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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1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우리가 가진 자유. わたしたちが得ている自由。
본문 갈 2:1~5
갈 2:1 그 다음에 십사 년이 지나서, 나는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2 내가 거기에 올라간 것은 계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설명하고, 유명한 사람들에게는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달리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달린 일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3 나와 함께 있는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지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4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 때문에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끼여든 자들입니다. 5 우리는 그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1. その後十四年たってから、わたしはバルナバと一緒にエルサレムに再び上りました。その際、テトスも連れて行きました。2. エルサレムに上ったのは、啓示によるものでした。わたしは、自分が異邦人に宣べ伝えている福音について、人々に、とりわけ、おもだった人たちには個人的に話して、自分は無駄に走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あるいは走ったのではないかと意見を求めました。3. しかし、わたしと同行したテトスでさえ、ギリシア人であったのに、割礼を受けることを強制されませんでした。4. 潜り込んで来た偽の兄弟たちがいたのに、強制されなかったのです。彼らは、わたしたちを奴隷にしようとして、わたしたちが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得ている自由を付けねらい、こっそり入り込んで来たのでした。5. 福音の真理が、あなたがたのもとにいつもとどまっているように、わたしたちは、片ときもそのような者たちに屈服して譲歩するようなことはしませんでした。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우리는 성도의 인간관계는 육신적인 손익계산이 아닌 복음으로 구원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된 것을 지키며 덕을 세우는 태도와 자세로 맺어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도 상호간의 관계는 물론, 아직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서도 오직 덕을 세우는 태도와 자세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성령충만한 모습으로 상대를 대할 수 있는 능력을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된 것을 확증한 바울은 이방인의 땅에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던 바울은 14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2절은 그 또한 계시를 따른 순종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을 통해 나눈 것처럼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로 보여지는 체험인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이나 명예, 혹은 세속적인 영향력이나 실력행사를 위한 수단으로 계시를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에게 어느날 갑자기 특별한 계시나 혹은 각별한 은혜의 체험이 주어진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계시나 은혜의 체험이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이 땅의 현실에 구현하는 일을 위해 허락된 것인지를 주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간청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진정으로 강한 능력의 기도는 주님과 소통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체감하는 기도인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 29:12-13, 12-14a)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일에 힘을 쓰자고 강하게 선포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 6:3)
이처럼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수단과 방법으로써 사용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은 바울의 의도나 혹은 바울의 개인적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어 가셨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드러내시길 원하셨던 것이지요.
그 내용은 먼저 이방인들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에 대한 내용을 사도들과 소통하고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아직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지키는 일에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을 보면 그들이 어떤 사역에 집중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사도행전 6장을 보시면 그 상황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들은 점점 성도들(제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기로 선언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행 6:4)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며 교회 공동체의 순전함과 온전함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온갖 박해와 율법주의자들의 미혹과 도전 가운데 주님의 뜻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 가운데 바울이 사도들을 찾아가 14년 간의 사역에 대해 공유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 다시 말해 이방지역에서의 복음전도에 대해 설명하고 보고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내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복음에 집중함으로 견고하게 존재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바울의 전도를 통해 이방지역과 이방인들에게 점점 퍼져 나아가는 복음의 열매를 공유했던 것입니다.
그 열매의 증거로서 바울은 디도를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디도는 헬라인(그리스인), 즉 이방인의 땅에서 나고 자란 이방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3절에는 디도가 그리스 사람으로서 할례를 받지 않은 채 복음을 믿는 제자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이방인이었던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하여 “노예”로 만들려는 자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몰래 공동체에 끼어들어 왔으며, 그들의 믿음은 거짓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의 조문을 따르는 것보다 율법의 의도와 그 정신을 따르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조문을 따르는 것은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진정한 자유는 복음을 믿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분명한 자유의 삶을 살게 된 것을 발견하고 믿으실 수 있기를 열망합니다.
그런데 자유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욕구대로 흡족한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억압된 것에서 풀려나는 것을 자유라고 하지요. 한마디로 자유란 속박되어 있는 상태에서 풀려나서 스스로 하고자 하는 바를 거리낄 것 없이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비롯한 성경에서도 자유에 관한 축복을 약속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대표적인 구절이 예수님의 약속이지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알 때 비로소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말씀인데요. 성경은 예수님 자신이 진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이 두 말씀의 공통점을 묵상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그것이 곧 나를 자유롭게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곧 자유로운 것이다.” 저는 후자의 말씀으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우리가 가진 자유_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표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자유란, 무엇인가를 자기 멋대로 마음에 원하는 대로 모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행하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소원이 내면에 흐르는 사람은 곧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기준이 없는 자유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런 자유를 말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방종이겠지요. 성경은 그렇게 영적인 방종이 마치 자유로운 삶인냥 하나님의 백성을 지배하던 시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이스라엘에 정치적인 제도로서 왕정이 시작되기 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라고 하는 영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라는 영적 지도자를 세우신 이유는 그들이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백성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왕”이 없다, 즉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고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로 인해 발생한 끔찍한 사건에 대해서 사사기 21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마지막 절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여기서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한다는 것은 곧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즉 자기 마음에 흡족하기만 하다면 비록 죄라도 범할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영적인 방종이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이런 영적 방종을 제어할 수 있는 대비책이 실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딤전 1:8)
율법을 적법하게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딤전 1장 9절~11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딤전 1:9-11)
이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온갖 부도덕한 행위를 제어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게 사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율법이란 애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거룩한 길을 안내하는 보물지도와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 1:16)
예수님께서도 당신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지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그러나 율법의 조문을 폐하심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5)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요구하시는 것을 완전하고 온전하게 완성하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득불 율법의 조문을 폐기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율법 조문으로부터의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도 율법의 조문, 즉 율법의 항목을 나타내는 문자들과 문장들에 얽매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그리스 사람인 디도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문에서 자유하게 되었던 것이구요.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마음 편히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복음이시며, 진리이시며, 길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이처럼 참으로 놀라운 약속입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값을 미리 치러내셨다는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요. 심지어 그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순간에 임재하시고, 나의 모든 삶의 자리에 동행하고 계신다는 이 복음의 약속은 이 세상 그 어떤 종교나 스승의 가르침에도 없는 내용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영적인 존재가치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내게 합당한 것이면 그대로 응답해 주시고, 내게 합당하지 않으면 거절로 응답하십니다. 때로 기도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의지의 노력과 실력으로 획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노력은 반드시 허무한 인생의 결말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기도하여 응답으로 얻은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축복, 그리고 은혜와 능력을 채우시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얻은 자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누리는 자유는 저주와 멸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허무함과 절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갈증과 불안, 그리고 불평과 낙심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사실에서 취하는 사리사욕의 자유를 세상이 말해도 휩쓸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바위에 서는 자유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자유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혈통과 유전적인 측면에서 유대인이 보기에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는 이제 율법의 조문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를 누립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우리는 복음을 믿고 길이오,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며 죄를 거절하고 세속의 유혹을 거절할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힘겹게 채워야 할 종교적 수단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우리의 든든한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과 수시로 자유롭게 통하는 대화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런 자유와 축복을 내게 채우신 주님께서 정해 주신 곳에 나아와 찬양과 감사를 표현하는 시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자유를 선물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모든 순간, 예수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은혜로 충만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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