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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주목한다 / 리듬
― 김소해, 만근인 줄 몰랐다(동학사, 2018) ― 류미야, 눈먼 말의 해변(솔, 2018) ― 선안영, 거듭 나, 당신께 살러 갑니다(발견, 2018) ― 이은주, 섭섭한 오후(고요아침, 2018) ― 장영심, 자작나무 익는 겨울(고요아침, 2018)
김남규
0. 시조의 리듬
주지하다시피, 시조의 기본형이라 불리는 ‘3.4.3.4/ 3.4.3.4/ 3.5.4.3’은 조윤제의 「시조자수고時調字數考」(1930)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는 고시조 중 단시조 2,759수를 자수로 분석해 율격 구조의 기본형을 제시하였다. 이 자수율은 시조 형식을 명료하게 설명해주고 있어 현재까지도 시조 창작 현장 및 교과서 교육 현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고시조 2,759수를 분석했을 때 초장이 그 기준에 일치하는 작품은 47%(1,298수), 중장은 40.6%(1,121수), 종장은 21.1%(789수)에 불과하며, 작품 전체가 자수율 기준에 일치하는 경우는 4%에 불과(서원섭, 「평시조의 형식연구」, 어문학, 1977)해, 결과적으로 고시조의 신축적인 형식을 축소하고 제약한 기본형을 도출하게 되었다. 김흥규 역시 한국문학의 이해(1986)에서 기준 자수율을 지킨 고시조는 7%밖에 되지 않으며, 300여종의 자수율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광의의 자수율 모형을 제시한 가람 이병기 선생(1926)은 ‘3장 8구체, 초장 6~9/6~9, 중장 5~8/6~9, 종장 3/5~8/4(5)/3(4)’을 제시하였고, 이후로도 많은 논자들의 기본형 제시가 있었지만, 이들의 논의는 1차원적인 음절수에 의한 구분 즉, ‘음수율’이라는 개념만 공고하게 다져왔다. 게다가 시조의 초중종장을 3행으로 배행하는 것은 한자문화권의 ‘우종서(右縱書)’ 관습에 따라 근대 초기 ‘세로쓰기’에서 비롯된 것이지, 어떤 규범이 만들어졌거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가로쓰기’로 언어 표기법이 변경된 근대 이후 시조시인들의 자유로운 배행을 보라! 다만 우리가 시조의 ‘기본형’을 말해야 한다면, ‘3장(章)이라는 것’과 ‘종장의 첫 마디 3음절, 그 다음 마디가 5음절 이상이라는 것’이다. 초ㆍ중장의 규칙적인 패턴이 종장에서 크게 변형되는 것이 시조만이 가진 ‘큰’ 특질이라는데 이견은 없어 보인다. (물론 여기서 음보율까지 따지기 시작하면 문제는 걷잡을 수없이 복잡해지므로, 여기서 논의는 그치는 것이 좋겠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각 시집에서 주목되는 작품이 어떤 리듬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다. 시조의 경우 리듬(형식)과 의미(내용)가 함께 붙어 있기 때문에, 따로 떨어뜨려 말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좋은 시조는 좋은 리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리듬은 소위 말하는 ‘율격’이나 ‘외재율’ 따위가 아니라, 시의 의미와 관계하는 언어 운동 전체 조직을 말한다.
1. 존재론적 모험―김소해, 만근인 줄 몰랐다
3행 배행에서 벗어나는 작품이 다소 적은 김소해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는 바다 또는 고향과 관련된 ‘심상지리(心象地理)’가 각별해 보인다. “앵강 바닷가 펜션 어머니 발소리”(「앵강 펜션」) 있는 곳, “거기 오래 당신 없어 고향집 쓰러질 듯”(「만근인 줄 몰랐다」)하여 고향집을 팔았더니, “낡은 집 한 채 무게가 만근인 줄 몰랐다”고 탄식을 내뱉은 시인. “시 쓰다 고향 말 부딪치면 도움 받는 곳”(「폐 타이어」)이 바다이고 고향이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그동안 시인은 멀리 고향과 바다를 떠나왔나 보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면,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처마 낮은 슬레이트 집 그 바다의 어매들은
뻘밭이 연분인 듯 발을 묻고 못 떠난다
숨겼던 말들은 끝내 구새 먹어 깊어가는
그리움이 바래지면 하얗게 파도라 한다
늑골 밑 파도 한 장 씩 꺼내어 철썩, 철썩
아껴서 벼랑 언저리 바람에게 주곤 한다 ― 「해식동굴」 전문
“처마 낮은 슬레이트 집” “바다의 어매들”은 “뻘밭이 연분인 듯 발을 묻고 못 떠”나는 사람들이다. 어떤 곡진한 사연이 있을지는 짐작이 가능할터, 한 행이 끝난 후 여백(엔터,↲)은 마치 ‘뻘밭’에 빠지듯 쉽게 다음 행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바다의 어매들’의 사연은 “구새(오래 된 나무에 구멍이 뚫린) 먹어 깊”고 깊으니, 독자도 ‘뻘밭’에 빠져야 하고, “숨겼던 말들” 앞에서 한 번 더 빠져야 한다. 그리고 2행의 여백이 나타난다. 시인이 독자에게 “숨겼던 말들”이 무엇인지, “처마 낮은 슬레이트 집”에서 떠나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입할 시간을 좀 더 배려한 것일까. ‘바다의 어매들’에서 ‘해식동굴’로 화면이 줌-인에서 줌-아웃되면서, “그리움이 바래지면 하얗게 파도라 한다”는 결론은, 아마도 ‘바다의 어매들’로부터 기인했을 것이다. 그래서 “늑골 밑 파도 한 장 씩”가지고 있는 ‘바다의 어매들’은 “철썩, 철썩” “벼랑 언저리 바람에게 주곤 한다”. 하얗게 파도가 될 때까지의 그리움과 오래되고 곡진한 사연은 바람에 날려 보낼 뿐, 떠나기도 그렇다고 정주하기도 그런 곳. ‘그리움’이 문제다. “달리기를 배우던 몇 살 적부터 그랬던가// 하늘을 쳐다본다는 건 들이받는 일이라고// 그 증거 흉터로 남았다 이마에 가로 놓인// 그리움을 아는 이만 하늘을 들이 받는다”(「아름다운 흉터」)는 시인에게 ‘그리움’은 ‘아름다운 흉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낙인이기도 하며, 극복의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극복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존재의 고통에 다름 아니다. 리듬의 어원인 ‘류트모스(rhuthmos)’가 강이 흐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질서와 무질서의 운동 전체라 했다. 파도가 치듯, 바람에 파도가 밀리듯, 시인은 한 행, 한 행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면서 1연에서 2연으로 장면이 전환될 때, 여백을 좀 더 마련했다. 시공간 전환에 그치지 않고, 구체에서 추상으로, 현상에서 본질로, 보다 존재론적인 성찰을 위해서다. 김소해 시인에게 행간은, 엔터(↲) 한 번이 아니라, 떠나왔던 고향과 바다로 다시 돌아가려는 시인의 존재론적 모험이니, 몇 년 혹은 수십 년이 켜켜이 접혀 있을 지도 모르겠다.
2. 정감—류미야, 눈먼 말의 해변
“부릅떠 세상 지키는/ 슬픈 시인의 눈”(「거울」)을 가진(갖고 싶어 하는) 류미야 시인의 이번 첫 번째 시집은 “우물이 제 몸속에 눈물샘을 감춘 것”(「지혜」)처럼 울지 않으려 애쓰는 시인의 울먹임과 그렁그렁 눈물 맺힌 아름답고 까맣게 큰 눈을 볼 수 있다. 시인은 “슬픔도 끝없으면 눈물조차 마르는 걸/ 그곳은, 눈물 버리고 돌아오기 좋은 곳”(「소금사막」)에 눈물을 버리고 오고 싶어 하는 동시에, “눈에 밟히는 것들 차마 밟을 수 없어/ 어디론가 떠나지도 못하는/ 다정(多情),/ 그래서 눈물 잦은 계절 더/ 푸르러지는 나무”(「나무」)이기도 하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는’ 시인은 “울음 다 쓰고야 새벽이 오는 그곳”, “다락 같은 말들과 흰 당나귀 뛰노”(「말들의 해변」)는 곳에 산다. “일평생 시마(詩魔)를 달래다// 끝내 눈먼” 호머처럼 되더라도, 시인은 울음을 다 쓰고자 한다. 울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 생 아마도 난 북재비였는지 몰라 눈시울 붉게 젖은 노을을 등에 업고 꽃 지는 이산 저산을 넘던 그 시름애비
어쩌면 그 손끝 뒤채던 북일지 몰라 그렁그렁 눈물굽이 무두질로 마르고 소슬히 닫아건 한 채 울음집인지 몰라
그렇게 가슴 두드려 텅텅 울고 텅텅 비워 가시울 묵정밭 지나 산머리에 이르러는, 마침내 휘이요—부르는 휘파람 된지 몰라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전문
시인은 바람의 노래, 우주의 기운에 귀 기울이며 자기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바람의 노래’ 또는 ‘휘파람’처럼 자유롭게 행갈이 된 인용시에서 우리는 영화 <서편제>와 같은 장대한 서사에 조금씩 몰입하게 된다. 시인은 ‘지난 생’에 “눈시울 붉게 젖은 노을을 등에 업고” “꽃 지는 이산 저산을” 넘는 ‘북재비’가 아니었을까 하며, ‘지난 생’ 한 행 처리로 긴긴 이야기의 서곡(overture)을 준비한다. 시인은 ‘북재비’도 아닌 “손끝 뒤채던 북”, “그렁그렁 눈물굽이 무두질로 마르고/ 소슬히 닫아건 한 채/ 울음집”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지만, 시인이 북재비든 북이든 ‘소슬히 닫아건 한 채 울음집’인 것은 분명하다. 첫 수와 둘째 수의 종장 모두 2행으로 처리되면서 ‘시름애비’와 ‘울음집’이 도드라지면서 동시에 함께 읽히니, 사연을 알 수 없으나, 사연이 아득하겠다는 짐작이 든다. 그 아득함은 “그렇게 가슴 두드려 텅텅 울고” 그것도 부족해서, 그것을 넘어서, ‘텅텅 비워’ 간다. 울음을 다 쓴 것이다. 울음을 다 쓴 가슴으로 시인은 “마침내 휘이요—부르는/ 휘파람”이 되고자 한다. 이 휘파람은 “가시울 묵정밭 지나 산머리에” 이르기까지, 너와 나의 장애물을 넘어 아무도 없는 곳을 지나 지극(地極 혹은 至極)한 곳에 이르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 휘파람이 이르고자 한 지극한 곳은 ‘무(無)’와 같이 초월적인 공간이 아니라, “바닥 모를 수심이라도/ 너의 끝에 닿고 싶었다// 돌아보니, 못 떠나는/ 내가 나의 늪”(「내 마음의 우포」)이라는 성찰에서 알 수 있듯이, 텅텅 울어서 마침내 텅텅 비워내는 자기 자신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고요함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살피며,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임을 알고 고결한 영혼을 유지하길 희망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속세를 초월하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시인은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기 때문이다. 결국 류미야 시인은 영혼의 능력들(dynamis) 중에서 ‘정감(emotion)’을 활성화시키고자 한다. 이때의 정감은 신(一者)에게서 분유된 인간 영혼의 능력으로서, 예술, 미(美)라는 것은 영혼의 순수한 창조력에 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감은 시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며, 대상(현실태)을 직관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무한한 존재(잠재태)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이 영혼의 운동을 우리는 리듬이라 부른다.
3. 충동―선안영, 거듭 나, 당신께 살러 갑니다
이번 선안영 시인의 시집에서는 다양한, 알 수 없는, 제어 불가능한 욕망들이 시집 곳곳에 지뢰처럼 매설되어 있어 잘못 건드리면 폭발한다. 이때의 폭발은 시 전문을 망치거나 흩트려 놓는 것이 아니라, 도화선이 되어 시 전체를 폭발시킨다. 순백한 눈(雪)과 흰색의 이미지조차 “거듭 같이 죽자 재촉하는 눈보라”(「두 목소리가 섞인 노래」), “저 흰빛을 나 차마 감당 못하겠어요”(「설원을 마주한 저녁」)와 같이 시인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절망하고, 쉽게 지나칠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시인은 시가 어떻게 이어지고 또 끝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설레면서 또 한편으로는 소름끼치게 무서울 것이다. 따라서 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시가 활자화되어 있다 해도 시는 끝나지 않았으니), 시는 시인의 것도 누구의 것도 아닌 것, 스스로 목적으로 존재한다. 리듬도 당연히 시 스스로의 것, 시가 만들어낸 것, 시의 것이다.
홀딱 반한 길이 많다. 꽃이 많다. 달리던 중 봄 들판 한 가운데 느닷없는 모텔이라니 추웠던, 아니 얼었던 세월아 자고 갈래?
자잘한 꽃단추가 많이 달린 블라우스 잘 채워진 단추들 만 풀다가도 늙겠구나 지퍼의 질주본능의, 지름길을 모른 채
얼음의, 침묵의, 금기의 단정함으로 나는 나의 울음소리 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상처의 불안을 안고 손이 손을 찾는 봄 ― 「해동모텔을 지나며」 전문
“달리던 중 봄 들판 한 가운데”에 있는 ‘느닷없는 모텔’에 의해 사건은 시작된다. 초중과 중장이 내달린다면, 종장에서 꼭 무슨 일이 생길 듯이. “얼었던 세월”에게 자고 갈 것을 제안하는 ‘해동(解凍)모텔’. 모텔을 중심으로 얼었던 세월‘들’이 몸을 녹이며 한없이 풀어지고 둘레를 넓혀간다. 지금 여기 느닷없는 모텔에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모두 모여 있다. “지퍼의 질주본능”처럼 서두르지 못하고 “자잘한 꽃단추가 많이 달린 블라우스”의 “잘 채워진 단추들만 풀다가” 늙어버린(릴) 나 또는 나와 당신. 그러나 나는 ‘얼음의, 침묵의, 금기의 단정’한 사람이다. 나는 “나의 울음소리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 그동안 얼음처럼, 침묵으로, 금기로 잘 묻어두고 덮어두었던 “상처의 불안”이 발발(勃發)되었다. 지나가다 본 모텔이 아니었다면, 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 ‘봄(see or spring)’이다. 만물이 기운을 일으키듯, 바르트의 말처럼, 마음은 욕망의 기관(사랑의 단상)이니 발기한다. 나는 나의 상처에 관심이 없으나, 당신이 내 마음에 관심이 없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시인이 (당신에게)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마음인데, 이 마음은 계속해서 내게 남아 있는 것이자 남에게 주고자 했으나 끝내 남아 있는 마음이다. 시인만 간직한 마음. 이 마음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은 모텔인가, 당신인가, 봄인가. 불안은 두려움과 다르게 대상이 없는 것이니, 시인의 불안은, 시의 불안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닌 것, 없는 것은 아닌 것에서 시작되고 이내 어디론가로 숨는다. 불안이 리듬을 리드한다. 마치 충동(trieb)처럼. 잠재된 욕망이 활성화될 때 불쑥불쑥 여기저기 파편의 형식으로 튀어나오는 (부분)충동(“충동은 부분충동이다”, 라캉). 충동의 목표는 자신의 원천인 기관 자체일 뿐, 충동의 대상은 빈 구멍, 공백의 현존인 부분 대상일 뿐이다.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충동은 그저 부분적으로 출몰(出沒)할 뿐이다. 안온하다고 생각하던 현실에 아주 미세한 차원의 틈이 생기고, 실재가 틈입하며, 사실과 진실이 겹을 달리하게 된다. 이제 문화와 제도에 의해 “얼음의, 침묵의” 금기로 꽁꽁 묶인 욕망은 안전핀 뽑힌 수류탄처럼 피아 상관없이 떨어진 곳에 터진다. 수류탄의 무서움은 바로 그것이다. 언제 터지고, 어떤 파편이 어떤 방향에서 얼마나 날아올지 모른다. “흙속에 반쯤 묻힌/ 돌”에서 “활활활 흰 종이 타는 냄새”를 맡고, “차가운 네 심장을 쥐자 묶인 날들이 날아”(「문진」)가는 것처럼. 리듬은 그렇게 부분 충동처럼, 스스로 구성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어디서 어떻게 출몰할지 알 수 없고, 목적도 없다. 그저 터질 뿐.
4. 반복―이은주, 섭섭한 오후
이은주 시인의 이번 첫 시집은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보다는, 도시와 일상에서의 구체를 선택했다. 사실의 나열에도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지만, 시인은 적극 개입보다는 시간의 추이(推移)에 따른 변화를 지켜보는 일로 시를 이어간다. 물론 이 변화는 시인의 감정으로 인한 것이기 보다는, 대상의 변화에 따라 시인의 감정이 동(動)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시인은 “근린공원 할매”들이 “책장 넘기듯/ 행인들을 읽고” 있는 낮의 시간부터 “빛바랜 한지 같은/ 하루해가 다 가”는 저녁, 그리고 “조각보처럼/ 또 한해를 이어”(「한지 같은 오후」)가는 일 년, 일생을 한 자리에서 오래도록 보고 있다. 그에 따른 감정의 변화는 뒤이어 따라오겠다.
무덤 같은 민머리를 베개에 파묻은 채 때 절은 체취들을 속옷으로 껴입은 채 노후를 침대에 먹힌 녹슨 저녁이 있다
발버둥치는 풍선을 꽉 붙든 비닐끈처럼 절개된 기관지로 거듭 차는 침을 빼며 줄들로 친친 묶여진 인질 같은 긴 여생
딸이 매단 닭 모빌은 자꾸 문을 힐끔대고 통로 향해 귀가
환한 음악 같은 어머니 날마다 저물지 않는 젖은 저녁이 있다 ― 「저물지 않는 저녁」 전문
첫 수와 마지막 수가 소위 ‘수미상관(수미상응)’하면서 안정적인 시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운율감에 기여하며 의미도 강조되지만, 무엇보다 눈여겨볼 점은 ‘반복’이다. 여기서 반복은 단순히 어휘나 구절, 또는 형식의 반복‘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후를 침대에 먹힌 녹슨 저녁”과 “날마다 저물지 않는 젖은 저녁” 그 사이 “줄들로 친친 묶여진 인질 같은 긴 여생”을 본다. ‘(녹슨)저녁’과 ‘(젖은)저녁’이 반복하면서, 차이가 발생한다. “반복이란 차이를 반복하는 것이고, 차이는 반복하는 차이”(들뢰즈)이므로, 동일한 저녁이 유사성으로 반복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반복에서 차이가 나는 것, 차이 속의 무한한 차이를 발견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라면, 이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마 ‘힘’일 것이다. 이 ‘힘’은 전자의 저녁으로부터 후자의 저녁이 달라지는 것을 유발하는데, 이 달라지는 일은 매우 미세하면서도 무한하다. “인질 같은 긴 여생”이 하루하루 반복되면서 저녁은 녹슬기 시작하고, 저녁은 젖는다. 녹슮의 강도, 젖음의 강도는 당연히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여기서 강도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마도 ‘시간’일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 질서이자 삶과 생 자체다. 시인은 이 당연한 일이, 얼마나 무섭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세밀하게 보고 있다. 따라서 같은 형태의 시행이 반복되면, 반드시 의미론적으로도 차이가 발생해야 한다. 차이가 없는 반복을 우리는 ‘중언부언’이라고 부른다. 랩(rap)에 라임(rhyme)을 넣는 이유도 이와 같다. 차이와 반복을 발생시키는 힘 그 자체를 즐기고 경험하기 위해서다. 그 힘은 곧 개성적인 플로우(flow)를 만들어낼 것이다. 시조의 리듬도 노래와 다를 바 없으니, 차이와 반복에서 강조되고 발견되는 모든 사건들을 경험하는 것, 이것을 우리는 리듬이라 한다.
5. 율독의 시간―장영심, 자작나무 익는 겨울
제주도에 적(籍)을 두고 있는 장영심 시인의 이번 첫 시집은 강인하면서도 푸른 제주의 이미지를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이 변화무쌍하고 때로는 파괴적인 바다의 이미지가 다른 시집에 비해 무척 정갈하면서도 정돈되어 있음 또한 발견할 수 있다. 1장을 1행으로 구성하고, 초중장을 3행으로 배열한 작품들이 시집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제주의 억셈을 잘 다스린 시인의 능력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파괴적이고 거친 제주를 시조로 겨우 붙잡아둔 것일 수도 있겠다. “칠십년이 흘러도 이집저집 기일은 같”(「제지기오름 파도소리」)은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버티면서 동시에 “칠순의 테왁 하나만 움켜쥔 내 어머니”(「바람 그물」)처럼, 시인은 버티면서 쓸려간다. 그것을 우리는 행갈이와 연갈이라 한다.
동복 바다 노을은 갈지자로 찾아온다 팔순 어머니가 해조음 지고 오면 등 뒤에 자리젓 냄새 허기진 세월이 있다
저녁 밥상머리에 올라온 별빛 몇 개 게 떼에게 발겨진 고등어 가시처럼 몇 숟갈 그리움마저 바닥나던 밤이 있다 ― 「동복바다 1」 전문
만약 인용시를 행갈이와 연갈이 하지 않고 이어 붙이면 어떻게 될까.
동복 바다 노을은 갈지자로 찾아온다 팔순 어머니가 해조음 지고 오면 등 뒤에 자리젓 냄새 허기진 세월이 있다 저녁 밥상머리에 올라온 별빛 몇 개 게 떼에게 발겨진 고등어 가시처럼 몇 숟갈 그리움마저 바닥나던 밤이 있다
의도하여 행/연을 나눈 글과 하나의 행으로 이어붙인 글의 차이는 무엇일까. 글에 있어서의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데 있어 어떤 점이 다른가. 분명한 것은 행과 연을 나눴다고 해서 ‘무조건’ 시의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산문과 시의 차이는 특별한 언어의 성질(일상언어/시적언어)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형식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산문에 리듬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리듬은, 특히 시조의 리듬은 어디에서 오는가. 시인은 행갈이와 연갈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어떤 평론가가 말한 적이 있다. 즉, 리듬은 시의 텍스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경험하는 일 자체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산문으로 나열된 작품이 아닌, 장영심 시인의 시조를 읽을 때, 우리는 행과 연을 나뉜 의도를 함께 읽게 된다. 그것은 산문에 비해 율독의 시간(소리 내어 읽든, 마음속으로 읽든 간에)이 충분히 주어진다는 점이다. “동복 바다 노을은 갈지자로 찾아온다”고 했으니, 동복 바다 노을이 갈지자로 찾아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팔순 어머니가 해조음 지고 오면” 우리는 팔순 어머니와 해조음을 연관시켜야 한다. “등 뒤에 자리젓 냄새 허기진 세월이 있다”는 종장의 전언은 다시 초장과 중장으로 돌아가게 하고, 마치 변증법처럼, 바다라는 자연과 어머니라는 인간이 섬처럼 하나의 공간에 있다. 만약 “저녁 밥상머리에 올라온 볓빛 몇 개”가 “게 떼에게 발겨진 고등어 가시처럼”이 산문처럼 이어 있다면, ‘별빛 몇 개’를 ‘고등어 가시’로 보거나 그 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연되면서, “게 떼에게 발겨진 고등어 가시처럼”이라는 문장의 주어는 우리에게 숙제로 남게 된다. 주어가 동복 바다인지, 팔순 어머니인지, 자리젓 냄새 또는 허기진 세월인지, 별빛 몇 개인지, 아니면 “몇 숟갈 그리움”인지 우리가 찾아야 한다. 문장으로 구성된 산문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는 주어와 서술어를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를 경험하는 일인데, 행갈이와 연갈이가 그 과정 자체를 더 복잡하고 깊게 만든다. 그래서 율독의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되니, 시조의 리듬을 다채롭게 혹은 개성적으로 구성하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제주의 바다라면.
6. 이게 다 리듬 때문
시조는 ‘시조의 이데아’가 있다. 소위 말하는 ‘3장 6구 45자’ 또는 ‘3.4.3.4. 3.4.3.4. 3.5.4.3’이 바로 그것인데, 모든 시조가 이 이데아로부터 분유된 모사물이라면, 모든 시조는 하나의 리듬만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시조시인이 차이 없는 반복만 하고 있다는 말인데, 과연 그럴까. 물론 리듬은 형식과 더불어 의미에도 관여한다. 그러나 시조를 쓰는 시조-시인에게 형식은 보다 특별하다. 우리의 특이성(sigularity)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시조의 기본형이라 부르는 ‘율(律)’의 최대치로 뻗어가거나 최소치를 지키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시조의 정격(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고집한다고 해서 편협하다고 말할 수 없고, 어긴다고 해서 이탈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 읽어본 시집을 통해 시조의 리듬은 ‘존재론적 모험’(김소해), ‘정감’(류미야), ‘충동’(선안영), ‘반복’(이은주), ‘율독의 시간’(장영심)에 의해 발현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같은 원리이기도 하지만, 태도에 있어 양상은 무척 다르다. 이제 우리 차례다. 어떤 장르는, 형식이 전부일 때가 있다. 리듬 때문이다.
김남규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가람이병기 학술논문상 외 수상. 시조집 집그리마 외, 연구서 한국 근대시의 정형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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