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아침 밥상에 만둣국이 나왔다. 맑은 국물에 다진 파, 계란고명을 얹고 김치가 곁들여진 단출한 식탁이다.
아내가 손자들을 얻은 후, 한국 명절이 되면 잊지 않고 풍성하게 속을 만들어 장만하곤 하던 음식인데, 때 아닌 아침 밥상 만두국이라 무척 반갑다. 예년 같으면 소꼬리 뼈 우려낸 국물에 삶은 편육을 듬뿍 넣고, 잘게 썬 떡국도 넣어서 요란한 냄새를 풍기며 만든 명절음식이지만, 오늘은 평소 만들어 둔 육수국물과 만년조림간장으로 국물을 만들더니, 여기에 먹다 남은 오래된 명절 냉동만두로 후다닥 끓여낸 음식이다. 담백하지만 집안의 깊은 내공이 깃든 사연의 음식이라 천천히 음미하며 옛 추억에 잠긴다.
지금은 점점 노쇠해 가는 아내도 삶에 지친듯 어림없는 일,
인근 COSTCO에서 포장 만두를 사다 포장된 1회용 사골육수에 말아 먹곤하는데 이것도 국물에 둥둥 떠다니는 모양이 비숫해 '꿩대신 닭', 옛 추억을 소환하며 감지덕지 맛있게 먹는다.
나는 맑고 투명한 만둣국에 동동 뜨는 만두를 좋아한다. 이럴 때면 습관적으로 휘휘 젓는다. 만두를 숟가락으로 잘라 흩뜨려도 동동거린다. 만두 속이 풀어지지 않고 잘린 채 썬 파, 계란고명에 떨어져 나간 만두피와 어울려 물위에서 두둥실 춤을 추는 모습, 어느새 추억의 오솔길을 걷는다.
6.25 전쟁 피난민 시절, 국제시장 노상 좌판의 만두국밥, 어머니의 만둣국, 아내의 만둣국과 함께 목동 오거리 골목에 차린 ‘원산할머니만두집’ 들이 아우러지며 빗어낸 추억의 아름다운 향기가 엉겅퀴 잔향이 물씬 베인 호젓한 오솔길을 실어 나르며 걷는다.
"어머니 뵙고싶습니다" 보는 이 없어 덩실덩실 걷는다. 이 늦여름에 지난날 켜켜히 쌓인 낙엽더미들이 품어내며 사라지는 낙엽 썩는 향이 더없이 은은하다. 어머니의 더덕향과 버무려지며 낮은 언덕 밑 좁은길에 미동도 없이 드리워져 베여든다. 나도 어느새 그리움에 취해 어깨가 들먹거린다.
처절한 아픔, 고통들을 참고 견디며 지나온 날들을 훠이훠이 저으며 만두국을 벅는다., 아름다움으로 승화 되고 저마다의 품었던 시대의 향기로 물씬거린다. 이제 팔순의 언저리에서 아직도 32년을 한 곳에서 피자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으니, 자신을 신뢰하고 올곳게 살아온 삶의 행로, 감사의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두둥실 다시 마음 속의 춤은 계속된다. 거룩한 위엄 보다 날마다 마음 비우며 역주행하는 인생의 뿌듯함에 눈물을 글썽거릴때가 어디 한 두번인가.
만둣국 회억에 잠기면 생기와 힘이 솟구친다. 잔잔하고 투명한 육수 물위로 지난 우리 가족 인생사의 한 단면들도 따라서 두둥실거린다. 인고(忍苦)의 생애를 넘어서서 맛보는, 나만의 축제 같은 시간이다.
만두가 국물위에 동동거리는 모습은 같으나 만두를 가른 속의 맛은 제각각이다.
피난시절, 어머니의 만두와 국제시장 만두는 돼지비계, 두부, 숙주나물은 같은 재료지만 어머니의 만두는 늘 구수한 맛을 지니는 독특한 맛이다. 아내의 것은 소고기와 돼지고기의 비계를 제외한 순 살코기를 으깨고 묶은 김치를 넣는 담백한 맛이다.
부모님은 나를 초등학교 입학 직전의 나이인데도 지리에 밝다는 이유로 국제시장 PX물품노점상 배달을 시켰다.
껌, 머릿기름 등 도매품목을 어께 가방에 잔뜩 넣고는 각 소매상 부민동, 보수동 열심히 배달을 했다. 불법적인 상품들이다. 연막탄을 터뜨리며 순찰 중인 미군 헌병의 검색에 걸리면 모두 빼앗기고 헌병 차에 끌려가던 시절이다. 연막탄에 눈물이 범벅인 채로 골목 구석에서 헌병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잽싸게 배달해 주다 보면 반나절이 넘어서야 끝이 나곤 했다.
아버지에게 주린 배를 하소연하면 으레 부근의 만두국밥집을 데리고 가셨다. 만둣국에 밥을 말아 먹곤 했는데 어린 나이에 한 그릇을 후딱 먹어 치우는 기쁨이 있어 한동안 열심히 배달을 했다. 돼지비계로 기름 범벅의 국밥인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맛이다.
어머니의 만둣국은 사뭇 다르다.
농사로 짜낸 들기름과 부추, 직접 만드신 손두부가 어우러진 구수한 맛이다.
명절에 강원도 춘성군 기도원 집을 찾으면 손수 기르시던 닭, 토끼들을 잡았다. 삶은 고기를 썰어 넣은 맑간 국물의 만둣국 맛이 일품이다. 양념한 야생더덕, 송이버섯을 방안의 질화로 석쇠에서 연신 구워내시느라 방안의 연기를 뒤집어쓰며 함께 먹던 추억의 음식 맛이다. 내가 도착하면 어느새 몸빼 바지에 망태기 허리춤에 걸치고 달랑 왼호미 하나로 산을 타신다
30분 쯤 지나면 한아름 송이버섯을 캐서 오신다. 어머니만의 송이밭, 누구도 동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내의 만둣국 솜씨는 어머니의 맛을 이어받더니 요리 솜씨가 일취월장했다. 1987년 5월, 신세계 백화점이 주최하는 ‘제1회 아빠자랑 전국 요리대회“에서 ‘우럭 매운탕’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전국 예선에서 선발된 남편들의 요리 경연장, 돌솥에 아내가 몰래 만들어 건네준 양념장 덕분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영광을 차지했다. 국내에서 처음 실시되는 아빠들의 요리경연장이라. 중요 TV, 라디오, 여성잡지, 신문사 기자들의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방송국 출연, 여성잡지에 인터뷰를 했다. 방송 신문 잡지에 소개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언젠가KBS TV ‘멋자랑 맛자랑’ 명절요리 만두 만들기 프로그램에 우리가족이 출연했다. 명절 전날 내가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면 가족이 준비한 재료로 만두를 빚고 가족이 담소하며 식사하는 25분 분량의 방송에 소개되고는 욕심이 생겼다.
PD들의 권유로 집 인근 목동 오거리 뒷골목에 ‘원산 할머니 만두집’을 개업했다. 이것 때문에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 4,300만원을 전부 투자했다. 음식점 경험이 없어서 아내가 이른 새벽 집에서 만두 속을 만들면 가게에서 여럿이 빚곤 했다. 점심에 벌써 만두가 다 팔려 저녁의 주 재료인 만두전골을 만들 기력과 여력이 없었다. 모두가 지쳐있었다. 한 주일이 지나고 음식점 문을 닫았다.
나는 10여일 만에 문을 닫은 것 같은데, 아내는 1주일 만에 한식점으로 변경했다고 했다. 주방장, 찬모, 홀 종업원을 새로 고용하고 갈빗집으로 힘겨운 1년을 운영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고 아찔한 순간 들, 이처럼 처절한 삶의 굴곡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지금까지 한 장소에서 팔순에 이르도록 32년 동안의 긴 세월을, 아직도 묵묵히 운영하고 있는 피자 가게를 지탱할 힘이 없었으리라.
이 새벽 미명에 불쑥 어머니의 유품, 왼호미를 두께가 깊은 유리 액자에서 꺼내 꼭 잡았다. 어머니의 따뜻한 온기가 손에 잡힌다. "어머니 뵙고싶습니다." 춘천 대장간에서 어머니가 직접 특별 주문해 제작한 50년이 넘은 왼호미, 날이 비틀어진 모양, 방향으로 만들었다. 왼호미는 일반 호미로 사용하기 힘들지만 어머니의 왼호미는 날은 비틀지않고 방향만 왼호미로 만들었다. 힘에 부치면 오른손도 사용할 수 있는 겸용이다. 어느 늦가을 추석명절, 아버지는 마당에서 '호미씻이'를 하고 계셨다.괭이 호미 삽 낫 등 농기구들을 마당에 즐비하게 늘어놓고 숫돌로 갈아서 깨끗하게 손질한 후 너른 부억의 고방벽에 가즈런히 걸어두신다. 춘천 대장간에 들러 어머니의 호미를 새것으로 만들어 드리고 기념으로 사용하시던 호미를 이민 가방에 넣었는데 유품이 되었다.
노년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낙엽처럼 겹겹이 쌓여 익으면 회억으로 남아 이런 지렛대를 발판으로 노년의 상승을 꿈꾼다.
남은 여생, 어떻게 타자를 위해 살 수 있을까. 노년에 꿈꾸는 마음 텅 빈 인생의 담백한 향유이리라.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렇듯 지나간 소중한 순간들에 감사하며 두보의 시를 읊는다.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 인생살이 칠십년, 예부터 드문 일이라는데.......
暫時相賞莫相違(잠시상상막상위) 잠시나마 서로 어긋나지 말고 봄의 기쁨을 나누지요.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우럭 매운탕과 할머니 원산 만둣국 먹어보고 싶네요.청야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