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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추억 #46, 그리운 선님들
그들은 모두 내 또래요, 친구요, 동료들이었다. 철모르는 어린나이에 세칭 동방교의 사이비 이단사설 꾀임에 빠져서 부모형제를 등지고 학업도 팽개치고 빈집초월(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기위해 무단가출하여 집을 나오는 것을 말하는 세칭 동방교의 은어-隱語)해서, 번화한 도시의 중심가 술집이나 다방, 점포에 들어가 하루종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껌팔이를 하면서도 그들은 행복했다.
이제 곧 세상의 끝이 오고 하늘에서 불심판이 내려 온 세상이 멸망하게 되고 그때 우리는 구원받아 하늘로 휴거해서 천년왕국에 이르러 온갖 복락을 누릴테니까 희망에 부풀어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노광공교주)의 특별한 은총으로 선택되어져 손에 잡힐듯이 눈앞에 닥아와 있는 이 엄청난 행운을 믿지 못한다면 이들은 아마 초라한 행색으로 껌을 팔고 있는 오늘의 자신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연단선님은 천년왕국에서 ‘왕의 씨’가 된다고 가르치고 다섯 데나리온 바치면 다섯 고을 다스릴 권세를, 열 데나리온을 바치면 열 고을 다스릴 권세를 받는다는데야 어찌 열심을 내지않고 분발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외인이 들으면 허무맹랑한 이런 소리도 당사자인 연단선님들에게는 타오르는 열정에 기름을 끼 얹는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
어떤 고난과 난관에도 버티어 나갈 수 있는 힘찬 동력이 되는것이다.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내밀한 분위기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행상을 하고 껌을 팔아 갖다 바치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내가 맡은 아주 적은 부분만 순회를 다녔으니까.
지금에 와서 눈감고 아웅하듯 기성교회인것처럼 위장하여 멀쩡하게 기독교연 하는 교단명칭으로 예수교 장로회라는 간판을 붙여놓고 인간의 영혼을 도적질하는 이 이단사이비 종교집단 무리들의 재력 밑바탕은 여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반 신도들의 억지 지성강요(재산갈취)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 세칭 동방교의 교리를 설파하여 신앙심을 끌어올리고 군림하는 자세로 책임점수(그날의 헌금목표)달성을 독려했지만 그들은 내 또래요, 친구요, 동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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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이 이단집단에는 일반 신도들이 잘 알지 못하는 ‘선님’이라고 부르는 부류의 신도들이 있다. 일명 ‘연단선님’이라고도 부르는데 참 희한한 명칭이다. 사찰의 스님도 아니고 한문으로는 쓴다면 아마 ‘先님’ 정도로 표기 할 수 있겠는데 아마도 ‘앞서 나아간다’는 뜻일 듯하다. 주로 빈집초월(무단가출)한 청소년들로서 다방이나 술집, 가게 등에 들어가 껌이나 손톱깎이, 볼펜, 악세서리 등을 파는데 그 행위를 ‘연단을 받는다’ 표현하고 그렇게 팔아 모은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을 ‘지성(헌금)’이라고 불렀다. 이 연단 선님들의 지성이 이 곳 이단집단의 자금을 축적하는 큰 원천이었다.
여기서 이들은 제일 보석같이 아낌을 받는 신도들로서, 선님들 각자가 매일 매일의 책임점수(상납금액)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달성하지 못하면 구타와 손찌검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폭행이라 생각하지 않고 사랑의 매, 즉 회초리, ‘초달(楚撻)’이라고 불렀다. 제일 많이 실적을 올리는(바치는) 부류들은 ‘일등 선님’이라고 해서 특별히 어여쁘게 관리를 하고 여사(餘仕) 잘못된 일이 발각되더라도 그냥 눈감고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잘못된 일이라고 해 봐야 기껏 배고픔을 참지 못해 붕어빵을 몇 개 사먹는 정도다. 감히 하늘에 바칠 지성으로 내 배를 채우다니…….
당시 경향각지의 매스컴에 자주 등장해서 탈도 많고 말썽도 많았던 이 집단의 일급비밀이었다. 각 주요 도시마다 수십 명, 전국적으로는 아마 수 백여 명이 훨씬 넘었으리라 짐작되지만 그 숫자는 나도 추정 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영혼을 도적질하는 이 무리들의 재력(財力)의 밑바탕은 바로 여기에 검은 노다지 황금이 매일 매일 굴러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선님들도 나이가 들고 하루살이 행상이 고달프고 지치게 되면 지성을 바치는 실적이 오르지 않게 되는데 그러면 일반 대기자로 물러나 앉게 된다. 물론 ‘정신이 희미해졌다(믿음이 약해졌다)’고 극심한 타박을 받은 후에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잡부수준의 하급 일반 대기자로 강등되어 내려앉는 것이다.
그래도 말세는 가까이 다가와 하늘의 진노가 임박해 있고 그때 휴거해서 하늘나라로 가야 한다는 세뇌가 아편중독같이 머리에 박혀 있어서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아, 누가 종교를 아편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들이 바로 나였고, 내 또래요, 친구요, 동료들이었다. 어느 날 선님들과 잠시 짬을 내어 모였던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선님 중의 그녀는 흘러간 옛 노래 한곡을 구성지게 불렀다.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나르고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
지금도 들리는 듯 하는 이 노래를 불렀던 그녀는 그 후 그 곳을 빠져나와 부모님이 계시는 가정으로 돌아가서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민 두 딸의 어머니가 되어있다. 이제 어쩌면 사위를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행복해라, 희정아… ]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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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단선님들과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들 가운데는 세월이 흐르고 의식이 깨어가면서 대부분이 허무맹랑한 사이비 이단사설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자신이 초월(무단가출)했던 빈집, 가정으로 돌아가 결혼하여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중의 일부는 아편쟁이같은 지독한 세뇌를 벗어날 수 없어 끝까지 대기처에 남아 지금은 대기자들끼리 짝을 구하여 결혼한 사람들도 있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않거나 혼기가 너무 지나버려 결혼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남녀 불문하고 내부적으로 끼리끼리 목사안수를 주고 받았는지,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모두 목사라는 명칭을 달고 목사 행세를 하면서 일부 대도시의 몇 개 교회를 제외하고는 옛날과 다름없는 가정집 수준의 집회장소를 교회라고 위장하여 몇 명 정도의 신도들을 규합하여 교회랍시고 운영하면서 곧 닥아올 세상의 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옹고집과 편협하기 이를데 없는 사고방식으로 2대 교주 노영구의 사망이후 주인없는 세칭 동방교는 지금 내부적으로 편이 갈라져 서로 입술에 담기 어려운 난타전과 폭행, 소송사태가 벌어지고 있는것이다. 그중에 나의 친구들과 후배들, 지인들도 아직 여러명 남아있다. 인간의 어리석음도 어떤 경우에는 죄가 되는 것이다.
세칭 동방교의 재물이 어떻게 모아졌던가, 모아졌던 이 재물은 현재 어떤 상태로 관리, 유지되고 있는가, 종교에 재물이 모이면 반드시 세력다툼이 일어나고 분파가 생기게 마련이다. 현 세칭 동방교의 재력과 그 다툼을 엿볼수 있는 일면이 있다.
서울의 안국동 사거리에서 헌법재판소길을 따라 북촌한옥마을 쪽으로 계속 걸어가다 보면 대지 200여평에 연건평 약 800여평에 이르는 지하2층 지상 5층의 세칭 동방교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 한빛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세칭 동방교의 교회도 있고 입구에는 ‘청남문화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청남(靑南)’이라는 명칭은 ‘청해(靑海)'와 '부남(夫南)’에서 한자씩 따와서 사용하는 것인데 ‘청해(靑海)’는 세칭 동방교의 창설 교주 노광공의 호((號))이고 ‘부남(夫南)’은 노광공의 둘째아들인 2대 교주 노영구의 호(號)이다.
그렇게 모아져서 마련한 제법 값 나가는 빌딩은 또 있다. 이러한 빌딩들을 소유하게 된 그 많은 자금의 원천속에는 어린 나이에 뼈 빠지게 연단받아 바쳤던(이단의 추억 #10, 어떤 연단 Ⅰ, 이단의 추억 #11, 어떤 연단 Ⅱ) 내 지성(헌금)도 그동안 새끼쳐서 상당한 금액이 들어 있으리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강남의 노른자위 테헤란로를 따라 선릉역 5번출구에서 조금 걸어가다 저축은행 우측으로 들어가면 ‘삼영빌딩’이라는 대지 150여평에 지하1층 지상5층 연건평 750여평의 건물이 번듯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의 3층에는 평소 문이 굳게 잠겨있는 강남한빛교회도 있고 4층에서는 현재도 ‘주간 기독교’라는 주간지가 발행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법 값 나가는 빌딩은 또 있다. 용산에서 한강대교를 타고 노들섬을 건너 상도터널사거리와 만나면 인근 강남초등학교와의 사이 일방통행길 안쪽에 ‘사회복지법인 청해복지재단’이라는 간판이 새겨진 5층짜리 붉은색 벽돌로 외벽을 장식한 건물이 있다.
지하철 숭실대입구역에서 상도역쪽으로 가다가 상도역에서 우회전, 상도터널 사거리에서 일방통행길로 강남초등학교쪽으로 가다가 보면 안쪽길에서 만나지기도 한다. 바로 ‘청남빌딩’이다. 이 건물 3층에 ‘청해복지재단’이 자리하고 있다. '청남빌딩'에 '청해복지재단'이라. . .
세칭 동방교에서 무슨 복지사업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자못 요상하다. 세칭 동방교에는 7-80대에 이르는 고집불통의 골수분자 할머니들이 아직 꽤 생존해 계신다. 그 옛날의 충성스런 연단선님 출신이거나 빈집초월(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기위해 무단가출하여 집을 나오는 것을 말하는 세칭 동방교의 은어-隱語)한 대기자 출신들이다.
이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세뇌된 사이비 이단사설의 아편같은 마약중독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노광공은 창조주 하나님이요 심판의 재림주가 되신다. 그 아들 2대 교주 노영구는 성자 하나님인 것이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 .
세월이 무던히도 흘러 그들은 이제 갈 곳도 마땅찮고 그동안 가족과는 벽을 쌓고 살았으니 반겨줄 가족이라고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론가 떠나봐야 별 볼일이 없으니 떠나 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동방의 의인, 감람나무 박태선장로의 부활을 애타게 기다리며 감람나무께서 부활해 돌아오시면 타고 다닐, 대한민국 대통령들이 타고 다녔던, 링컨 컨티넨탈 차고의 가로로 된 스텐 샷타봉을 하염없이 닦고 계시던 전도관의 허리굽은 할머니(이단의 추억 # 20, 정 야베스이 고백)같은 분들이 생존해 계신다.
그중에는 ‘샬롬 요엘’ 저자의 누님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 80에 가까운 연세이시리라. 단란한 가족들에 둘러싸여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후손들의 팔순잔치 재롱을 즐겨야 할 연세이신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러한 분들은 지금 독신에 가족조차 없으니 정부로부터 지급되는 상당한 금액의 기초생활수급자 생계비 지원이 있을것이다. 이러한 돈이나마 이런 저런 핑계를 붙여 빼앗지말고 세칭 동방교에서 운영하는 '청해복지재단'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잘 보살펴 주고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낙원상가에서 운현궁방향으로 가는 인사동의 외곽길, 안국역 5번출구에서 나와 낙원상가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대로변에 대지 약250여평, 연건평 1200평이 넘는 규모의 지하2층 지상10층짜리 ‘이양원빌딩’이라는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 있는데 역시 세칭 동방교 소유 건물이다.
이 빌딩에는 ‘부남미술관’(관장 홍춘표)이라는 갤러리가 개설되어 있다. 빌딩과 미술관 개관등에 따르는 자금력의 바탕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부남미술관’을 소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미술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2006년 4월 29일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인사동)에 평소 문화, 예술에 애정이 깊으셨덙 故 夫南선생님의 뜻에 부응하고자 미술관을 개관하였으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뜻있는 전시회를 기획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훌륭하신 작가선생님과 역량있는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모시고자 많은 홍보에 주력 및 지원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부남미술관’ 관장의 인사말도 올라와 있다.
부남미술관은 설립자의 삶에 있어 많은 인생의 가르침과 지도, 편달을 해 주셨던 부남(夫南)선생님께서 생전에 문화, 예술에도 관심과 사랑이 깊으셨던 바 제자 된 도리로서 미약하나마 스승님의 뜻을 기리고자 스승님의 호를 빌어 갤러리를 개관하였습니다. 평소 이웃사랑과 나라사랑을 몸소 실천하시고 보여주셨던 스승님의 뜻에 부응하여... (이하생략) ]
여기에서 '부남(夫南)선생'이라고만 지칭하고, 미술관 설립자의 삶에 있어 많은 인생의 가르침과 지도, 편달을 해 주셨던 스승님, 그 스승님의 호를 빌어 갤러리를 개관했다고 하는 그 스승님의 실명은 공개되어 있지않다. 세상에 드러내기 껄끄러운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알아줄만한 자랑스러운 이름도 아니다.
부남(夫南)선생, 바로 이사람이 세칭 동방교의 교주 노광공의 둘째 아들인 2대 교주 노영구를 말한다. 노광공의 호는 ‘청해(靑海)’이고 그의 둘째 아들인 노영구의 호는 ‘부남(夫南)’’으로 지어 사용했다.
그리고 ‘부남미술관’의 홈페이지에 공개되어있는 갤러리의 관장은 바로 세칭 동방교가 기독교의 일반 기성교단으로 이름을 바꾼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교단-교단의 명칭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부산한빛교회 인터넷사이트/교회소개란에 등재되어 있는 내용을 인용- 전 총회장 홍춘표, 바로 그 인물이다.
세칭 동방교의 경주교회 출신으로 일찌기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천국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에 들어간 신도들중의 한사람이다. 생전에 부남(夫南)선생(노영구)이 언제부터 문화, 예술에 깊은 관심과 사랑이 있었으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평소 이웃사랑과 나라사랑을 몸소 실천하시고 보여주셨는지는 참으로 아리송하다.
바이올린을 제접 잘 연주하던 세칭 동방교의 어느 목사가 앞으로의 시대에는 사람이 피아노 정도는 칠줄 알아야 된다고 설득하여 노영구를 피아노 교습소에 데려다 주어 겨우 바이엘을 뗄가 말까한 정도였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살던 어린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와전되어 세칭 동방교내에서는 아브넬 할아버지(노영구를 지칭)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친다고 은밀히 알려져 있었는데 나는 한번도 그가 피아노를 치는것을 보지 못했고 목격했다는 이야기도 들은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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