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임시정부와 기독인
상하이 임시정부의 요인들 |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기독인들은 임정 수립과 활동에 큰 역할을 했다.
임정의 모체였던 `독립 임시사무소'를 운영한 단체는 신한청년단.신한청년단은 1918년 여름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정당 형태로 결성됐다.장덕수 김구 서병호 송병조 여운형 김규식 등 단원중 종교를 밝힌 사람들은 모두 기독인이었다.신한청년단은 독립청원서를 작성,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에 주력했다.또 단원들은 3·1운동 이전 국내에 잠입,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신용하교수(서울대)는 신한청년단에 대해 “상하이는 3·1운동의 진원지였고,그 주체는 신한청년단이었다”고 평가했다.
임정 수립에는 신한청년단과 함께 상하이한인교회 교인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신한청년단 단원들중 상당수가 이 교회에 다녔다.또 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던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조소앙 신익희 등의 기독교인들이 임정의 요직을 맡았다.일제는 이같은 이유 때문에 상하이한인교회를 두고 “예수교를 이용,독립운동을 선전하고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며 경계했다.
신한청년단 외에 조선독립기성회와 대한신민단 등의 단체에서도 기독인들은 주요 역할을 맡아 활동했다.조선독립기성회의 경우 상하이 임정의 탄생과 함께 대한국민회로 개명했다.회장 구춘선,부회장 서상용 등 회원들은 대부분 기독인이었다.이 단체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과 연합해 봉오동 전투에 참여했고,대종교의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어랑촌 전투에 참여해 일제와 싸우기도 했다.대한신민단은 1919년 3월 북간도 왕청현에서 조직됐다.이 단체 역시 단장 김규면을 비롯한 대부분의 단원들이 기독인이었다.대한신민단도 독립군을 편성,중국 삼둔자에서 전투를 벌였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있던 곳. 기독인들은 상하이 임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
기독인들은 서간도 지역에서도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했다.최봉석목사와 오대규목사 등은 `급진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일제를 습격하려고 했다.또 즙안현의 기독인들은 천도교와 연합해 의용단 청년회 등의 단체를 설립,총장에 허선노장로를 추대하기도 했다.그러나 이같은 활동들이 1920년 10월 훈춘사건을 계기로 약화됐다.기독인들은 3·1운동을 전후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일제와 맞서 싸웠다.국내 기독인의 비폭력성향과 달리 국외 기독인들은 치열한 무장투쟁을 벌이기도 했다.민경배교수(연세대)는 “3·1운동과 관련,기독교회가 일제 집중살상·파괴의 첫 대상이었던 까닭은 겨례와 민주주의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교회는 독립운동과 별도로 사회의 도덕성 회복에 초점을 맞춰 활동했다.사이토 부임 이후 제출된 `재한선교사 연합협의회'의 개혁 건의서에 따르면,한국 교회는 유곽 폐지와 아편의 제조·판매금지,주류판매의 제한,미성년자의 금연령 실시,소년의 노동 제한,입옥자의 주일노동 반대 등을 요구했다.당시 일제는 도읍마다 유곽을 세우고,아편을 공개적으로 경작,판매했으며,술 담배를 통한 한국인의 도덕적 몰락을 방조했다.민교수는 이에 대해 “한국 교회는 3·1운동 직후 한국 사회의 도덕성 회복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면서 군국주의와 일제의 몰역사성에 도전,저항했다”며 “이같은 활동으로 한국 교회는 일제시대 사회를 이끌어가는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설명했다.
기독인들은 이와 함께 또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을 펼쳤다.1920년 7월 평양에서는 조만식장로와 김동원 김성업 등 50여명이 예수교서회에 모여 `조선물산장려회' 발기대회를 열었다.이 운동은 서울에까지 퍼져나갔다.유성준장로와 김윤수 백관수 등은 1922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총회를 열어 이 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발전시켰다.그러나 회장을 두지 않는 비조직적 활동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이에 따라 장려회는 1923년 1월 각 지방의 대표 1백50명이 모인 가운데 유성준장로를 이사장으로 선출,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 활동에는 서울 YMCA를 비롯한 교회 청년회와 부인회 등이 적극 가담했다.함흥에서는 1923년 1월 함흥 YMCA 회원 1천여명이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가두행진을 벌여 국산품 애용정신을 고취시켰다.
/전재우 jwjeon@kukmin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