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시를 쓰게 되었다 / 최병무
50이 되던 해, 새 천년이 도래한다고 떠들썩하던 그 무렵 -
불현듯 내 안에서 무언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日記처럼 생활의 소제목에 대하여 생각나는대로
써내려 갔다. 삶의 터전을 다시 필리핀으로 옮겨 쓴 글이
500여편이 될 무렵, 인터넷 카페를 알게되어 글을 올리다가
시인들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귀국하면 모임참석과 상호방문을
하기도 하였다. 그저 혼자 좋아서 쓰기 시작한 내 글이 때로는
과분한 평가를 받기도 하고, (무명)시인의 이름을 얻게 되고
내 작은 시의 집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풋풋한 고1
학창시절, 비교적 조숙했던 나는 조병화 시집을 읽게된 것과
김형석 교수의 생활인의 철학을 읽게 된 것이 내 시의 자양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1979년부터 2년여 사막의 추억이
오늘까지 내 시의 바람이었다.
500여편의 다듬어지지 않은 시를 쓰기까지 나는 다른 시를
읽지 않았는데, 내 안의 문자들이 生物이 되어 그후 20여년
시와 동행하는 날이었다. 내가 문맹이 아닌 것이 참으로
감사한 날들... 내 안의 소리와 생각이 아주 私的인 감정이
타인에게 共鳴할 때 한 편의 시가 될 것인데, 나는 고요한 소리,
현란하지 않은 소리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도 10여년 동안
시를 쓰는 동안 나는 다른 시인의 시를 읽지 않았던 것은
개인적으로 좋은 詩作의 출발이었다고 생각하며, 지인들에게
권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교훈적이거나 영탄조의
시를 쓰지 말 것, 절대로 모방하지 말 것을 경계한다.
내 문자를 얻은 후에 나는 겨우 시에 눈을 뜨고 10여년 전에
<淸韻詩堂> 블로그를 개설하여 비로소 좋은 사람, 좋은 친구를
만나듯 하루도 빼지 않고 시를 읽고 찾아다녔다. 淸韻詩堂은
쇠냇골, 내 작은 원룸 서재에 존경하는 임보 시인님께서
붙여주신 당호인데, 맑은 소리를 내라는 깊은 뜻에 이르기엔
갈 길이 아득하다. 지금은 시 쓰는 일보다 좋은 시를 읽는 일에
몰두한다. 20여년 동안 1,000여편의 자작시를 썼는데, 아직
나는 시집을 내지 않았다. 지인들은 시집 발간을 권유하지만
사이버공간이 있으므로 그간의 기록으로, 소장용으로
전자시집을 만든 이후로 지금도 미루고 있다.
50고개를 넘으며 시작한 글쓰기가 이제 70고개를 넘어섰다.
詩的인 삶은 아니어도 문자와 동행하는 노년은 至福이다.
언제나 마음은 분주하고 따뜻하다. 내 안에 문자가 운동한다.
좋은 시를 읽은 날은 지금도 가슴이 뛴다. 나의 건강비결이기도 하다.
시인이 많은 나라에 사는 행복, 일용할 양식처럼 소중한 詩여!
(2024.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