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9] 장덕희(張德姬) - 눈물 속에, 감사 속에 3. 나는 기적을 지켜 보았다 - 1 1 58년 12월에 협회 40일 수련회가 있어서 수련회에 참가했다. 그때 나이 56세 때이다. 나이 탓인지 아무리 성경 구절과 원리 대의를 외워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남에게 뒤질세라 수련생이 모두 취침하고 있을 때면 성전에 나와 오버를 뒤집어쓰고 암기하기를 힘썼다.
2 내 모습을 본 선생님께서는 “늙은 학생이 수고한다”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며 “사람이 한 일을 사람은 다 모르지만 하늘은 알며, 하는 일에 사람의 칭찬을 받지 않는다 해도 좌절하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셨다.
3 나는 곽정환씨 곁에서 강의를 들었는데, 가끔씩 졸 때가 있으면 곽정환씨가 내 노트를 가져다가 정리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 청년이 내게는 참 좋게 보였다. 귀한 말씀을 듣는데 졸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도 깨우지 않고 노트에 기록해 주는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4 40일 수련을 마치고 험한 고생을 해 보고 싶어서 전도를 자원했다. 임지는 목포로 결정되었다. 차상순(車相淳) 목사, 김희옥(金喜玉) 권사, 강현실(姜賢實) 전도사가 다녀갔지만 기반이 닦이지 않은 곳이었다.
5 목포에 도착한 때는 59년 2월이었다. 도착해 보니까 집회할 방도 없었고 식구들도 없었다. 이 집사 댁 마루에 칠판을 걸고 강의를 하다가 최 집사가 자기의 방과 마루를 내주어서 교회로 썼다. 최 집사 댁에서 집회를 하게 되자 학생들 30여 명이 들어왔다.
6 그러자 기성 교인들의 반대가 노골화되었다. 반대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금식을 하기로 했다. 당시 전라지구장이었던 황환채(黃煥菜) 지구장이 21일 금식을 시작했다는 편지를 받고 울었다. ‘귀한 아들이 왜 금식을 해야 하나’ 하고.
7 그때 군산에서 수련회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군산 교회에 도착했다. 수련을 시작하기 2일간은 ‘고생은 황금을 주고도 사기 어려우니 고생을 하라’는 표어 아래 남자 식구들은 모두 노동판에서 막일을 하고 여자 식구는 쌀 4말씩을 사서 머리에 이고 다니며 쌀장사를 했다.
8 전도사로서 마을에 파송되어 어떤한 고생을 하더라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신념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쌀장사를 마치자 왕복 30리나 되는 청하 교회를 도보로 가 보자고 해서 청하 교회를 다녀왔다.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9 군산에서 또 이리 교회까지 도보로 가자고 해서 출발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젊은 사람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금식을 하는 황 지구장이 나를 붙들다시피해서 따라가는 입장이었다. 역시 젊음이 좋은 것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10 이리 교회가 눈앞에 보일 정도까지 왔을 때는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리 교회에 도착한 뒤 교회를 둘러보고는 젊은 사람들은 또다시 걸어간다고 하며 교회를 떠났다. 책임자, 책임자는 할 말이 있어도 못하고 참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