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40] '세한도' 소장史에 담긴 한일 父子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0.08.28. 03:14
우리나라 문화재 컬렉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작품을 꼽자면, 단연 '세한도(歲寒圖)' 아닐까. 1844년 추사 김정희가 유배 시절 도움을 줬던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보낸 이 그림은 180년 동안 10명의 주인을 거쳤다.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과 아들 김준학을 거쳐 한말 권세가인 민영휘 집안으로 넘어간다. 민영휘 아들 민규식을 거쳐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가 수집해 주인 따라 바다를 건너가기도 했다. 1944년 컬렉터 손재형의 노력 끝에 극적으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주인은 계속 바뀐다. 손재형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이근태에게 그림을 저당잡혔고, 이후 개성 갑부 손세기 소유가 됐으며 아들 손창근씨가 물려받아 소중히 간직해왔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1844년). 국보 제180호.
이 굴곡진 소장사(史)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있다.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 누구보다 추사를 흠모하고 열정적으로 연구한 학자였다. 1926년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해 서울에 온 그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에 매료됐다. 서울과 베이징의 고서점을 훑으며 부지런히 추사 유품과 자료를 사 모았다. '세한도' 역시 그런 노력의 산물이었다. 1943년 그가 '세한도'를 들고 일본으로 돌아가자, 얼마 뒤 손재형이라는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러고는 100일간 문안하며 '세한도'를 내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후지쓰카는 그 귀한 작품을 생면부지의 한국인 젊은이에게 아무 조건 없이 내주었다. "그대 나라의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며 돈 한 푼 받지 않았다. 일본인 후지쓰카가 국보 '세한도'를 한국에 기증한 것이다.
그리고 62년이 흐른 2006년 2월, 이번에는 아들이 기증에 나섰다.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는 아버지가 수집했던 추사 친필과 관련 자료 등 2700여 점을 경기도 과천시에 기증했다. 당시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사람이 공수래(空手來)는 못해도 공수거(空手去)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받아서 고마워하고 기뻐할 사람에게 줘야 유물의 생명이 살아있는 것 아닌가."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재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한국이라고 믿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아버지의 수집품을 돈으로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사 자료실에 써 달라며 과천시에 200만엔까지 기부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허윤희 문화부 차장
지난주 '세한도'가 드디어 국민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 일본인 부자(父子)를 떠올렸다. 대(代)를 이어 선행을 실천한 후지쓰카 부자처럼, 이번엔 개성 출신 한국인 가문의 나눔이 퍽퍽한 우리 마음을 적셔 주었다. 개성 갑부였던 손세기는 일찍이 인삼 무역과 재배로 부(富)를 일궜다. 평생 신용(信用)과 근검절약을 철칙으로 삼았으나 고서화 수집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그렇게 모은 서예·회화 200점을 생전 서강대에 기증했다. 다른 대학도 접촉했으나 서강대 외국인 총장이 가치를 알아보고 반색해 기증을 결심했다고 한다. 선친의 정신을 계승한 손창근씨는 시가 1000억원에 달하는 경기도 용인 땅을 국가에 선뜻 내놓았고, 대를 이어 수집한 컬렉션 304점을 아무 조건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다." 2018년 기증식에서 손씨가 한 말은 후지쓰카 아키나오의 말과 묘하게 닮았다. 어떻게 삶을 품위 있게 마무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준다. 손씨가 구순을 맞아 컬렉션을 몽땅 기증하면서도 '이것 하나만은 섭섭해 안 되겠다'던 작품이 '세한도'였다. 그 마지막 한 점까지 아낌없이 내놓으면서, 굴곡 많은 작품의 여정도 대미를 장식하게 됐다. 한일 부자(父子)의 대 이은 나눔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선의를 새삼 일깨워줬다.
허윤희 기자 편집국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