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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족후손좌승지 정양]
공의 이름은 복립이고 자는 군서이며 호는 묵계로서 전주류씨이다. 삼한백(완산백(완산주의 우두머리)을 잘못 쓴 것이다.) 류습으로부터 시작하여 4세에 이르러 류의손은 참판으로 집현전 제학을 하셨고 소와당이라 부른다. 막내 동생 집의 류말손의 셋째아드님 증승지 류계동을 양자로 맞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시다.
증조부 류식은 전한을 하셨고 조부 류윤덕은 부제학을 하셨다. 부제학의 동생 통례원 인의 류윤선은 증사복시 정인 류성을 낳았고 류성은 문소김씨인 증판서 김진의 따님을 맞이하여 공을 명종 13(1558)년에 낳았다. 공은 11세 때 대종손이신 부제학공의 뒤를 이은 참봉 류지의 양자가 되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소꿉장난을 할 때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쥐고 말씀하기를
“이것이 대장부가 적을 방어하는데 쓸 연장이다”
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그가 효경을 배우기 시작하였을 때
“아무리 효도를 하고자 하여도 누구에게 하는가”
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문득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나는 정도와 같은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책을 읽고는
“임금에게의 충성으로 바꾸리라”
하고 또 기꺼이 이르기를
“나는 성취하리라”
하니 듣는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자라가면서 수업은 외삼촌 학봉 김성일에게 배웠으며 부지런히 숙련하고 충의를 스스로 목표로 하였다.
선조 21(1588)년에 발탁되여 종부시 주부에 제수 되였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학봉공이 초유사(난리가 났을 때, 백성을 불러서 타이르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로 남쪽으로 내려가니 공은 분개하며 말하기를
“내가 대대로 이어온 충신인데 국가를 위하여 의롭게 죽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처자를 형님 댁에 부탁하고 큰 칼을 들고 따라가니 학봉공이 매우 기뻐하였다. 계책을 세우고 도와서 사천, 고성을 수복하였는데 공의 공적이 많았다.
조정으로부터 학봉공이 승진하여 경상도 우관찰사로 진주성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병환으로 별세하실 때 성을 지킬 것을 공에게 부탁하니 공은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등과 맹세하고 협력하여 지키기를 60여일에 성은 결국 함몰당하고 말았다. 여러 공과 같이 같은 날에 순절하니 이날이 선조 26(1593)년 6월 29일이다.
왜란이 끝났을 때 진주에 사당을 세워 죽은 이들을 모두 제사 지내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공은 벼슬이 없이 수호를 하였기 때문에 같이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단지 그 집에 세금과 부역면제의 특전이 내려지고 진주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이를 슬퍼하였을 뿐이다.
그 후 127년만인 숙종 45(1719)년에 예조판서 민진후 공께서 공(류복립)에 대한 여론을 임금께 여쭈어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11년이 지난 영조 5(1729)년에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는 도암 이재 선생이 글을 지었다.
그리고 그 후 74년이 지난 순조 2(1802)년에 진주 창렬사에 배향(사당, 서원 등에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신주)를 모시는 것)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니 옳은 일이며, 그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더욱 오래도록 나타날 것이니 나라에서 베푼 포상이 어느 법도에도 유감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다.
아! 선비로서 불행한 난을 만나 자신이 처해 있는 곳이 재야의 신하로서 처음에는 의롭게 죽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하였으리라. 민간으로서 생활하는 자들이 공의 풍격을 듣고 가까이 아는 이로서는 더욱 부끄러워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전부인 전주이씨는 사직 이영종의 따님인데 공보다 16년 앞서 선조 10(1577)년에 별세하셨다. 묘소는 고양시 원당동(흥도동) 서남향 산기슭에 있는데 순절하신 공의 유품인 의관을 우측에 부장 (부부의 시신을 한 봉분에 묻는 것. 합장)하였으며 외아들을 두었다. 공의 후부인 전주이씨는 현감 이복윤의 따님인데 자손이 없다.
외아들 호는 5남을 두었는데 괄, 절, 집, 익, 적이다. 모두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모시고 남이 버린 집에서 생업을 하시었다. 증현손 이하는 100여 명으로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 없다. 새겨(명) 이르기를
“촉석루가 진강 옆에 있고 충신의 피가 영구히 부서지지 않을 소나무가 우거진 동산에 있다. 조상의 묘에 아주 가까이 혼이 돌아오니 이것이 그대인가”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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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비음기]
(예조판서 송성명)
숙종 21(1695)년 겨울에 내(송성명)가 황송하게도 정부의 사인으로서 먼저 덕을 갖춘 사람을 이어서 명을 받아 상경하여 밀린 장부들을 살펴보던 중 충신 류복립의 건이 있어 진주에서 순절 시에 있었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여론을 수집하여 문서를 보내라고 감사(각 도의 관찰사)에게 지시하여 보고를 받고 포상 청구를 심사하는 예조에 회답을 올려 정부 담장자에게 보냈다. 나로 인하여 이의 실적이 상세히 밝혀졌다,
임진년과 계사년에 풀옷을 입은 야만인이 열을 지어 묏돼지처럼 달려 들어와 성은 와해 되었다. 학봉 김성일이 경상도 우감사로 진주성을 지키고 있을 때 공은 학봉의 생질로서 일찍이 공의 가르침을 받고 항상 스스로 충의와 절개에 힘을 쓰며 전에 제수받은 종부시 주부 벼슬은 하지 않고 집에 살았다.
그리고 난리 소식을 듣고는 분개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로서 국가를 위하여 의롭게 죽는 것은 당연하다”
라 하고 곧 가족을 형님 류복기에게 맡기고 학봉공을 따라가서 포위 당한 성중에서 밤낮으로 온 힘을 다하여 보좌하고 계책 수립에 참여하였다.
다음 해에 학봉공의 병이 위독하여 성을 지킬 것을 공에게 부탁하니 공은 곧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등과 온 힘을 합하여 사수하기로 맹세를 하였다. 학봉공이 별세하니 성은 적으로부터 더욱 고립되였으나 오히려 패잔병 등을 수습, 정비하여 두 달을 버텨낸 것은 공의 힘이 컸다.
결국에는 꺾이어 함락된 날에는 화살이 빗발치는데 날이 시퍼런 큰 칼을 들고 적에게 돌격하여 싸우다 순절하시니 그때 향년 36세이시다. 아! 그 몸을 예리한 화살촉에 당하셔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니 열렬한 대장부라 할 수 있다.
비바람을 맞는 시신을 전장에서 해골도 거두지 못하였으니 그 역시 슬픈 일이로다. 그 때 조정에서는 그 집에 세금과 부역면제의 특전이 내려져 이미 법에 따라 보상한 기록이 여러 번 있었다.
조정의 말단 직위에 있는 감사가 행적을 작성하여 해당 관청에 보고하였으나 오히려 임금께 올리는 복명이 조정에서 묶이어 있으니 국가에서 정성으로 한다는 것이 규정이 부족하여 문장에 흠이 있으니 심히 억울하고 분한 일이로다. 이에 하급 관리에게 곧 조사하여 밝히도록 타일러 임금에게 아뢰게 하니 이조에 내려져 이조참판에 추증되였다.
영조 5(1729)년에 이르러 유림(유교의 도를 닦는 학자들. 사림)들이 본도(경상도)에서 일제히 부르짖으며 일어나 장계로 청하였다. 도설 예조판서 김시환, 참판 송인명이 임금에게 복명을 하여 청원이 시행되었다. 즉, 그의 7세손 심의 집에 정려가 내려졌다.
그 정려에 이르기를 “충신의 문”이라 하였다. 우리 거룩한 임금의 조상께서 포상하는 것은 절의를 숭상하고 심으려는 법도의 뜻이 있다. 이것은 밝고 즐거운 일이다. 공은 세종 때 집현전 제학 류의손의 6세손이며, 모친 김씨는 학봉공의 누이이다.
절행이 있어 정려문이 안동 땅에 있다. 공이 세운 탁월한 정신의 연원이 모두 그런데 있는 것이다. 역시 부군을 아는 그의 모친이 있는 곳에 그 자식이 있는 것이다. 류생원 심(묵계공의 7세 종손)은 의논하여 공적을 적고 아는 것을 대략 돌에 새겨 세우니 사적, 정려 및 포상의 전말은 위와 같다.
(정려기)
아! 이는 옛 충신 증이조참판 류복립 공의 정려이다. 공의 자=는 군서이며, 완산(전주)인으로서 세종 때 명신 류의손의 후손인데 일찍이 종부시 주부(종6품)에 발탁되였다.
임진왜란 때는 학봉 김성일이 경상 우감사로 진주성을 지키고 있을 때 공이 따라가 협력하고 계책을 세워 보고를 올려 여러 번 승전을 한 바 있다. 학봉공이 별세한 후 적병이 더욱 많이 몰려와 선조 26(1593)년 6월 29일에 성을 지킬 수 없게 되자 공은 김천일, 고종후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순절하니 공은 향년 36세이다.
백여 년 후 5세손 규석(묵계공의 6세)이 비로소 전해오는 이야기를 적극수집하여 얻은 것은 공의 조카 우잠이 촉석루 아래에서 지낸 초혼제와 또한 족보에 기록된 사실들을 찾아내어 고향 사람들에게 밝히니 이로 인하여 방백(관찰사)이 듣고 이 사실을 조정(정부)에 알려 숙종 45(1719)년 예조판서 민진후 공이 임금에게 복명하여 증직한 것이 지금의 관직이며, 영조 5(1729)년에 또한 정려가 내려졌다.
공의 어머님께서는 학봉의 누이로서 인조 때 일찍이 그 정절을 나타낸 바 있으니 공의 충성심은 모두 그로 말미암은 것이다. 공의 후손은 양지현(면)에 살고 있는데 5, 6세손은 더욱 번성하였고 지금에 이르러 그의 종손 심(묵계공의 7세 종손)의 집에 정문이 세워졌다.
아! 공의 지위는 하급 관리에 불과했으나 나라의 위기에 도망하여 숨지 않고 난리에 뛰어들어 초개같이 몸을 던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이는 필시 평소의 기상과 절개가 타인보다 크게 뛰어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가려졌다가 마침내 드러나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도다.
예절에 따라 이와 같이 선조의 미덕을 칭송하고 명확히 밝히는 것은 후손의 도리이다. 류규석(묵계공의 6세)에게 그와 같음이 있으니 어찌 효자라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또한 전하는 바가 없다고 하겠는가? 심이 내게 글을 청하여 정려문 곁에 걸겠다고 하면서 규석의 조카라 하였다.
숭정후재병인삼월일 원임대제학 이재 기
이조판서 신만 서
영조 22년(1746년) 3월 전 대제학 이재가 글을 짓고 이조참판 신만이 쓰다.
[초혼제문]
- 종자 우잠
- 조카 류우잠
원통하다. 우리 숙부! 어디로 가셨나요. 원혼은 의지할 데 없고 의골은 누가 묻을까. 공의 말씀 생각하니 더할 수 없는 고통이 한량없네. 삼가 생각해 보니 우리 숙부 장한 뜻 가지시고 처음 병란 만날 때 군영에 가서 보좌하고 협력하다 성채에서 시석에 당하시니 하늘이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으리요. 오장(제갈량이 사마의와 대적하다 병사한 곳. 김성일의 죽음을 말한다)에 별 떨어지는 큰 화가 거듭 와서 수양(중국 당나라 때 장순 장군이 안록산의 반군을 막다가 전사한 곳)의 죽음으로 이어갔네.
*봉상: 묵계공이 어릴 때 쑥대로 화살을 만들고 뽕나무로 활을 만들어 가지고 논 것을 말한다.
방종하는 저희 흉한 칼 끗에 우리 충량 해쳤으니 몸과 넋이 어디로 갈까. 의관 둘 땅도 없네. 열사를 그 혹시나 말가죽으로 쌀 것인가. 원통하다 우리 숙부 해곡(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간 곳)참화 되었네. 옛날을 돌이켜 보면 도망쳐 숨을 수도 있을 텐데 돌아와서 가족을 형제에게 의탁하고 앉은자리 데워질 겨를 없이 큰칼 가지고 출전하시어 한번 간 뒤 못 돌아오니 저승과 이승을 영원히 갈라놓았네.
고아는 모친 모시고 이미 경기 지방으로 돌아가니 혼령께서 천리의 먼길에 익숙한데 하늘이 침침하니 이 한은 끝이 없어요. 산천은 분노에 차고 만물도 슬퍼하네. 촉석루 가운데서 곡(곡)하고 술 한잔을 올리오니 이 슬픈 정성을 살피시고 혼령이여 돌아오소서.
[분황고유문]
- 오대손 명진
선조 25(1592)년 섬의 오랑캐(왜구) 난으로 학봉공이 진주성 방어의 명을 받았을 때 일찍이 절의의 가르침을 받고 이에 힘썼다. 선대의 음덕으로 발탁되어 벼슬을 제수받았는데 나가시지 않고 밭에 가서 평생 농사를 지으려고 경험을 쌓으려 했으나 공은 오직 나라를 생각하셨으며, 나라가 어지러울 때 달려가 시석으로 도우며, 계책을 세워 기치를 빛나게 하고 승전을 임금께 바치었으니 공훈이 크다. 선생(김성일)이 별세하시기 전에 지휘권을 부탁하여 성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
탄환에 성은 고립되고 세력은 미약한데 흉악한 적들은 약점을 이용하여 달려드니 군사들은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순절하신 당일에는 적병들의 세력이 더욱 불어나 아군의 기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의협심과 담력은 더욱 세차게 분발하여 스스로 화살이 빗발치는데 날이 시퍼런 큰칼을 들고 적에게 돌격하여 싸우니 피가 빗물같이 흘러 오염시켰다.
충의를 위하여 목숨 바친 혼을 고인이 입던 옷으로 부질없이 불러보나 의골을 파묻기가 어렵습니다. 저 푸른 하늘이시여 이 세상에서 순절하신 의로운 발자취가 당연히 역사에 올라 포상자 명단에 나열되어 널리 떨쳤어야 하거늘 사람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지금까지 백번을 거듭하면서 가슴 아프고 몹시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 우리 고향에서 모두 추배(사당, 서원 등에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추가로 모시는 것)되지 않은 것에 분개하고 애석하게 생각하여 모든 실적을 밝혔습니다.
대궐에서 특별히 의가 억수같이 열렬함을 가상히 여기고 문관의 자리로서 이조참판 관직의 교지를 내리니 공손히 받들어 감히 분황(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할 때 조정에서 사령장과 황색 종이에 쓴 부본을 주면 그 자손은 추증을 받은 선조의 무덤에 고하고, 황색 종이의 부본을 그 자리에서 태우는 의식) 함을 고하나이다. 영광스런 맑은 샘물이 조정으로부터 넘쳐흐릅니다. 자손들이 돌이켜 지나온 옛일을 생각하니 감격의 눈물이 계속 흐르옵니다.
[창렬사봉안문]
(예조판서 김희순)
임진년과 계사년(용사)에 풀 옷을 입은 야만인(왜구)의 난을 막아낸 창의사 여러분들이 한마음으로 도와서 고요한 열사의 사당에 모셔져 은덕을 갚는 향사가 이제야 승낙되었다. 생각해 보니 류공(류복립)이 어찌하여 홀로 빠졌었는고! 공은 장군(김성일)의 보좌역을 부탁받아 하늘을 떠받치는 충정으로 화살이 빗발치는데 날이 시퍼런 큰 칼을 들고 적에게 돌격하여 싸우다 옳은 일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도다.
촉석의 높고 험한 산에 의로운 넋의 울음소리는 지사들의 흥취를 돋굴 것이다. 몇 년에 걸쳐 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여론을 임금이 들으시니 이를 칭찬하시고 먼저 하던 대로 나중도 공평하게 나란히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예전에는 4, 지금은 5로 점을 치고 날을 가려 길일을 정하여 위패 만들기를 이미 끝내서 의로운 혼령들이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것이니 많은 선비들이 목욕재계하고 향기로운 제수를 올리나이다.
(상향축문)
막부에서 충성을 떨치었고 융원에서 의탁을 받았도다. 외삼촌(우감사 김성일)과 생질(류복립)이 원(중국의 충신)과 순 같았도다.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시어 살신성인(옳은 일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하셨기에 이에 찬술을 올리고 제법에 따라 진설(제사나 잔치 때 상에 음식을 차려 놓는 것)하여 신령께 삼가 제사를 올리나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