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체육복을 읽는 아침 8. 오빠도 술이 웬수다 240509
지방 소도시나 읍면 지역에서는 퇴근 후에 할 만한 일이 별로 없다. 그 지역 출신이 아니라면 만날 사람도 없고 자가용이 없으면 갈 수 있는 곳도 한정적이다. 선배 교사들은 초임 교사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들로 인해 나의 저녁 시간은 거의 매일 술자리로 채워졌다. 낮 동안의 격무와 거친 아이들과 씨름하는 일로 지쳐 저녁엔 좀 쉬고 싶어도, 그 선배 교사가 만약 내 또는 근처 관사에 살고 있다면 도망갈 곳도 없다. 선배들이 나를 위로하러 일부러, 굳이 찾아와 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도 그날 해야 할 업무를 채 다 마치지도 못한 채 선배들의 호출로 시내 모처에서 마구 때려 부은 술을 게워 내던 참이었다. 지금이라면 요령 있게 꺾어도 마시고 화장실에도 자주 가고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했으련만 그때는 여러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그 자리에 붙박이로 있으면서 주는 대로 넙죽 잘 받아 마시는 게 사회생활이라 믿었다.
그 덕에 아직은 싱싱하던 내 간이 알코올의 침략을 자주 거부했고 위장의 펌프질로 내 식도는 늘 역류성 질환에 시달렸다. 좀 전에 먹었던 산 오징어가 중력의 방향을 거슬러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순간, 그날은 다시 그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훅 불어오는 유월의 더운 바람을 등진 채 정한 데 없이 걷기 시작했다.
몇 분이나 걸었을까. 생각은 멈췄지만 내 발길은 다시 불이 환하고 사람들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대로로 향하고 있었던 듯하다. 문득 낯모르는 사람들 틈에 행여 휩쓸리지 말라는 듯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머! 오빠!”
이상하다. 나는 여동생이 없다. 나를 오빠라는 호칭으로 부를 만한 후배도 이 타지에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내 귀에 이런 말이 들리지. 그 말은 곧 청각이 아닌 촉각으로도 다가왔다. 누군가 내 오른편 팔짱을 끼며 다시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야 인마! 죽을래? 이게 어디서 선생님한테 오빠래 오빠는! 이거 안 놔?”
오늘 낮에도 학교에서 국어 수업을 함께 했던 하영이였다. 학교에서도 가끔 복도를 지나가는 내 뒤에 달려와 업히거나, 뒤에서 배를 껴안는 것과 같은 선을 넘는 장난을 종종 치는 아이였다. 그날도, 손바닥만 한 짧은 치마, 어울리지 않게 새빨간 립스틱, 얼근하게 취한 듯 얼굴도 벌겋게 달아오른 하영이가 손에 라이터와 담뱃갑을 쥐 채 내 팔에 매달려 있었다.
“술 드시러 오셨어요? 쌤들 회식이에요?”
물속에서 소리를 듣듯 허우적거리다 오만 가지 생각이 스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여나 학부모들이 이 번화가를 지나가다 웬 술 취한 어린애랑 실랑이하고 있는 걸 보기라도 하면, 학원이든 알바든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학생들이 이 모양을 보기라도 하면, 문득 술에서 깬 이 녀석이 멀쩡하게 팔짱을 대 주고 있는 날 보고 이 인간이 날 추행한다고 생각이라도 하면, 어떻게 고생하며 된 선생님인데 이런 사소한 일로 오명을 쓰고 그만둘 순 없었다. 팔을 뿌리치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대체 이런 경우엔 어떻게 대처해야 자연스럽고 노련한 건지 선배들에게 물어보기 위해 아까의 그곳으로.
다행히 시간이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내가 오징어와 재회했던 그곳에 선배 몇이 담배를 문 채 서 있었다. 대체 어딜 갔다 왔냐는 몇 마디 잔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다시 끌려 내려갔다. 분명히 1차로 삼겹살을 먹고 2차로 노래를 부르자고 해서 따라온 곳인데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온 곳은 사뭇 분위기가 좀 끈적해져 있었다. 함께 왔던 이들 중 몇몇은 집으로 돌아갔고 남은 이들 중 누군가가 즐거운 분위기를 도와주시는 아주머니들을, 그러니까 도우미님들을 몇 분 불렀던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없어서 그쪽은 잘 쳐다보지도 못하고 앉아서 맥주만 홀짝거리는데 옆자리에 앉은 선배가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야, 야. 자연스럽게 행동해.”
“예?”
“저기 저 아줌마, 2학년 준하 엄마잖아.”
“예에?”
놀란 내 표정을 봤는지 못 봤는지,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의 일들에 충실했다. 마시고 싶은 사람은 마셨고 엉키고 싶은 사람은 엉켰고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은 불렀다. 내가 맡은 담임 반에도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아빠와 연락은 되지만 생업 때문에 다른 지역에 살아서 얼굴을 보는 건 드문 듯했다. 양육비 분담도 불분명했는지 학기 초에 상담할 때 엄마가 저녁에 노래방 도우미로 일한다고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말하기에 아는 사람의 가게 일을 도와주시거나 노래방에서 일하시더라도 카운터를 보거나 주방일을 하시는 걸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했다. 그 기억과 겹쳐 저편을 보노라니, 아이에게 학비와 버스비와 밥값을 쥐여 주기 위해 이 밤중에 처음 낯모르는 남자와 어울려 저 감정 노동을 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는 떳떳하게 낮에 일하는 학습지 교사, 요구르트 배달 또는 하다못해 식당에서 설거지라도 하지 않겠느냐고 함부로 말하지 못하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노래가 점점 잦아들고 다들 몸속에 흐르는 게 물인 술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질 무렵, 그 아주머니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삼촌은 말씨가 다른데? 어디 저 밑에 지방에서 왔어요?”
“예. 티가 났나 봐요. 부산에서 왔습니다.”
그는 갑자기 자기 핸드폰을 꺼내 웬 젊은 여자의 사진을 보여 줬다.
“우리 애가 부산에서 대학을 다녀요. 멀리 보내 놓고 용돈이고 뭐고 잘 보내 줘야 되는데.”
하며, 묻지도 않은 그 여자의 고교 시절, 대학 입학에 얽힌 이야기에 이어 그 댁의 가정사까지 줄줄이 꺼냈다. 나는 그의 잔을 연신 채워 주며 중간에 이야기가 끊이지 않도록, 그의 도우미가 되어주었다. 쿵짝거리는 노래의 흥겨움과는 반대로 그의 목소리가 잠시 울먹이는가 싶더니 노래가 끝나는 타이밍에 살짝 앞서
“우리 애랑 나이가 비슷해 보여서 별 소릴 다했네요.”
하는 말로 우리의 대화와 노래방의 시간은 끝을 맺었다.
그때 내가 주로 술 마시러 가던 그 도시는 제조업이나 생산 관련 산업 기반이 거의 없고 주로 관광업에 의존했다.
그래서 학부모들 가운데 유흥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꽤 있었고 아이들도 졸업하고 나이트클럽 웨이터, 노래방 도우미 등으로 활발히 활동(?)한다는 풍문을 자주 들었다. 내가 학교에서 이 아이들에게 무언가 가르쳐서 ―무엇을 배웠는가 와는 별개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시키더라도 이 사회는 그들을 학교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봐 주지 않고 적당한 울타리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양질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이 청년들이 진입할 수 있는 일자리는 적고, 그중에서도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는 더욱 없는 대신 곳곳에 ‘여성들만을 위한 대출’,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부업’과 같은 달콤해 보이는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현실을 보지 않고 교실 안에서만 달콤한 시를 읊고 맞춤법을 가르치는 건 기만에 가깝지 않은가. 내가 그들의 나중의 삶을 책임져 줄 수는 없지만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적어도 내가 하는 말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이 사회의 모습부터 보아야 했다. 학교에만 매몰되는 나를 들어올려야 했다.
지금 그 여자는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엄마의 바람만큼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잘 지내고 있을까, 상상해 본다.
그 밤의 노동을 통해 흘러간 엄마의 돈이 그 여자에게 어떤 열매로 맺혔을까를. 나처럼 교실에서 뭔가 먼저 공부해서 알게 되었을 뿐인 것들을 아는 체하는 노동만이 귀한 것이 아니라, 민망함과 구차함을 참고 낯모르는 사람을 도와가며 한 노동 역시 똑같이 아이를 기르고 삶을 이어가는데 소용되었음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선생도 하나 만들어졌다고, 전하고 싶은데, 전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