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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제3대 태종
태종(太宗) 8597-1400 18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제2차 왕자의 난
세제로 책봉된 방원은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 나갔다. 그 일환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 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 시켰으며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 시키기 위해 노비 변정도감을 실시해 노비의 변속을 관리 하기도 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했다.
태종의 업적
1. 중앙제도와 지방제도 의 정비로 고려잔재 완전청산.
2. 군사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 하고 토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재정의 안정.
3. 노비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
4. 권근을 책임자로 하여 유학과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 성균관과 오부의 학생들을 맡김.
5. 기술 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둠.
6. 과거 제도에서 공거, 좌주문생제 등 귀족 위주의 관리 등용 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
7. 사찰에 예속된 노비를 공노비로 전환 시켰으며 처녀로 비구니가 된 사람은 환속 시켰고 연등체, 초파일제 등을 폐지시킴.
8. 문묘 제도를 정비하고 묘제, 혼례, 장제 조관복제 등을 정함.
9. 단군,기자 등을 중사로 승격시켜 개인적인 자연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이끌면서 민족 신앙을 유교 속으로 끌어들임.
10.명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 약재 역서 등을 수입하여 실리를 취하는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킴.
11.왜인 범죄논결법을 마련해 왜인들의 범죄 행위를 다스렸고 부산포와 내이포에 도박소를 두어 왜인의 무역을 합법화 시키고 왜인들의 병비 정탐을 감시.
12. 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김.
13.선원록을 정비하여 비 태조계를 왕위 계승에서 제외 시킴.
14.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
민무구형제의 옥
태종이 선위를 표명하자 왕비 민씨의 동생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를 통해 이른바 협유집권, 즉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 집권 이전에는 남편의 등극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른후 잉첩들만 가까이 하자 이에 심한 투기심을 드러내 태종과 불화가 잦았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서 아버지 민제와 왕비인 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할 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이 발생 하게된 사건 이다.
옥발생 후의 진행
민무구를 연안에 방치- 공신녹권을 빼앗음-직첩을 수취하여 서인으로 전락 시키고 여흥에 유배 시킴-1413년 자진 -민무구, 무질 형제가 죽은 후 그의 형제들이 형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무휼, 무회 형제도 사사 시켰으며 그들의 처자도 변방으로 내쫓음-옥사 종결
육조직계제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을 정3품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다. 이에 따라 전곡 과 군기를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 시켰으며 좌우 정승이 장악하고 있던 문 무관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이관 시키기에 이른다. 또한 같은 해에 대언사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나눠 관장 하도록 했다. 또한 육조의 각 조마다 각각 3개의 속사를 설치하고 당시 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 시켰다.
거북선 개발에 대한 추측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실록'부터이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거북선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종대에 이 거북선의 조성 흔적이 있는 것은 왜구와의 수전에 대비한 것이거나 또는 대마도 정벌 같은 왜구 토벌 작전을 감행하기 위한 준비책이었을 것이다.
신문고 설치
신문고는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때 자유롭게 청원할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전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 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 1401년 8월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따 설치 되었다.
한양으로의 천도내력
건국 초에 조선 조정은 세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 했다가 1398년 정종 원년에는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다시 왕궁을 옮겼다. 이 때 개경으로 다시 옮겨간 이유는 우선 한양의 시설이 미비하여 개경을 그리워하는 신민들의 정이 심각 하다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실의 큰 불상사인 골육상잔의 참변이 일어 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 간 이후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세제 방원에게 왕권을 물려 주었다. 태종은 등극 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4년(태종5년) 9월에 경복궁이 준공되자 한양 천도를 단행 하였다. 이 후로 한양은 5백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경왕후 민씨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82 년(우왕8년)에 방원에게 출가 하였으며 1392년 조선개국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그녀는 1400년 2월에 방원이 세제에 책봉되자 세제빈으로 정빈에 봉해 졌으며 이해 11월 에 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태종보다 두살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준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398년 8월 그녀 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것이 라고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 시켰다. 이 정보 덕분에 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수 있었다. 또한 왕자의 난 10일 전에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를 혁파하고 그들의 군 장비를 불태울 때 그녀는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거사 직전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어 선수를 치도록 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불화는 우선 궁녀 문제에서 출발하여 태종의 후궁 간택 문제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왕비의 동생 민무구 형제 사건으로 불화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태종은 외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나갔고 민씨는 이에 노골적인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되자 그녀는 그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 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 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민씨는 4남 4녀를 낳았으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자들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그녀의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묘와 함께 쌍을 이루며 현재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남아 있다.
양녕대군
1394년 (태조3년)에 태어난 양녕은 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 자는 후백, 부인은 광주 김씨 한로의 딸 김씨였다. 양녕은 1404년 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궁중을 몰래 빠져 나가는 일이 잦았고 사냥이나 풍류를 좋아해 자주 태종의 화를 돋우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그가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말도 있으나 정확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동생 충녕이 왕이 된 이후에도 감찰 대상이 되긴 했으나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세종과는 지극히 우애가 깊어서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된 바가 있었지만 세종에게 한번도 처벌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천명을 누리다가 1462년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강정이다.
효령대군
효령은 1396년(태조5년)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 났으며 이름은 보, 자는 선숙 이었다. 부인은 정역의 딸 예성 부부인으로 그녀와 슬하에 6 남 1녀,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효령은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한 때 자신이 세자 자리를 넘겨받을 것으로 생각 했으나 동생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1407년(태종8년)에 효령군에 봉해졌고 1412년에 효령대군으로 진봉 되었다. 이후 출가한 뒤에는 불도에 전념하여 1435년 회암사 중수를 건의 하였으며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활동 하기도 했다.
1465년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고 그 해 '원각경'을 수교 하기도 했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섯 왕의 연고존친 으로서 극진한 존경과 대우를 받았으나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 하였기 때문에 유생 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왕 들의 보호 아래 꾸준히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시호는 정효이다
조선왕조 제21대 영조
21 영조(英祖) 8921-1724 52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임인옥사와 연잉군의 자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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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처분 영조는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대신들을 숙청한 다음 1725년에는 김일경이 노론 4 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때 이에 동조한 이진유등 6 명을 귀양 보냈다. 그리고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잇따른 논핵에 의거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등 소론 대신들을 내몰고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인사들을 등용 하였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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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환국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신임옥사 때 처단된 노론 4 대신과 그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 문 제가 다시 논의되어 4 대신이 복관되고 시호를 받았다. 하지만 노론측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호, 민진원 등이 임인옥사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 초부터 송인명, 조문명 등의 조언을 받아 각정파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펴고자 했기 때문에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정호, 민진원 등의 노론들을 대거 파면 시키고 초년에 파직했던 이광좌, 조태억을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 시켰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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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쌍거호대 즉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고 소론의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 에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랑에 노론 신만으로 상대하게 했던 것이다. 영조는 그뒤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수습하자 한층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쌍거호대 방식을 극복하고 유재시용, 즉 인재 중심으로 인사정책을 펼쳐 나갈수 있었다. 이처럼 탕평책은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 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과 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 정국이 본궤도에 오르자 이정책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게 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정국 도에 따라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정국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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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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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업적
한편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 하도록 해 탈세를 방지했다. 오가작통은 다섯 집을 한통으로 묶은 마을의 최소 단위를 말하며 이정은 마을의 책임자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마을의 사건이나 인적 변화를 관아에 반드시 알릴 의무가 있게한 제도였다. 이밖에도 영조는 각도에 보고되지 않은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애초에 국가 비축미로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환곡이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도로 전락한 것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 옴으로써 흉년이 들었을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구황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수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정책으로 가장 눈에 띄는것은 신분에 따른 국가에 대한 의무 사항을 더 분명히 한점이다. 양 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는 한편 천민 들에게도 공사천법을 마련해 신분에 맞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부담 시켰다.
또한 양인의 숫자를 늘려 양역의 증가를 꾀하였는데 1730년에는 양인 어머니와 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면 양인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모중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게 하고 여자는 어머 니의 신분을 따르 게 하였다. 또한 서얼 차별로 인한 사회적 불만 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서얼 출신도 관리로 등용할수 있도록 하였다 국방정책을 살펴보면 1725년 화폐 주조를 중지하고 군사무기를 만들도록 했으며 1729년에는 김만기가 만든 화차를 고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수어청에 명하여 조총을 제작하게 했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및 각도의 수영에 제작 배치하도록 하여 임진왜란때 맹위를 떨쳤던 해군력을 증강 시켰다. 이같은 국방정책은 변방에도 적용돼 요새구축을 늘리는 한편 1727년에는 북관군병에게 총을 나누어주고 훈련시켰으며 1733년에는 평양중성을 구축하게 하였다.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 개축 작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료했다.
여러 분야에서 시도된 이같은 변화 이외에도 영조 시대에는 문화적인 성과도 많았다. 영조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기도 하고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여 민간에 반포시켜 일반 백성이 볼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에는 '감란록'을 만들고 이듬해 '숙묘보감'을 편찬 하였으며 1732년에는 이황의 학문 세계를 담은 '퇴도언행 록'을 간행케 하였다. 그리고 1736년에는 '경국대전'을 보강 했으며 여성들을 위해 네권의 책을 묶은 '여사서'를 언역하고 1742년에는 '천문도', '오층륜도'를 이듬해에는 균역의 전형인 '양역 실총'을 인쇄하여 각도에 배포했다. 이 회에 '경국대전'을 보수한뒤 새롭게 제도적으로 바뀐 것들을 반영한 '속대전' 1747년의 '황단의 궤' 관리들의 필독서인 '무원록' 1749년에 만들어진 '속병장도설' 1753년에 편찬된 '누주통의' 영조 자신의 왕위 승통의 정통성을 천명 하는 1754년의 '천의소감' 1757년의 '삼국기지도', '팔도분도첩', '계 주윤음' 등과 1765년의 '해동악장', '여지 도서' 우리 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 등이 있다. 영조 자신이 친히 쓴 글로는 '악학궤범 서문' 자서전인 '어제자성편' 무신들을 위해 쓴 '위 장필람' 그리고 '어제경 세문답', '백행원' 등 십여 권의 책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재야에서는 실학이 확대되면서 신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영조의 후원을 받아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찬 간행 되었다. 1765년 북학파 홍대용의 '연행록'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의 '반계 수록' 신경준의 '도로고' 등이 편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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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왕후 서씨
이같은 말에 비추어 볼때 사도세자는 일종의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 하였다. 이에 영조는 분개하여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 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 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영조는 그를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이 때 그의나이 28세였다. 그가 죽은뒤 영조는 세자를 죽인것을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 한다는 의미로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 되었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 되었다. 그의 무덤은 처음에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다가 정조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장조 로 추존된 뒤에 융릉으로 정해졌다 |
조선왕조 제22대 정조
22 정조(正祖) 8973-1776 24 휘는 성.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 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함.
'세도'의 유래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 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 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 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 으므로 이른바 '세도'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홍국영의 몰락과 정조의 계책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 한지 얼마 되지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음에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 날것을 권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 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 4년만에 가산을 몰수 당하고 전리로 방출 되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 세도정치 기간동안 충실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끌어 모았다. 즉 모든 신하들의 눈을 홍국영에게 집중시킨 다음 자신은 앞으로 펼칠 문화정치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가 고의로 홍국영 의 세도 정치를 부추기 거나 방치 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규장각의 발전
1776년 설치된 이래 규장각은 급속도로 규모가 확대 되었으며 기능도 다양해졌다. 창설 초기에는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편서, 간서 등의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 외각의 기능이 정착되자 3년 뒤인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개국 이래로 능력과 학식에 상관없이 입신의 길이 막혀있던 서얼들 에게 조정으로 진출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줌으로써 사회의 분위기 를 집안과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끌고갈수 있었다.
또한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청사로 옮겨 졌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 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 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학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저녁으로 왕을 문안 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 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 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지치(학문 중심의 정치)'와 '작성지 화(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라는 규장각의 2대 명문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 하고자 한것이다.
신해박해와 벽파의 기세
전라도 진신의 윤지충은 양반으로서 천주교를 신봉하던 인물 이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 의식에 따라 상을 치렀다. 이일로 그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인척이자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이 그를 비호하고 나서면서 이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조정은 서구문화 수입을 공격하던 공서파(벽파)와 천주교를 신봉 하거나 묵인하던 신서파로 갈라져 정면 충돌 하였다. 이에 정조는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국문케 하여 사형 시켰다. 이 때문에 조정의 대세는 벽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4년뒤인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으로 벽파는 또 한번 기세를 떨치게 된다. 이때 남인의 실학자로서 차기 정권의 주자로 인식되고 있던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채제공 등의 중신들도 입지가 크게 약화 되었다. 1799년 채제공이 죽자 남인 세력은 완전히 위축 되었고 이듬해 정조가 죽음 으로써 남인은 거의 축출당한다. 그나마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파들 역시 일부 노론 출신의 외척 세력만 남고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정조의 업적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 졌고 영조 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 되어오던 문물제도 정비작업이 완료 되었다. 그 결과물 들이 이때 편찬된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들이었다. 한편 그의 문화 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 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위항 문학을 낳기도 했다. 인왕산의 경아전을 중심 으로 형성된 중인 이하의 위항인들이 귀족 문학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라는 그 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 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하는 등 대단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 였다. 그러한 문예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 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 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후기는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룰수 있었다.
혜빈 홍씨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뒤 혜빈에 추서 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7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 되었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외척 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켜볼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1795년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많은 일생을 자서전 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효의왕후 김씨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다. 1762년 10세 때 세손비로 책봉되어 정조와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 되었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빈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기에 궁중에서 감탄 하지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혔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왕가의 자녀들을 돌보는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 사가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래서 수진궁과 어의궁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중의 물품은 공물이라 하여 일체 사가에 보내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채 1821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차례 존호가 올려 졌으나 모두 거절 하였다. 능은 경기도 화성의 건릉이다
효명세자
24 |
헌종(憲宗) |
9031-1834 |
15 |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1812년 순조 12년에 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때 그는 어린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등 백성을 위한 정책구현에 노력 했으나 대리청정 4년 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 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 김씨 일파와 정치적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 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아들 헌종이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뒤 익종에 추존 되었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 되었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순원왕후 김씨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1800년(정조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갑자기 정조가 죽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외척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1802년(순조2년) 10월에 왕비로 책봉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아버지 김조순과 오라비 김좌근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때 세자비의 외척인 풍양조씨 일문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기다가 헌종 대에 이르러 다시 회복하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자손이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때 순원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하여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한다. 순조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1857년 창덕궁에서 죽었다.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조선왕조 제24대 헌종
헌종대의 사회상황
헌종대 에는 17, 18세기부터 시작된 사회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로 농민층의 분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들어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 빈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농층과 부상인들이 생겨 나면서 천민에서 양민으로, 양민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이 빈번해 졌는데 이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 조짐으로 나타났다.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는 수재와 전염병의 창궐로 민생이 악화 되었으며 삼정의 문란이 가중 되어 살던 곳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불어났다.
풍양조씨의 세도정치
풍양 조씨는 헌종의 모후 조대비의 일문으로서 조대비의 부친인 조만영이 그 거두이다. 조만영은 어영대장,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세도를 확립한다. 그 후 5, 6년 동안 풍양 조씨 일문이 현달 하더니 일문의 내부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김씨 일문으로 넘어간다. 헌종 대에 정권을 잡아 안동김씨를 견제한 풍양조씨 일문은 정치 혁신 대신에 안동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하여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도외시 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 시켰다.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물론이요 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다.
이양선의 출몰과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문서
헌종 11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호가 제주도와 서해안을 불법 측량하고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조정은 청나라를 통해 광동에 있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또한 헌종 12년 6월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군함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들어와 왕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해서 한때 조정을 긴장 상태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 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7 월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듬해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에 답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우리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문서가 되었다. 헌종 14년에는 이양선들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동요되는 등 국내외적인 위기가 조성 된다. 이때부터 조선은 이양선을 앞세운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화 개방 요구를 맞게 되는 등 본격적인 외세 대응기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나 주변 정세에 어두웠던 조정에서는 이 양선의 출몰이나 위협에 별다른 방책도 세우지 않은채 각각 권력의 장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신정왕후 조씨
익종의 비 이며 헌종의 어머니로서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다. 12세때 효명세자의 비로 책봉되어 세자빈이 되었고 효부라는 칭찬을 들었다. 1827 년 순조 27년에 헌종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에 추존되자 왕대비에 봉해 졌는데 이때부터 풍양 조씨 일문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 하면서 세도를 이루게 된다. 1857년 순조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왕실의 권한을 쥐게 되었다 이때 조대비는 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못마땅해 하던 흥선군 이하응, 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1866년 2월까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제 정권은 모두 흥선대원군이 잡도록 하교하고 있었다. 그 후 조대비가 대거 기용한 친정 세력들이 잇따른 정변에 희생되어 조씨 가문이 쇠락해지자 그것을 슬퍼 하였으며 나라가 재난에 시달리자 자신이 죽지않는 것을 한탄 하였다고 한다. 1890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효현왕후 김씨
안동 김씨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로서 1837년 헌종 3년에 왕비에 책봉되고 4년 뒤에 가례를 올렸다. 왕후가 된지 2년 만에 병에 걸려 죽었다. 1851년 철종 2년에 경혜, 정순의 휘호가 내려지고 다시 단성, 수원의 존호가 더해 졌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효정왕후 홍씨
판동녕부사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로서 1844년 헌종 10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헌종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왕대비가 되었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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