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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구도, 공존의 미학
- 정진실론2
권대근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Ⅰ.
정진실은 한복판인 도시보다는 도시 속의 시골인 기장에 예쁜 작업실을 갖고 시를 쓰면서 다양한 예술적 취미를 즐기는 종합예술인이다. 다재다능한 시인의 시론은 일상인들이 갖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일상인이 관심을 잘 안 가지는 생태의 발신음을 듣는 데서, 삶의 의미, 즉 사물의 진리를 추구하려 한다는 점에 있어서 시의 본질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 정진실 시해설은 정진실의 시가 지니고 있는 개별성과 보편성의 정체를 탐색하고, 이 양자가 어떻게 예술적으로 합일되는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해 봄으로써 정진실 시의 참모습에 다가설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시 속에서 그가 생성해낸 미의식은 사물의 내면 소리를 듣는 데서 나온다. 시인이 주제로 형상화해낸 정서의 빛깔이자, 심오한 관조 속에서 획득한 철학적 울림은 인문학적 가치와 잘 매치됨으로써 그의 시는 문학적 성취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시적 태도가 기본을 견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시는 시인과의 가장 인간적인 만남의 장을 열어주는 통로라는 점에서, 필자는 어느새 그가 다듬고 있는 삶의 진실성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는 생명의 소리를 듣고 느낄 수 있는 뛰어난 감수성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비유를 통해 시적으로 구축하는 시상은 우리에게 풍성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 감동의 고지에 오르기 위해, 필자는 시의 숲을 창조적으로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는 서정시학의 힘을 업고 문학형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시와의 치밀한 감상적 조우라는 이 시집 해설을 통해서 정진실 시의 정체와 시적 울림의 메커니즘에 접근해 볼 수 있었다. 고향에 대한 사랑 없이 지구가 어떻게 건강할 수 있는가. 기장을 시적 등가물로 생각하고 노래했다는 점에서 그는 문학사의 큰 줄기를 부산은 물론 한국에 심어놓는 데 크게 기여한 시인이라 하겠다.
그의 시는 한마디로 이상적이다. 그는 시작에 임하여 본성 차원에서의 인간 존재해명의 문제는 물론 역사적 환경 속에서의 바람직한 삶을 위한 순수의식에 천착함으로써 통시적이면서 공시적이고, 수직적이면서 수평적인, 그리고 초월적이면서 당대적인 미의식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사상과 형상의 변증법적인 통일을 통해 세계를 자아화하는 것이 바로 정진실의 시적 특성이며, 예술시학의 전개다. 하나의 압축된 서정시로서 심상과 상징을 그려내었는가 하면 풍경화 같은 작가의 심적 나상을 너무나 솔직하게 형상화하고 있기에 삶의 다양한 의미를 환기시켜준다. 따라서 그의 시가 환기하는 언어들은 그대로 우리를 미적 사유로 몰아넣는다. 제 물상과 합일을 추구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과 화해해야 한다는 시인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시집의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는 풍성하다고 하겠다.
그의 시가 자연주의와 휴머니즘의 변증법적 완성을 통해서 한국시의 전통과 품격을 격조 있게 계승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으리라 본다. 나눔 속에서 더 찬란한 꽃을 피우는 것이 시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하는 그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의 소망이 식지 않는 한, 그의 시는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좋은’ 시로 인정받으리라 믿는다.
Ⅱ.
나는 이분을 볼 때마다, ‘참 이름 그대로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름 그대로 삶도 언어도 진실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름은 사고의 방향타이니 만큼 얼마나 이름이 삶의 방향에 압박을 가했는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나는 그가 이름으로 압박을 받아서 진실한 삶을 살아왔다기보다 그런 DNA를 타고 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시인이기에 정의로운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의식적으로 진실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추측도 해본다. 리처즈에 의해 제기된 포괄의 시론에서 ‘진실의 의미는 지시된 모양 그대로 현실에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고 독자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된다’고 하였다. 달리 풀이하면 문학작품에서 진술된 사항이 현실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항이 문학적 개연성으로 수용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되며 만약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는 진실이 되는 것이라는 시론이다.
이는 엘리엇의 지적이거니와 ‘경험들의 새로운 전체’는 포괄의 시론을 이해하기 위해 원용할 만하다고 하겠다. 리처즈는 아이러니를 유지하는 시, 곧 포괄의 시이며 그것은 여러 충동들이 균형을 이룬 체계요, 태도를 나타내는 시라고 규정한 것과도 같은 맥락을 잇대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포괄의 시는 동질적인 것을 배제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화해롭게 조화시켜 균형적 질서로 이끌어내는 총체적 작업으로 긴장 충격을 통해 보다 새로운 정서를 환기시키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정진실은 계절의 마디마디를 잘라서 시로 형상화해온 시인이다. 12월 1, 12월 2, 11월 등의 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도 아니고, 한 달 한 달을 시로 형상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아래 <11월>이란 시를 보면, 늦가을에서 겨울 초입으로 가는 11월의 분위기를 구체적 이미지로 잘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러야 할 노래를 여태 다 부르지 못했다 해도
한때는 산이라도 옮길 것 같았지요
살찌운 짐승은 동면을 준비하고
새는 멀리 날기 위해 날개를 단련할 겁니다
들꽃은 쭉정이를 남긴 채 바람에 씨를 날리고
들판에 구르는 햇살에 얼굴이 따스해지면
먼 곳에서 흔치 않은 기별이 올 것도 같아
창밖을 내다보다 골목을 서성거리기도 합니다
지난밤 비는 계절을 재촉하고
늦은 오후 해는 낮달 하나 남긴 채 서산으로 기웁니다
곱게 물든 숲속 잎은 곧 다 떨어지고 산은 가벼워지겠지요
그러다 첫서리 내리고 나면
산기슭 어느 가난한 무덤에
봄날 꽃잎 같은 첫눈은 내리고
자벌레의 한 자처럼 한 해의 매듭이 지어지겠지요
쌀쌀한 바람이 볼을 스치는 저녁답입니다
- <11월> 전문
정진실의 시집 제일 처음에 놓인 <11월>이란 시다. 이 시는 11월이란 시간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들, 산, 짐승, 새, 들꽃, 비, 해, 숲속, 첫서리, 무덤, 첫눈, 바람과 같은 이질적인 대상과의 경험들을 동원, 한 질서 속에 조화롭게 결합시켜 포괄적 효과를 획득하고 있다. 이런 이질적인 사물들이 결합됨으로써 새로운 정서를 환기하는 효과를 획득하고 있는데, 이는 이질적 사물들의 충돌을 균형있게 질서화하는 포괄의 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여러 사물을 열거하고 있지만, 눈여겨 보면, 산-하늘-들-하늘-숲속-하늘-땅-하늘 등의 공간적인 질서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런 결합은 서로 상반되고 대립되며 이질적이고 모순되는 양극을 극복, 결합되었을 때 긴장과 충격과 성취감을 한층 높이게 된다. 어떤 시인은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 명명했고, 어떤 사람들은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했다. 정진실 시인은 좀더 멀리 가서 형체를 알 수 없는 11월을 사유하면서 어떻게 하면 11월을 보이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한시미학에 따르면,‘언불진의 입상진의’라 했다. 형상만이 뜻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가을을 막 마감하고 초겨울로 달려가는 가을의 마지막 달 11월에다 ‘저녁답’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새벽-아침-오전-정오-오후-저녁-밤’의 시간대에서 11월의 좌표를 밤 앞에 있는 저녁답에 찍은 것이다. 밤이 12시를 너머 새벽 전까지를 의미하니까, 11월은 저녁답이 될 수밖에 없다. 적확한 이미지로 지배적 정황을 포착했다고 하겠다.
누가 내 이름을 묻거든
잊었다 하거라
그래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묻거든
김가라고만 전해라
또 누군가가 내 이름을 묻거든
모름지기 잊었다 전해라
고물상 박 사장이
성을 붙여 할머니라 불러주니 고마울 따름
누가 내 주소를 묻거든
큰 글자만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종이상자만 보며 살다 보니
작은 글은 잊었다고 전해라
작은 글자가 좁쌀처럼 빼곡히 담겨있는
두꺼운 책을 읽던 소싯적엔
시인 이름도 제법 알고, 시도 많이 읽고
더러 몇 편은 외우기도 하였다고 전해라
이제는
탱탱한 피부가 필요 없고
부푼 가슴도 짐이 되는
이제는
북어처럼 휘어지고 말라빠진 다리가 밥이 되는
머리도 필요 없는 나의 시절
- <나의 시절> 전문
정진실의 시는 계절을 넘어 이제 시간이 확장되어 겹겹이 쌓인 ‘시절’을 점검하면서 자기 정체성에 포커스를 맞추고자 한다. ‘~한다고 전해라’는 가사로 유명한 ‘백세인생’ 노래는 sbs 스타킹 가수 이애란이 불렀다. 발표 당시엔 반응이 없다가 뒤늦게 네티즌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역주행한 노래다. <나의 시절>은 이 노래의 후렴구를 빌려와 쓴 일종의 패러디 시다. 이러한 패러디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창조의 한 범주로 자리잡고 있다. 탈장르의 확산적 의미를 담기도 하는 이러한 패러디 방법을 시인은 원작이 가지는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후렴구 정도만 빌려왔다. 패러디한 시는 그 원작이 이미 잘 알려져 있어 누구나 쉽게 원작을 떠올리면서 언어유희의 즐거움에 빠지게 하고, 기발한 착상에 경탄하게 한다. 이같은 패러디가 때로는 아주 새로운 시각에서 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정진실 시의 확실한 매력은 시적 화자의 확장성이다. 대부분의 시인이 시적 화자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역사적 자아라면, 정진실은 새로운 인물을 내세워 세상을 보고자 노력한다. <나의 시절>은 제목을 보면, 당장 시인 자신의 시절을 말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시 속에서 나는 ‘정가’가 아니고 ‘김가’다. 고물상 박 사장이 할머니인 자신의 성을 붙여, 김 할머니라 불러주면 그저 고마워하는 노파다. 잊혀지고 싶어하는 평범한 할머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패밀리네임만은 기억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이는 모두 잊어버리고 다 지우고 싶어도 지워져서는 안 되는 어떤 운명적인 혈연의식에 대한 시적 화자의 작은 집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가계의 보존과 혈연을 중시하는 한국적 정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큰 글자와 작은 글씨가 완벽히 대비되는 두 번째 연에는 할머니의 역전된 삶이 가슴 아프게 크게 부각된다. 큰 글자만 박혀 있는 종이상자만 보며 살았다는 것에서 삶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시적 화자의 고단하고 그늘진 삶이 지배적 정황으로 그려지고 있는 마지막 3연은 이 시의 압권 중 압권이다. 시를 읽는 쾌미는 이런 데서 나오지 않을까. 시에 예술성을 주기 위해서는 상상에 의한 유추와 상상의 기법을 극대화해 나가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이 할머니의 삶을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상상의 예술적 형상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의 하나가 바로 정진실의 <나의 시절>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제는/ 탱탱한 피부가 필요 없고/ 부푼 가슴도 짐이 되는/ 이제는/ 북어처럼 휘어지고 말라빠진 다리가 밥이 되는/ 머리도 필요 없는 나의 시절’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이제는’이란 시간부사를 두 번이나 써서 젊음도 꿈도 사라져버린 늙어빠진 노파의 신세 한탄을 ‘휘어진 북어’로 형상화해서 독자로 하여금 한 여인의 그늘진 삶을 오래도록 응시하게 한다. 물론 ‘이제는’에 대비되는 ‘예전에는’이 시에 숨어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을 ‘예전에는’이라고 외쳐보자. 시집을 읽기 좋아하고, 애송시도 몇 개나 있었던 할머니의 젊은 시절은 삶의 존재이유가 있었던 그런 좋은 시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의 명암에서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지점이 바로 시인이 노리는 바가 아니겠는가.
부용꽃 화관 쓰고
구만리 구름 저편
어긋난 아녀자는 한평생 서럽구나
차라리 피지나 말걸
꽃잎 같은 여인아
연지 찍고 곤지 찍어
시집이라 갔건마는
지아비 바깥 돌고
문 닫은 시어머니
그나마 시詩가 있어 토해낸 응어리들
붓을 잡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인생아
아버님 객사한 후
오라버니 객사하고
두 새끼 보낸 어미 생명 끈 무엇이냐
하늘 땅 맞닿은 곳
가고 가고
또 가리
- <난설헌> 전문
시인의 시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타자적 삶에 대한 시인의 따스한 눈길과 손길이다. 여성작가가 여성의 문제를 동류의식이나 타자의식으로 터치하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남성시인이 여성적 삶을 주시하거나 정조준하는 일은 쉽게 볼 수 없다. 정 시인의 시를 관통하는 여러 지점에서 확인되는 의식의 하나가 ‘다름의 가치화’나 ‘타자의 담론화’라는 것이다. 시인은 여성 자아를 내세워, ‘시집이라 갔건마는 지아비 바깥 돌고 문 닫은 시어머니’라는 말로, 가부장제적 남성중심사회에서 고통받고 살아온 여인의 삶을 정조준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그나마 시詩가 있어 토해낸 응어리들/ 붓을 잡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인생아’라는 말로 허난설헌을 소환한다. 넋두리나 푸념은 너무 직접성을 띠기에, 시라는 예술적 통로를 이용해 자기 삶을 투시하는 이 대목은 격앙된 감정과 억압적인 주위 환경이 소통의 어려움을 가중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여인의 고통스런 삶을 쏟아낸다. ‘막힘’이 ‘풀림’으로 전개됨으로써 시의 역할이 소통과 치유로 이어진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고 굳어진 혀를 풀어주는 언어, 즉 ‘막힘’과 ‘퍼짐’의 경계에 있는 ‘풀림’의 언어인 시를 통해 여성들이 삶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연의 비극성을 접하고 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버님 객사한 후/ 오라버니 객사하고/ 두 새끼 보낸 어미 생명 끈 무엇이냐/ 하늘 땅 맞닿은 곳/ 가고 가고 또 가리’에서 알 수 있듯이, 부모 형제 자식까지 다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인생에서, 시적 화자는 생명을 부지해야 하는 이유를 ‘생명 끈 무엇이냐’는 말로 묻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견자를 창조해 보여주는 동시에 여성적 삶의 처절함을 한국적인 사유 체계에 맞는 귀납법적 추론에 의해 직조하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제일 처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버님 객사한 후 오라버니 객사하고 두 새끼 보낸 어미’는 한많은 여인의 삶을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시의 압권은 강한 생명력의 추구를 보여주는 ‘하늘 땅 맞닿은 곳/ 가고 가고 또 가리’란 대목이다. 이 시가 공감을 주는 까닭은 모든 사람이 갖게 되는 여자의 일생에 대한 보편적인 진리가 여기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자
남도로 뻗은 척추 같은 산맥 따라
팔다리 가슴에도 힘을 주고
발자국 하나하나 태산 같은 힘을 주어
응징하듯 그렇게 가자
산새 울음 들으면서
선분홍 진달래의 절규도 보고 가자
터지는 함성, 벅차게 맞으러 가자
나는 가자
강을 따라가자
가다, 가난한 들판 만나면
넉넉히 적셔주면서 가자
젊은 피 흐른 강
먼 곳, 아픈 광장 그곳으로
타는 가슴으로 가자
나는 가자
임 떠난 자리 그곳으로
끝없이 가고, 또 가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렇게 나는 가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나는 가자> 중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중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중
시는 근원적으로 역설적인 언어다. 창조적 오용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에만 시적 허용이란 게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에서는 새롭게 보기, 다르게 보기를 강조한다. 고은 시인도 <조국의 별> 첫 행, ‘별 하나 우러러 보며 젊자’ ‘어둠 속에서 내 자식들의 초롬초롬한 가슴이자’라고 했지만, 이는 시적 허용이란 게 있어서 가능한 표현이지,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젊어지자’, ‘가슴이자’는 어법에 맞지 않는다. 정 시인은 시의 애매성을 최대한 이용할 줄 안다. 그 의도를 알 수 있게 하는 시가 바로 위의 <나는 가자>란 시다. 물론 애매성으로 낯설게 표현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어서다. 문법적으로 맞게 하기 위해서는 ‘나는 간다’로 해야 하지만, 시인은 이런 문법성을 파괴하고자 한다. 첫 의도는 표준이나 관행의 파괴다. ‘간다’는 주체의 능동적 행위이지만, ‘가자’는 주체의 행위라기보다, 주체의 주문이나 권유, 가벼운 명령의 청유형 어법이다. 시인은 주체를 객체화해서 시적 화자가 머뭇거리는 주체라는 것을 암시하고자 한다.
시는 자아와 세계와의 동일성을 추구한다. 진리에 대한 시인의 믿음은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응징’ ‘절규’ ‘터지는 함성’ ‘젊은 피’‘타는 가슴’ ‘끝없이’ ‘또’ ‘남김없이’ 등의 진보적 언어와의 만남에서 시인의 특별한 정서나 정신을 볼 수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항전에 나섬에 있어서 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강한 의지를 불태우는 걸 알 수 있다. ‘가자’라는 일성의 청유, ‘먼 곳, 아픈 광장 그곳으로/ 타는 가슴으로 가자’라는 저항적 시어 배열에서 탄력성을 가져와 시의 동력학적 맛을 더해준다. 그야말로 적재적소에 들어앉은 플로베르의 일물일어라고나 할까. 시인의 저항의지에 얹힌 서정적 사물에 힘입어 정서적 증폭 현상을 가져온다. 시인이 보는 더 나은 세상의 그림도 그려진다. 시 창작은 한마디로, 상상력으로 새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다.‘나는 가자’라는 애매성을 이용하여, 세상의 불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젊은 의지를 불태우는 시적 화자를 빚어냄으로써, 시인은 이 시에다가 미적 진보라는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김씨 할배 집에는 붕어가 살고
박씨 할배 집에는 메기가 살고
웃각단 장씨 할배 집에는 미꾸라지가 산다
산골 마을 세 할배 나이를 모두 더한 세월보다 더 오래 산
금색 쳐진 당산나무 할배는
작년 정월 대보름 마지막 제삿밥 얻어먹고 죽었다
신목神木이 죽으니 마을도 죽었다
집단으로 이주한 할배는
새로 잘 지어진 경로당 대신
옛 마을로 내려가듯 뒷산에 올라
저수지 마을 속 그때의 자신들을 들여다보곤 한다
팽나무 그늘 아래
박씨 할배는 웃각단 장씨 할배의
차장車將도 마장馬將도 아닌 졸장卒將에 꼼짝 못하고
쪽팔려서 물러달라고도 못하고 있는데
하품하며 훈수 두던 김씨 할배가
졸다 졸다 장기판으로 꼬꾸라졌다
- <수몰 마을 세 할배> 전문
구체성과 보편성은 문학 고유의 특성이다. 그것으로 문학은, 여타의 인간 정신활동과 뚜렷이 구별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의 독자성을 옹호한 이래로, 문학작품들이 영속적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바로 감각적 구체성과 보편성 때문이었다. 정진실의 <수몰 마을 세 할배>는 구체성으로 보편성을 확보한 좋은 예가 된다. 특히 마지막의 ‘하품하며 훈수 두던 김씨 할배가/ 졸다 졸다 장기판으로 꼬꾸라졌다’는 마지막 결구는 이 시의 압권 중 압권이다. 시의 메시지는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사상이 지닌 추상성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된다. 문학이 예술의 한 장르로 간주되는 까닭은 아름다움, 즉 심미성을 매개로 해서 우리의 정서적 쾌락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심미성은 감각이 지닌 성질의 한 차원이고 감각은 구체성 위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문학성은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이나 사상을 어떻게 구체성으로 구제하느냐 하는 문제에 귀결되고 만다. 시의 이야깃거리가 다양하다고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소재들이 문학적으로 구제되기 위해서는 시인의 개성적이고 일관된 관점 아래 그것들이 내적 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그 통일성이 인생과 세계에 대한 어떤 해석을 드러내야만 한다. 바로 ‘졸다 졸다’가 다 말해준다. 고향을 묻고 온 수몰 마을할배들의 인생이 ‘졸다’에 다 녹아 있는 것이다. 그 해석이 온당하기에 우리는 거기에서 보편성을 보고, 감동에 드는 것이다.
시인은 ‘살고’ ‘산다’와 ‘죽었다’와 ‘꼬꾸라졌다’를 대조적으로 배치하고, ‘살다’의 의미상 주어로는 ‘붕어’ ‘메기’ ‘미꾸라지’를 놓고, ‘죽었다’란 과거시제 서술어의 주어는 당상나무 신목이고, ‘꼬꾸라졌다’의 주어는 하품하다 훈수 두던 김씨 할배다. 얼마나 할 일이 없었으면, 매일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장기나 두고, 훈수 두며 졸고 졸까. 그 장면이 수몰민의 비애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살아 있는 것은 뭣도 모르는 어류들이고,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뿌리를 잃어버린 좌절감, 고향산천을 잃은 마음에 마음 붙일 곳이 없다. 그 절망과 좌절이 경로당 대신 저수지 마을 속을 그려보는 할배들의 모습에 그대로 투영되어져 나온다. 장기판에서 한 수 물러달라고 하는 것도 쪽팔려하는 자존심 강한 할배들이기에 더욱 수몰민의 비애가 크게 느껴진다. 세상에 하품하며 졸고 졸다 죽은 사람이 있다니, 신목은 수명을 다해 죽는데, 수몰민 할배들은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그것도 심심해서 죽는다는 시인의 수몰민에 대한 비극적 묘사가 가슴을 아프게 파고든다.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수몰민 할아버지의 그늘진 삶을 구체성으로 구현할 수 없었다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인류 유산으로서의 시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시가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는가 하는 문학성의 문제다.
육지에서 먼 곳, 철새들의 낙원인 섬이 있어
그 섬, 아랑도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던 여자가
때마다 찾아주는 철새를 돌보며 살고 있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겨울에는
울지 않는 새를 좋아하고
여름에는 검은등뻐꾸기를 좋아해
검은등뻐꾸기는 그 여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줘
아마도 새에게 네 자 말을 가르치는가 봐
아랑도에 가면
섬 여기저기에서 검은등뻐꾸기가 네 자로 울어
연인들을 보면 '싸우지마'
낚시꾼에게는 '많이낚아'
우는 사람에게는 '힘내세요’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줘
그런데, 내 귀에는 모두 '돌아가라'로 들려
아랑도 여자는
나로 인해 그 말을 가르친 거야
- <아랑도 여자> 전문
아랑도라는 섬이 실제로 있나 하고 찾아보니, 인터넷 검색으로는 알 수가 없다. 일단 시인이 가상으로 만들어낸 섬 같기도 하다. 이 시는 아이러니와 패러독스가 있어 맛이 있다. 이 아이러니는 현대시에서는 풍자적으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인생론적 원리에 적용되고 있는 듯 보인다. ‘여름에는 검은등뻐꾸기를 좋아해/ 검은등뻐꾸기는 그 여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줘’라는 두 행을 보면, 시적 화자인 ‘나’가 ‘아랑도 여자’에게 듣기 싫은 말을 많이 했던 모양 같다. 그래서 아랑도 여자는 시적 화자를 사랑하지 않고, 철새를 돌보며 육지에서 먼 섬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철새’와 ‘나’의 대비에서, 그 여자가 철새를 좋아하는 이유를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본질은 시시각각 시공적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아랑도 여자는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좋아하고, 그 섬에 사는 검은등뻐꾸기는 섬을 찾은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데, 시인은 그 이유를 ‘아랑도 여자는 나로 인해 그 말을 가르친’ 것 같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아랑도 여자가 철새를 좋아하는지, 섬에 가서 혼자 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도의 확정 편향성의 아랑도 여자나 연인, 낚시꾼, 우는 사람도 모두 듣고 싶은 말만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전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어한다는 풍자다.
문학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생태론적인 입장에서 진실은 사물이 듣고 싶은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검은등뻐꾸기 소리가 시적 화자의 귀에는 모두 ‘돌아가라’로 들린다는 건 시인만이 사물의 소리,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랑도에 사는 뻐꾸기가 현실 속에서는 말을 할 수도 없고, 그 여자가 만나는 사람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도록 가르쳤을 리가 없지만, 시인은 ‘나로 인해 그 말을 가르친’ 걸로 인식한다. 듣기 좋은 만만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철새’에 비유하는 전략에서 이 시의 풍자가 빛난다. 우리는 철새에 대해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린다’는 의미로 쓸 정도로 ‘철새’란 말에 부정적이다. 시인은 이 지점을 노리고 아랑도 여자와 철새의 궁합을 만들어내었다. 그리운 것은 잃어버림, 즉 그 부재를 전제로 한다. 시인은 진실에 대한 그리움을 통해 혼란에 빠진 인간의 정체성을 철새를 통해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자 한다. 식물성의 생태와 인간적 현실과의 충돌, 그 갈등이 우회적으로 형상화되어 이 시는 감동을 준다.
꽃잎 스치는 바람의 마음으로
속절없이 떠나간 당신을 탓하지 않으렵니다
보리밭 어루만지는 바람의 마음으로
가고 없는 당신, 놓아드립니다
이는 떠난 당신 슬며시 다시 곁에 다가와
내 가슴 봄물 흐르게 할 것을 아는 까닭이요
골짜기 산새들 분주하게 할 것을 아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만난 햇수를 세기보다
남은 횟수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아보며
아스라해지는 가슴 어루만집니다
먼 시절, 생의 시작으로 같이한 당신
모질게 떠나보낸 철없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제야 당신의 의미를 깨달아
앞으로의 몇 남지 않은 만남
더욱 소중히 하렵니다
- <또 한 번의 이별 - 봄을 떠나보내며> 전문
자연의 순행을 자연의 질서 또는 순리라 부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누가 붙잡지 않아도 고장 난 벽시계처럼 멈추는 법이 없다. 그저 간다. 봄이 왔다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마치 떠나는 봄을 잡아둘 수 있는 것처럼 ‘보리밭 어루만지는 바람의 마음으로’ 놓아드리겠다고 한다. 계절의 변화를 직관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정황 안에 봄이 환기하는 이별의 아픔과 아쉬움의 사유를 내재시킨다. 이때 가는 봄의 흔적은 보다 선명하게 우리의 미의식 안으로 잠입하게 된다. 이 모든 묘사는 봄의 떠남을 환기하는 미적 인식을 제시하며 미적 사유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적 형상화는 비유라는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게 된다. 비유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사물로 치환할 뿐만 아니라 같은 구체적 사물을 감각적으로 강화하기도 한다.
정진실의 시에서 ‘골짜기 산새들 분주하게 할 것을 아는 까닭입니다’와 같은 신선한 비유가 없다면 오늘날과 같은 문학적 성과는 많은 부분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정진실의 시에서 그것은 절대적이다. 비유는 기적을 낳는다. 정진실의 시에서 우리는 비유를 통해 형상화에 성공한 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위의 시 두 번째 연에서 시인은 ‘이제는 만난 햇수를 세기보다/ 남은 횟수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아보며/ 아스라해지는 가슴 어루만집니다’라는 말로 나이가 들어 생의 의미를 어느 정도 깨우쳤음을 실토한다. ‘먼 시절, 생의 시작으로 같이한 당신 모질게 떠나보낸 철없던 시절도 있었습니다’라는 계절의 순환이 가르쳐준 교훈도 모른 채 그냥 떠나보낸 철부지 시절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 이어, 시인은 ‘이제야 당신의 의미를 깨달아/ 앞으로의 몇 남지 않은 만남/ 더욱 소중히 하렵니다’란 말에 생의 유한성을 담음으로써 유한한 생 앞에서 안타까워하는 시적 화자의 심사를 감각적으로 구체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따라서 감상하는 입장에서는 단순히 비유의 함축성을 해독하는 데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표현이 만들어내는 미감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시가 문학으로서 수행하는 예술적 기능을 만나고 이해할 수 있다.
기장군 어느 마을에는 ‘어뎅교’라는 학교가 있다
집안 아재의 한창 시절
전봇대 사건으로 개교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학생이라야 아재 한 분뿐이고
교장을 겸한 선생님은 아지메 한 분이다
수업은 저녁 9시에 시작하는데
종소리 대신 전화벨이 수업 시작을 알린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하여
외출 중인 때에는 거의 지각이다
9시가 다가오면 일행들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잔을 기울이다가도
수시로 시각을 확인하며 안절부절이다
오래전 학교생활을 마친 후
등교를 생각해 보지 못한 나는 헷갈린다
어떤 이는 어뎅교의 교훈이 사랑이니 좋다고 하고
다른 이는 아무리 교훈이 좋다지만
그 나이에 그런 학교에 다녀야 하느냐고 핀잔이다
모든 일의 경계 지점에서 이리저리 살아온 나는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같아
또 한 번 흔들린다
어뎅교는 어쩌면 아재의 팔순 잔치쯤에는
졸업식을 겸해서 폐교될지도 모르겠다
- <어뎅교> 전문
시인은 역사의 증인이 되고자 한다. 시인이 그 고장의 현재를 시화할 때, 세월이 지나면 역사가 된다. 시인도 향토문화 사적과 사건을 알리고 기술함으로써 향토사 기술에 앞장서야 한다. 기록이 기억을 이긴다는 걸 증명해 주어야 한다. 우리 기억에 남는 많은 시인들이 고향에 관한 시를 썼다. 토포필리아는 장소애를 나타내는 말로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기장에 ‘어뎅교’라는 학교가 있다는데, 정확히는 무슨 학교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학생은 집안 아재 한 명이고, 선생 겸 교장은 아지매 한 명이고, 등교시작 시간은 9시고, 교훈은 ‘사랑’이다. 학생들은 등교와 함께 세계평화를 위하여 술잔을 든다는데, 술을 마시면서 수시로 시각을 확인하며 안절부절이라니, 짐작되는 바가 있다. 이 시에서 ‘어뎅교’가 의미하는 것은 뭘까? 집안 아재가 운영하는 주막 같은 선술집은 아닌 것 같고, 아재 친구들인 갯가 뭇남자들이 수시로 찾는 아재집일 가능성이 높다. 또는 심심한 시골 어른들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 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어뎅교’는 지금 어디에서 한 잔 하고 있노? 집이가? 누구랑 어디 있노? 지금 뭐하고 있노? 등의 의미로 안부를 묻는 데 쓰이는 남부 경상도방언이다. 아재의 팔순잔치 즈음에 졸업식을 겸해서 폐교될지 모른다고 하니, 아재집이 분명한 것 같은데, 어쨌든 이 또한 많은 상상력을 낳게 한다.
등교를 해보지 못한 시인도 헷갈리지만, 헷갈리는 건 독자도 마찬가지다. 이 시를 지탱하는 근간은 아이러니다. 술잔을 기울이는 이유가 거창한 세계평화를 위한다는 데도 수시로 시각을 확인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나 교훈이 사랑인데도 그런 학교를 다녀야 하느냐 하며 핀잔을 주는 이도 있다고 하니, 일종의 아이러니다. 술잔을 들며 행복해하지만 또 다른 지향은 졸업과 폐교다. 시인은 짐짓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체 시치미를 떼기도 하고, 진술한 것과 진술을 통해 의미된 것과 사이의 긴장, 혹은 상이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문장 형식으로 일종의 아이러니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이 시의 맛을 더해 주는 것은 바로 풍자다. ‘9시가 다가오면 일행들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잔을 기울이다가도/ 수시로 시각을 확인하며 안절부절이다’는 대목은 형식적으로는 아이러니이나 내용적으로 보면 풍자다. 인간사회의 불합리를 재치있게 파헤치는 것을 본질로 하는 풍자의 활용으로 시의 재미를 더해준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에 의해 오염된 시대에는 이를 비판하고 고발하며 개선하고자 하는 풍자가 요구된다. 밤늦게까지 시각을 확인하며 술을 마시는 행위가 과연 옳은 걸까, 그것도 팔십이 될 때까지 세계평화를 위해 술잔을 드는 데 대해 시인은 시로써 ‘세계평화는 무슨’하며, 시골 노인들의 남성중심주의를 비꼬고 고발하며 비판한다.
메아리가 없다
허무이 동구 밖을 넘지도 못하는 절규
목이 쉬는 처절함도 없다
소리는 얕아
초침의 움직임 같은 가벼움은 바람에 날리지만
얕음과 얕음은 모이고 모여
분침이 되고, 시침이 된다
그리하여 여름밤을 가득 채운다
밤하늘 별들에 울고 또 울어주면
별들은 반짝임으로 답을 하지
때론 너희 외침은 내 얕은 영혼을 일깨워 주기도 하지만
입춘을 지나면서 풀은 시들어지고
너희 울음도 시들어지고 말 거야
- <풀벌레 울음> 전문
시적 화자는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존재다. 그러나 육안은 사물의 겉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시각은 오히려 흘러넘치고 있다. ‘시각 중심주의’ 시대다. 시는 시각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이제 시는 저 왜곡돼 있는 시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얕음과 얕음은 모이고 모여 분침이 되고, 시침이 된다. 그리하여 여름밤을 가득 채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사물을 투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은 여름밤에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라는 일상어를 ‘분침이 되고, 시침이 된다’는 문학어로 치환하면서, ‘밤하늘 별들에 울고 또 울어주면 별들은 반짝임으로 답을 하지.’라며 문학적인 표현으로 감각화를 시도한다. 물질주의 시대에 인간을 시각 과잉으로부터 구원하고자 시인은 시각 중심주의에 희생당하고 있는 나머지 다른 감각, 특히 청각을 복원하고자 한다. 정진실의 시는 중층묘사법으로 직조된다는 차원에서 믿음직하다. 이 같은 현상학적 지향은 형이상학적인 이미지의 정상적인 특징이다.
‘때론 너희 외침은 내 얕은 영혼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는 등의 어구는 시인의 체험에서 얻은 잔상들을 시적 형상화로 표현했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시가 원숙한 경지에 이르게 되니까, 논리가 시를 구속하기보다 초논리적인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허무이 동구 밖을 넘지도 못하는 절규 목이 쉬는 처절함도 없다’ ‘소리는 얕아 초침의 움직임 같은 가벼움은 바람에 날리지만’ 등의 어구는 논리를 초월해서 존재하려는 자유로운 언어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주의 복잡계적 인식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표방하고 있는 이 시의 또 다른 특징은 보이지 않지만, 나는 서정주의도 포용한다는 선언을 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적어도 시인이라면 작은 것도 아름답다는 타자의식도 가져야 하고,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시에는 보이지 않는 것도, 들리지 않는 것도 보고 들어야 한다는 시인의 감각우선주의가 드러나 있어 좋다. ‘풀벌레’란 하잘 것 없는 미물의 소리를 ‘분침’ ‘시침’소리로 형상화해서 담아내었다는 데에 이 시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겠다. 정진실은 수많은 이야기를 직접 경험해서 시로 만든다. 그의 시는 머리로 쓰는 관념시가 아니고 발로 쓰는 현장시다.
담임선생님께서 하루 한 끼 굶는 학생 손 들어 그러면 몇몇 학생이 쭈빗쭈빗 손을 들고 하루 두 끼 굶는 학생 손 들어 하면, 갯가의 급우 몇이 좌우를 살피며 슬그머니 손을 든다 비는 끼니는 태평양을 건너온 강냉이죽이 채워주는 것이다 농부의 아들 정호는 끼니 거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학리마을 친구들이 먹고 있는 빼떼기를, 무가 든 밥을 모르는 것이다
마루에 앉아있으면 가끔 멀리 학리마을 하늘에서 피어나는 뭉게구름이 보일 때가 있다 그런 때 눈을 한두 번 깜빡이면 어김없이 포성이 울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학리마을은 때때로 전장이 된다 전투의 상처는 커 학리마을에는 한쪽 팔이 없는 사람이 있고, 한쪽 다리가 없는 사람도 포성이 울리길 기다리며 빼떼기로 무밥으로 검은 세월을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장은 사라지지 않고 몇몇 학리마을 사람에게는 불발탄의 탄피가 주식인 것이다
- <전장戰場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전문 -
시인은 자신의 고향 기장 학리마을의 시공간을 먼 옛날로 돌려놓는다. 일광해수욕장 오른쪽 끝의 학리마을은 이름 그대로 학이 무리 지어 오래된 소나무 숲 위를 울면서 나는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역사적 전통 덕분인지 일광 등 기장군 5개 읍면은 일제강점기에 치열한 항일운동으로 구수암, 권동수, 권은해, 김도엽, 김두봉, 김약수, 박영출, 박세현, 이도윤 선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고장도 보릿고개 시절이 있었다. 너무 잘 살아 모든 게 풍족하다 보면, 과거를 잊고 사는 수가 많은 법이다. 그 많은 유년의 추억들 중에서도 시인에게는 굶는 학생에 대한 아픈 추억이 가장 가깝게 다가온다. 중국의 시법에 ‘시궁이후공론’이란 게 있다. 문학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의미다. 이 시에는 작가의 어린 시절 곤궁했던 풍경이 눈물 나게 다가온다.
행복했던 기억보다 쓰라렸던 기억이 오래 남는 법이다.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우리 기억의 한 켠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고통스런 과거의 샘물을 미학적으로 퍼내어 형상화하는 일이다. 강냉이죽, 빼떼기, 무밥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친구들의 모습을 그려보는 시인의 모습은 인정을 잃어버린 시대, 우리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에는 지금으로 보면 가장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농부 아들이 이 시 안에서 배고픔을 몰랐던 행복한 학생으로 나온다. 흔한 강냉이죽도, 빼떼기도 무밥도 먹지 못 했던 적빈의 시절을 전장터로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적빈의 환경이 정진실 시인을 의식 있는 시인으로 키운 것 같다. 이름 그대로 학이 무리 지어 오래된 소나무 숲 위를 울면서 나는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란 학리마을의 평화로운 분위기는 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시공을 넘나들면서 아픈 현실을 들추어낸다. 감추어진 진실을 끄집어낸다. 학리마을의 이름을 흥기적 요소로만 보지 않는다. 시인은 전쟁은 끝났지만 전장터가 된 학리마을의 현실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진리에 기대어 과거도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 때 우리 것이 될 수 있다는 준엄한 역사의 교훈을 전해주고자 한다. 시인의 이런 의미 부여는 작가의 사회적 책무다. 학이 날던 평화로운 이미지의 학리마을 사람들의 주식을 불발탄 탄피로 형상화한 시인은 응어리진 씨앗으로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 적빈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시인은 주제의식의 간접화에 성공한다. 이런 문학적 기법에 힘입어 정진실의 시는 전반적으로 갈수록 문학성의 향훈을 낸다. 주제를 마지막에 가서 문학적으로 응축시키는 정진실의 문학적 기량은 모든 시에 두루 적용되고 있는 점에서 눈여겨 볼 점이라 하겠다.
일광역으로 향하는 꿈길 5리 신작로 꽤엑~ 기적 소리 높게 옅어지는 어둠을 헤쳐온 기차는 덕지덕지 시골티 나는 소년을 도시의 학교로 데려다준다 새벽을 달려온 기차가 취이~췩 하이얀 증기를 내뿜으면 플랫폼은 하늘 세상이 되고 한 무더기 학생들은 천사 되어 기차를 탄다 하늘의 역에서 탔을 것 같은 소녀가 얼굴 발개지며 도시락으로 무거워진 책가방을 받아주면 소년의 가슴은 증기기관차 되어 쿵쾅거리고 넘치도록 꾹꾹 눌러 담은 도시락은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시골농부, 엄마의 사랑 넘치는 사랑, 김칫국물은 뛰는 가슴으로 흐르고 여학생 가방으로 흐르고 소년은 부끄럽고 미안하여 어쩔 줄 모르는데 소녀의 얼굴은 들꽃 한 송이로 수줍게 피어나고...
마침내 동이 트면서 기차는 넘실거리는 청사포 앞바다를 보여주고 소년은 하늘 소녀 이야기를 바다 깊숙이 넣어두고
- <하늘 소녀 이야기> 전문 -
이 시는 동해남부선 완행열차를 타고 도시 학교를 다녔던 시적 화자의 유년기 삶을 관통하면서 청소년기 추억을 실어 나른다. 삶과 유리된 수필은 삶을 해친다.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의 추구는 삶의 질을 높이지 않는다. 인간행위의 모든 산물은 삶과 격리되어 있지 않다는 명제를 전해주는 이 시는 그래서 아릿한 추억이 흘러넘친다. 톨스토이는 지극히 단순한 마음, 평범한 사람이나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것, 남의 기쁨을 기뻐하고 남의 슬픔을 슬퍼하며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것을 예술이라고 하였다. ‘하늘의 역에서 탔을 것 같은 소녀가 얼굴 발개지며 도시락으로 무거워진 책가방을 받아주면 소년의 가슴은 증기기관차 되어 쿵쾅거리고 넘치도록 꾹꾹 눌러 담은 도시락은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시골농부, 엄마의 사랑 넘치는 사랑, 김칫국물은 뛰는 가슴으로 흐르고 여학생 가방으로 흐른다’는 대목에서 진정으로 삶을 생각하고, 삶 속에서 삶의 길을 열어가는 공존의 풍경을 자유롭게 그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청춘의 고백서다.
인생이란 세월을 전제하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것과 시간의 흐름은 당연히 연속되는 사건을 만든다. 사건들은 인생의 긴 행로를 따라 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축적된다. 세월이 우리에게 나이만 무게를 보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중년을 넘어서고, 노년으로 접어들면 우리의 등 뒤에는 세월의 부피만큼 온갖 기억들도 무겁게 쌓여간다. 삶이라는 것을 소재로 하여 생명감이 넘치는 시를 써내는 것이 정진실 시인이 해낼 책무다. 그러하기에 제1시집을 내고난 후, 더 빠르게 질주하는 세월을 놓칠세라, 한 점 한 점 그림을 그리듯 시를 쓰며 제2집에 자기 내면의 목소리는 물론 사회의 목소리, 시대와 역사의 목소리도 흐름도 시 속에 담아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모진 세월
살구꽃 지고
찔레꽃 하얗게 필 때면
아버지께서는 닳아빠진 흰 고무신 신으시고
어김없이 소작小作논이 있는
달음산 아래 떡지와 정골로
소를 친구 삼아 지게 지고 가셨다
물 담은 논은 그랬듯이
낮은 산과 구름 뜬 하늘 담아 반겨 주었고
당신께서는 늙은 소 앞세우고
맨발로 써레질하셨다
그곳의 곡식으로 나는 컸다
철들어 장가가던 날
논두렁에 핀
찔레꽃보다 흰 셔츠 입으신
아버지의 구두는
빛나는 검정이었다
- <아버지의 구두> 전문
이 시를 읽으면, 정진실 시인은 영롱한 빛살들로 가득 찬 그리움의 세계를 가진 작가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정진실 문학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아버지로의 지향성이다. 그 그리움의 귀착지는 아버지의 흰 고무신과 검정구두다. 시의 첫 연부터 마지막 연까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한마디로 절절한 사부곡이다. 이는 그만의 독특한 정서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정성, 부정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아버지의 구두’가 입증한다. 겉에서 보면 부자간의 인연이 화소가 된 것 같은 인상이 강한 작품이나 주제의식은 강한 부정의 표현에 있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 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 자식을 사랑한 아버지의 마음을 시인은 장가가는 날 아버지가 입은 셔츠와 구두로 잘 형상화해내었다.
<아버지의 구두>라는 시는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정, 부모를 향한 자식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교차적으로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정진실은 이런 진리를 ‘구두’라는 제재를 통해 잘 보여준다. ‘논두렁에 핀/ 찔레꽃보다 흰 셔츠 입으신/ 아버지의 구두는/ 빛나는 검정이었다’는 문구는 부정의 무한한 사랑을 절정으로 표현한 대목이다. 아버지의 셔츠와 빛나는 구두가 부자지간에 오고가는 사랑의 화음을 보여준다. 구두의 상징성에 뭉클한 감동이 드는 것은 부자지간의 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아버지의 헌신에 대한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시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정 시인의 시가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실함이 인정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정진실 시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Ⅲ.
시인은 현대 시작법의 대표적 기법인 중층묘사로 사물과 관념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시인 자신이 갖고 싶은 세계를 잘 변용시켜 자신의 시학을 완성했다. 정진실의 시는 '시는 이미지다'라는 명제와 ‘시는 현실과의 미적거리에서 창조된다’는 시학원리에 딱 부합한다. 왜냐하면 시적 대상과 시인의 거리가 밀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는 곳곳에 상징과 은유가 있으므로 한층 확장된 시적 맥락이 살아나게 된다. 이루고자 하는 생각대로 시를 완성하려면 그 의도한 만큼 표현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창작에서 구체적 형상화란 불가결한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암시성과 입체성이 있다. 상징적인 언어가 은유되어 있어 문학적 성취가 빛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거리, 실감과 정서의 거리는 정진실 시의 미적 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삶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대상을 응시하고, 그 대상을 직접적인 시의 대상으로 삼되 미적 경로라는 프리즘을 가지고 미적으로 응시하는 정진실 시인의 미의식이야말로 바로 시를 쓸 때 기본으로 삼아야 할 자양분이 아닐 수 없다. 가슴에 문을 닫고 나와 나, 나와 식물, 나와 동물 사이에 벽을 높이는 단절의 공간에서 자기도취에 만족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인이라면 정진실은 가슴과 눈을 열어 세상이 보내는 발신음을 듣고자 세계 속에서 언제나 내포적 자아를 취한다. 여러 가지 형상으로 다가오는 사물을 직관하고, 정서적 반응을 보이며, 사물의 속살을 환히 볼 수 있는 시안을 가졌기에 그가 창조해낸 생산물은 결코 예사로울 수가 없다. 정진실 시인 역시 시인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저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시집은 사물이 주는 상황과 심리적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화해의 구도로 응축되는 ‘공존’의 미학을 드러내는 작품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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