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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오입(四捨五入)
―5.16을 되돌아 본다一 함석헌
이 나라 사람인 담에는 아마 자유당 시절의 사사오입(四捨五入) 국회를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꾀를 내도 분수가 있고 억지를 해도 정도가 있지, 지식을 배우고 경력을 쌓아서, 국민을 대신하여 나라를 한다는 사람들이 어찌 감히 그렇게까지 도리를 짓밟고 지식을 악용하고 국민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분한 마음으로 한다면 열두번 죽여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분하기 보다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결국 우리 자신의 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개인으로 하면 죄를 지은 것은 자유당 사람이요 우리는 아니지만, 우리는 서로 다 같이 운명을 같이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책임을 같이 져야 하게 됩니다. 공정이거나 부정이거나 간 그들을 국민의 대표로 뽑은 것도 우리요, 그들이 잘못했을수록 그것을 고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다행히 4.19로그 허물을 씻었으니 말이지, 만일 그대로 있었다면 우리는 세계 어디를 가도 너희는 사사오입(四捨五入) 인간이지 할 때 얼굴을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만이 아닙니다. 슬픕니다. 나만 아니고 너만 아니라, 인생이 통히 다 그렇습니다. 이제만 아니라 언제나 정치란 그런 것입니다. 결국 四捨五入입니다. 그런데 그 정치를 벗어날 수 없으니 슬픈 일입니다. 四捨五入이 무엇입니까? 큰 것을 두기 위해 작은 것은 버린단 말아닙니까? 결과를 위해 법칙을 짓밟는단 말 아닙니까? 현실을 위해서는 이상은 버린단 말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학문은 늘 권력자를 변호해 준단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정치는 결국 억지입니다. 그 점에서 보면 거짓말도 옳다고 자꾸 주장하면 결국 그것이 참이 되고 만다고 내놓고 말하는 공산주의자가 차라리 솔직하고 철저합니다. 정치는 결국 이기주의입니다. 그것이 한 개인이거나 한 당파나 계급이거나 간 전체를 무시하는 이기주의인데서는 다름이 없습니다. 일이 쉽게 되면 남 생각도 하는 척, 도덕도 지키는 척 하지만. 정말 내냐 네냐 하는 다급한 데 가면 아비도 자식도 벗도 스승도 없습니다. 그것이 인류 문명 6천년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슬프다는 것은 이 도리니 양심이니 하는 하나 때문입니다. 세상이 도리대로 돼 본 적이 있습니까? 어느 시대에도 무시당한 것은 도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죽지 않습니다. 누구가 가르쳐 준 것 없이, 세삼 생각할 것 없이,언제부터인지 웬 까닭인지 알 수 없게 있는 것 이 도리요 양심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해처럼 스스로 밝은 것입니다. 누가 비쳐 준 것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압니다. 일이 결국 바로 되리라 믿습니다. 스스로 믿습니다. 사필귀정이라고 합니다. 필(必)입니다. 반드시 입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흐리터분이 없습니다. 둘 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뿐입니다. 절대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것을 알고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을 아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줄을 믿고 알고 지키자는 것인데, 그것이 원리요 법칙인데, 그런데 그것이 한번도 그대로 된 일 없으니, 없으면서 버리고 떠날 수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도리를 무시하는 악을 보면 분해 견딜 수 없건만 그 악과 같이 다툴 수도 없으니 어찌합니까? 다투면 옳던 나도 같은 악이 됩니다, 양심은 영원히 슬퍼하게만 마련입니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을 씻고 일어나 두 다리를 디디고 곧추 서서 눈을 똑바로 뜨고 앞과 뒤를 가만히 내다보면 거기 다른 것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억지하고 이겼다 하고 사납고 건방지던 것들이 다 어디 가고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 위에 그것들은 가랑잎처럼 떠서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푸른 물같이 영원히 변함없는 법칙뿐이요 원리뿐입니다. 진시황 오늘날 어디 있습니까? 시저 오늘 어디 있습니까? 갔습니다. 다 갔습니다. 영원히 있겠다고 붙들던 놈들 다 갔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이 있으나 그것의 운명은 뻔합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가지려 하지 않고 주려했고,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즐겨 남을 섬겼던 사람들은 지금도 서 있어 다스리고 있습니다. 예수요 석가입니다. 살므로 죽은 것은 욕심이었습니다. 죽음으로 산 것은 정신이었습니다. 가짐으로 잃은 자는 정치가였습니다. 내버림으로 얻은 자는 성인이었습니다. 해가 없어질 날은 와도 이것이 가리워질 날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하면서도 분을 참고, 슬프면서도 눈물을 먹음으며, 못생긴 것 같아도 위로를 얻고,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어도 소망을 가지고, 증명을 할 수 없어도 확신을 가지면서 이 역사의 수레를 멥니다.
오월은 얼마나 좋은 때입니까?
四月淸和雨乍晴 (사월청화우사청)
南山當戶轉分明 (남산당호전분명)
更無柳絮因風起 (경무유서인풍기)
唯有葵花向日傾 (유유규화향일경)
맑고 잔잔한 사월 날씨 오던 비도 산뜻 개고
앞 산은 지개 앞에 와 선듯 또렷한 맵시로다.
바람 다시 아니 일어 버들 솜 조차 볼 수 없고
아옥 꽃만 해를 보고 고개를 혼자 갸웃 했네.
옛날 시입니다. 음력 사월은 오월이니 이것은 요새 경치입니다. 시인은 요술장이입니다. 오월의 천지를 스물여덟 글자 속에 남김없이 좀여 넣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평화의 음악이 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위대한 것은 시인이 아니고 시인을 만들어 낸 그 자연입니다. 이 달에 어린이 날, 어머니 날, 스승의 날이 있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자비의 스승 석가가 나신 것도 이 달입니다. 그리고 보면 세상이 늘 그만일 듯해 철 없는 아가씨들이「메이 퀸」이라 어리석게 흥분하는 것도 용서해 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오월에 5.16 소리를 해야 하는 것은 기막힌 일입니다. 4.19 뒤에 왜 5.16이 왔습니까? 왜 그 세계로 메아리 쳐 나간 시(詩)에 흙탕물을 끼어 얹었습니까? 하나님이 노했습니까? 운명이 장난을 했습니까? 역사의 시련입니까? 자연의 샘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진창 속에 났으면서도 거기 물들지 않고 깨끗이 서서 아름답고 빳빳한 몸으로 맑은 향을 멀리 보내는 그 연꽃 위에, 제가 아니고는그 아름다움이 없다고 배가 아픈 진창물이 한방울 그 꽃 위에 튀어 올라와 본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도 가라지 밉지만 갈할 때까지 곡식과 한가지로 두라 했습니다. 老子도 不善人은 善人之資라 했습니다.
밉거나 곱거나 간에 5.16의 뜻이나 값은 4.19와의 관계를 내놓고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말하는 때에 밉고 고움에 붙잡혀서는 아니 됩니다. 공동체인 이상, 연대 책임인 이상. 곱다면 곱고 밉다면 다 밉습니다. 미운 일을 한 사람일수록 그 노릇을 맡았던 것이 가엾습니다. 사람도 많은데 네가 하필 그 노릇을 했느냐! 그러나 곱고 미움은 말하지 않아도 잘했다 못했다는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년이 돼 오는 오늘 무슨 지나간 잘못을 뇌까리느냐 할지 모르지만, 역사는 문제입니다. 풀지 않고 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모든 사건 풀지 못한 문제의 항의요 그것이 풀릴 때까지는 역사는 바른 길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10년이 지났어도 백년이 지났어도 따질 것은 따져야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이렇게 흐리터분한 것은 5.16을 아직 숙제로 두고 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풀었으니 그냥 넘어가잔 것은 정권 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국민의 가슴엔 언제나 걸린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일을 판단하는 능력이 흐려집니다. 그러면 닥쳐오는 일을 또 잘못합니다. 분명히 따져서 국민 전체가 그렇다 하고 승인을 하게 되어야 역사는 진행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재판에서 한번 판결 내린 그 전례가 크게 관계 되듯이 역사에서 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5.16은 분명히 4.19에 맞서 일어난 것입니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입니다. 5.16 정권이 5.16을 될수록 혁명으로 규정 짓고 4.19를 혁명이 아니라고 하려고 갖은 수단을 써서 구구한 억지 설명을 하는 그 일이 벌써 그것을 증명합니다. 나는 도둑 아니다 하는 것이 도둑인 증거입니다.‘
밖에서 보면 5.16은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4.19혁명이 아직 완결 되기도 전에 일어났다는 것, 더구나 군인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군인이 총칼을 들고 일어났을 때 그 속에는 무슨 말이 들어 있습니까? 말 가지고는 아니 된다,토론, 항의 가지고 아니 된다, 데모 따위 가지고 되느냐? 아니 된다. 샌님들이 일 못한다, 이런 따위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실지로 그런 말 그런 생각을 발표해 말했거나 말았거나 간에 그들 가슴 속에 그것이 들어 있습니다.「隱忍自重」하던 군인이 이제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것이 비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정당한 것으로 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것은 민주당이라는 하나의 정권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 하나의 철학에 대항하고 일어난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것이 文武의 대립으로 나타났습니다.그러나 학생들이 무슨 계급은 아닙니다. 그 사상에 그 방식에 반대한 것입니다.
왜 반대 했습니까? 자기네들 말은 부정 부패를 싹 씻기 위해서라 했지만 그것 아닌 것은 오늘의 사실이 증명합니다. 부정 부패는 백배 천배합니다. 설혹 부정 부패 없애자는 것이 진정 목적이었다 하더라도 그 방법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첨부터 군인 의식을 가지고 4.19 이후의 일을 매우 불만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말로는 발표된 것이 없으나 행동에는 여지없이 나타나 있습니다. 5.16사람들은 언제 한번 학생이나 지식인에 대해 호감을 표시한 일 없습니다. 지식인의 지위는 자유당 시대만도 못합니다. 간혹 가다 대접 받는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지성 때문이 아니라 자기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하면 첨부터 컴풀렉스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5.16의 중심 인물들 중에 고등한 지식인이 별로 없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날껏 싸움터에서만 많이 돌았습니다. 일제 시대에도 흔히 보는 일이었지만 대학생이나 학자가 군대에 들어가면 각별 학대를 받았습니다. 이쪽에서 그럴 리 없지만, 스스로 고등 교육 받지 못한 것 때문에 열등 의식에 빠져 있는 심리로, 자기를 무식하다 깔보지 않나 하는 비뚤어진 생각에 비겁한 분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군대의 윗 대가리에는 일제 밑에 교육 받은 사람이 많았으니 그 야만스런 전통을 상당히 받았을 수 있습니다.
또 한걸음 더 나가 생각한다면 6.25의 영향도 있는지 모릅니다. 군인들은 피를 흘려 공산군을 막았는데 4.19가 일어나니 온 국민이 6.25의 쓰라렸던 일은 잊은 듯 학생들만 영웅을 만들어 4.19, 4.19하고 학생 자신들도 어딘지 6.25의 공로를 잊고 우쭐하는 것 같은 점이 있는데 저도 모르게 격분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노상 들어맞지 않는 추측 같지도 않은 것이, 한때 학생들 입에서 남북 협상 소리가 나왔을 때에 군인들이 분개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은 해서 좋은 것이 못되는 말이지만, 역사에 명분이 뚜렸한 4.19에 대해 감히 이러구 저러구가 있을 여지가 없는데, 거기 대해 부정하는 태도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까닭을 될수록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에서는 그 동기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물론 사사로운 개인의 심리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이 역사적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을 분명히 반성 비판해야 합니다. 인간은 약한 것이기 때문에 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은 민족적 비극의 원인이 되는 수 있습니다. 공정하게 말해서 역사상에 순전히 공공한 정신에서 된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인 것은 나라 일보다는 그의 글 재주가 자기 보다 낳은 것을 시기해서 한 것이라는 말이 있고, 대원군이 천주교도를 학살한 것도 사상이나 국책으로서 보다는 감정 때문이란 말도 있습니다. 하여간 말의 요점은 인간의 약점이 잘 났다 못 났다 하는 감정 때문에 나라의 큰 일이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자리에서 볼 때 4.19로 인해 일어난 새 정신의 올라가는 것을 어째서 꺾게 되느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네는 군인답게 군인식으로 나라 건지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하노란 것이, 깊이 스스로를 깨끗이 할만한 반성하는 힘이 모자랐기 때문에 그 일이 그렇게 잘못된 것 아니냐? 그것은 재건최고 회의 이후의 일을 보면 아무래도 그 의심을 뺄 수가 없습니다. 혁명 공약을 내걸었는데 지키지 않았다, 지키려 애쓰는 기색도 아니 뵈고 그저 주저앉아서 해 먹기 시작했다, 그 점이 첨부터의 동기까지 의심하게 합니다. 당시 그 사건에 관계 됐던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는 미안하나 후일의 역사를 위해 밝힐 것은 밝혀야 합니다. 하나 더 당돌한 말을 한다면 5.16을 결코 전 국민이 찬성한 것 아닌 줄은 알터인데, 또 언론 압박을 그렇게 해가면서 하는 보도로 해도 정치 타락이 극도에 달한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이날껏 국민 앞에 솔직히 잘못했다는 사과는 한번도 한 일이 없으니 신용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짓 통계표 억지의 변명으로 잘되어 간다고만 하니 말입니다. 자유당 때보다 낳은 것이 무엇입니까? 민주당 때의 잘못 중에서 고쳐진 것이 무엇입니까? 겉에 뵈는 건설로 속이려 하지만 그 결과가 와우 아파트 아닙니까? 그리고는 수원서 무너지고, 전주서 무너져 가는 것을 발표 못하게 하면 몇 날이나 갈 수 있겠습니까?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오늘 정치가 이렇게 된 원인은 5.16이 당초 잘못된 정신에서 나온데 있다 해야 할 것입니다. 四捨五入이라 했지만 자유당의 四捨五入이나, 공화당의 국회 별실 날치기 투표나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므로4.19 후에 5.16 온 것이 四捨五入이다 합니다. 四捨五入을 해서까지 국민을 농락하자는 것은 思邪誤入입니다. 생각이 비뚤어졌기 때문에 못 들어갈 데로 잘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詩三百에 一言以蔽之하니 曰思無邪란 공자말씀이 있습니다. 참 詩는 더러운 생각에서는 아니나옵니다. 4.19는 詩라 하지 않습니까? 거기 시시한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능히 죽을 수 있었습니다. 깨끗한 피기에 능히 국민의 죄를 씻고 맑은 정신을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거기 비하면 5.16에는 시시한 생각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양심적인 정치가에게 넘겨준다 해놓고는 양심적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게 사회를 폐쇄하고 공포 분위기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것이 시시 컴컴한 생각 아닙니까? 그랬기 때문에 5.16 이후 제 사명에 능히 죽은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구구하게 모가지 감투를 붙들었지.
누구를 깎아 내리고 속이 시원해서 하는 말 아닙니다. 그렇다고 보거든 누구든지 먼저 돌을 들어 치십시오. 고스란히 당할 것입니다. 행여 곪은 것을 째고 수술을 해서 죽을 국민이 살까 해서 하는 말입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四捨五入식의 변명을 아직 하려는 데가 희망 있는 데입니다. 아직 양심이 채 죽지 않은 아직도 두려워하고 꺼리는 것이 있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희망 있습니다. 이제 히틀러처럼 변명 조차도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면 마지막입니다.
아니 됩니다.
군인이 학생을 미워해 가지고는,
권력이 지성인을 업신여겨 가지고는,
현실이라고 이상을 무시해서는,
결과가 급하다고 도리를 짓밟아서는,
말못하는 씨알이라고 칼만 들어서는,
아니됩니다.
오월의 햇볕을 바라고 갸웃해 웃는 아옥꽃을 네가 칼로 자를 수 있느냐? 칼은 다하는 날이 와도 웃는 아옥은 영원히 아니 없어진다!
汚ᅳ戮(오일육)아 !
씨알의소리 1970.5월 2호
저작집30; 5-223
전집20; 17-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