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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령산맥 서남부에 솟은 계룡산(鷄龍山)
2023-01-29(다섯째 일요일 / 눈, 흐림, 맑음 -10º~ -1º)
용과 닭, 산과 물이 휘감는 천하의 명당 계룡산(鷄龍山)
코스 : 동학사주차장 -> 문골 -> 문골삼거리 -> 큰배재 -> 남매탑,점심(상원암) ->
삼불봉 -> 자연성능 -> 관음봉 -> 은선폭포 -> 동학사주차장(원점회기).
약 11km / 약 6시간 40분 (놀멍,쉬멍)
함께한 분들
주향기 / 가원 / 죽향 / 회오리 / youn
산바람 / 아름뜰 / 라이온 / 마중물 / 청마(靑馬)
사진 촬영 청마(靑馬) ~
계룡산의 유래 “닭 벼슬을 쓴 용”이라는 뜻으로 조선 초기에 태조가 계룡산 아래 도읍을 정하려고 이 지역을 답사하였을 당시 동행한 무학대사가 산의 생김새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 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 일컬었는데, 여기서 두 주체인 계(鷄갑)와 용(龍사)을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계룡산은 충청남도 대덕군·공주시·논산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826m의 국립공원이며, 신도안은 논산군에 속한다. 계룡산 주위에는 갑사(甲寺)·동학사(東鶴寺) 등의 절이 있으며, 《정감록 鄭鑑錄》에서 주장하는 신도읍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논산시 두마면 부남리의 대궐터에는 조선의 태조가 무학대사(無學大師)와 정도전(鄭道傳)을 데리고 와서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사하였다는 주초(柱礎)와 제방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84년 신도안의 재개발사업 이전까지만 하여도 70여 개의 종교단체가 있었다.
풍수지리학으로 본 신도안 계룡산은 금강산(東嶽)·구월산(西嶽)·지리산(南嶽)·묘향산(北嶽)과 더불어 중악(中嶽)으로 불릴 만큼 명산으로 꼽히고 있다.예로부터 십승지지(十勝之地)는 병화가 들어오지 못하고 삼재(三災)의 난이 머무르지 못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계룡산은 어느 명승지보다도 지기·지령이 뛰어난 곳으로 유명하였다.옛 삼한시대에는 계룡산을 천태산(天台山)이라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는 옹산(翁山)이라 부르던 것을 태조가 조선을 개국할 무렵 무학대사 등이 와서 보고는 “이 산은 한편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고, 또 한편으로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니 두 가지 모양을 모두 따서 계룡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한 뒤 지금의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죽향님이 산행에 오신분들에게 한개씩 나누어준 선물 ↑
계룡산 중에서도 대궐터가 있는 신도안 일대는 특히 풍수설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신도안은 행정구역상으로 논산시 두마면 석계리, 정장리, 부남리, 암사리, 용동리, 남선리와 대전 유성구 송정동 일부에 걸쳐 있는 해발 5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여 남쪽만이 트인 동서 약 4㎞, 남북 약 3㎞인 분지이다.이곳은 신도역에서 들어오는 양정고개의 남면을 제외하고는 동·서·북 삼면이 모두 산협으로 둘러싸여 있다. 《계룡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지세는 백두산을 종으로 하여 그 지형의 꿈틀거림이 큰 용과 같은데, 계룡산이야말로 백두산으로부터 흘러내린 모든 산들의 원맥이 멈추어진 곳이라고 한다.풍수가들의 말에 따르면 선인봉(仙人峰)은 청룡(靑龍)이 되고 국사봉(國師峰)은 백호(白虎)이며 삼불봉(三佛峰)은 현무(玄武)가 되고 대둔산(大芚山)은 주작(朱雀)이라고 한다.
신도안을 중심으로 하여 동과 서의 양편으로 용추(龍湫)가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동용추, 서쪽의 것은 서용추라 한다.전설에 따르면 동추에는 자룡(雌龍)이 살고 서추에는 웅룡(雄龍)이 살았다고 하여 각각 암용추·수용추라고도 부른다.이렇게 신도안을 좌청룡과 우백호가 옹위하고, 숫용추 계곡과 용화사 암용추 쪽으로 흐르는 내와 밀목재 남쪽 계곡에서 흐르는 세 줄기 계곡물이 부남리 궁궐평을 양쪽으로 감싸고 돌아 정장리 별뜸(현 삼군본부 자리로 들어가는 사거리 옆)에서 합쳐져 신도천을 이루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두마와 대전 경계지점인 기성 원정리 영회마을 앞에서 벌곡천과 합하여 구부러져서 동류하여 갑천이 된다. 이것은 다시 신탄진에서 금강 본류와 합류한다.
이 때문에 옛부터 풍수가들은 신도안을 중심축으로 산천이 감싸고 흘러서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것 같은 산태극, 수태극의 형국을 이루었다 하여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난 길지로 여겨왔다.명칭 유래신도안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기록과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태조가 즉위하여 계룡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기초공사까지 하다가 물기록되어 있다.길이 멀어서 중지하고 말았는데, 그 뒤 그곳을 신도라 부르며 아직도 군데군데 초석들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룡산록》에 따르면, 계룡산 제자봉(帝字峰) 밑의 지역을 예로부터 ‘제도(帝都)’라고 불렀는데, 신라 말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와서 “중국에 황제가 있는데 어찌 조그만 나라에서 이런 명칭을 쓸 수 있읍니까? 당장 이를 바꾸십시오.”라고 하여 신도(辛都)라고 고쳤다가 조선 개국 초에 신도(新都)로 바꾸었다고 한다.《계룡산록》에 보면, 무학 등의 간청에 따라 태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고 공사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이 곳은 뒷날 정씨(鄭氏)가 도읍할 곳이니라. 네 땅은 아니니 너는 한양으로 가거라.”라고 하여 공사를 중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일설에는 태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였던 것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세웠으나, 민심이 돌아오지 않게 되자 남쪽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면 백성들이 호응하게 될 것이라는 신하들의 간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도읍의 공사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민심이 수습되자 한양으로 옮겼다는 것이다.이와 같이 태조의 신도안 천도계획설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풍수지리와 민심의 불가분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신도안의 장터를 중심으로 하여 서북쪽 일대를 ‘대궐터’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동쪽으로 제자봉이 있고 그 밑의 지역 일대를 ‘동대궐’, 신도초등학교가 있던 서북쪽 일대를 ‘종로터’라고 부른다.그리고 대궐터를 중심으로 하여 동문·북문·남문이 있다. 또한, 태조가 천도준비를 할 때 가져다 놓았다는 주춧돌 94개 중 파손된 2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인력으로는 운반하기 어려운 큰 돌들로서 대둔산에서 가져왔다고도 하며, 백제왕이 공주로 천도하려고 할 때 부여에서 운반해 놓았던 것이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대역사를 시도하려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신도안 종교촌의 형성 및 변천1924년 동학의 한 교단인 시천교 제3세 교주 김연국이 황해도와 평안도의 신도 약 2,000여 명을 데리고 계룡산 밑 용동리에 자리잡으면서 계룡산 신도안 일대에는 종교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1984년 삼군본부 이전사업 시행으로 모두 이주당하기 전까지 60여 년간 증산교의 중심지인 전북 모악산 일대와 더불어 한국 신종교의 메카로서, 민중신앙의 집산지로서 세인의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런데 신도안이 종교촌으로서 그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1950년대의 일이다. 당시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일반 민중은 평화롭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신천지를 기대하게 되었고, 이러한 민중의 종교적 열망에 부응한 것은 개신교의 말세 재림신앙, 불교의 미륵하생신앙, 정감록의 정도령 출현신앙, 정역의 개벽운도신앙 등이었다.그리하여 각종 신비주의적 신앙풍조와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현세적 구원자들이 출현하였는데, 그 중에는 전통적인 신앙내용을 주로 하는 불교계나 무속계뿐만 아니라 서구 종교의 말세 신앙과 한국적인 영성을 독특하게 결합시킨 기독교계 신종교 지도자들도 다수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에 의해 신도안 종교촌도 전성기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신도안에 종교촌이 형성된 직접적인 이유는 한말에 민간에 널리 유포된 비결서 《정감록》의 예언이 이곳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민중들의 믿음 때문이었다.《정감록》을 비롯한 예언비서들에는 현세는 쇠운이 다가왔으므로 이제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세사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그러나 말세가 되어 운세가 쇠진해 가면서 정도령(鄭道令, 正道令)이 나타나서 새로운 운세를 열어준다는 것이다. 메시아 대망과도 같은 이러한 구원사상은 현실을 부정하고 십승지지의 피난처를 찾는 은둔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중종교단체들은 바로 이런 예언비서에 예시된 정씨 왕국의 주인공으로 자처하면서 장차 새 왕조의 중심지가 될 이곳 계룡산에 정착하여 있으면서, 저마다 후천선경(後天仙境)의 주도적 구실을 담당할 사명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도안 종교촌의 대표적인 종교적 특성은 정감록 신앙에 바탕을 둔 후천개벽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계룡산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교단들의 신앙형태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유·불·선 삼교의 교리혼합 및 후천개벽사상·지상천국사상·구세주신앙·선민사상, 특히 《정감록》에 예시된 정도령 신앙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런 것은 우리 나라 민중종교 일반에 나타나는 신앙형태이기는 하지만, 보다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이 지역의 신앙에서 단군신앙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계룡산 신도안에 세워진 작산단군전은 근대 한국의 단군전 건립에서 시초의 역사를 가진 것이며, 또 더 넓게 보아 충남 전역에는 12개의 단군사묘가 세워져 있어 전국 단군사묘의 3분의 1을 넘어서고 있다. 게다가 대개의 신종교 교단이 단군계 종단이 아니면서도 단군신앙을 포괄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불교계나 무속계뿐만 아니라 각세도계나 기독교계 신종교들 역시 단군을 신봉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계룡산 신도안의 종교적 특성은 정감록 신앙을 주로 하면서도 단군신앙을 포섭하고 있어, 전북 모악산 부근에서 증산신앙이 주류를 이루는 것과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고 하겠다.
한편, 이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신앙형태는 ‘계룡할무니’라는 산신숭배이다. 이 할머니산신은 우리 나라 전체 산신령들을 호령하는 주신(主神)으로 섬겨지기도 한다. 그 밖에 계룡산 신도안 동서에 있는 양추(兩湫)에는 용신(龍神)이 존재하고 있다고 여겨져 숭배되고 있다.1975년 8월 강경경찰서 신도안 유사종교 집단지역 정화작업이 있기 전까지 이 곳 계룡산일대에 자리잡은 종교단체의 수는 100여 개나 되었다. 제법 큰 규모의 조직과 체제를 갖춘 종교단체에서부터 1종교 1교주 1신도를 겸한 단체도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정부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종교정화운동은 계룡산 일대에 엄청난 영향을 몰고 왔다.미신타파의 미명 아래 계룡산 곳곳에 설치된 제단과 각종 암자, 치성터 등이 허물어지고 철거당했다. 또한 100여 개에 이르던 종교단체 대표들이 산림법 위반, 사기,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로 구속, 검거되기도 하였다.그 후 1983년 8월부터 1984년 6월 30일까지 계룡대 이전사업을 가리키는 이른바 ‘6·20사업’이라는 이름의 극비작전이 실시되어, 신도안의 모든 민간인들은 하루아침에 밀려나고 말았다.그러나 대부분의 신종교인들은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고, 주변에 머무르면서 머지않아 다가올 새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철거되기 직전인 1982년에 계룡산 신도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던 종교단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불교계: 법정사(法正寺)·제석사(帝釋寺)·화장암(華藏庵)·황룡사·원불교신도교당(圓佛敎新都敎堂)·원불교 삼동수양원(圓佛敎三同修養院)
② 무속계: 무량천도(無量天道)·백암사·법룡사·극락사(極樂寺)·봉안사(奉安寺)·용흥사(龍興寺)·학룡사(鶴龍寺)·견성암(見性庵)·염불암(念佛庵)·중원사(中元寺)·연수암(蓮水庵)·황룡사·관음사(觀音寺)·미륵사·미륵암·운봉사(雲鳳寺)·정토사·옥녀봉산신각(玉女峯山神閣)·청룡암·불암사(佛巖寺)·대덕암(大德庵)·충효사(忠孝寺)·성도사(聖都寺)·용수암(龍水庵)·자성암(自性庵)·대천사(大天寺)·태극사(太極寺)·법룡사(法龍寺)·신흥암(新興庵)·청학사(靑鶴寺)·봉원사(奉願寺)·보덕암(寶德庵)·월정사·백룡암(白龍庵)·계명사(鷄鳴寺)·수룡암·천룡암(天龍庵)·자련암(自蓮庵)·미륵불용화법당(彌勒佛龍華法堂)·청룡사·광명암(光明庵)·복렬암(福烈庵)·삼선암(三仙庵)·서봉암(棲鳳庵)·황적암(黃跡庵)·용화사(龍華寺)·통천암(通天庵)·도덕암(道德庵)·머리암·용문암(龍門庵)·옥명사(玉明寺)·떡보살·기도막·석암사(石巖寺)·천태사(天太寺)·용추사·갑순암(甲淳庵)·통룡굴·재순암(在順庵)
③ 유교계:천진전(天眞殿)·삼천도(三天道)·순국선열봉안소·석굴암·유불선합일유도갱정교화일심교(儒佛仙合一儒道更定敎和一心敎)
④ 동학계:정도교(正道敎)·천진교(天眞敎)·수운교(水雲敎)·동학교·정도교대본영원(正道敎大本營院)
⑤ 찬물계:천지대안교(天地大安敎)
⑥ 단군계:계룡수도원(鷄龍修道院)·단성전(檀聖殿)
⑦ 기독교계: 백암새일교회·세계일주평화국·삼신당(三神堂)·안식문(安息門)·기독교성결교회
⑧ 계통불명:삼안석사(三安石寺)·영신암(靈神庵)·삼성암(三星庵)·천문암(天文庵)·계룡정심원.
1983년 8월부터 1984년 6월까지 충청남도는 5개 리(암사·정장·부남·석계·용동)에 있는 건물 및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재개발사업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 지역 안에 산재하던 종교단체들도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신도안 이주 현황을 살펴볼 때, 대전·논산 지역으로의 이주자는 전체 1,080세대 중 800세대로서 약 80%였으며, 종교단체는 80% 이상이 논산·연산·대전쪽으로 이주하여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는 강한 성향을 보여주었다.
즉, 종교단체들은 계룡산 신도안을 떠날 수 없다는 강렬한 의지를 나타내면서, 적어도 계룡산 주봉이 보이는 곳에 머무른다는 집념을 보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계룡산을 천년왕국의 도읍지로 여기며, 새 세상의 종교적 중심지라고 강력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일가공회의 양도천목사는 “한님이 계룡산을 떠나지 말라는 계시를 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계룡산이 바라보이는 양정의 황태골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으며, 정도교, 봉안사, 일심교, 천지대안교 등의 교단도 계룡산이 보이는 가장 가까운 장소에 아직 머무르고 있다
또한 많은 군소 교단들이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와 상·하신리 일대, 두마면, 신원사 주변, 대전 시내, 식장산, 보문산 아래 용운동 등에 흩어져 ‘00협회’ ‘00법회’ ‘00수도원’ ‘00정사’ 등의 이름을 달고 혹은 신장대만 내건 채 법당을 차려 놓고 점을 치거나 굿을 해주고 있다 한다.이러한 현상은 신도안에 위치하여 있었던 100여 개의 종단뿐만 아니라, 넓게는 계룡산 주봉의 맥을 따라 있는 진잠면 학하리의 종단들과 대전지역 보문산 밑의 신종교단체들까지도 모두 풍수지리적 택지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새 세상의 기운을 받으려는 의지가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계룡산록(鷄龍山錄)『한국신흥종교』(류병덕,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1974)『한국종교』(한국종교사학회,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1973)『한국신흥종교총람』(이강오,한국신흥종교연구소,1992)『계룡산지(鷄龍山誌)』(충청남도,199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계룡산신도안(鷄龍山新都─))]
‘남매탑’ 유래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 3-1번지에는 크고 작은 석탑이 다정하게 서 있다. 동학사에서 북쪽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2km 정도 오르면 넓직한 터에 위치한 이 탑은 청량사지 7층석탑(보물 제1285호)과 청량사지 5층석탑(보물 제1284호)으로, 일명 ‘남매탑’으로 불린다. 석탑 옆에는 ‘상원암’이라는 암자가 자리해 석탑을 관리하고 있다. 암자보다 석탑이 유명한 이 곳에는 한 스님과 여인의 운명적인 ‘만남과 수행’의 드라마틱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삼국시대 때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백제의 왕족이였던 한 사람이 계룡산으로 들어왔다. “내 여기서 수행자가 되어 나라를 잃은 슬픔의 망념을 벗어 던지리라.” 이렇게 생각한 그는 현재 남매탑이 자리하고 있는 청량사지 터에서 삭발염의를 하고 스님이 됐다. 그는 풀잎으로 듬성듬성하게 토굴을 지어 자그마한 부처님을 모시고 평생 수행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오고 가는 사람 한명 없는 산중에 부처님을 시봉하며 살기로 마음먹으니 그동안 나라를 위해 싸운 일이 한낱 부질없는 물거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니….”
스님은 ‘모든 현상세계는 마치 꿈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아서, 또한 이슬과 번개 같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가슴속에 새기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눈이 억수같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데 문 밖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큰 동물이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 끙끙거리는 소리 같았다. 깊은 산중이라 평소에도 산짐승들이 먹을 것을 찾아 내려오는 터라 스님은 문을 열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 보았다.
“아니, 호랑이가 아닌가? 덩치는 산 만한 호랑이가 왜 여기에 와서 저렇게 고통스러워할까?” 스님은 겁이 나면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짐승에 대한 측은심이 생겨 조심스럽게 호랑이의 행동을 예의주시해 보았다.“어라, 저 녀석이 뭔가를 잘못 삼킨 모양이구나. 목에 뭔가 걸려 있는 게 틀림없어.” 며칠 동안 고통 속에 시달린 듯 호랑이는 기운이 없었다. 이미 목구멍에는 피멍든 상처가 깊어 보였다. 사람을 헤칠 기력이 없음을 확인한 스님은 호랑이 곁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러자 호랑이는 마치 자신의 목구멍에 걸려 있는 무언가를 제거해 달라는 듯 목을 크게 벌렸다. “그래, 그래. 내가 네 목에 걸린 가시를 제거해 주마.”
이렇게 말한 스님은 호랑이의 목 안으로 손을 넣어 잡히는 무언가를 밖으로 빼내보니 날카로운 동물의 긴뼈가 나왔다. 목에 가로로 걸려 며칠동안 호랑이를 괴롭혔던 것이다. 스님은 호랑이에게 긴 법문을 했다. “호랑이야, 아무리 네가 미물의 축생이라도 해도 네가 헤치는 짐승들의 고통을 헤아려야 한다. 지금 너가 당하는 고통은 너로 인해 죽은 짐승의 고통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도록 하여라.”
호랑이는 스님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이 넙죽 절을 한번 한 뒤 숲으로 사라졌다. 이런 일이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났다. 대지는 또 하얀 눈으로 휩싸였고 사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스님은 새벽 일찍 일어나 수행하는 토굴을 나와 주변을 산책하고 돌아가는데 호랑이가 토굴 안으로 무언가를 떨어뜨려 놓고 사라졌다. “며칠 전 목에 뼈가 걸린 호랑이가 틀림없는 것 같은데….” 스님은 가까이 가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사람이 아닌가. 보아하니 여자 같은데 이 산중에 어떻게 호랑이에게 물려 왔담?” 혼절한 듯한 여인을 토굴 안으로 들인 스님은 물수건을 따뜻하게 데워 머리에 올려 놓으니 여인은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여기가 어디죠?” 겁에 질린 여인은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걱정 마세요. 당신은 호랑이게 물려와 이곳에 오게 된 것이오. 이제 호랑이는 없으니 안심해도 좋소.” 그제야 여인은 안심이 되는 듯 한숨을 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루를 꼬박 잔 여인은 다음날 깨어나 자신이 겪은 일을 상세하게 말했다.
“저는 경상도 상주에 사는 김화공의 여식이옵니다. 제 나이 열여섯이 되어 집안에서는 혼사이야기가 오갔고, 결국 저는 이웃 마을 양반댁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첫날 밤을 맞은 날 소녀는 소피를 보기 위해 측간을 다녀오기 위해 나왔다가 커다란 불빛을 만나 혼절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 눈을 떠 보니 지금 이 자리에 소녀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입니까?”
“아, 그려셨군요 낭자. 여기는 계룡산 중턱의 토굴이오. 아마도 호랑이는 그대를 헤치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소. 다만 제가 며칠 전 목에 길다란 뼈가 걸린 호랑이를 구해 주었는데 그 호랑이는 저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여인을 물어다가 내 토굴에 놓고 간 게 틀림없소. 이제 큰 화를 면했으니 기운을 차려 어서 남편과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빨리 가시오.”
이 말을 하자 갑자기 여인은 대성통곡하며 자신을 한탄하기 시작했다. “스님, 이제 소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소녀의 집안과 마을에서는 제가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었을 것일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소녀는 이미 스님의 거처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여인의 흐느낌에 스님은 당황했다. “그러면 어찌하면 된단 말이오. 해결책을 말해 보시오”
그러자 여인은 자신의 입장을 또박또박 말했다. “어차피 저는 이미 한번 죽은 목숨입니다. 그러니 스님께서 소녀를 어여삐 여기시어 아내로 맞아 주시면 평생 지아비로 모시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정중하게 말했다. “여인의 사정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소승은 이미 부처님의 제자가 된 몸입니다. 여색을 멀리하기로 다짐하고 평생 불도(佛道)를 닦기로 한 몸이니 그대의 여인이 될 수가 없소.”
하지만 여인은 오갈 데 없는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을 받아주길 간청했다. 며칠을 고민한 스님은 여인에게 제안을 했다. “그대의 딱한 처지를 이해할 수 있소. 그러니 내가 제안하겠소. 그대와 나는 오늘부터 오누이의 인연을 맺으면 어떻겠소. 물론 그대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오. 그리고 평생 이곳에서 비구와 비구니로 살면서 수행하다가 한날 한시에 열반에 드는게 어떻겠소?” 여인은 스님의 제안에 대 환영의 뜻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소녀는 비구니가 되어 평생 이곳에서 수행하며 살다가 세상과 하직하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여인은 스님과 오누이의 인연을 맺고 출가한 후 비구니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약속한대로 한날한시에 열반에 들었다. 두 스님이 열반에 들자 이들의 아름다운 수행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은 두 수행자의 행적을 후대까지 기리고자 2기를 석탑을 조성하고 ‘남매탑’이라고 불렀다.
삼불봉(三佛峰)
계룡산에 두 번째로 높은 봉으로 계룡 제2경에 속하는 삼불봉의 설화(雪花)를 꼽는다, 계룡산 정상이나 동학사에서 이 봉우리를 바라보면 세 부처님의 모습을 닮아 삼불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한다
동학사(東鶴寺)
고려 태조 3년(920)에 도선국사가 왕명을 받아 중창하였는데, 국사가 원당을 건립하고 국운을 기원했다해서 '원당'이라고도 불리우다가 그 후 영조 4년(1728) 신천영의 병화로 사원이 전소되어 80여년 동안 빈 절터인 채로 내려오다 조선 순조 14년(1814)에 금봉화상이 옛 원당터에 실상암을 짓고 절을 중건하여 절 이름을 개칭하되, 진인출어동방(眞人出於東方)이라하여 "동"자를 따고 사판국청학귀소형(寺版局靑鶴歸巢形)이라 하여 "학"자를 따서 동학사라 명명했다는 설도 있고, 또 계룡산 동쪽 사찰 입구에 청학이 깃들었다는 학암(鶴岩)을 위주로 하여 동학이라는 절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그 뒤 고종 원년(1864)에 만화화상이 개창하였고, 그의 제자인 경허성우 스님이 고종 8년(1871)에 강의를 열었으며 1879년에는 이 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한국의 선풍을 드날렸다. 근대에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으며, 지금도 일주문 불사 및 상원암(옛 계명장사로 남매탑이 있는 곳) 복원불사가 진행중이다. 현재 전각으로는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을 비롯하여 조사전, 육화당, 강설전, 화경헌, 엽화실, 실상료, 숙모전 등이 있다.
신내암자로는 미타암, 길상암, 관음암, 문수암, 심우정사, 상원암 등이 있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