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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계년사 2⌟의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끝 1부 - 우리가 배운 폐정개혁안은 없다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조선왕조 말기의 역사 기록이다.
고종1년인 1864년부터 1910년 한일병탄의 역사를 시기별로 저술하였다. 이 책은 일제 침략자에 대한 항거와 독립협회 운동을 중심으로 시대를 기술하고 있으며 저자가 직접 경험한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서 특별히 독립협회에 대한 기록은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에도 불구하고 사가로서의 역사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결여 되어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 책에 나오는 동학 관련 기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동학 지도자들이 제시한 폐정개혁안 12개조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성숙한 민권의식과 평민들의 위대한 개혁정신을 보여준다.
1.동학교도와 정부 사이의 오래된 혐오감을 씻어 내고 서민을 위한 정사에 협혁할 일.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알아낸 후 엄밀히 징계할 일.
3. 횡포한 부호 무리는 엄히 징계할 일.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무리의 못된 버릇을 징계할 일.
5. 노비 문서는 태워버릴 일.
6. 일곱 가지 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패랭이는 벗도록 할 일.
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할 일.
8. 명칭도 없는 온갖 세금을 모두 없앨 일.
9. 관리 채용은 지체와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일.
10. 왜적과 간통하는 자는 엄히 징계할 일.
11. 공채와 사채를 막론하고 기존의 빚은 모두 없앨 일.
12. 토지는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하게 할 일.
1894년 5월 동학농민들은 일본군의 조선 진주 사실을 알고 '전주화약'으로 점령하였던 전주 감영을 떠나며 초토사인 홍계훈에게 폐정개혁안을 제출하였다.(어떤 기록은 김학진 전라 감사에게 제출했다고 한다) 개혁안의 내용이 당시 유교의 주자가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히 혁명적이었으므로 나는 그런 이상과 신념을 가지고 농민운동을 이끌어간 지도자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개혁안에 내포되어 있는 그들의 정의와 평등에 대한 염원 그리고 토지 균등 분배에 대한 신념에 감동하였다. 좋은 세상, 사람들이 다 함께 잘 사는 대동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조상들의 처절한 분투에 감사하며 그런 조상들이 계셨음에 깊은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자주 선각자인 동학농민지도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이 누구에게 그런 혁명적인 사고의 씨앗을 받았는지? 그런 사상이 어떻게 그들 안에서 계속하여 성장하였는지? 어떻게 신념으로 생명을 불사하는 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묵상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직접•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동학과 시대적 상황과 호남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사가들과 지식인들이 쓴 역사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배운 12개조의 폐정 개혁안을 찾았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추적해 보니 천도교인 ‘오지영’이 쓴 <동학사>라는 소설에 처음으로 기록된 것으로 나왔다. 소설을 아무리 역사를 근거하여 썼다고 해도 사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동학 농밍혁명을 영웅적으로 기술하고 싶은 우리 사가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소설의 기록을 마치 진짜 1차 사료인 것처럼 그대로 사용하였고 우리 후손들은 그사실에 놀라며 자부심을 가지고 배웠다. 12개조 폐정개혁안이 소설에 근거했다는 사실을 알면서 농민혁명의 선각자들에 대한 감탄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1894년 농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의 의미와 인내천사상에 공감한 농민들의 의식이 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과거 역사를 미화시키기 위해서 허구를 팩트로 기술한 사가들의 의도이다. 왜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허구를 팩트화시켰는가 말이다. 이런 역사 첨가와 과장이 비단 이 사건에만 있었겠는가? 이런 역사 왜곡이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일제는 동학농민혁명을 조선 농민들의 항일전쟁으로 보지 않고 처음부터 사교(邪敎)동학비도들의 난으로 치부해서 농민들의 항일운동을 역사에서 지우고자 하였다. 이런 심각한 왜곡 때문에 우리는 일제 침략에 저항한 조선 농부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참전을 지금도 교조신원운동과 부패한 조선 정치 개혁의 측면에서, 반봉건의 입장에서 접근하게 된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역사왜곡이나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처음부터 부패한 양반사대부를 겨냥하였기 때문에 개혁의 칼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양반 지식인들은 해방 이후에도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제의 심각한 역사 왜곡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역사 속에 박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 왜곡이라고 지탄하는 중국의 동북 공정과 일본의 고대사는 억지와 허구가 너무 심한 것일 뿐이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제국의 역사, 독재국가의 역사는 억지와 왜곡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허구를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것은 은 민족의 미래를 생각할 때 바람직스럽지 않다. 그러나 우리 민족, 우리 나라에 대해서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드에 우리 모두가 젖어 있으니 앞으로 더 많은 역사 왜곡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황현 저 ⌜오하기문⌟과 ⌜매천야록⌟, 윤효정 저⌜대한제국아 망해라⌟, 정교 저 ⌜대한계년사⌟를 읽었다.
아래는 정교 저 ⌜대한계년사 2⌟에 나오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부분을 조금씩 발췌하였다.
책에 써진 순서대로 발췌해서 단순하게 정리해본다.
1894년 여름 4월
○ 호남의 동학 무리들이 봉기하다.
이때 전라도 고부<서울에서 6백 리이다>군수 조병갑이 백성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음이 더욱 심했다. 백성들이 원한을 이기지 못하여 무리를 모아 소요를 일으켰다.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해 실정을 자세히 조사해 밝히도록 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태편스럽게 놀면서 시간만 헛되이 보냈고, 또한 이 기회를 이용해 백성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니, 도리어 민심이 더 소란해졌다. 이에 시골 백성들이 전(前) 녹도만호 전봉준을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드디어 3월 25일 동학의 무히 모두 5~6만 명과 함께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손에는 누런 깃발을 들고 4개항의 명문을 내걸었다.
“하나,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재물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둘, 충•효를 함께 갖추어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
셋,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 없애고, 성인의 도리를 맑고 깨끗이 한다.
넷, 군사를 몰아 서울로 들어가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자들을 모두 없애버린다.
기강을 크게 떨치고 명분을 바르게 세워 성인의 가르침을 따른다.”
○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동학 무리들을 치다.
홍계훈은 초토사로 임명되어, 장위영 병사 8백 명을 데리고 난리를 일으킨 무리를 토벌하여 가게 되었다. 4월 2일 전주를 향해 떠났다. 청나라 군한 청원호, 또 우리나라의 증기선 창룡호, 한양호 2척( 주세로 걷은 살을 운반하기 위해 외국에서 구입했는데, 모두 노후하여 썩어 있었다)를 거느리고 갔다. 청나라 사신 원세개가 서방걸에게 따라가서 사정을 엿보도록 시켰다.
○ 고부 군수 조병갑은 되가 있어 감옥에 가두고, 안핵사 이용태도 죄가 있어 김제군에 귀양 보내며 전라 감사 김문현은 죄를 물어 관직을 삭탈하였다.
○ 김학진을 전라 감사에 이원회를 양호 순변사에 임명하다.
임명한 바로 그날 조정에 하직 인사하도록 해다.
○ 엄세영을 삼남 안렴사에 임명하다.
백성의 폐단을 물어가며 찾아내, 그때그때 바로 고고하도록 했다.
○ 동학 무리가 전주를 함락하니, 전 감사 김문현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이때 동학의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전운사 조필영은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당아났다. 난민들은 마침내 관곡 수천 석을 탈취하고, 무기를 거두어 모아들였다. 28일(4월)에 전주를 함락하니, 김문현은 황급히 달아났다. 서울에서는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 난리를 일으킨 무리들이 전주의 남문에 방을 내걸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의 형세를 살피건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 걸출한 병사와 용맹한 장수들은 각각 정해진 지역을 지키고, 각 고을의 재주있는 선비들은 임금을 위해 충성을 가 바친다는 사실을 먼 곳까지 글을 띄워 전하라.
대개 나라의 형세를 말하자면, 권력을 쥐고 있는 대신들은 모두가 외척이고, 밤새도록 하는 일은 단지 자기를 살찌우는 방법만을 궁리할 뿐이다. 자기 당파의 무리를 각 고을에 나누어 퍼뜨려 백성들을 해롭게 하는 짓을 일삼게 했으니, 백성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초토사 홍계훈은 사람됨이 본래 무식할 뿐만 아니라, 동학의 위세에 겁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병하였다. 어질고 착하며 공이 많은 김시풍을 망령되이 죽이고 공을 구하려하니, 이는 반드시 벌을 받아 죽어야 한다.
가장 애석한 일은 3년 안에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한 까닭에 우리 동학이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한다.”
○ 김문현의 죄를 물어, 거제도에 안치하다.
지시하였다.
“한 지역을 맡은 책임자로서 완부(완산)는 중요한 곳인데, 처음에 소란이 시작될 때 금지하여 그치게 하지 못했고, 느닷없이 난입할 때 막지 못했으며, 마침내 성까지 버리고 경계를 넘어 달아났다. 한 지역을 맡은 신하는 자기가 맡은 지역에서 죽어야 마땅하가. 그 의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 죄를 범한 것을 따지자면 자연 해당하는 형벌이 있겠지만 형량을 참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거제부에 안치하도록 하라.”
이 조지치는 대간이 올린 글에서 거듭 귀양보내라고 한 때문이었다.
1894년 5월
○ 조병갑을 죄주어 섬에 귀양 보내다.
5월 4일이었다. 도학 무리의 난이 조병갑 때문에 시작되었는데도 그를 섬으로 귀양보내는 데 그치자, 당시의 사람들이 매우 분하게 여겼다.
○ 청나라 장수 엽지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도와주려고 아산에 이르다.
이보다 앞서, 민영준은 동학 무리의 난리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까 두려워해서 성기운과 함께 모의하여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청나라의 주일 공사 왕봉조가 일본 외무성에 청나라 군인이 조선의 요청으로 번복인 조선의 동학난을 토벌하러 1822년 임오군란때 처럼 원정을 간다고 아래와 같이 알렸다.
“… 지금 조선에서 보낸 전보를 받아보니, ”동학 패거리가 전라도에서 난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파괴했습니다. 그 형세는 북쪽으로 전주를 침범할 것 같습니다. 저희 나라는 군대를 보내 죄인들을 잡아 다스리려고 했으나 조사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만일 시일이 오래되어 더욱 널리 퍼진다면 이는 바로 상국에서 우려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 광서 8년 임오년과 광서 10년 갑신년의 일을 생각해 보건대, 저희 나라 땅에서 도적들의 위험이 있었을 때, 황제께 의뢰하자 대신 소탕해 주었습니다. 감히 이러한 전례에 따라 급히 천자의 군대를 일으켜서 하루바삐 동쪽으로 보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변란을 철저히 평정하고 즉시 개선하신다면 천자의 군대를 오래도록 수고롭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
이때 이홍장은 직예제독 엽지초와 정예병 4천 명을 해안• 해정•도남•공북 등 네 척의 군함에 나누어 실어 보내고 또 수송선 네 척을 거느리고 갈 수 있도록 황제에게 아뢰어 요청했다.
5월 6일, 엽지초와 섭사성 등이 아산에 도착하여 정박했다. 조정에서는 이중하를 영접사로 임명하고 가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일본 외무성은 청나라의 조회에 대하여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1885년에 맺은 천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도 군인을 파송하겠다고 답하였다.
○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오다.
…
5월 6일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인천항에 내려서 일본 영사관에 머물렀다. 우리 정부에서는 외무참리 민상호에게 인천으로 가서, 일본 공사를 만나 군대를 철수하도록 타이르게 했다. 민상호는 인천에 이르렀으나 밤이 이미 깊어 오오토리 게이스케를 만나지 못했다.
이튿날 7일,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길을 떠나 마포에 이르렀다. 우리 정부는 참판 이용직에게 오오토리 게이스케를 도중에서 만나 군대를 철수하라고 말하게 했다. 오오토리 게이스케는 ‘우리는 일본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왔다. 우리는 황제의 명령이 아니면 군대를 철수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마침내 그는 헌병대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와 일본 공관에 주둔했다. 이날 오후에 일본 병사 1백 50명이 각각 격림포(개틀링 기관총)를 가지고 서울에 들어왔다. 또 병사 1백 명이 인천과 서울 사이에 있는 높은 산의 주요지점 및 강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까지 곳곳에 군막을 설치하고 주둔하면서, 망원경으로 사방을 관찰하였다.
○ 관군이 전주를 되찾다.
5월 8일, 홍계훈 등이 동학의 무리를 격파하고 전주를 되찾자 동학의 무리가 김제로 물러갔다.
(동학농민군이 홍계훈 장군에게 폐정개혁안을 제출했다고 하는데 대한계년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어떤 책들은 27개조 요구를 제안하였다고 나온다. 그 내용은 크게 분류하면 탐욕스런 부패 관리 징계, 전정, 환곡, 군포의 세제 개선과 부당한 징세 철폐 그리고 외국 상인의 불법 활동 금지였다.) ○ 이때에 청나라 군대가 아산에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집을 내주어 그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한 경우가 많았다. 또 대규모의 군대가 연대에 구름처럼 모여 군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강함에 권총 자루와 탄약 10만발을 싣고 계속해서 왔다. 이홍장은 서울에 돌아가 경솔하게 싸움의 꼬투리를 일으키지 않도록 군령을 내렸다. 우리나라는 영국과 독일 두 나라 공사에게 청나라와 일본의 잘잘못을 가려주도록 요청하려 하였다.
7일, 청나라 제독 엽지초가 전주성 안 곳곳에 고시문을 걸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
엽지초가 깨우치도록 타이른다. … 원세개가 전보로 보낸 조선 정부의 공문 내용을 따르자면 “전라도 관할 각현에서 도둑떼들이 변란을 일으켜 고을 십여 곳을 공격하며 함락시키고 또 북쪽으로는 전주를 함락시켰습니다. 삼가 북양 대신 이홍장에게 조선을 구원핳 방안으로 황제께서 장수들에게 군대를 출동시키도록 명령을 내려 대신 평정할 주청해줄 것을 전보로 말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황제께서 번복(藩服)을 생각하시어 요청한 것을 굽어 살펴주셨습니다 라고 했다.
본 군문은 이러한 명령을 받고 도둑떼의 소탕을 독려하고자 이미 밤을 새워 바다를 건너왔다.
…
너희 위협받은 선량한 백성들이 즉시 해산토록 노력하거나, 혹 군영으로 와서 스스로 투항하면, 본 군문은 관대하게 처리하고 결코 깊이 캐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너희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기를 버리고 조를 뉘우쳐 투항해 온다면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끝내 어리석게 고집을 피우며 잘못을 위우치지 않고 관군에게 맞서 반항한다면 본 군문은 오직 극형으로 소탕하여 천토를 펼칠 것이다.
…
너희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목숨을 생각하여 도적의 우두머리에게 어리석게 붙지 말라. 위엄을 갖추고 특별히 위와 같이 타이르니 모두 알아듣도록 하라.
광서 20년 5월 7일.
5월 8일 섭사성 또한 같은 내용으로 충청도 공주감영의 문 앞에 고시문을 붙였다.
○ 일본의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키가 우리 대군주(고종)께 상소문을 올리다.
.....
생각해 보건대 우리 일본과 귀국은 동양에 함께 위치해 있으며 국토가 매우 가까워서, 실로 광대뼈와 잇몸,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할 뿐 만 아니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지금 여러 나라들의 대세를 볼 때, 정치를 하고, 백성을 가르치고, 법을 세우고, 재정을 관리하며, 농사를 권하고, 상업을 장려하는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스스로 장점을 모두 드러내며 능력을 한 군데 집중시켜서 세계를 굽어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만들어진 법에만 굳이 매달려 임시 변통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세력을 다투어 스스로가 주인이 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어찌 여러 나라들이 둘러보는 가운데서 서로 맞서서 자립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 조정은 또 저에게 귀 조정의 대신들과 함께 모여 이 방법을 검토하고 밝히도록 지시했습니다. 부강해지기를 위한 내실있는 정치를 애써 펼치고자 하는 목적은 두 나라가 운명을 함께 하는 우의와 서로 밀접히 돕고 의지하는 국면을 처음부터 보전하여 잘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판리대신이 저와 함께 모이도록 지시를 내리시어 그 말을 모두 다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우리 대황제께서 이웃 나라와 돈독히 지내려는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않게 한다면, 외교적큰 틀을 이루는 데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메이지 27(1894)년 6월 26일 삼가 아룁니다.
○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다섯 가지 조항의 글을 올리다.
5월 23일,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5강령 26조목을 우리 정부에 보내어 모든 정사(政事)를 바로잡아 바꾸자고 요청했다.
“제1강령 서울과 지방의 쓸데없는 관원은 헤아려 줄이고, 그중에 반드시 줄일 수 없는 관리는 재주와 거망이 있는 자를 가려 임명하되 문벌을 따지지 않는다.
제 1조목 각 관직의 직분은 칙서에 자세히 기재한다. 내치와 외교를 총괄하는 큰 권한은 정부가 모두 관장하고, 정부 아래에 육부를 두어 예전의 육조와 같게 한다. 왕실 안에서 부리는 관직은 정부와 뚜렷이 서로 구별하며, 정부의 조치에 왕실 내의 관리들은 간여할 수 없다.
제 2조목 국정과 통상 업무는 현재 ldf의 형세에 대단히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마땅히 세상일에 통달한 사람들을 가려 뽑아 타협하여 처리한다.
제 3조목 정부에서 꼭 필요한 관원은 비록 수가 많더라도 남겨두고, 직무없이 한가로운 관청은 비록 적더라도 반드시 없애거나 또는 잘 헤아려 합치도록 한다.
제 4조 목 팔도는 그 안에 현으로 나눈 것이 너무 많으니, 마당히 줄여서 경비를 절약한다. 다만 이 일은 신중히 하여 지방의 관리들이 역량은 발휘하지 못하는 우려가 없도록 한다.
…
제 3강령 법률은 공평타당하게 정리하여 유감이 없도록 한다.
제 19조목 옛 법률 중 현재에 맞지 않는 것은 없애거나 고쳐서 새로운 법률에 추가한다.
제 20조목 재판하는 법은 공평하게 명백해야 한다.
제 4강령 군율을 정돈하고 군사의 수를 증가시켜, 내란을 진압하고 백성의 안정을 보장한다.
5강령 학교에 관한 법규는 가장 마땅하게 정한다.
제 21조목 무관은 마땅히 지난날의 태도를 바꾸어 글을 읽음으로써 한갓 용맹한 혈기만 믿지 않고, 문무의 재질을 겸비하도록 한다.
제 22조목 해군과 육군은 현재 남아 있는 군대로 다시 대오를 짜고, 국고 가운데 재정의 넉넉함과 부족람을 생각해, 해마다 군량을 약간씩 마련하여 병사의 숫자를 정한다.
제 23조목 범죄를 단속하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서울과 지방 각 요충지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 모집한 순경들은 일정한 기일 동안 훈련시킨다.
제24조목 학생들이 마땅히 읽어야 할 책은 그 사용여부를 분별한다. 각 도에 유학당(幼學堂)
을 세원 아이들을 교육한다.
제25조목 유학당을 세운 뒤 다시 중학교를 세우며, 서운에 해당하는 전문학교는 잠시 늦추고, 때에 맞추어 증설한다.
제26조목 나중에 전문학교를 세워 그 중에 뛰어난 학생들을 뽑아 다른 나라로 보애 공부시켜 견문을 넓히도록 한다.” 등등이었다.
7일을 기한으로 답을 보내달라고 했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어수선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의 정치를 바로잡아 고치는 데에 어찌 다른 나라의 간섭을 허용하겠는가?”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 그 충고는 따를 만하다.’ 했다. 이에 좌포도청대장 신정희, 예조 참판 김종한, 행호군 조인승을 개정위원에 임명하여, 그들이 결정하여 대답하도록 했다.
이튿날,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우리 외서에 조회하여 우리나라가 이전부터 독립국이었는지 아니면 청나라에 부속되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를 질문하고, 24시간을 기한으로 그 안에 회답해 달라고 했다. 대개 일본은 프랑스가 베트남에 썼던 옛 계략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 대회의가 열렸다. 일본이 이미 여러 나라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천명했으니 당연히 이것으로써 대답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또 우리나라와 청나라는 관계된 일이 있어, 역사에서 확인해보면 '독립'으로 대답하기 어렵다는 논의도 있었다. 이논의는 좌의정 조병세가 앞장서 주장하였는데, 우의정 정범조, 돈년부사 김병시가 뒤따라 맞장구쳤다. 그러나 논의가 오래되어 결론이 나지 않자 전보로 청나라 이홍장에게 의논했다. 이때 의주에서는 전보가 불통이었기 때문에 안경수를 일본 공사관에 보내 답변 기한을 연기해 주도록 요청하고 또 이튼날 외아문 주사를 보내 다시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
이홍장은 "자신의 역량을 다하여 법을 만들어 온전하게 보호해야 한다. 내정은 상국도 간여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왜는 주변국이 아닌가? 결코 속지 말고,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 일본 공사에세는 자주독립국으로 대답하는 것을 허락한다." 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그는 일본의 꼼수를 간파하고 조선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므로 '독립국'이라는 말을 써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이때 형조 참의 이남규와 부사과 이설이 동학 무리와 농민들이 저항하며 난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 수령과 관찰사들의 탐욕과 강탈, 전운과 균전과 잡세 등에서 나온 폐단임을 지적하며 바로 잡으라는 것과 도성으로 군대를 이끌고 온 일본의 내정 간섭을 탄식하며 일본이 결코 조선의 우방이 될 수 없다는 상소가 잇달아 들어왔다. 그러나 조선은 내정 간섭을 단호히 물리치며 나라 일을 스스로 결정할 힘이 없었다.
이때 동학 무리들이 퇴각하여 장성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전라 감사 김학진에게 13조의 요구사항을 보내어 결재하여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2부로 계속됩니다.
2023.4.16.진시
우담초라하니
참고서적
정교 저, 조광조 편, 이철성 역주 ⌜대한계년사⌟,소명출판, 2004
김흥식 엮음, ⌜전봉준 재판정 참관기⌟, 서해문집, 2017
황현 저, 허경진 역주 ⌜매천야록⌟, 서해문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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