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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2022) - 노자 / 박삼수
지은이 노자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으로 생졸년은 모두 미상이다. 춘추시대 말엽 초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주나라에서 오늘날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에 해당하는 수장실守藏室 사관을 지냈다. 이후 주나라가 쇠락하자 벼슬을 버리고 떠나던 중, 노자의 비범함을 알아본 함곡관 수문장 윤희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자』를 썼다. 『노자』는 상·하편 5,000여 자의 짧은 분량이지만 우주론, 인생철학, 정치·군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내용을 담아 후대에 널리 영향을 끼쳤다. 노자가 도를 닦으며 심신을 보양한 삶을 산 덕에 장수했다고 전해질 뿐, 그 외 은둔 길에 오른 이후의 종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옮긴이 박삼수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경북대학교, 타이완대학교, 성균관대학교에서 각각 중문학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울산대학교 중문학과 교수와 출판부장,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동아시아언어학과 방문교수를 거쳤다. 현재 울산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으며, 중국 산동사범대학교 대학원 교외 논문 지도교수를 겸임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논어』(상・하), 『장자』, 『손자병법』(이상 ‘쉽고 바르게 읽는 고전’ 시리즈), 『왕유 시전집』, 『왕유 시선』, 『주역: 자연법칙에서 인생철학까지』, 『맹자의 왕도주의』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공자와 논어, 얼마나 바르게 알고 있는가?』, 『논어 읽기』, 『당시의 거장 왕유의 시세계』, 『고문진보의 이해와 감상』,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3』(공저) 등이 있다.
이메일 sspark@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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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무無는 천지의 시원始原을 일컫고,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영원불변의 지극한 무를 통해 도의 본체의 오묘함을 보려 하고, 영원불변의 지극한 유를 통해 도의 작용의 광대함을 보려 하는 것이다.
이 둘은 똑같이 도에서 나왔으면서 그 이름만 달리할 뿐이요, 하나같이 현묘하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도란 현묘한 가운데서도 특히 현묘한 것으로, 온갖 오묘함이 발현되는 문이다.
주석
2 道(도): 앞의 ‘도’가 명사였던 것과는 달리 이는 동사로, 말하다ㆍ설명하다의 뜻임. 여기서는 곧 도가 어떤 것이라고 말(설명)함을 이름.
3 常道(상도): 영원불변의 지극한 도. 이는 우주의 본원인 ‘도’의 항구 불변성을 부각해 달리 일컬은 말임. 여기서 ‘상’은 항恒과 같은 뜻으로, 영항永恒 즉 영원불변함을 이름. 백서본에는 ‘항恒’으로 되어 있는데, 통행본에서는 한 문제文帝 유항劉恒의 휘자諱字를 피해 ‘항’을 ‘상’으로 고쳐 쓴 것임. 아래의 ‘상’도 이와 같음.
9 此兩者(차양자): ‘무’와 ‘유’를 가리킴. 왕필은 ‘시始’(시원)와 ‘모母’(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으나, 문법적으로나 논리ㆍ사상적으로 적절치 못함.
제2장
천하가 다, 아름다운 것이 왜 아름다운지를 알면서 비로소 추함에 대한 의식이 생겨났고, 천하가 다, 선한 것이 왜 선한지를 알면서 비로소 악함에 대한 의식이 생겨났다.
주석
1 斯(사): 즉則과 같음. 여기서는 ‘그로 인해’ㆍ‘비로소’의 의미를 내포함.
제6장
골짜기처럼 공허 청정하면서 신神처럼 신묘하기 그지없는 도는 영원불멸하나니, 이를 현묘한 모체母體라 할 것이다. 또한 그 현묘한 모체의 음문陰門은 천지의 근원이라 할 것이다.
주석
1 谷神(곡신): 골짜기처럼 공허 청정하면서 신처럼 신묘하기 그지없음. 이는 곧 노자가 말하는 도의 특성을 형용 묘사한 말임. ‘곡’은 공곡空谷, 즉 텅 비어 맑고 고요하며 깊고 그윽한 골짜기. 여기서는 도의 본체가 진실로 공허 청정함을 비유 형용함. ‘신’은 지극히 신묘한 존재. 여기서는 도의 작용이 신묘하기 그지없음을 비유 형용함. 흔히 ‘곡신’을 한 단어로 보아 ‘계곡(골짜기)의 신’으로 풀이하나, 옳지 않음. 제39장에서 “신은 도를 얻어서 영험해졌고, 강은 도를 얻어서 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라고 했듯이, 『노자』에서 이른바 ‘곡’과 ‘신’은 엄연히 두 가지 서로 다른 존재의 형상을 가리키는 말임.
3 玄牝(현빈): 현묘한 모체. 이는 도가 만물을 생육生育함에는 그 어떤 형상도 볼 수 없고,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으며, 그 때문에 ‘현묘하기 그지없는 모성母性ㆍ모체’라는 뜻으로, 곧 불가사의한 만물 생성生成 능력을 가진 도를 형용 지칭함. ‘빈’은 짐승의 암컷을 이르니, 여기서는 천지의 시원이요, 만물의 어머니인 도의 생식生殖 능력을 상징함.
제8장
최상의 덕성을 갖춘 사람은 물과 같다. 물은 능히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그들과 다투지 않고, 모두가 싫어하는 곳에 처하나니,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주석
1 上善(상선): 제38장의 ‘상덕上德’과 같은 말로, 하상공이 이른 대로 상선지인上善之人, 즉 나무랄 데 없이 높은 덕성을 갖춘 사람을 일컬음.
5 居善地(거선지): 처신은 겸손히 낮추기를 잘함. ‘거’는 거처함. 여기서는 곧 처신ㆍ처세함을 이름. ‘지’는 비하卑下, 즉 자기 자신을 낮춤을 이름. 이는 곧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 데서 나온 표현임. 『순자』 「유효편儒效篇」에서 “지극히 높은 것은 하늘이라 하고, 지극히 낮은 것은 땅이라 한다〔至高謂之天, 至下謂之地〕”라고 함.
7 與善仁(여선인): 사람들과 지내며 인애하기를 잘함. ‘여’는 서로 더불어 지냄ㆍ사귐을 이름. 이 구절이 백서본에는 ‘여선천予善天’으로 되어 있는 등 일부 판본에서 문자상의 차이를 보여, 논란이 끊이지 않음. 그 밑바탕에는 대개 까오밍高明이 말했듯이, 유가에서 숭상한 덕목인 인仁은 노자의 도와는 서로 어긋나며, 따라서 애초의 경문經文이 이처럼 ‘여선인’으로 되어 있었을 리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음. 이 점에 대해서는 리우쿤성劉坤生의 부연 설명을 참고할 만함. 즉, 노자가 “무위자연의 도가 행해지지 않자 인의仁義가 창도되었다〔大道廢, 有仁義〕”(제18장)라고 했듯이, 물론 도가는 유가의 인의를 반대함. 한데 도가는 결코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의 함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님. 도가가 반대하고 비판한 것은, 유가가 외곬으로 인의를 창도하면서 사람들이 앞다퉈 인의를 추구하게 되었고, 그러한 가운데 겉보기만 그럴듯하고 내용도 없는 거짓 인의가 나타나고, 질박하고 진실한 대도가 파괴되고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임. 그러므로 노자는 인의를 바르게 잘 써야 함을 주장한 것임. 하지만 후세의 주석가들은 단지 노자가 인의를 반대했다고만 아는 탓에 이 구절(‘여선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자구를 고쳐 오히려 노자 사상의 참뜻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됨.
제9장
욕망의 항아리를 부여잡고 가득 채우려 하기보다는 애당초 그만두는 게 낫다. 재간才幹의 칼날을 갈아 한껏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전할 수가 없다.
주석
1 持而盈之(지이영지): 욕망의 항아리를 잡고 그것을 가득 채우려고 함. ‘지’는 잡음. ‘영’은 채움. 여기서 ‘욕망의 항아리’란 말은 원문에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으나 자간에 함축된 뜻을 역문에서 드러낸 것임. 왕필은 ‘지’를 덕을 잃지 않음, 즉 덕을 지니고 있음을 이른다고 보고, 이 구절을 덕을 잃지 않았는데도 또 그것을 더 채우려 한다는 뜻으로 풀이함. 하지만 뒤의 ‘금옥金玉···’ 두 구절은 이 ‘지이···’ 두 구절을 이어받아 이르는 말인 만큼, 왕필의 풀이는 전후 문맥상 결코 적절치 못함.
3 揣而銳之(취이예지): 재간의 칼날을 갈아서 날카롭게 함. ‘취’는 (금속을) 불림, 단련함. 곧 (칼을) 갊을 이름. ‘예’는 날카로움. 여기서는 그렇게 함을 이름. 여기서 ‘재간의 칼날’이란 말 역시 원문에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으나 자간에 함축된 뜻을 역문에서 드러낸 것임. 뒤의 ‘부귀富貴’ 두 구절은 이 ‘취이揣而’ 두 구절을 이어받아 이르는 말임. 사람이 부귀해짐과 그 부귀함만 믿고 거들먹거림은 아무래도 한껏 재간을 부려 얻은 결과요, 또 그로 인해 교만해진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임.
제10장
사람이 심신을 잘 다스려 도를 굳게 지키며 능히 도를 떠나지 않을 수 있는가? 정기精氣를 모으고 또 한껏 유순하게 하여 능히 갓난아이와 같을 수 있는가? 내심의 잡념을 깨끗이 씻어내어 능히 아무런 흠도 없을 수 있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지혜를 쓰지 않을 수 있는가? 이목구비를 여닫음에 능히 유약ㆍ겸양할 수 있는가? 만사ㆍ만물의 이치에 두루 밝고 한껏 도량度量을 키워 능히 무위자연의 원칙을 지킬 수 있는가?
주석
1 載營魄抱一(재영백포일): 심신을 잘 다스려 도를 굳게 지킴. ‘재’는 부夫와 같은 발어사로, 별다른 의미는 없음. ‘영’은 경영함, 다스림. ‘백’은 혼백ㆍ넋, 즉 사람의 몸에 있으면서 몸을 거느리고 정신을 다스리는 비물질적인 것. 여기서는 대개 육체와 정신 내지 몸과 마음을 아울러 이르는 것으로 이해됨. 이는 『문선文選』에 수록된 육기陸機의 「증종형거기贈從兄車騎」 “영백회자토營魄懷玆土” 구에 대한 이선李善 주注에서 “경호經護 즉 관리하고 보호함을 ‘영’이라 하고, 형기形氣 즉 형상과 기운ㆍ신체와 정신을 ‘백’이라 한다”고 풀이한 데에 근거함. 한편 하상공은 ‘영백’을 혼백의 뜻으로 풀이함. ‘포’는 포수抱守, 즉 안아 지킴ㆍ견지함. ‘일’은 『노자』에서 쓰는 특수 명사로, 곧 도를 가리킴. 제22장에서는 “그러므로 성인은 도를 굳게 지키며, 천하만사의 준칙으로 삼는다〔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라고 하고, 제39장에서는 “하늘은 도를 얻어서 청명해졌고, 땅은 도를 얻어서 안정되었다〔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라고 함.
2 專氣致柔(전기치유): 정기를 모으고 또 유순하게 함. ‘전’은 단摶의 가차자로, 모은다는 뜻임. ‘기’는 정기, 즉 천지 만물을 생성하는 원천이 되는 기운. ‘치’는 (~ 경지에) 이름, 도달함. ‘유’는 유순함, 유화柔和함, 유약함. 대개 심신을 닦고 기력氣力을 기름에는 가장 먼저 정기를 모으고, 또 그 모은 정기를 한껏 부드럽게 해야 한다고 함.
3 滌除玄覽(척제현람): 내심의 잡념을 깨끗이 씻어냄. ‘척제’는 소제掃除함, 세정洗淨함. ‘현람’은 현감玄鑒ㆍ현경玄鏡(현묘한 거울)과 같은 말로, 사람의 내심 세계를 가리킴. 이는 곧 사람의 마음은 현묘하고 거울처럼 맑아 만사를 비추어보아 알 수 있다는 뜻을 비유해 이른 것임. 한편 까오헝은 ‘람’을 ‘감鑒’으로 읽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두 글자는 옛날에 통용했기 때문이라고 함.
4 疵(자): 흠, 결함, 결점.
5 無知(무지): 지혜를 쓰지 않음. ‘지’는 지智와 같음. 한편 왕필본과 하상공본은 통행본과 같이 ‘무지’로 되어 있고, 백서갑ㆍ을본도 모두 ‘무이지毋以知’(곧 ‘무지’와 같은 뜻임)로 되어 있는 반면, 경룡본景龍本을 비롯한 일부 판본에는 ‘무위無爲’로 되어 있어, 후세 사람들의 풀이에 혼란과 불일치를 야기함. 이에 리우쿤성은 전한 초엽의 판본으로 현존 최고본最古本인 백서본 두 종種의 문자가 일치하는 점에 주목해야 함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함. 우선 현존 백서갑ㆍ을본이 모두 ‘무이지’로 되어 있다는 것은 곧 왕필본과 하상공본이 올바름을 말해줌. 그리고 노자 사상에서 ‘무지’는 단지 ‘무위’의 일환일 뿐으로, 양자는 동등한 개념이 아니며, 전자가 후자에 포함됨.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심신을 수양하고, 세상을 다스리며, 도를 체득 실행함에 있어 전반적으로 요구되는 것임. 반면 총명과 지혜를 써서 나라를 다스림은 극력으로 반대하는 것이 노자의 일관된 사상임. 예를 들면 제19장에서는 “총명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이 백배는 많아질 것이다〔絶聖棄智, 民利百倍〕”라고 하고, 제65장에서는 “무릇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까닭은 바로 그들의 지혜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써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화요, 지혜를 쓰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복이다〔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라고 함. 특히 제65장의 말은 바로 이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지혜를 쓰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부연이라고 할 수 있음.
6 天門開闔(천문개합): 이목구비를 여닫음. ‘천문’은 이목구비 같은 감각기관을 가리킴. 인체의 감각기관은 천부적인 천연天然의 문이므로 이같이 일컬은 것임. 까오헝이 이른 대로, 귀는 소리의 문이고, 눈은 색의 문이며, 입은 음식과 말(언어)의 문이고, 코는 냄새의 문이라고 할 수 있음. 까오헝은 또 『장자』 「천운편」 “그 마음이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 이목구비는 열리지 않는다〔其心以爲不然者, 天門弗開矣〕”의 ‘천문天門’ 역시 이와 같은 뜻이라고 함. 무릇 신외身外의 온갖 사물은 사람의 감각기관을 통해 내심으로 들어와,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인지하고 탐욕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됨.
7 爲雌(위자): 유약ㆍ겸양함. 통행본은 ‘무자無雌’로 되어 있고, 왕필본도 같음. 하지만 왕필 주注에서는 경문을 인용해 기술하며 ‘위자’라고 했는데, 이는 왕필본도 원래는 ‘위자’로 되어 있었음을 방증함. 또한 ‘무자’는 노자 사상의 기본 정신에 전혀 부합하지 않아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백서본 등에 근거해 고침. ‘자’는 자성雌性ㆍ모성으로, 유약ㆍ겸양ㆍ퇴양退讓ㆍ부쟁 등의 덕목을 말함.
8 明白四達(명백사달): 만사ㆍ만물의 이치에 두루 밝고 한껏 도량을 키움. ‘명백’은 잘 앎ㆍ밝음. ‘사달’은 사방으로 통달함이니, 곧 도량이 넓고 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됨. 여기서 ‘명백사달’은 곧 제47장의 ‘지천하知天下’ㆍ‘견천도見天道’를 두고 이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음.
9 無爲(무위): 무위함. 곧 무위자연의 원칙을 지킴을 이름. 통행본을 비롯해 하상공본 등 다수의 고본에는 ‘무지無知’로 되어 있으나, 왕필본에 근거해 고침. 유월은 ‘무지’의 뜻이 낫다고 했고, 까오헝과 천꾸잉도 그에 따름. 까오헝은 또 시통奚侗의 견해를 인용해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 풀이에 따르면 ‘명백사달’은 모르는 것이 없음이고, ‘능무지호能無知乎’란 결국 알면서도 스스로 안다고 여기지 않음이라는 것임. 하지만 이 같은 풀이는 사상적으로 유의미함이 떨어짐. 그리고 앞에서 이미 ‘애민치국, 능무지호愛民治國, 能無知乎’라고 했는데, 여기서 ‘무지’를 거듭 말하는 것은 마땅치 않음. 또한 왕방슝은 도가에서는 ‘명明’과 ‘지知’의 두 층차層次(층이 지게 서로 높고 낮고 한 차이)로 나누는데, 전자는 무심無心의 관조觀照를, 후자는 유심有心의 집착을 말하므로, 응당 ‘무위’라고 해야 논리적으로 합당하다고 함. 결론적으로 이 구절은 왕필본이 올바른 것으로 보임.
10 “生之畜之(생지축지)···” 5구: 이는 제51장에도 보임. 마쉬룬은 윗글과 의미상 상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착간으로 보았고, 까오헝은 후세 사람들이 제51장의 경문을 발췌해 주문註文으로 삼은 것이라고 함. 분명 이 5구는 이 장의 종지宗旨에 맞지 않으며, 따라서 삭제함이 옳은 것으로 판단됨. 자세한 풀이는 제51장 참조.
제13장
사람에게 있어 영예나 치욕은 응당 놀라고 두려워할 일이요, 큰 환난을 부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어찌하여 영예나 치욕은 응당 놀라고 두려워할 일이라고 하는가? 흔히 영예는 좋은 것이요, 치욕은 나쁜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영예나 치욕은 얻어도 놀라고 두려워할 일이요, 잃어도 놀라고 두려워할 일이다. 그래서 영예나 치욕은 응당 놀라고 두려워할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큰 환난을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라고 하는가? 우리가 큰 환난에 직면하게 되는 까닭은 바로 우리가 자신의 이익만을 돌아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무슨 환난이 닥치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천하 만인을 위해 헌신하기를 중시한다면 곧 그에게 천하를 맡길 수가 있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천하 만인을 위해 헌신하기를 좋아한다면 곧 그에게 천하를 맡길 수가 있다.
주석
5 寵爲上, 辱爲下(총위상, 욕위하): 왕필본은 ‘총위하寵爲下’로, 하상공본은 ‘욕위하辱爲下’로 되어 있는 반면, 경복본景福本을 비롯한 일부 고본은 ‘총위상, 욕위하’로 되어 있음. 한데 이 구절은 앞의 ‘총욕약경寵辱若驚’을 부연 설명하는 말임을 감안할 때, 경복본 등이 옳은 것으로 보임. 유월과 까오헝도 같은 견해를 보임. ‘위상’은 상등, 즉 좋은 것으로 여김. ‘위하’는 하등, 즉 나쁜 것으로 여김.
6 得之若驚, 失之若驚(득지약경, 실지약경): 영예나 치욕은 얻어도 놀라고 두렵고, 잃어도 놀라고 두려움. 까오헝은 영예나 치욕을 얻든 잃든 응당 놀랄 일인 까닭은 그 모두가 결국 이기利己의 소산이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노자 사상의 심층적 의의를 올바르게 간파한 탁견으로 보임.(아래 ‘해설’ 참조) 사실 영예를 얻거나 치욕을 잃는 것을 왜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 후세 사람들이 이 장의 논지를 풀이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과 혼란을 겪어왔는데, 까오헝의 설명은 사상적 맥락을 정확히 잡아 그 풀이의 실마리를 찾아준 것으로 평가됨.
12 以身爲天下(이신위천하): 직역하면 자신을 천하 만인으로 여긴다는 뜻이니, 곧 자신은 천하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다시 말하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천하를 위해 헌신한다는 말로 이해됨.
제15장
먼 옛날 도를 잘 체득한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신묘하게도 도에 두루 깊이 통달하여, 그 심원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가 없다. 바로 그처럼 심원함을 자세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한번 그 형상을 묘사해본다. 삼가기는 겨울철에 얼어붙은 강을 건너듯이 하고, 경계하기는 사방 이웃 나라의 침공을 두려워하듯이 하며, 의젓하고 점잖기는 다른 사람의 손님이듯이 하고, 욕망을 떨쳐버리기는 봄 햇살에 얼음 녹듯이 하며, 인정 많고 꾸밈없이 수수하기는 다듬지 않은 통나무 같고, 겸허하면서도 활달하기는 깊은 산속의 텅 빈 골짜기 같으며, 흐리멍덩하게 어리석기는 혼탁하기 그지없는 강물 같고, 고요하고 편안하기는 한없이 넓고 큰 바다 같으며, 대범히 거침없고 얽매임이 없기는 그야말로 멈추개가 없는 것 같도다.
어느 누가 흐리멍덩한 가운데서 그 정서情緖를 안정安靜시켜 서서히 맑고 밝아지게 할 수 있는가? 어느 누가 편안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그 정서를 변동變動시켜 서서히 생동감이 넘치게 할 수 있는가?
요컨대 이 같은 도를 견지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가득 채우려고 하지 않나니, 바로 그처럼 스스로를 가득 채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낡은 것 가운데서 새로운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주석
4 容(용): 형용함ㆍ묘사함.
5 豫兮(예혜): ‘예’는 본디 짐승 이름으로, 의심이 많은 동물이라고 함. 여기서는 전의轉義되어, ‘예혜’로 주저하며 삼가고 조심하는 모양을 나타냄.
6 猶兮(유혜): ‘유’ 역시 짐승 이름으로, 원숭이의 일종이며 역시 의심이 많다고 함. 여기서는 전의되어, ‘유혜’로 의심하며 경각심을 가지는 모양을 나타냄.
7 儼兮(엄혜): 엄연儼然과 같음. 곧 사람의 용모와 언행이 의젓하고 점잖은 모양을 나타냄.
8 客(객): 다른 사람의 손님. 왕필본에는 ‘용容’으로 되어 있으나, 하상공본ㆍ백서본ㆍ경룡본 등 다수의 고본에는 모두 ‘객’으로 되어 있음. ‘용’은 ‘객’과 글자꼴이 비슷해 빚어진 오자로, ‘객’이 옳음.
9 渙兮(환혜): 흩어지는 모양. 또 (엉기어 굳어진 것이) 풀리는 모양. 여기서는 하상공이 이른 대로, 내심의 온갖 정욕情欲(마음속에 이는 여러 가지 욕구ㆍ욕망)을 떨쳐버림으로써 날로 공허 무사無私함으로 나아감을 이름.
10 其若凌釋(기약능석): 백서본에는 ‘기약능택其若凌澤’으로 되어 있는 반면, 부혁본에는 ‘약빙장석若冰將釋’으로, 통행본과 왕필본에는 ‘약빙지장석若冰之將釋’으로 각각 되어 있음. 한데 전후 구법의 일관성을 감안할 때 백서본의 표현이 옳음. 다만 ‘능택’은 의미상 부혁본 등에 근거해 ‘능석’으로 고침이 마땅함. ‘능(릉)’은 두꺼운 얼음. ‘석’은 (얼음이) 녹음.
11 敦兮(돈혜): 하상공이 이른 대로 돈후敦厚ㆍ질박함으로 이해됨.
12 樸(박): 다듬지 않은, 즉 켜거나 짜개지 않은 원목原木ㆍ통나무를 이름.
13 曠兮(광혜): 공광空曠, 즉 텅 비거나 아주 넓은 모양. 여기서는 전의되어 사람의 품성이 겸허하면서도 활달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됨.
14 混兮(혼혜): 혼돈混沌, 즉 무지몽매한 모양. 이는 곧 세상 명리에 대해 무지ㆍ무욕함을 이름.(제3장 주석 5 참조) ‘혼’이 통행본에는 ‘혼渾’으로 되어 있는데, 두 글자는 서로 통용하므로 왕필본에 근거해 고침.
15 澹兮(담혜): 침정沈靜, 즉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을 수 있을 만큼 고요한 모양. 또 안온安穩, 즉 조용하고 편안한 모양.
16 飂兮(유혜): ‘유’는 높은 바람을 이르는데, 여기서 ‘유혜’는 바람에 불려 높이 날아오르는 모양으로, 언행이 대범하고 소탈하여 거침이 없음을 형용함.
17 止(지): 그침, 멈춤. 여기서는 멈추개(브레이크, 제동 장치)로 확대해 이해할 수 있음. 이상의 “담혜기약해, 유혜약무지澹兮其若海, 飂兮若無止” 2구는 본디 제20장에 들어 있는 구절임. 하지만 천꾸잉이 이는 위아래 글과 상응하지 않아 착간으로 여겨지므로 응당 이 장의 “혼혜混兮···” 구 뒤로 옮겨와야 한다는 옌링펑嚴靈峯의 주장에 근거해 고쳤는데, 설득력이 충분하여 따름.
18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動之徐生(숙능탁이정지서청, 숙능안이동지서생): 통행본에는 앞 구의 ‘이以’ 자 다음에 ‘지止’ 자가 더 있고, 뒤 구의 ‘이’ 자 다음에 ‘구久’ 자가 더 있으나, 왕필본에 근거해 고침. ‘숙’은 누구. 앞뒤 구의 ‘이’는 모두 이而와 같음. 이 두 구절은 곧 어느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지만, 옛날의 도를 체득한 선비들만은 능히 이같이 할 수 있었음을 강조한 것임.
19 蔽而新成(폐이신성): 통행본과 왕필본에는 ‘폐불신성蔽不新成’으로 되어 있음. 이에 역순정易順鼎은 ‘불’은 ‘이而’의 잘못이고, ‘폐蔽’는 ‘폐敝’의 가차자이며, 이 구절은 곧 제22장에서 말한 ‘폐즉신敝則新’을 이르는 것이라고 함. 까오헝 역시 역순정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전문篆文(고대의 한자 서체인 전서篆書 문자. 갑골문, 금문 등이 전서에 속함)의 ‘불’ 자가 ‘이’ 자와 그 형태가 비슷한 탓에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함. 이 모두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따를 만함. ‘폐敝’는 해(어)짐, 낡음.
제20장
영예와 모욕은 그 차이가 얼마란 말인가? 아름다움과 추함은 그 차이가 어떠하단 말인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군주도, 사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네.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대도는 실로 광대하여 끝이 없도다!
뭇사람들은 성대한 잔치를 만끽하듯, 또 봄날 누대에 올라 조망眺望하듯 희희낙락하거늘, 나만 홀로 마냥 담박淡泊하여 세상 명리에 무덤덤하고, 마냥 무지하여 마치 갓난아이가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것과 같으며, 마냥 의기소침하여 마치 돌아갈 집도 없는 것과 같도다.
뭇사람들은 모두 재지才智가 넘치거늘 나만 홀로 모자란 것 같다. 내 진정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로다! 세상 사람들은 다 총명한데 나만 홀로 우매하고, 세상 사람들은 다 세상 물정에 밝은데 나만 홀로 세상 물정에 어둡다.
뭇사람들은 모두가 유능하거늘 나만 홀로 우둔하고 비루하다. 이렇듯 나만 유독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주 만물을 낳아 기르는 대도를 귀히 여길 따름이다.
주석
3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人(인지소외, 역불가이불외인): 이는 백서을본에 따른 것임. 통행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판본에는 ‘인지소외, 불가불외人之所畏, 不可不畏’로 되어 있음. 통행본 등은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나와 다른 사람이 똑같이 같은 대상을 두려워한다는 말임. 반면 백서본은 뭇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인 군주도, 사실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뭇사람들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군주와 뭇사람이 똑같이 서로를 두려워한다는 말임. 한데 이 앞의 두 구절이 모두, 대립적 관계에 있으며 상이相異할 것 같은 두 개념이 사실상 서로 별 차이가 없음을 역설한 것임. 따라서 이 구절 또한 논리적 맥락이 서로 같은 백서본의 말이 노자의 본의를 바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임.
4 荒兮, 其未央哉(황혜, 기미앙재): 이 구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여러 설이 분분하나, 왕필이 ‘세속적인 것들과는 서로 크게 다름을 탄식(사실은 찬탄)한 것’이라고 한 데에 비춰볼 때, 노자가 일념으로 추구하는 ‘도’를 두고 이른 것으로 이해됨. ‘황혜’는 넓고 큰 모양, 아득히 넓은 모양. ‘앙’은 다함〔盡〕.
7 其未兆(기미조): ‘조’는 조짐, 징조. ‘미조’는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니, 곧 전혀 마음에 움직임이 없다ㆍ감동이 없다ㆍ무관심하다는 말로, 세상 명리에 무덤덤함을 이름.
8 沌沌兮(돈돈혜): 혼돈한 모양. 여기서는 무지한 모양을 이름. 이 구절은 여러 판본에서 ‘아우인지심야재我愚人之心也哉’ 뒤에 붙어 있음. 하지만 마쉬룬이 마땅히 ‘여영아지미해如嬰兒之未孩’ 앞에서 갓난아이의 무지함을 형용해야 아래 ‘누루혜儽儽兮’와 짝을 이룬다고 했고, 까오헝과 천꾸잉 등도 모두 이를 따랐는데, 충분한 설득력이 있어 그에 근거해 고침.
9 孩(해): 해咳와 같음. 어린아이가 방긋 웃음.
10 儽儽兮(누루혜): 고달프고 지친 모양, 의기소침한 모양, 풀이 죽고 기가 꺾인 모양.
11 有餘(유여): 여유가 있음, 넉넉함. 이는 곧 재주나 지혜 따위를 두고 이름.
12 遺(유): 여기서는 궤匱의 가차. 다함ㆍ결핍함ㆍ모자람.
13 愚人之心(우인지심):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 곧 부지불식不知不識ㆍ무지무욕無智無欲의 순박淳樸 질실質實하고 순진무구한 심성으로, 노자는 이를 수양修養의 최고 경지로 여김.
14 昭昭(소소): 밝은 모양, 빛나는 모양. 곧 총명함을 두고 이름.
15 昏昏(혼혼): 흐린 모양, 어두운 모양. 곧 우매ㆍ몽매함을 두고 이름.
16 察察(찰찰): 명찰明察하는 모양. 곧 세상 물정物情ㆍ풍정風情에 밝음을 두고 이름.
17 悶悶(민민): 어두운 모양. 이 또한 곧 세상 물정에 어두움을 두고 이름.
18 澹兮其若海, 飂兮若無止(담혜기약해, 유혜약무지): 이는 제15장으로 옮김. 제15장 주석 17 참조.
19 有以(유이): 유능함. ‘이’는 능能과 같음. 『노자』에서는 ‘이’가 흔히 ‘능’의 뜻으로 풀이되곤 함. 일설에는 용用의 뜻이라고 함.
20 頑且鄙(완차비): 우둔하고 비루함. ‘차’가 왕필본에는 ‘사似’로 되어 있으나, 그 주문에는 ‘차’로 되어 있어 본디 ‘차’였음을 알 수 있고, 또 부혁본을 비롯한 여러 판본에도 모두 ‘차’로 되어 있으므로, 그에 근거해 고침.
21 食母(사모): 도를 가리키는 말. ‘사’는 먹여 기르다ㆍ양육하다라는 뜻.(이때는 ‘식’이 아니라 ‘사’로 읽음) 도는 우주 만물을 생양生養(낳아 기름)하니, 곧 만물의 어머니이며, 그러므로 여기서 ‘사모’라고 한 것임. 이는 오징과 위페이린이 『예기』 「내칙편內則篇」에서 “대부의 아들에게는 사모가 있다〔大夫之子有食母〕”라고 했고, 그 주에 ‘사모’는 유모乳母를 말한다고 한 데에 근거한 풀이를 따른 것임. 한편 장시창은 『노자』의 ‘사모’는 『장자』의 ‘사어천食於天’과 같이 ‘양어도養於道’ 즉 대도에게 길러짐을 뜻한다고 함. 그리고 까오헝과 천꾸잉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또 ‘사모’를 수도守道 양성養性, 즉 도를 지키며 천성을 기른다는 뜻으로 부연함. 참고로 『장자』 「덕충부편德充符篇」에서는 “이미 하늘에게 먹여 기름을 받았거늘 어찌 또 인위적인 것을 쓰겠는가?〔旣受食於天, 又惡用人〕”라고 함.
제22장
자신을 굽히면 스스로를 보전할 수 있고, 구부리면 곧게 펼 수 있으며, 움푹 들어가면 가득 채울 수 있고, 낡으면 새로워질 수 있으며, 적으면 얻을 수 있지만, 많으면 미혹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도를 굳게 지키며 천하만사의 준칙으로 삼는다. 그렇게 하여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므로 오히려 자신이 더욱 두드러지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으므로 오히려 옳고 그름이 더욱 뚜렷하며,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 공로가 더욱 빛나고, 스스로 잘난 체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 존엄이 더욱 오래간다.
성인은 바로 이처럼 남과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에 어느 누구도 그와 다툴 수가 없다. 이른바 ‘자신을 굽히면 스스로를 보전할 수 있다’고 하는 등의 옛말이 어찌 근거 없는 말이겠는가? 진실로 그 말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기필코 그 길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주석
14 全而歸之(전이귀지): 이에 대한 풀이는 여러 설이 분분함. 까오헝은 보전保全의 결과를 그에게 돌려줌으로, 천꾸잉은 참으로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으로, 장바오취엔은 확실히 보전할 수 있으면 근본으로 돌아감으로 각각 풀이하는 등 심히 다양하나, 선뜻 수긍하기 어려움. 한데 이들과 달리 위페이린과 허룽이의 견해는 분명 일리가 있어, 그 논지에서 실마리를 찾아 이 구절을 풀이하고자 함. 즉, 『예기』 「제의편祭義篇」에서 “부모가 자식을 온전히 낳아주셨으니, 자식도 죽어서 부모에게 온전히 돌아가는 것을 ‘효’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몸을 훼손하지 않고, 또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것을 ‘온전히’라고 할 수 있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 不虧其體, 不辱其身, 可謂全矣〕”라고 한 데에 비춰볼 때, ‘전’은 보전함, 즉 온전하게 보호ㆍ유지한다는 뜻이니, 여기서는 (그 말을) 마음 깊이 간직한다는 말로 이해됨. ‘귀’는 되돌아감이고, ‘지’는 그 (옛)말을 가리킴. 그렇다면 ‘귀지’는 그 옛말로 되돌아간다는, 다시 말해 그 옛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로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이해됨.
제25장
혼연히 이루어진 혼돈의 물物이 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보다도 먼저 생겨났다. 그것은 아무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만물을 초월해 홀로 우뚝 서서 영원불변하고, 널리 두루 순환 반복 운행하며 그침이 없나니, 진정 천지 만물의 어머니라 할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억지로 그것을 이름하여 ‘도’라고 하고, 또 억지로 그것을 형용하여 ‘한없이 크고 넓다’고 하노라. 한없이 크고 넓으니 가고 가며 운행에 그침이 없고, 운행에 그침이 없으니 멀리멀리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며,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돌고 돌아 본원으로 되돌아온다.
제27장
그러므로 성인은 항상 사람들을 잘 교화해 그 재능을 다하게 하므로 버려지는 사람이 없고, 항상 물건을 잘 다루어 그 쓰임을 다하게 하므로 버려지는 물건이 없나니, 이를 일러 대도의 밝음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제29장
무릇 천하 만인은 본시 그 천성에 차이가 있어 어떤 이는 앞서 나가고 어떤 이는 뒤따라가며, 어떤 이는 입바람을 천천히 불어 따뜻하게 하고 어떤 이는 거세게 불어 차게 하며, 어떤 이는 강건強健하고 어떤 이는 허약하며, 어떤 이는 안정되고 어떤 이는 위태롭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하를 다스림에 극단적이거나 과분하거나 과도한 조치는 취하지 않는다.
제30장
군사를 잘 부리는 이는 전쟁에서 이겨 환난 구제의 목적만 달성하면 전쟁을 그만두며, 감히 강성한 패자霸者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무릇 군사를 부리는 이는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긍지를 갖지 말고,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자랑하지 말며,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교만하지 말고,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그것은 부득이한 것이었어야 하며,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위세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제32장
애초에 만물이 비로소 생성되면서 각기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는데, 그 이름까지 이미 붙여졌으니, 장차 도를 굳게 지키며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도를 굳게 지키며 멈출 줄 아는 것이 바로 위험에 빠지지 않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도가 천하 만물의 귀의처歸依處인 것은 마치 강과 바다가 뭇 냇물과 골물〔谷水〕의 귀착점인 것과 같다.
제36장
무언가를 장차 수축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확장시켜야 하고, 장차 약화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강화시켜야 하며, 장차 눌러 없애려면 반드시 먼저 일으켜 세워야 하고, 장차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 이 같음을 일러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너무나 명백한 이치’라 하나니, 요컨대 부드럽고 약함이 굳세고 강함을 이긴다.
제38장
높은 덕을 체득한 사람은 애써 덕을 베풀려고 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진실로 덕이 있다. 반면 낮은 덕을 체득한 사람은 애써 덕을 베풀려고 하나니, 그러므로 실상은 덕이 없다. 높은 덕을 체득한 사람은 만사를 무위자연의 섭리에 따르면서도, 애써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낮은 덕을 체득한 사람은 만사를 무위자연의 섭리에 따르면서, 애써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높은 인仁을 체득한 사람은 항시 인을 행하면서도, 애써 그렇게 하려는 마음은 없다. 반면 높은 의義를 체득한 사람은 항시 의를 행하면서, 애써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또 높은 예禮를 체득한 사람은 힘써 예를 행하는데도 호응하는 이가 없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사람들을 잡아끌어 억지로 따르게 한다.
제39장
그 옛날 애초에 도를 얻은 예例는 이러하다. 하늘은 도를 얻어서 청명해졌고, 땅은 도를 얻어서 안정되었으며, 신은 도를 얻어서 영험靈驗해졌고, 강은 도를 얻어서 물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만물은 도를 얻어서 생장하게 되었고, 군왕은 도를 얻어서 천하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추측컨대 만약 하늘이 청명해지지 못했다면 아마도 장차 갈라져버릴 것이고, 땅이 안정되지 못했다면 아마도 장차 허물어져버릴 것이며, 신이 영험해지지 못했다면 아마도 장차 사라져버릴 것이고, 강이 물로 가득 차지 못했다면 아마도 장차 완전히 말라버릴 것이며, 만물이 생장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장차 한 가지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군왕이 천하의 본보기가 되지 못했다면 아마도 장차 몰락하고 말 것이다.
무릇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하고, 높음은 낮음을 기초로 한다. 그러므로 군왕은 스스로 일컫기를 고독하고 덕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고孤’나,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의 ‘과寡’, 혹은 선善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의 ‘불곡不穀’이라 하거니, 이 어찌 천함을 근본으로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게 아닌가? 그러므로 최고의 칭송은 곧 칭송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옥처럼 영롱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돌처럼 투박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제50장
사람은 세상에 나옴으로써 태어나지만 결국은 땅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죽게 되는데, 장수하는 이들이 열 중 셋이고, 요절하는 이들도 열 중 셋이다. 한데 사람이 본디 오래 살 수 있거늘 망동하여 스스로 죽음의 땅을 밟는 이들 또한 열 중 셋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이 몸을 보양하기를 지나치게 하기 때문이다.
제54장
그와 같음을 자신에게 구현하면 그 덕이 진실해질 것이요, 가정에 구현하면 그 덕이 넉넉해질 것이요, 고을에 구현하면 그 덕이 성장할 것이요, 나라에 구현하면 그 덕이 풍성해질 것이요, 천하에 구현하면 그 덕이 온 세상에 두루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심신이 절로 갈고닦임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집안이 절로 가지런해짐을 기준으로 가정을 보며, 고을이 절로 다스려짐을 기준으로 고을을 보고, 나라가 절로 부강해짐을 기준으로 나라를 보며, 천하가 절로 태평해짐을 기준으로 천하를 보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천하의 실상實狀을 알겠는가? 바로 이 같은 방법에 따르는 것이다.
제59장
뭇사람을 다스리고 타고난 심신을 보양하는 데는 정신과 지력智力을 아끼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군주가 바로 그처럼 정신과 지력을 아끼기 때문에 보다 일찍 도를 좇을 수 있다. 보다 일찍 도를 좇는다는 것은 부단히 덕을 쌓음을 말한다. 부단히 덕을 쌓으면 능히 해내지 못할 것이 없다. 능히 해내지 못할 것이 없으면, 그 능력의 끝을 알 수가 없다. 그 능력의 끝을 알 수 없으면 나라를 차지할 수가 있다. 이처럼 나라를 차지해 다스림을 무위자연의 도로써 하면, 오래도록 그 나라를 지킬 수가 있다. 이를 일러 뿌리를 깊이 뻗고 단단히 내려 길이길이 사는 이치라 할 것이다.
제61장
그러므로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게 겸손할 수 있으면 작은 나라의 신뢰와 따름을 얻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겸손할 수 있으면 큰 나라의 신임과 기름을 얻는다. 요컨대 혹은 겸손함으로 남의 따름을 얻고, 혹은 겸손함으로 남의 기름을 얻는 것이다. 무릇 큰 나라는 단지 작은 나라를 복속시켜 기르려 할 뿐이요, 작은 나라는 단지 큰 나라에게 의지하며 따르려 할 뿐이다. 한데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각기 원하는 바를 얻는 과정에 큰 나라는 더더욱 겸손하여야 한다.
제62장
그러므로 천자가 즉위하고, 삼공三公이 취임할 때, 비록 먼저 아름드리 큰 옥을 바치고, 이어서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바치는 봉헌奉獻의 예를 행하지만, 차라리 단지 이 도 하나를 바치는 것만 못하다.
제65장
옛날에 도를 잘 행한 이는 백성을 총명하고 약삭빠르도록 이끈 것이 아니라, 순진하고 질박하도록 이끌었다.
제67장
나에게는 세 가지 보배가 있으며, 나는 그것을 잘 지키며 보전하고 있는데, 첫째는 자애慈愛요, 둘째는 검약儉約이요, 셋째는 감히 천하 만인의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무릇 자애로우므로 할 일 앞에서 용감할 수 있고, 검약하므로 영토를 넓힐 수 있으며, 감히 천하 만인의 앞에 나서지 않으므로 천하 만물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
제72장
백성이 군왕의 위압威壓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군왕에게 실로 큰 위협이 닥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