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기를 화장하여 재를 부모님 산소에 뿌려 달라고 말했다.
그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나는 먼 거리 여행을 했다. 먼 거리라고 하지만 거기는 내 모국이자 고향이 아닌가?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고 항공권 예약부터 잘못되어 시댁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기 시작했다.
예정보다 이틀 후에 나는 인천 공항에 내렸다. 긴 여행 끝에 동서를 만나고 반가운 나머지 iPhone에 sim card 바꾸는 일이나
한화로 환전 하는 일을 까맣게 잊고 공항을 떠났다. 잘 못된 시작은 계속 내 발목을 잡았다.
도착한 다음날이 남편의 기일이라 큰 동서와 시누이 그리고 나를 태우고 기사가 포천에 있는 시부모님 묘지에 데려다
주었다. 거기서 조금 가지고 간 재를 그가 원하던 대로 부모님 산소에 뿌려 주었다. 오고 가는 길에 단풍이 한창이었지만
나는 친지들과 연락을 하느라 동서의 전화기로 통화 하느라 단풍을 볼 여유조차 없었다.
시부모님께서 생존 하셨을 때는 서울에 가면 시댁에 머물었다. 나는 교통 편하고 중앙이라는 반포에 위치한 대형 아파트 단지의 게스트 하우스에 투숙하게 되었다. 단지는 엄청 컸다. 숙소에서 조금만 나가면 무슨 가게가 있다고 하는데 그들 발음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개 점심에는 약속이 있었고 아침과 저녁은 혼자 해결하거나 점심을 많이 먹은 날은 저녁을 먹지 않았다.
조카딸의 안쓰는 전화기를 빌려 거기에다 sim card를 넣었다. 받는 전화에는 부과료가 없고 내가 하는 통화는 시간제 였는데 이틀 만에 탕진 하고 말았다. 결국 다 쓰지 못하고 돌아 왔지만 조카딸이 5만원 상당의 시간을 더 충전 시켜 주었다.
이런 문제가 전과 다른 것이었다. 처음 한국을 방문 했을 때는 아직 cell phone 이라는 것이 없어서 집 전화로 모든 연결을 했고 밖에 나가서는 공중 전화를 사용 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직 나는 용감하게도 전철을 타고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창구 안에서 표를 팔던 사람도 없어지고 지금은 모든 것이 자동으로 되어 있다. 컴퓨터를 사용해본 사람은 자세히 드려다 보면 알 수가 있게 되어 있어 어느 역까지의 표를 산 후에 전철을 탔다.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기 위해 여러 번 사람들에게 물어야 했다.
내가 너무 일직 나가서 그 시간이 가장 붐비는 출근시간으로 차칸은 sardine can 처럼 꽉 차서 무엇을 잡을 데도 없고 잡을 필요도 없었다. 얼마를 가니 차츰 사람들이 내리고 좌석이 비어서 앉았다.
전에는 전철이 가는 구간이 그리 멀지 않았을 것이고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전철의 노선도 상당히 먼데 까지 가는가 보다.
분당의 한 역인 서현역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했고 조금 일직 나가 같은 자리에서 광수 오빠와 만났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약속한 친구와 교대를 했다.
16년 만에 찾아 간 모국은 초 고속으로 달리는듯 했다. 모든 것이 기계화 했고 사람들의 생활도 초 고속인 듯 보였다.
전철을 타고 멀리 가보았지만 시내에서는 주로 택시를 타고 다녔는데 기사들도 친절 하고 어떤 기사는 자기가 여행한 모든 나라의 모험담을 자랑 했다. 그리고 택시 안에는 여러 개의 GPS가 장착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4개 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찾아 가는 길의 navigator고 좀 큰 것은 아마도 도시 전체를 보는 것 같고 어떤 것은 거리의 상황을 영상으로 보는 듯 했다.
횡단 보도를 건너갈 때 육교를 넘던 일은 사라지고 보도 통행이 가능 했다. 그리고 복잡한 거리에서도 U-turn 을 하는 일이 전과 달랐다. 전철 안에서는 모두가 smart phone 으로 무엇인가 드려다 보고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를 거리는 휘황 찬란한 건물들로 차 있어서 여기가 어디냐고 계속 묻곤 했다. 사람들은 서울이 NY의 Manhattan 처럼 되었다고 말한다. 강남이 그렇게 변했다고 해서 내가 자란 강북이 변하지 않았을 리도 없다.
어느 날 혼자서 인사동에 갔다. 거기는 우리가 다니던 경성 유치원이 있던 곳이고 어느 지물포에 들어가서 종이를 좀 샀다. 젊은 점원이 너무 불친절 했다. 어느 화랑에도 들려 보지 않고 걸어서 사간동 우리 집을 향해 가면서 나는 이미 감상적이 되고, 나를 기다려 주는 이 아무도 없이 집 조차 사라진 집터 앞에서 울먹이다가 큰길에 나와 십자자각 사진을 찍었는데 한국일보 고층 건물이 그 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한 때 남편이 기자로 일하던 곳이다. 인사동이나 사간동도 다 변해 있었으나 그 지형은 내게 익은 곳이었다. 그 많은 인파들 그리고 외국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길에 돌아 다닌다. 의상을 대여해주는 곳이 즐비하고 한복을 입으면 고궁이나 박물관 입장이 무료라고 한다.
며칠 후에 나는 북촌에도 갔다. 전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다시 한번 사간동 우리 동네를 걸었다. 길 이름도 율곡로가 되어있다. 소격동으로 해서 가회동 그리고 게동으로 걸어 가면서, 북촌에 가면 한옥이 즐비하게 있어 주기 기대 했지만 큰길은 다 현대식 상가로 뒷골목 에만 한옥들이 있었다.
언덕이 높고 낮아 걸어 다니기가 힘들었고 거의 다 끝날 무렵에 가예헌을 찾았다. 배명승 박사가 기증한 한옥이라 반가워 골목으로 들어가 층계는 오르지 않은 채 밖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 나왔다.
도심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겨 갔고 강북에서 낳아 거기서 자란 나는 강남이 낯설고 서툴렀다. 바로 옆이 고속 터미널이라 거기를 중심으로 상가며 식당이 번성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상가에 걸어가서 쇼핑을 했다. 옷가게 주인이 나더러 피부가 좋다며 머리가 흰 것으로 보아 아마 70은 되어 보이고 몸 관리도 잘 했다고 칭찬을 했다. 한국의 옷이 좋고 싸다고 말 하지만 나는 물가를 몰라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샀는데 결국 싼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상술에 나는 더 주고 샀을 것이 분명하다.
이모님 한 분이 북아현동에 사시고 머지 않아 작품 전시회를 기획하고 계셔서 어머니의 서예와 내 소품도 찬조 출품 으로 기증 했다. 그렇게 내 여행 일자는 많은 친구들을 못 본채 흘러 갔다.
떠나기 하루 전날은 모교 이화대학에 이대 출신인 두 동서들과 함께 갔다. 대강당은 우리 재학 시절에 건축 되었고 운동장이 있던 곳에 새로운 초 현대식 건물이 있었다. 사진으로 본 적은 있으나 그 규모는 생각 보다 엄청 컸다. 우리가 다니던 小梨花大學은 大梨花大學 으로 변모한 것이다. 지하 4층으로 그 안에는 교실, 식당 은행 책방 문방구등 많은 상점들이 있었다. 조형미술대학으로 이름조차 바뀐 美大 건물도 뒤에 숨어 있어 찾아 가야 했고 새로운 박물관 건물도 있었으나 들어가지 않았다.
가족들이 한데 모이던 날 젊은 조카들에게 가족의 전화 번호며 주소를 iPhone 에 입력 시켜 달라고 했다. 내가 들고 간 iPhone 은 아들과 Facetime 할 때와 거기 입력한 정보들을 사용했고 조카딸 에게서 빌린 전화로는 현지 통화를 했다.
전화기 두 대와 iPad 까지 들고 다니느라 무거웠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내 작품 사진들을 보여주는 일은 몇 십년 거리를 단축 시키는 좋은 도구가 되기도 했다. 손주벌 되는 어린 애들에게는 내 종이 접기 사람이나 동물을 선사 했더니 너무들 좋아 했고 한 아이는 접는 법을 배우고 싶어 해서 잠시 가르쳐 주기도 했다.
90대의 이모님들과 외삼촌과의 재회는 뜻 깊었다. 시외에서 아직도 소아과를 운영하는 한 친구는 나오지를 못해 안달을 했다. 내가 찾아 가는 편이 빠를 것 같아서 택시를 타고 찾아 갔다. 시외에는 예전 서울 같은 어수룩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그런 곳이 아직 있었다. 그 친구는 시내에 잘 나오지 않는 듯 했고 오히려 내가 용감하게 찾아 가야 했다. 동네 식당에 갔는데 방 바닥에 앉아서 먹는 곳이었다. 좀 우려가 되었지만 참고 앉아서 갈비탕을 먹었는데 그 국물이 일미였다. 바닥에 앉아서 먹고 그날 밤에는 다리가 아파서 잠을 잘 못 잤지만 그 집 갈비탕 맛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이 좋은 것이었다.
전화번호도 거의 입력이 되었고 해외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나 친척들을 만났을 때 이미 나는 떠날 날이 가까웠다.
한국이 부강 해진 것을 보았고 감동을 한 것은 사실이나 예전 내가 살던 시절의 서울 그리고 한적 하던 도시와 거기 살던 정다운 사람들이 그립다. 책방 에도 들려서 새로 쓴 한국 고대사와 흑피옥에 관한 책을 사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나를 인도 해 줘야 할 친구들이 너무 멀리 교외로 이사 갔거나 건강상 문제가 있어서 오히려 내가 그를 안내해야 할 형편이었다. 많이 걸어 다녀 힘은 들었으나 나는 다리에 근육을 키워 귀가 했다. 단 어지럼증이 나를 괴롭히고 시차로 정신이 없다.
아마도 이번 모국 방문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내가 돌아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지만 한계에 도달 한 것 같다.
부강 해진 나라 나쁘지 않다. 그러나 거기서 전같이 따뜻한 인간의 정은 많이 줄어든 것을 느꼈다. 그 두 가지는 역 비례해야 하는 것일까? 지극 정성으로 나를 대해준 사람들도 있어 마음 훈훈했고 밤에는 긴 통화로 못 다한 얘기를 쏟은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모국 방문은 떠나간 남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한 방문 이었고 덕분에 넘치는 환영과 대우를 받고 돌아 왔다.
첫댓글 긴 글 이었지 만 단숨에 읽었습니다. 서울에 오셨을 때 뵙지는 못 했지 만 통화 라도 할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아직 이모님 댁에 가서 주신 판화를 받아 오지는 못 했지 만 곧 찾아 뵈울려고 합니다. 무슨 사는 일이 바쁜지 아직 북아현동에 못 갔습니다.
주량이의 이야기를 듣고는 참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가 벌써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믿어 지지 않습니다. 서울이 변한 것은 제가 40년전에 미국에 13년 살다 돌아 왔을 때도 같은 심정 이었습니다. 살던 곳이 모두 변해서 참 슬펐는데 그래도 지난 40년을 여기서 살아보니 그냥 옛날 같은 감정이 되 살아났습니다.
서울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 이때 16년이란 긴 세월이지요. 돌아가서 살게 된다면 얘기는 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잠시 방문 하고 돌아 오는 사람이 느끼는 점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제가 전화를 드렸을 때 얼른 누군지 모르셨지요? 기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지요. 잠시나마 통화는 반가웠습니다. 시간 있으실 때 찾아 가세요.
한화가의 글은 한국 여행을 총집약한 글이었습니다.
아주 잠깐의 만남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만남은 참 반갑고 기쁜 만남이었습니다.
좋은 노년의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또 만날 날이 오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