즈 존슨이 청와대에서 찍은 사진들을 '사진첩'으로 꾸며 선물했던 모양이었다.
미시즈 존슨은 백악관을 떠나면서 그것을 나에게 선물하고 고향인 텍사스로 돌아갔다.
미시즈 존슨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육여사를 '가장 완벽한 퍼스트레이디'라고 극찬했다.
"나는 세계 각국을 방문해 각국 퍼스트 레이디들의 접대를 받아 봤지만 한국의 미시즈 박이 최고다. 그녀는 내가 폐경이 되자 않았다는 것까지 미리 알아보고 숙소인 워커힐 호텔 에메럴드 룸 내 방
서랍에 경도대까지 준비해 놓았다."
나중에 청와대에서 육여사를 만났을 때 나는 물었다.
"미시즈 존슨이 왔을 때 경도대까지 준비해 놓으셨다던데 그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어요?
미시즈 존슨은 나이도 많은데."
육여사는 말했다.
-"나이 50이 넘어도 나오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미시즈 존슨이 그렇게 썼어요."
69년 박정희는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3선 개헌과 장기 집권은
야당만 반대한 게 아니었다. 공화당 안에서도 박정희의 후계를 노리던 김종필계는 3선 개헌에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박정희는 김종필 후계구도 준비를 위해 김종필 계가 결성한 '국민복지회'를
빌미로 삼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김종필계 엄단을 지시했다. 이로써 김종필계는 중정으로
연행돼 혹독한 대접을 받은 끝에 모두 공화당에서 제명 됐고, 김종필 자신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공화당 내의 반대파는 평정됐지만 6월 부터는 학생들의 3선 개헌반대 데모가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내적으로는 김형욱이 돌격대장이 되어 학생 데모를 물리력으로 진압하고 야당 의원을 매수하는등 3선 개헌안 날치기 통과를 준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이후락 비서실장이 주동이 되어
박정희. 닉슨 간의 한. 미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국민들의 3선 개헌 반대 여론을 '미국의 지지'를 빌어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69년 6월 김동조 주미대사는 한. 미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백방으로 외교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측도 박정희의 의도를 이미 환히 알고 있었다. 한국 내에서 학생들이 치열하게 전개하는 3선개헌 반대 데모가 전 국민적 공감을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급해진 박정희는 3선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국회와 국민을 협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정상회담은 닉슨 행정부가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전폭 지지한다는 인상을
줄것이 틀림없었다. 닉슨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우방국이며 특히 월남 참전국인 한국 대통령이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표면적인 의제로
내세워 만나자는데 닉슨으로서는 그를 만나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 닉슨은 자신의 선거 공약에 따라 아시아에서 미군을 철수 하겠다는 의지를 계속 밝히고
있었다. 그의 유명한 '닉슨 독트린'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2만 명의 미군이 철수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한.미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으면 북한이 오판할 우려도 있었다. 닉슨으로서는 박정희를 설득해 자신의 공약대로 미군을
무리없이 철수해야 한다는 과제도 떠안고 있었다.
결국, 워싱턴 당국은 한.미 정상 회담을 열되 서울측이 요청한 워싱턴이 아니라 샌프란 시스코에서 회담을 갖기로 결정했다. 서울측은 백악관에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데만
고무되어 준비에 바빴다. 회담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의 '샌클라멘테 백악관'이라 불리는 닉슨의 저택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이 열리고 보니 회담 장소는 샌클라멘테 백악관도 아닌
세인트 프랜시스라는 호텔이었다. 정상회담이 호텔에서 열린 것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미국측은 한.미 정상회담 장소를 '백악관' 이란 지명이 전혀 붙지 않은 일반 호텔로 격하시킴으로써 미국이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전폭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한.미 양국 국민에게 애써 남겨 놓으려 했던 것이다.
박정희측은 일단 한.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만 하면 언론을 이용해 미국이 3선개헌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식으로 전 국민에게 선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호텔 정상회담'을 이의없이 수용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69년 8월 21일~23일 박정희.닉슨 정상회담이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열렸다. 필자를 비롯한 워싱턴 주재 각사 특파원 5명은 회담 시작 전날 현지에 도착, 서울서 수행한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 합류해 취재하게 되었다.
박정희.닉슨 정상회담에서도 "수십만 시민들이 손에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박 대통령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거짓 보도는 KBS 기자에 의해 재연되었다. 회담 기간중 샌프란 시스코 하늘에 나부낀 태극기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 건물 정문 입구에 하나, 거기서 좀 떨어진 한 호텔 국기 게양대에 하나 해서 총 두개였을 뿐이었다.
이 호텔에는 로스앤젤레스 한국 총영사관 측에서 전세버스로 동원한 30여 명의 교포들이 묵고
있었다.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 앞 공원은 수백 명의 월남전 반대 데모 군중들의 고함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들은 '미국 고용병의 왕초 박정희는 물러가라' 는 플래카드를 들고 북을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장면 정권 때 유엔 대사를 지낸 임창영 박사와 그의 부인,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한복을 입고 나와서 북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원 코리아 예스! 투 코리아 노!"
2백여 명의 재미 교포들은 박정희에게 "삼선 개헌을 반대한다"는 전보를 보냈고, 그 사실은 [뉴욕
타임스]에 보도 되었다. 나는 정상회담 기사에 곁들여 이 사실도 스케치해 보냈지만 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보니 데모 대목은 실종되고 없었다.
한국 기자들이 기사를 보내는 방법은 하와이 박정희.존슨 회담때와 똑같았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 거의 전원이 따라왔는데도 기사를 보낸는 것은 당번 기자 한사람 뿐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있었던 만찬회장에서도 백악관 공보실측은 한국 기자들로 인해 한바탕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당초 백악관측에서 발표한 만찬회 참석 풀(Pool) 기자 명단에는 5명의 미국 기자와 1명의 한국기자(필자)만이 들어 있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청와대 기자단과 다른 주미 특파원들이
한숙 한국 공보관장에게 자신들도 만찬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한숙 관장은
백악관측에 간청해서 어렵게 5명의 한국 기자들의 좌석을 마련했다. 한숙 공보관장은 만찬에 참석하게 된 한국 기자들이 턱시도를 빌리는 것까지 주선해 주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만찬회장에 가 보니 한국 기자단 중에서 그자리에 나타난 것은 [신아일보] 기자 한
사람 뿐이었다. 신아일보 기자에게 "왜 혼자 왔는가"라고 물었더니 "내가 만찬회 담당 풀 기자로
선정되어 혼자 나왔다" 면서 "다른 기자들은 시내로 쇼핑 나갔다"고 했다. 추가 좌석을 마련하느라 골머리를 썩였던 백악관 공보실 관계자들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상상에 맡긴다.
만찬회에서는 먼저 초청국측 대통령이 인사말과 토스트(축배의 말)를 한다. 그 후 초청된 나라 대통령이 답사를 겸한 인사말을 한다. 식사가 끝나면 다른 방으로 이동해 '애프터 디너 드링크' 혹은 커피잔을 들고 담소한다. 이야말로 기자들이 양측 대통령 부처 및 각료들과 어울려 담소할 수 있는 시간이므로 특별 취재 경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 날 밤 만찬회에서는 육여사가 기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육여사는 패트리셔 닉슨 여사를 비롯해서 만찬회에 참석한 미국측 손님들 그리고 백악관 출입 미국 기자들의 질문에 재치 있게
답변했다. 육여사가 자신의 의상에 대해 설명한 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곳 샌프란시스코가 있는 캘리포니아는 오렌지 산지로 유명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장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바탕에다 오렌지 무늬를 수놓은 옷을 지어 입고 왔습니다."
과연 육여사가 입은 한복은 연한 오렌지색 바탕에 오렌지 무늬를 수놓은 것이었다. 닉슨 여사는
"당신의 훌륭한 아이디어를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감탄했다. 다음 날 아침 필자는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는 것 같아 호텔 지하의 드럭스토어 (약과 화장품 등을 파는 상점)로 내려갔다. 그런데 여점원이 나를 보자마자 손을 저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팬티호스(여자용 스타킹)와 두바리 콜드 크림은 이제 없습니다.(노 모어 팬티호스,
노 모어 두바리 콜드 크림)"
"무슨 소리 하는거요? 팬티 호스는 뭐고, 콜드 크림은 또 뭐예요?"
-"당신은 한국서 온 손님 아닌가요? 어제 한국 분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서 우리 상점에 있는 팬티호스와 콜드 크림들을 모두 사 갔는데 그 후에도 다른 분들이 와서 계속 달라고 해서요. 손님도 그걸 구하러 온 줄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기자단이 와서 모두 쓸어 간 것이었다. 그들은 호텔 상점만이 아니라 그 주변 상점까지
싹 쓸어 버렸다고 했다. 나중에 팬암 항공 직원에게 들으니 이후락 비서실장이 팬암 항공에 몇만
달러를 주고 빌린 박 대통령 전세기가 중량 초과로 예정보다 3시간이 지나도록 뜨지 못하는 소동
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수행기자, 경호원 할 것 없이 텔레비젼.냉장고까지 사서 전세기에다 실었기 때문이었다.
이틀간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이 끝난 후, 박정희 일행은 미국 서부의 유명한 휴양지 요세미티(Yosemite) 국립 공원에서 2일간 휴식한다고 했다. 숙소는 요세미티 아와이 호텔이었다. 나와
동화통신 한창섭 특파원은 직업의식이 발동해서 자동차를 빌려 타고 지도 한 장에 의지해 꼬불
꼬불한 산길을 8시간 동안이나 번갈아 운전해서 요세미티란 곳으로 찾아갔다. 자동차 안에서
한창섭은 갑자기 말했다.
-"제가 이번에 보지 말아야 할 남의 비밀 수첩을 봤습니다."
남의 비밀 수첩이라는 바람에 궁금해진 나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수첩을 봤는데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우리 회사 기자가 책상 위에 놔 둔 수첩을 우연히 봤는데, 각처에서 받은 촌지 명단과 금액이 적혀 있지 뭡니까? 이번에 청와대 출입 기자들 엄청나게 받았더군요."
"어느 놈들이 그렇게 엄청나게 줬는데?"
-"김성곤 2천 불, 이후락 1천 불, 강상욱 대변인 5백 불, 공화당 모 국회의원 3백 불, 모 기업 사장 5백 불 이런 식으로 적혀 있는데 심지어 모 야당 의원 이름까지 있더란 말입니다. 모두 합쳐보니
8천 불에서 1만 불은 되겠던데요? 이번에 따라온 기자들이 모두 그럴테니 기사를 제대로 쓸 수가 있겠습니까?"
1만 불이라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상점을 싹쓸이한 돈이 여기서 나왔구나 싶었다. 한국 언론계가 이렇게 썩고 있었다. 약삭빠른 야당 국회의원들이 박정희와 자주 접촉할 수 있는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신경을 쓴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이구나
싶기도 했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의 촌지 문제로 한창섭 기자와 열을 내서 떠들면서 고속도로를 과속으로 달리다가 나는 그만 경찰에 걸리고 말았다. 옥신각신 끝에 결국 워싱턴에 돌아가 법정에 출두하기로 하고 그에게 아와이 호텔 위치를 자세히 물어 달려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훨씬 넘었다.
가보니 한국서 수행한 수십 명의 기자중 서울신문 이양 기자 단 한사람만이 풀 기자로 선정되어 아와이 호텔에 와 있었다. 사실 풀 기자 한 명으로 충분했던 서울측의 심정도 모르고(?) 우리 두 사람이 들이 닥친 것이었다. 우선 숙소부터 문제였다. 아와이 호텔은 방이 너무나 부족해서 김용식 주
유엔 대사나 백선엽 주캐나다 대사도 근방 야영장에 유숙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는 무턱대고
육여사의 비서인 나은실의 방 번호를 알아 가지고 문을 두들겼다.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반겨 주었다. 그 방은 나은실과 육여사의 미용사로 따라온 여성 두사람이 묵는 방이었는데, 침대 두 개를 붙
여서 셋이 함께 자기로 했다. 한창섭은 이양 기자 방에 얹혀 자기로 해서 숙소 문제는 해결 되었다.
가지고 간 타이프 라이터와 손가방을 놓고 방을 나섰다. 정도순 LA 총영사 부인이 호텔 주방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도록 교섭해서 현지의 한국 요리사들을 동원해 박정희가 좋아하는 비빔밥을 준비한다고 야단 법석이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노발대발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때는 푹푹 찌는 삼복인데 호텔에 에어컨이 없어서 박정희는 펄펄 뛰고 이후락은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비행기 타고 다른 호텔로 옮겨 가자" 고 했던 모양인데,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을 턱이
없었다. 전세기라 해도 스케줄에 따른 이동 시간에만 제공되는 것이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행기는 다른 비행에 투입 됐다가 전세 승객이 움직일 때 돌아온다. 그것을 알지 못했던 박정희로서는 타고 옮길 비행기가 없다니 더욱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궁금해서 호텔 매니저에게 물
었다.
"이런 일류 호텔에 왜 에어컨이 없습니까?"
-"우리 호텔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자연을 즐기러 오시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저희 호텔은 일체의 인공적인 시설은 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한여름이라 해도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합니다. 손님들은 낮에는 모두 등산이나 삼림욕을 즐기시고 저녁에 호텔에 돌아오시기 때문에 에어컨의 필요성을 거의 못느끼십니다."
그러고보니 호텔 뒤쪽은 산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었고, 손님들도 대부분 등산객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산에서 다치는 사람도 많은지 호텔 주위에는 접골원도 여러 곳 눈에 띄었다. 그런 중에도 박종규 경호실장은 김동조 주미대사와 포커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동조가 박종규에게 일부러 잃어주고 있는 눈치였다. 그 때 나은실이 와서 육여사에게 인사하러 가자고 했다. 육여사 방에 갔더니 박정희도 앉아 있었다. 나는 두사람에게 인사하고 "오다가 고속도로에서 경찰에 걸려 늦었다"고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박정희가 말했다.
-"순사도 문 기자에게 걸렸으니 혼났겠구먼."
나는 세이트 프랜시스 호텔 드럭 스토아에 팬티호스와 콜드 크림 동난 얘기를 하고 나서 따졌다.
"왜 출입기자들에게 돈을 줘서 나라 망신을 시키십니까?"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이 박정희가 말했다.
-"문 기자, 내일 모레 전세기 타고 같이 서울 갑시다. 문 기자는 한국 실정을 너무 모르는데 이번에 가서 좀 둘러 보시오."
뜻밖의 얘기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저는 공짜는 싫습니다."
-"그러면 비행기 반값만 받을까?"
나는 내심 '비행기 같이 타고 가면서 특종 한 번 해보자' 싶어 동행하기로 했다. 박정희가 3선 개헌에 대해 무엇이라고든 얘기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변인 좀 만나야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왔다.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의 방을 노크했다. 그는 잠옷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옆에 앉은 서울신문 이양 기자에게 기사를 불러주는 중이었다. 내가 들어가니 급히 옷을 걸쳐입고 기사를 계속 부르는데 내용이 완전히 소설이었다.
-"휴식차 요세미티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은 휴식할 새도 없이 오늘 오후 한.미 고위경제각료회담을 가졌다. 미측에서는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도 참석했다.."
어이가 없없다 나는 강 대변인에게 물었다.
"강 대변인, 지금 미국 경제 각료들이 회담하러 여기 와 있습니까?"
-"문 기자, 원래 이렇게 하는것 아뇨? 잘 아시면서.."
나는 당장 밖으로 나와 서울의 [경향신문] 편집국 정재호 정치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요세미티에서 이양 기자가 풀로 보내는 기사에서 내 이름은 몽당 빼 주세요. 강 대변인이 있
지도 않은 일을 이양에게 불러주고 있어요. 앞으로 여기서 날아가는 기사는 대부분 소설일 겁니다. 출발하는 날이 8월 25일 아침, 박정희는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아침 먹을 시간도 없는 것
같았다.
전세기가 뜨는 미 공군 기지 캐슬 에어베스로 가기 위해 각료들과 수행기자들이 모두 버스 한 대에 탔다. 나는 기자들과 함께 앉았는데 앞쪽에 앉아 있던 김동조 주미대사가 내 옆에 와서 앉으며 "우리 얘기 좀 합시다"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그를 좋지 않게 생각하던 나는 일부러 비꼬아 말했다.
"아니, 저 앞에 부인도 앉아 계신데 왜 이러세요?"
'얘기'를 듣고 보니 그는 내가 대통령 전세기에 함께 타고 서울로 간다는 것을 알고 대통령에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좀 해 달라고 부탁하러 온 참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무슨 얘긴데요?"
-"대통령께서 만일 이 실장과 나의 관계에 대해 물으면 내가 절대로 이 실장 측근이 아니라는 것만 전달해 주시오."
내심 나는 '아니 이 사람이?' 싶었다. 김동조는 이후락의 꼬붕이 아닌 게 아닌 사람이었다. 이후락
맏아들의 결혼식을 자신의 대사관저에서 치러 주었고, 자신의 딸을 이후락의 둘째 아들에게 시집보내려고 온갖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이후락과 관계 없다고 말해 달라니, 이제 이후락의 권세가 끝난 모양이다 싶었다.
"이번에 HR(이후락)이 목 달아납니까?"
그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이 자기 부탁만 되풀이 했다. 그의 다급한 표정으로 봐서 아와이 호텔에서 같이 포커치던 박종규에게서 뭔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이후락의 실각은 나중에 사실로
나타났다. 3선개헌을 마친 후 김성곤을 비롯한 공화당 의원들의 압력으로 이후락과 김형욱은 각기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는 말했다.
"나는 김대사께 들은 얘기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아이고 그러면 안되고..."
김동조는 원래 일제 때 일본 규슈제국 대학을 나와 내무성에서 일했다. 내무성의 주 임무라는 게
독립운동 사찰하는 일이다 보니 그는 해방 후 반민 특위에 걸려들었다. 그런 그가 별 탈 없이 출세길을 달린 것은 부인 송두만 덕분이었다. 송씨 집안은 경남 통영의 천석꾼 부자인데 이승만이 감옥에 있을 때 찾아다니며 차입을 넣어 주었다고 한다. 해방 후 이승만이 송씨 집안에 은혜를 갚는다고
사위인 김동조를 밀어 주었던 것이다.
일본 총독부에서 이승만에게, 이승만에서 박정희에게, 거기서 다시 이후락에게 이어진 김동조의
줄서기는 이제 누구에게 이어질 것인가. 제 자리로 돌아가는 김동조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약속을 지키마"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공군기지에 도착한 후 모두들 비행기에 올랐다. 전세기의 구조를 보니 조정석 바로 뒤가 대통령
부부의 침실이고 그 다음이 대통령 부부의 식당 겸 접견실 , 그 뒤에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방이
있고, 그 다음이 수행 각료들 좌석, 마지막으로 비행기 꼬리 부분에 수행 기자실이 있었다.
기자실에 앉아 있는데 나은실이 나를 찾으러 왔다.
-"각하께서 문 기자님은 접견실에 앉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래서 나는 박정희 부부와 몇 시간 동안 마주보고 앉아서 날아가게 되었다. 식탁에는 박정희 부부가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나와 나은실이 앉았다.
곧 식사가 나왔다. 포크와 나이프를 갖다 놓는데 보니 물론 도금한 것이겠지만, 온통 황금색으로 번쩍번쩍한데 대통령 휘장이 박혀 있었다. 내가 말했다.
"이거 하나 쌔빌까요(슬쩍 집어 넣는다는 뜻의 속어?) 이런 걸로 밥 먹기는 제 일생에 처음인데.."
육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다 세어 놓았을 거예요."
메뉴판을 갖다 놓는데 보니 대통령 휘장을 금색으로 박아 멋지게 만든 것이었다.
"그럼 여행 기념으로 이거 하나 주십시오."
박정희가 메뉴판에다 '문명자 여사를 위하여, 박정희' 라고 쓰더니 나에게 주었다. 박정희는 식사를 하며 일제 때 가 본 금강산 구룡폭포에 대한 기억등 여러가지 한가로운 얘기들을 했다. 대구
사범 시절얘기도 나왔다. 내가 물었다.
"그 때 수학 여행을 만주로 가셨지요?"
-"아, 그랬지요. 어떻게 압니까?"
"우리 친척 오빠가 대구 사범에 다녔는데 만주로 수학여행 갔다가 선물을 사다 준 기억이 있습
니다."
그래서 또 그 오빠 이름이 뭐냐, 나이가 몇살이냐 하다 보니 오빠와 박정희가 동기 동창이었다.
박정희도 그 오빠를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 좁은 것이다.
여러가지 얘기중에 주미대사 김동조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나는 "세상에 별 웃기는 일도 많습니다." 하고는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육 여사는 한숨 섞인 소리로 "아휴"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박정희가 담배를 피워 무는데 역시 신탄진이었다. 칠이 벗겨진 지포 라이터를 쓰고 있었다. 미국에서 지포 라이터는 주로 GI(미군 병사나 하사관)들이나 쓰는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왜 하필 사병들이나 쓰는 지포 라이터를 쓰십니까?"
-"옛날에 미국놈에게 선물 받은 것인데 바람이 불어도 불도 안꺼지고 참 좋아요."
박정희는 꼭 '미국놈'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박정희가 갑자기 물었다.
-"문 기자는 3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안됩니다.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안됩니다. 이승만 박사를 보십시오."
그러자 육여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박정희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리더니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문 기자는 한국 실정을 모른다는 말이오. 이번에 가서 한국 실정을 잘 좀 둘러보시오."
"한국 실정이 어떻든 저는 3선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샌프란시스코-서울 간의 14시간 비행 동안 박정희는 비서실장 이후락을 단 한 번 불렀다. 박정희가 물었다.
-"이실장 이번 정상회담 성과에 대해서는 어떻게들 보고 있소?"
나는 이후락이 박정희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나 유심히 보았다.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그러나
급한 성질은 어쩔 수가 없는지 이후락은 말을 더듬으며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가, 가, 각하,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모두들 대, 대성공이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성공이라니, 박정희는 주한 미군 철수 정책을 변경시키러 닉슨을 만나러 간다고 했지만 닉슨은
전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군 철수 정책에 변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 뿐 아니라
닉슨은 박정희를 지지한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기 위해 극히 말조심을 했다.
결국, 박정희가 얻어낸 것은 정상회담 공동 성명속의 "박 대통령의 영도하에 한국이 거둔 주목할
만한 발전" 이라는 한 문장뿐이었다. 그것은 어떤 공동성명에든 으레 끼어들어가는 외교적 수사일 뿐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도대체 누가 그렇게 평가 합디까?" 하고 소리를 칠 뻔 했다. 그러나 박정희를 힐끗 보니 그 역시 이후락의 보고가 듣기 좋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김포에 내리자마자 나는 불문곡직 KBS 스튜디오로 끌려갔다. 이번 정상회담에 관한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 하라는 것이었다. 가 보니 김성은 국방장관과 정재호 경향신문 정치 부장이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담당 PD가 달려와 말했다.
-"문 기자님께서는 주미 특파원으로서 정상회담 시작 전부터 샌프란시스코에 가 계셨으니까 대통령 각하 부처가 도착하기 전 교민들의 환영 분위기라든지 태극기 물결등의 광경을 이야기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싶었다. 프로그램의 의도가 빤히 보였다. 이번 미국 방문에서 교민들에게 열렬히 환영받고 미국 대통령 닉슨에게도 강력한 지지를 받은 대통령 박정희를 다시 한 번 대통령으로!
나는 짐짓 말했다.
"내가 가 보니까 샌프란 시스코에 태극기는 두 개 밖에 없었는데 물결은 무슨 물결입니까?
또, 대통령 숙소 앞 공원에서는 민주당 때 유엔대사를 지낸 임창영씨 등의 교포들의 꽹가리를 치면서 '박정희 물러가라' 하고 구호를 외치던데 그런 것도 합니까?"
PD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아이고 문 기자님. 왜 이러십니까. 그러지 마시고 대통령 부처를 맞이하는 우리 교민들의 열광적인 환영 분위기를 소개해 주십시오."
"아 글쎄, 열광적인 환영 같은 것은 없었어요.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거짓말은 못합니다. 나는
가겠습니다."
정재호가 옆에서 거들었다.
-"문 기자, 사람 죽일라 카나, 살릴라 카나, 거짓말 한 번 하면 어때?"
"당신이나 실컷 해. 나는 국민을 속일 수 없어. 태극기가 두 개밖에 없었는데 태극기의 물결이라니?"
내가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니까 다급해진 PD가 사정을 했다.
-"시간도 없는데 가시면 어떡합니까. 정 그러시면 있는 그대로만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 샌프란시스코 회담 때 국민들에게 소개할 만한 광경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열광적인 환영' , '태극기의 물결' 등 입에 발린 거짓말로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자들이 괘씸해 골탕을 먹인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닉슨이 박정희를 위해 마련한 환영 만찬에서 육여사가 입었던 한복에 대해 얘기했던 것 같다.
결국, 69년 수천 명의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고,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 농성하는 가운데 9월 14일 새벽 2시 3선개헌안이 날치기 통과 되었다.
당시 공화당 중진 의원이었던 김정렬 전 주미대사는 지난 70년 필자에게 이 때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비록 내가 공화당에 몸담고 있지만 '세상에 이런 날도둑질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소. 그 때 야당 의원들은 의사당 안에서 곰탕 한 그릇씩을 시켜 먹고 아예 이부자리를 가지고 들어와 잠을 잔다고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공화당 총무 단원들이 우리에게 귀띔하기를 모두 지정해 주는 호텔로 가라고 했어요. 밤이 깊었기에 잠이나 잘까 하고 누웠는데 갑자기 지시가 내리기를 한 사람씩 나와서 국회 앞 별관 쪽으로 가라는 거였어요. 야당 의원들에게 정보가 누설되면 안된다고.
그 때 이미 그 일대 전기를 끊어버려 우리는 모두 소경이 다 되었지요. 3인조에서 5인조로 나뉘어 별관 안으로 들어가라는데 젊은 의원이 선두에서 걸어가고 뒷사람은 앞사람 허리띠를 잡고 따라가라는 것이었어요. 나도 앞사람 허리띠를 잡고 내 허리띠를 딴 사람이 잡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따라갔었소. 그 곳이 별관이더란 말입니다. 가 보니 촛불 몇 개 켜 놓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이효상 국회의장이 시간을 끈다고 장경순(당시 부의장)이가 의사봉을 확 뺏더니 '왜 이렇게 지체해요? 이건 이렇게 때리는 겁니다' 하면서 땅땅 때리는데, 개헌안 통과 시키는 데 1분이나 걸렸을까. 정말 기가 딱 찹디다. 대체 이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공화당에 몸담고 있는 내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이것 모두가 부정부패의 총수 이후락의 잔재주에다 김형욱 같은 안하무인격의 무식쟁이의 소산이란 말입니다. 한국은 무법천지로 변했어요. 나는 그 때 의원직을 사퇴하기로 결심했지요. 그런데 3선 개헌 후 박정희는 그렇게 과잉 충성하던 자들의 목을 쳐버리더군요. 나는 '이것은 잠시 동안의 속임수다. 이 자들은 가까운 장래에 다시 데뷔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후락이가 주일대사로 임명되어 지금 도쿄에 가 있지 않습니까? 아마 내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김형욱이한테도 비례대표 국회의원 자리 하나는 안겨 줄 겁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정치에는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면서 "문 기자를 믿고 이야기 한 것이니 내가 죽고 나면 반드시 3선개헌의 진상을 역사에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차례 만나는 가운데 나는 육여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내게서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육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저는 이 나라의 진짜
민심이 어떻다는 것을 대통령께 전달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에 나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기도 하고 주위에서 좋은 분이라고 추천 하는 분들을 초대해 대화를 나누곤 해요. 그런데 처음 만날 때는 바른 말 해 주시던 분들도 두 번째 만날 때부터 저 듣기 싫은 얘기는 안 하시려 해요. 제가 아무리 '왜 이러십니까? 저를 소경. 귀머거리로 만드시려고 그러십니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사실대로 좀 얘기해 주십시오'라고 아무리 간곡히 부탁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문 기자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거예요"
만남이 거듭 되면서 육여사는 내 이야기를 들을 뿐 아니라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난봉꾼이었던 아버지로 인해 배다른 형제가 11명이나 되었다는 얘기, 박정희와 결혼하게 된 사연, 결혼에 반대했다고 남편이 장인을 쳐다보지도 않는 데서 오는 괴로움 그리고 남편의 끝없는 외도로 인한 가정적 고민 등등.
한번은 육여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71년 대통령 선거 때였지요. 그이가 선거운동차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저에게는 서울에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그 때 참 어려운 선거였어요. 국민들에게 '이게 마지막입니다' 하고 호소까지 했었잖아요. 청와대에 앉아 들으니 김대중 씨 부인 이희호 여사가 선거운동에 그렇게 열심이라고 해요. '저이가 그렇게 애쓰는데 나는 왜 내 남편을 못돕나' 싶어서 바로 대통령께서 묵고 계신 유성온천으로 내려갔지요. 도착해서 대통령 계신 방문을 탁 열고 들어갔는데 웬 여자가 옆에 앉아 있다가 혼비백산을 해서 도망을 쳐요. 나도 깜짝 놀라 멈칫하는데 그이가 글쎄 '서울에 있으라면 있을 것이지 뭐하러 왔어? 하고 고함을 치면서 재떨이를 집어 던지는 거예요."
육여사가 그 재떨이에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가련한 여인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얼마나 다쳤느냐'는 질문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박정희를 싸고도는 측근들의 부정부패와 도덕적 타락상에 대해서도 잘 알 뿐 아니라 그 때문에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청와대로 육여사를 방문하고 돌아가려 할 때 여사가 내게 말했다.
-"2층 비서실장 방에 들러 이 실장에게 인사하시지요. 그이한테 잘 못보이면 안되잖아요."
"안 합니다. 언젠가는 이후락이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할 겁니다."
육여사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나의 말을 부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박정희가 결국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해 3선에 성공했던 71년 나는 경향신문사를 사직하고
MBC 워싱턴 특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된 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워싱턴에 다니러 와 있던 최치환(전 경무대 비서)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는데 그가 뜻박의 얘기를 했다.
-"이번에 HR(이후락)이 나더러 [경향신문]사장으로 오라고 해서 한국에 나가게 됐습니다."
"어째서 이후락이가 [경향신문]사장을 임명합니까?"
-"모르셨소? [경향신문]은 실질적으로 PP(박정희)건데 지금은 이후락이가 대신 핸들하고 있는
거요."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최치환은 자기 말대로 서울로 가 경향신문 사장에 취임
했다.
71년 10월 나는 서울을 방문했는데, 이환의(당시 MBC 사장)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는 [경향신문] 정치 부장을 지낸 사람이라 만났더니 "MBC 특파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신문기자지 방송기자가 아닌데 마이크 잡고 잘 할 수 있을까요?"
-"문 선배는 잘 해낼 겁니다."
"그나저나 MBC는 누구 겁니까? 그것도 정부 겁니까?"
-"절대 아닙니다. 우리 MBC는 주식이 모두 개인 주주들에게 분산되어 있어요."
그 말에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경향신문]이 박정희 것이라는 통에 계속 [경향신문]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이환의 사장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최치환 [경향신문] 사장과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그 길로 [경향신문] 사장실로 갔다. 최사장은 자리에 없었다. 거기다 불문곡직 사직서를 내놓고 "점심 약속 지키지 못한다"라는 메모를 적어
놓고는 다시 MBC로 갔다. 거기서 나는 MBC 워싱턴 특파원 발령장을 받았다. 모두가 10월 7일
하루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환의 사장은 큰 실수를 한것이었다. 나를
특파원으로 쓰는 바람에 73년 11월 내가 망명하는 날까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3선에 성공했지만 국내는 결코 평온치 않았다. 대학생들의 대규모 교련 반대 시위는
서울에 위수령까지 발동해야 할 정도로 거세게 전개됐다. 또 광주 대단지 폭동 사건이 보여주듯
고도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노동자.빈민들의 저항이 시작되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른바 10.2 항명 파동을 빌미로 3선개헌의 돌격부대였던 김성곤 등 공화당 4인방을
쓸어 버리고 친정체제를 구축하더니 12월 6일에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유신체제의 전주곡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 전처 소생인 박재옥의 남편 한병기(당시 공화당 국회의원)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는 황호을 주미대사관 공사를 통해 미국 국회의장을 위시하여 상.하 양원 의원들을 만나려 했던 모양이었다.
한 의원이 칼 앨버트 하원의장실을 방문하기 전날 그의 비서실장 에머진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박 대통령의 사위 한병기라는 사람이 앨버트 의장 면담 신청을 해 와서 조사중입니다. 그가 진짜 박 대통령의 사위입니까?"
이런 경우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그에게 "한병기는 박정희가 숨겨 놓은 딸의 남편" 이라고 구구히 설명해야 할 것인가. 나는 간단하게 답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사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 인명 카드에는 결혼한 딸이 없는데 어떻게 된일입니까?"
입장이 곤란해진 나는 다음과 같이 둘러댔다.
"복잡한 사정이 좀 있는데, 어쨌든 박 대통령의 사위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김동조 주미대사의 부인 송두만 씨에게 물어보세요."
잠시 후 송두만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앨버트 의장실에서 전화가 와서 한병기 대사 문제를 묻기에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고 했다. 이 무슨 나라 망신인가. 당사자인 박재옥은 한번은 내게 "차라리
저는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한탄한 일도 있다.
박재옥은 자기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과시한다든가 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선량하고 진지한 여성이다. 대통령의 숨겨진 딸로서 성장 과정에서 여러가지 말 못할 고생도 많이 했던 인물이다.
이런 곡절을 거쳐 한병기 의원은 황호을 공사와 함께 앨버트 하원의장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화통신 한창섭 기자가 그 자리에 나타나 "나는 박대통령의 사위인 한병기 의원의 친척" 이라면서 한 의원과 함께 들어 가겠다고 주장해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에머진 여사는 "두 사람이 같은 미스터 한이라 친척이라고 하는데 진짜 친척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하여간 앨버트 하원의장 방에서 한 의원은 5분 정도 인사 겸 면담을 가지고 박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는데 앨버트 의장은 "만약 그런 심각한 사태가 사실이라면 내가 박 대통령 입장에 있었어도 비상사태를 선포했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가지고 한창섭 기자는 "미 하원의장 앨버트가 한병기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박 대통령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를 적극 지지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그 기사는 한창섭 기자 1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의 중앙지들 특히 주미 특파원이 있는 신문. 방송들은 모두 자사 특파원 이름으로 그 기사를 내보냈던 것이다. MBC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이름으로 "앨버트가 박정희의 비상사태를 지지했다"고 보도 했다. 나는 즉시 박근숙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보내지도 않은 엉터리 기사를 왜 내 이름으로 내보냅니까? 계속 그런 식으로 하실 거면 나는 언제든지 그만둘테니 다른 유능한 기자를 보내세요."
이 기사로 인해 앨버트 의장은 몹시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만약에 그런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말한 의례적인 발언이 '전폭적인 지지'로 둔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무성으로부터 발어 사실 여부를 문의받는 등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도대체 그 코리안 리포터는 어떤 사람이오?"
인사 방문 자리에서 사담으로, 그것도 단서를 붙여 한 발언을 정치적 입장이 분명한 말로 둔갑시켜 보도하는 자가 어떻게 기자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느냐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김대중 의원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우리 특파원들을 그의
처남 이성호 씨 집에 초청받아 김대중 씨와 환담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 씨의 특별보좌관 이었던 유기홍 박사가 우리에게 물었다.
-"신문을 보니 앨버트 의장이 비상사태를 지지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 자리에는 한창섭도 참석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쏘아 붙였다.
"미스터 한, 그런 허위날조 기사를 보내서 특파원들뿐 아니라 앨버트 의장까지 망신시키지 마시오. 그거 국민을 속이는 짓 아니오?"
"...."
"그리고 당신이 언제부터 한병기의 친척이야?"
-"같은 한가니까.."
"앨버트 의장실에서 그게 사실이냐고 조회해 왔는데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되겠어? 제발 이런 일 좀 없었으면 좋겠어."
얼마 후 나는 MBC 박근숙 보도국장으로부터 사신을 한 통 받았다.
-"문 특파원, 수고 많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알려 드립니다. 동화통신 한창섭 기자가 중앙정보부의 김모 국장에게 '문명자가 김대중이라는 자 앞에서 나를 모욕했다 위험한 인물이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김모 국장은 이환의 사장에게 문 특파원을 채용한 경위를 따지면서 '당장 목을 자르라'고 강력히 요구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기자는 또 한병기 의원에게도 편지를 썼는지, 며칠 전에 한 의원이 이환의 사장실에 찾아와서 '문명자 특파원을 당장 파면해라. 박
대통령도 지금 매우 화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태가 이처럼 복잡하니 약간의 거짓
보도가 있다 해도 김대중 씨 같은 사람 앞에서 그 기자를 마구 쏴붙이는 발언은 삼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김대중 씨 같은 사람' 앞에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는
말인가.
해가 바뀐 72년 봄, 대사관 파우치(외교행낭) 편으로 이번에는 이환의 사장의 사신이 날아왔다. "문 선배, 제발 사람 좀 살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는 지금도 내가 간직하고 있다.
사실 한창섭 기자에게 내가 싫은 소리를 한 것은 앨버트 사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 기자가 미국에 초기에 나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즈음 통신사 간의 극심한 경쟁 때문인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앨버트 의장 발언 기사 같은 허위날조 기사를 쓰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71년 4월 박정희와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7대 대통령 선거 전날, 워싱턴발 한창섭 기자의 기사가 미 국무성을 놀라게 했다.
"폴 스카트란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가 쓴 보도에 의하면, 닉슨 행정부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박 대통령의 당선을 확신하고 있다."
한국 대통령 선거날 아침에 미 국무성에 들렀더니 국무성 관리들이 번갈아 나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폴 스카트라는 미국기자를 아는가?"
"들어보지 못했다."
-"어떤 기자인지 찾게 되면 좀 알려달라."
나는 폴 스카트가 누군지 궁금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니 조그마한 지방지에 칼럼을 쓰고 있는 노인이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로 물었다.
"한창섭 기자 기사를 보고 전화드립니다. 당신은 어떤 정보에 의해서 닉슨 행정부가 박 대통령의 당선을 확신하고 있다는 칼럼을 쓰셨습니까?"
-"아, 사실은 내 기사는 아직 신문에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기자가 쓴 그런 내용이 아닙
니다. 한국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이 필요하다는 내용일 뿐인데... 필요하다면 내 기사의 복사본을 당장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노인이 어떤 경위로 "박정희의 당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박의 당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박의 당선이 필요하다"는
한 무명 칼럼니스트의 생각을 닉슨 행정부의 생각으로 둔갑시켜 선거 바로 전날 한국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한 행위는 명백히 '선거 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창섭의 폴 스카트 인용 기사가 나간 며칠 후 최규하 외무장관이 워싱턴에 왔다. 그는 국무성
관리와 만난 후 특파원들을 앰프레스라는 중국집에 초대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최규하 장관, 김동조 대사, 황호을 공사, 권오기 동아일보 특파원, 조세형 특파원 등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뒤늦게 한창섭 기자가 나타나 우리 테이블에 끼어 앉았다. 우리 옆자리에는 이상호 중앙정보부
공사, 최응태, 신동원, 김동희 참사관 등과 다른 기자들이 앉았다.
나는 한창섭을 보자 다짜고짜 몰아 붙였다.
"미스터 한은 언제부터 공화당 대변인이 되었어요? 대통령 선거 전날 어떻게 그 따위 허위 기사를 보도할 수가 있어요?"
동석한 기자들 중 몇몇도 이구동성으로 한창섭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한창섭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최규하 장관이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 여사, 한 번쯤 봐주시지 그래요."
김동조 대사도 거들었다.
-"문 여사가 화가 나니 대단하네요? 자, 최 장관도 모셨으니 우리 밥이나 먹읍시다."
순간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상호 중앙정보부 공사와 눈이 마주쳤다. 못마땅한 안색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도 질세라 쳐다보는데 이상호 공사 옆자이에 앉아 있던 김동희 참사관이 눈짓을 하면서 "참으세요" 했다.
그 후 한창섭 기자는 동화통신이 자진 폐간하자 김용식 외무장관의 주선으로 합동통신 뉴욕 특파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76년 코리아 게이트가 한창일 때 한창섭은 박스 기사로 '문명자는 친북' 이라고 써 갈겼다. 나에게 공개망신을 당한 보복을 그렇게 한것이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