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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 월간 문학 589
2018년 3월호
한국문인협회
독정: 2018.2.28. 수
ㆍ단잠에 꾼 꿈, 길을 걷다 옆 전신주 쓰러져 나를 덮치네. 사람 살려 비명도 못 지르고 눈앞에 꿈에서 본 전신주를 누가 들고 있네. 아버지가 싸리나무 회초리 들고 서 있네. “데려온 자식이 감히 낮잠을. 눈빛은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때리겠다는. 꿈에 덮쳤던 회초리였던 여섯 살 적 일들이 조금 전 일같이 엉덩이가 저려온다.
ㆍ짖으라면 짖었고 물라면 물었다
철저히 나를 버렸을 때
당신은 흡족한 얼굴로 고기를 던져줬고
비를 파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잃지 않으려고
더욱 비굴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어는 때 목줄을 잡은 당신의 손이 느슨해졌을 때
가차 엇이 버림 을 수 있음을
저만치 당신이 정해준 목표물이 보인다
목줄을 풀면
개거품을 물고 순발력을 발휘하면 된다.
-개 -교도소 수감생의 글
ㆍ일본 오사카애는 안도타다오 빛의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심자가의 실체를 만들지 않았다. 다른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견고한 나무나 쇠, 네온사인으로 십자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벽에 틈을 내어 그 틈으로 빛이 들어와, 그 빛이 십자가의 형체를 만들어내도록 설계 한 것이다. 십자가의 실체가 없으므로 빛의 십자가를 볼 수 있는 교회다. 스스로에게서 나와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다,
ㆍ 아빠가 술래하고 백ㄲ가시 세라 했다. 나는 벽에 이마 붙인 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열 번 외친다. 그 사이 어디론가 향하는 딸의 발자국 소리, 어디에 숨은 줄 알면서도 모른 척해준다. 딸은 아빠가 진짜로 못 찾는 줄 알고 기뻐하면서 잘도 숨어 있다. 지금은 딸이 술래다. 많이 찾고 있는데 눈에 안 보이나 보다. 아빠가 너무 꼭꼭 숨었나?
-교도소 제소자의 글. 제소자들은 외국에 돈 벌러 갔다거나 원양선을 탔다고 하는 거짓말이 일반적이다.
ㆍ오늘도 눈을 뜬다
하루라는 소중한 오늘의 눈을 뜬다
어떻게 즐겁게 나눌까?
하루라는 세월의 시작에서
특혜 받은 오늘의 기쁨은
접견실 창밖에 서 계신
어머니의 환한 미소였다. -제소자의 그리운 미소
ㆍ사회복귀과라는 곳에서 ‘새길’이라는 제목으로 종합문예지를 낸다. 책상머리에서 쓴 글이 아니다. 좁은 감방에서 무릎 끓고서 볼펜으로 쓴 글이다.
ㆍ감방에 가서 무슨 죄를 지어 여기 왔냐 물어보지 말 것, 전에 무엇을 했나 물어보지 말 것, 수의를 입었지만 몸 전체에서 풍기는 인상이 지식인 “하하, 욕심이 하를 불렀지요. 다 내 잘못이죠.” 대학교수는 정년퇴임 퇴직금을 사업에 투자하고 자금이 더 필요해 돈을 꾸어 정해진 날에 못 갚아 사기꾼이 되었단다. 몇 백만 원이 아니라 몇 천만 원이면? 발려 준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면? 갚을 방도가 없으면? 손자의 재롱을 보다가 하루아침에 죄수가 된 대학교수재소자 중에는 마술사를 꿈꾸는 소년도 있었고 일급요리사를 꿈꾸는 소년도 있었다. 우리 사회는 이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ㆍ내가 고요 속에 불타오를 때 그는 온다. 나의 혼속에 타고 있는 불이기에 나를 표현하는 불꽃이다. 그가 없는 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의 종교였고 나의 처음이고 끝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생명이었고 정신이었다. 아무리 혼미한 상태에서도 나의 영혼은 그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청정함으로 그를 기다린다. 두려움의 떨림을 사랑하며 갈구한다. 나의 연인을 모든 이가 소유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의 일체의 본이 거기 있기에, 나는 오늘도 시인이고 싶다.
ㆍ당신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살아가고 있을 뿐이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러 나도 죽는 날까지는 살아야겠다는 생각
ㆍ평균 기온 –223도. 보이는 거라곤 온통 잿빛 암석과 얼믕 뿐인 이곳 다름 아닌 명왕성. 이곳에서 태양까지는 59억 6천만km,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약 40배로 태양광이 지구에 도달하는 8분 18초에 비해 자그마치 5시간 27분이 소요되는 가마득한 곳. 오죽했으면 이곳을 밝음왕이 다스리는 명왕별이라 했을까. 소문난 뒷고기만큼 햇살이 그리워진다.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라도 버틸 수 있는 건 이곳 질량이 지구의 7%라는 사실, 그런 이유로 제 삶의 무게 도한 그만치 가벼워졌다고 믿기 때문. 이곳의 1년은 지구의 248면, 정작 저를 힘들게 하는 건 이 느려터진 시간. 행여 당신이 너무 빨리 늙어 버릴까 그게 바로 나의 슬픔
ㆍ충무김밥
통영바다 멸치잡이 떠나는, 시퍼런 파도에 지칠 아들이 안스러워
어미는 가마솥에 쌀을 앉힌다.
흰살알이 고슬고슬 익어 가면 오징어를 조물조물 무친다.
장독에 묻어둔 무김치를 꺼내와
뭉텅뭉텅 설어 반찬 통에 담는다
밥알을 사각으로 자른 김에 말아 소쿠리에 차곡차곡 쌓는다
돛단배로 떠나는 아들에게 충무 김밥 한 뭉치 안겨 주고
노파는 부엌에 널브러진 것들을 한 점 두 점 집어 먹는다.
바닷가 낡은 집을 비추는 햇살이
물고기 비늘처럼 노파의 허연 머리칼을 비추고
족빛 바다가 성난 듯 고깃배를 흔들어도
멸치 그물을 잡아당기는 어부들
어허야 둥둥 어허야 둥둥 ㅡ김혜영
ㆍ새 한 마리 벗하면 산에도 날개가 돋는다.
ㆍ어머니는 눈이 발 무릎까지 차는 어느 겨울 해 아침
부엌문 밖에서 서성이는 노루 새끼를
아궁이 엷은 불을 피워 놓고 살포시 들이시곤
청년들 소리 크게 나기 전 밀어 보내셨다.
시에게 라면을 먹인다. 객석에 앉아있는 수평선이 울컥인다.
<ㆍ검은 꽃 연탄재 불꽃- 선>
불꽃을 가꾸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하다. 달동네 맑은 공기를 먹고 자란다는 그 귀하디 귀한 꽃을 하루가 멀게 두 세 송이씩 피워내며 살아가는 것‘
난로나 보일러 아궁이에 숨겨두면서 가족들에게만 쐬게 해주는 온기
저물었을 때만 모습을 드러낼 뿐
만개하는 동안에는
그 형상을 보여주지 않는 신비의 꽃
매서운 칼바람을 먹고 사는 탓에 투명한 향기 속 맹독을 지녀
한 번 물리면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
백련으로 마무리하는 마지막 생
빙판길에 하얗게 으깨어 납골되면
빙판길 오르내리는 사람들 등 밟고 무사히 가라고
바닥에 까는 압화는 겨울에도 얼지 않아
발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마른 눈물을 쏟아내는 노인들
가난한 세상 흐드러지게 피었다 저무는 동안
공기로 가득 채웠던 뼛속에서
푸드득 핏덩이 새떼가 날아오른다. -흑련. 이종섶
ㆍ쫓기는 삼촌을 가족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방 안에는 숨길 수 없었다. 금방 찾아낼 것이 뻔했기 때문, “낭구 위로 올라가거라.” 대청마루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집 앞 나무는 무성했다. 새들 천국이었다. 아버지는 바깥에서 망을 보고 할머니는 떨고 있었다. 아들 둘 딸 셋, 오남매의 아버지가 맏아들이고 삼촌은 막내였다.
수조가 총을 들고 집안으로 뛰어 들었다. 눈이 이상한 빛으로 이글거렸고 얼굴도 딱딱한 돌껍질처럼 보였다. “너가 웬 일이냐. 여기!” 마을 뒷산 골짜기에서는 밤이면 횃불이 도개비불처럼 활개를 치고 마을마다 치안대가 생겼으나 인민군이 물러나고 나라를 되찾았으나 치안상태는 살기를 띠어갔다. 밤에 산으로 쫓기거나 적을 동조하거나 벼락 감투를 쓴 이른 바 공산주의자들이 자의반 타의반 산골짜기로 숨어 빨치산부대에 합류하여 부락을 습격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ㆍ나는 새를 날아가게 해서 아이들의 돌팔매를 벗어나게 하려고 나무를 흐들었다. 우여어어어 길게 빼서 부르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새는 한쪽 날개들처럼 파들파들 날다가 땅에 떨어져 얼마나 구슬피 울던지. 형은 그마저도 끄물거리는 새를 돌로 짓이겼다. 이틀 동안 울음소리를 내는 새소리를 ㄸㄸ다라 나무들 속으로 들어갔다. 울음소리를 /다라 갔더니 어린 새 하나 마리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미를 잃은 어린 새는 작고 흰색 빛을 띠고 눈두덩이 부j석한 눈으로 붉은 줄이 있는 새, 나는 두려움에 떠는 새를 잡아 따스하게 손에 쥐었다. 만져보자 비단처럼 어쩌나 매끄러운 손가락 마디가 간지러워서 몸이 오그라들 정도였다. 나에게 나부대 볼 만한 힘도 없고 날 수 있는 힘도 없고 다만 무섭게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앙상한 뼈의 감촉, 나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나는 새의 작고 반짝이는 보석 같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유연하고도 힘찬 몸통과 단단한 다리가 손가락 사이에서 저항하며 완강하게 버티었다. 나는 이내 새를 놓아 주었다. 어린 새는 움직이지 않았다. 날려 보낼 수도 없었다. 형에게 들키지 않게 하려면 집으로 데려와야 했다. 나는 몸을 굽히고 손을 벌렸다. 새는 어리둥절한 듯 숨을 잠시 멈추더니 황급히 풀숲으로 사라졌다. 나는 풀숲을 뒤졌다. 새는 숲에 있었다.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못된다고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새를 들여다 놓고, 책상 위에 옮겨 놓으니 체념했는지 울음도 멈추고 웅크린다. 책상 위에서 뛰어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할머니가 빵아 주신 깻가루를 입을 열어 놓아주었지만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가 새가 굶어서 기진맥진 하여 죽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주둥이를 열고 빻은 깨를 밀어 넣어주었다. 새는 연신 입을 벌리면서 모이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끝내는 책상에서 뛰어내려 내 무릎 위에 올라 날개를 터덜거렸다. 그 날갯짓은 온통 환희로, 생명의 부활로 보여진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찢어질 만큼 날개를 흔들어대며 털이 성긴 목을 길게 뽑고 내가 가는 방향 따라 머리를 돌리며 울어대었다. 새는 땅 위에서 먹이를 찾기 시작했다. 친구가 된 새는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곧바로 작은 나뭇가지 끝에 내려앉아 즐거운 듯 나를 뚫어지게 내려 보았다. 내가 나뭇가지를 살금살금 흔들어도 꼼짝하지 않았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성식 형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그러자 번개처럼 민첩한 새는 두세 번 나뭇가지 위에서 거칠게 몸을 흔들어 움직이더니 무서웠는지 날아갔다. 여기저기 계속해서 날아다니다가 영영 떠나 버리고 말았다.
담보 대출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재빨리 등기권리증을 꺼내 그에게 건냇다. 형이 물건서류를 훑어보는 동안 긴장감 탓인지 떨림이 멈춰지지 않아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밑둥 굵은 나무 한그루가 가지를 하늘로 뻗어 올린 채, 무성한 잎 사이로 철 이른 푸른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다. 한 무리의 큰 새들이 날아와 열매를 쪼아댄다. 분명 우리집 새였다. 나는 갑자기 귀가 밝아짐을 느꼈다. 아마 내 귓속에 살고 있던 어린 새가 어느새 훌쩍 커서 이곳 나뭇가지로 날아온 모양이다. 나는 너무 눈이 부신 새여서 자꾸만 눈을 비볐다. 그렇게 눈을 비비자 투명한 햇살 너머 어디선가 들려오는 할머니의 덕담을 들었다.
“인감 도장 찍어야 하네.”
형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대출서류가 다 작성되어 있었다. 나는 인감도장을 꾹꾹 눌러 찍었다. “형 이젠 저 새들을 돌봐 주시오.” “자이식! 너 어린 시절을 잊지 않았구나-최문경 <붉은 새>
ㆍ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를 그렸다. 이름도 붙였다. 다음날 그는 초상화를 부탁한 고객을 방분하려고 탬스 강 다리를 걸었다. 그때 그의 바로 눈앞에 바로 그 전날 그가 캔버스에 그렸던 이상적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따라가서 알아보니 자기가 붙였던 그 이름의 여인이었다. 약혼을 승낙받자 그녀 아버지가 말했다.
“그 아이는 나와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닐세, 옛날에 죽은 딸의 형상으로 만든 자동인형이지.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속눈썹을 떨면서 활짝 웃었다. 그는 분명 집주인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였다. 결혼해 행복하게 살다 그녀의 태엽의 힘이 녹아내려 그녀가 힘이 없어졌다. 오래된 책을 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거기엔 자동인형을 인간으로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 방법은 자동인형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인간의 심장을 산 채로 도려내서 이식하는 것이다. 자동인형이 인간이 되면 심장을 이식해 준 인간의 심장도 재생된다. 하지만 의사들은 수술을 거절했다. 성공에 자신이 없다고. 사기꾼 의사를 만나 심장을 내어놓았을 때 사기꾼 의사는 천 파운드 수술비를 챙긴 체 사라졌다. 다음날 신문에는 초상화가가 정신병으로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람들 기억 속에 잊혀갔다.
괴테에 대해 말하는 그의 얼굴에 괴테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긴 비행 중 깜박 잠든 사이에 파우스트의 한 장면처럼 이 세상에 사랑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고 절규했던 지옥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영, 젊어지는 묘약과 요술 안개가 목욕탕에 비치며 어스름하게 그녀 꿈속을 찾아왔다. 어찌어찌해서 와이파이가 연결되 톡톡 튀어나온 카톡의 글을 읽었다. 직원은 내명, 누가 빨리 일을 처리하나 등 그 와주에도 누구와 상담하게 될지 살피며 기다렸다. 고객 한 사람을 상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꽤 길었다. 그들도 비행기를 놓치고 유럽 어느 나라로 떠나는 다음 비행기를 찾고 있으니 그럴 수박에.
호텔에 들어 방을 열고 들어가 카드꽂이 옆의 둥근 버튼을 누르니 방안 전체를 비추는 등에 불이 들어왔다. 스텐드 두 개는 스위치를 당겨야 불이 켜지는 수동형이었다.
물 먹은 솜처럼 꼼작도 못하고 잠에게 먹혀 버렸다.
ㆍ넓은 산책길을 경비아저씨들이 싸리 빗자루로 쓰는 모습에 가을이 있었다. 아영이는 나풀나풀 뛰며 잘도 넘는 아이들이 부러웠는지 양손에 손잡이를 잡고 줄을 자기 발 앞에 늘어뜨린 채 돌리지도 않고 그냥 제 자리에서 뛰었다. “줄을 돌려 넘어야지.” 마음 귀퉁이가 살짝 아렸다.
몽몽이 숲에서 두 마리 박쥐가 말한 고운 말을 찾는 공부를 했지만 ‘저리 가!’가 딱히 미운 말도 아니지만 그 말을 듣는 아영이 가슴에 가시 하나가 박혔나 보다.
시간이 흐르며 스산함이 구멍 난 타이어에서 공기가 빠지듯 빠져나갔다. 그 구멍은 아마 아이들의 순수함일 게다. 아이들 파일은 교실 우측에 번호 순서대로 새워져 있었다. 자기 파일을 꺼내서 어설프고도 느린 동작으로 왼손으로는 파일 속 비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학습지를 만지작거리며 끼우는 척 했다.
“내가 나가고 있는 데 그렇게 앞에서 뛰면 어떡해.”
장애아 아영이가 다른 아이들을 쏘아 부쳤다.
아영이가 움직이면 다른 아이들이 모두 알아서 척척 비쳐 줘야 하나?
ㆍ머리를 정직하게 쓰지 않으면 머리가 퇴화하고, 진실로 착하게 살지 않으면 선한 본성이 퇴화하는 것이 이 세상 이치이니
ㆍ<탄천에서 물새들이 사는 법>
경기도 성남을 가로질러 한강까지 흘러가는 탄천에는 물새들이 산다. 작은 논병아리도 많이 늘었다. 탄천에 살고 있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너무 작아 렌즈에 담기도 어렵고 개체수도 적었다. 처음에는 오리들과 함께 무리 짓고 있어서 새끼 오리인줄 알았는데, 덩치는 작지만 엄연히 다 자란 성체들이었다. 이 친구들은 무척 활기찬데 그 작은 몸으로 수면을 활주로 삼아 날갯짓하며 달려가면 마치 모터보트가 지나가듯 물보라가 일며 바람소리까지 들릴 정도다. 잠수함처럼 이 쪽 물속으로 가라앉아 멀리 저쪽에서 떠오르곤 하여 들어간 쪽에서 대기하던 렌즈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듯 다양한 종들이 올망졸망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며 탄천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인간들의 호기심 어린 눈이 그들에게는 여느 포식자의 날카로운 눈처럼 다가올 테니까. 사실 탄천 인근에는 사람 눈에는 잘 띄지 않지만 너구리들과 길 고양이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새들의 천적이다. 그래서 인간들과 포식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게다가 햇볕이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이 최고의 명당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은 흔하지 않아 자리다툼이 생기기 마련일 텐데 물새들은 ‘핫 플레읏’를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다. 정자역 인근 탄천변 양쪽 산책로를 이어주는 다리 근처에는 퇴적물이 쌓여 섬처럼 된 곳이 있다. 그곳은 탄천 건너 높은 건물들의 그림자를 피할 수 있어 늘 해가 비친다. 햇볕이 좋으니 수초가 많이 자라 벌레들이 알을 까기 좋을 것이고 바닥은 무기질이 많은 진흙이라 지렁이 등 무척추 생물들이 많이 살 것이다. 모두 물새들이 좋아하는 먹이들이다. 물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 너구리와 고양이 등 천적들이 쳐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 섬은 아마도 탄천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일 것이다. 그 완벽한 쉼터를 서로 다른 종들이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다. 지난여름만 해도 그 섬은 흰뺨 검둥오리들만 찾던 곳인데 지금은 청둥오리, 비오리는 물론 왜가리도 함께 있다. 먼저 살던 오리들이 자기 영역을 손님들에게 양보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왜가리는 긴 목을 날개 품에 묻어 바람을 피하고, 오리들은 날갯짓을 하며 고개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 내고 있다. 논병아리들이 다가오니 몇 마리가 자리를 내어주며 옆으로 조금씩 이동한다.
오리들과 백로, 왜가리 등 탄천에 사는 모든 물새들은 본디 철새로 분류된다. 언젠가 이들, 혹은 이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날이 추워져 따뜻한 나라를 찾아가는 철새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지쳐서 혹은 잠시 쉬어가려다 무리에서 이탈하여 이곳 탄천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을 것이고 일부는 아예 터를 잡아 대를 이어 살게 되었겠다. 이제는 텃새처럼 살아가는 새들이지만, 다른 종들에게 텃새 부리지는 않는 모습이다. 생태계는 보이는 것처럼 평화로운 곳은 아니라 작은 영역 다툼이 생사를 결정 짓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의 눈으로는 저렇게 목 좋은 곳을 같은 종도 아닌 다른 종들과 사이좋게 나누는 모습이 신기하다. 인간으로 비하면 민족과 인종의 차이보다 큰 다름인데. 그럼에도 탄천이 원래 자기의 살던 터전이 아니고 머무는 동안만 그 혜택을 누릴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이 원래 자연의 모습일까? 탄천의 물새들은 한때 철새였지만 지금은 탄천과 그 생태계가 허락하여 텃새로 살고 있다. 그래서 철새시절의 기억이 대를 이어 물려받아 찾아온 손님들과 사이좋게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오래 전 자기들을 받아준 탄천의 넉넉함에 보답하는 방법은 함께 살아가는 것, 그러면서 더욱 풍성한 생태계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물새들과 탄천의 소명일 것이다. 내 것, 네 것 따지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자연의 섭리는 그럴 것이다. 철새로 탄천에 내려와 텃새로 살아가는 그들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 이치를 몸으로 깨달아 따뜻한 피로 흐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다시 바라보니 옹기종기 모여 햇볕을 받는 모습이 평화롭다. 멀리서 그 모습을 렌즈에 담아 본다.- 강대호. 제 145호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ㆍ내가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춰 놓고 있는 안양에서 제일 큰 시장이다. 시장 골목이 너무 많아 헷갈릴 때도 있지만 내가 찾는 골목은 정해져 있다. 과일들을 신선하게 살 수 있어 시장을 찾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 될 수 있는 한 단골가게를 마들지 않으려 한다. 내 행동에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을 알게 되면 보통 불편한 게 아니다. 고개를 숙인 채 외면하고 가 아파트 슈퍼마켓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다녀야만 했다. 어느 때는 우리 집과 반대쪽으로 난 길로 한 바퀴 빙 돌아 집에 오곤 했다. 주인과 눈이 마주칠까 봐.
ㆍ수채구가 막혀 설거지물이 쑥쑥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마치 잘못된 음식을 먹고 체한 가슴만큼이나 답답하다. 장대비가 쏟아져도 하수구가 뻥 뚫려 물이 빠져나가는 걸 보면 그렇게 상쾌할 수 없다. 그렇게 배설이 잘 돼야 건강한 몸이요, 건강한 사회다. 사랑도 그렇게 흘러 보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내가 받은 사랑을 귀하게 여기고 그 감사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고
항문으로 나오는 배설물은 화장실이란 처리 장소가 있지만 입으로 나오는 배설물은 처치할 곳조차 없다. 남에게 튀어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준다. 항문으로 배설한 배설물은 배설하고 나면 시원하기라도 하지만 입에서 나온 배설물은 내 뱉을 때는 시원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후회 되기 마련이다. 화가 나서 분노를 배출할 때는 거의가 그렇다.
<국 한 그릇>
추운 땅속에서 추운 겨울을 보낸 냉이는 냄새부터 마음을 달뜨게 한다. 산골의 반찬이라야 사계절 빠지지 않는 김치와 제철에 나는 채소를 무치고 볶는 것뿐이니 밋밋하다. 단출한 밥상에 변화라고는 조금씩 달라지는 국에 달여 있다. 된장국에도 때로는 배추를 무시래기를 삶아 넣어 맛을 달리 한다. 같은 콩나물국을 끓여도 고춧가루를 풀고 얼큰하게 끌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시원하다’며 밥을 말아 드셨다. 나는 무채를 조금 넣고 들기름에 달달 볶다가 콩나물을 넣은 맑은 국을 좋아한다. 국 한 그릇은 정을 나누게 해준다. 이웃 어르신들이 오시면 큰솥에 미역국을 넉넉하게 끓여 옆집을 불러 “국 한 그릇 먹고 가라” 권했다. 밥을 국에 말아 부뚜막에 걸터앉아서도 달게 먹었다. 국물도 없다는 말이 있다. 기근에 죽을 얻어먹기 위해 줄 섰다가 죽이 떨어져 국물도 못 얻어먹게 되어 했던 말이라 한다.
ㆍ병문안 오며 국을 한 솥 끓여 와서 건넸다. 그 국을 먹으며 평소에 무뚝뚝하던 그녀가 더없이 살갑게 느껴졌다. 힘든 농사일을 하던 세대에는 국사발이 매우 큼지막했다. 어쩌다 닭장에 암탉 한 마리 잡아 달개장이라고 끓이는 날이면 이웃을 불러 머리 맞대고 정을 나누었다. 풍족한 식생활만큼 우리 마음도 넉넉해졌을까. 혼밥 문화가 붐을 이룬다. 마주 앉아 밥 한 끼 나누는 여유마저 빼앗겨버린 세대들이 안쓰럽다. 국 한 그릇씩 받아 놓고 마주 앉은 사람에게 건더기 한술 더 건져 주고 싶어 안달하는 정겨운 모습이 그리운 이즈음이다. 향기를 가득 담은 냉잇국이 알맞게 끓여졌다. 마침 손님이 와서 풍성해진 밥상 위로 일찍 찾아온 봄 이야기가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