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연중 제14주일>
멈춰버린 사람들
새로운 것에 열려있는 마음과 새로운 변화를 알아차리는 눈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일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개방성’과 ‘깨어있음’이 중요한 덕목인데 하물며 구세주의 오심에 대하여, 하느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에 대하여 알아차리고 열린 마음으로 수용할 줄 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거침없이 참된 것을 보는 사람, 걸림 없이 진실을 보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할 것이다. 마음에 이런저런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거침없이, 걸림 없이 보기란 쉽지 않다. 자기 불안과 두려움에 ‘편견과 선입견’에 빠지고 점점 자기중심적 태도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자신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모세오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법전’이다. 모세오경에서 율법이 나왔으며,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생활 지침서’다.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생활 지침서’는 곧 ‘신앙 규범’이 되고 ‘윤리 규범’이다. 이 율법에 대한 태도에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등 여러 분파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백성들도 많았으리라. 문화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때 당시나 지금 우리의 교회 공동체나 비슷한 부분이 보인다. 그것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다. 당시나 지금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관점과 개방성의 정도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어느 시대든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 늘 보수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이다. 이것은 ‘새로운’ 것의 어떤 문제라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문제다. 신학자 칼 라너는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이라고 말하며, 교회 신자들이 시대의 징표에 잘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을 때, 안식일이 되자 여느 날처럼 회당에서 가르치신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다른 고을 사람들과 달랐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보았고 그 부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누이들은 고향에서 그들과 함께 살고 있었으니, 그들의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마르 6,1-3) 그들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예수님과 같은 고향이어서 뜻밖의 ‘피해자’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관점보다 성경의 관점이다. 고향 사람이 아니어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편견’과 ‘선입견’에 휘둘리고 있는가? 내가 보았고, 경험해서 ‘알고 있다’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가?
연애 시절에 만났던 그 남자가 아니라고 호소하는 여인들, 콩깍지가 씌어 제 모습을 못 보았다고 하소연하는 아저씨들, 모두 자기에게 속은 사람이든지 아니면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다. 학교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1학년 때 본 아이가 2학년 때도 같은 아이라고 보기 쉽다. 아이에게 관심이 없든지 아니면 게으른 선생님이다.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며 자녀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부모는 도대체 무얼 사랑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눈이 멀어 소경이 아니요, 귀가 먹어 귀머거리가 아니다. 세상은 무섭게 변해 가는데, 아이들의 세상과 젊은이들의 세상은 기성세대의 세상과는 전혀 딴판인데 우리 기성세대는 우리 세상을 보듯이 그들의 세상을 이야기한다. 세상 사람들은 초현대사회를 살아가며 최첨단의 과학과 사유를 생활화하며 살아가는데 교회의 언어와 교리는 어떠한가?
세상의 관점에서 중세시대는 ‘암흑기’라고 할만하지만,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과 교리의 르네상스 시대라 할만하다. 뛰어난 교회 학자와 영성가들이 등장했던 시대였고, 그때의 교회 신학이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올 정도로 그 영향은 지대하다. 그러나 그대로 내려올 뿐 현대의 언어나 감각으로 재해석 또는 재구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대는 여러 번 변하여 많은 세대를 거쳤는데도 교회의 언어는 잘 계승된 전통과 같다. 교회는 오래된 박물관이 되어가고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현실과 동떨어진 또 다른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교회가 세상을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그 시대 시대의 문화와 정신적 메커니즘에 대하여 분명한 태도와 가르침을 주는 책임 있는 자세는 필요해 보인다. 많은 이들의 신앙이 물 위에 떠도는 물풀과 같이 물결 따라 바람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모양새가 안타깝다.
우리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지금의 성경을 그대로 사용하실까? 성경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받으시되 언어와 논리는 새롭게 하실 것 같다.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의 언어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에 교회도 시대를 반영한 우리의 교리와 논리를 지속해서 창출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께서 지금 오신다면 우리를 몹시 못마땅해 하실 것 같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러고 앉아 있느냐?’며 꾸중하실 것 같다.
‘변화’는 불안정 상태다. 흐르는 물은 불안정하고 고여 있는 물은 안정되다.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안정을 추구한다. 고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안정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새로운 것은 신선하지만 불안정하다고 생각하기 쉬우니 낯설고 불확실한 것이야 더 말할 나위 없다. 외면당하고 폐기처분당하기 쉽다. 고향에 돌아온 예수님을 보고 모두 ‘저 사람은 우리가 아는 사람이 아닌가?’ 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외면하지만, 사람들이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낯설고 불확실하여 외면한다고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외면해도 그것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신앙에 영향을 끼친다. 많은 사람이 불안정하지만, 변화에 따라 적응하려 애쓰고 변화를 통하여 새로운 길을 찾아간다. 위험과 시련이 따르겠지만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지 않은가? 교회라고 해서, 신앙인이라고 해서 다른 길이 있는가? 언제까지 외면하고 회피하며 보전하는 길을 가려 하지만 진정 보전할 수 있겠는가? 적응하지 못하면 퇴보하는 것임을 왜 모른척할까?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킬 수 없었던 예수님,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마르 6,5-6) 성경은 전하지만 놀라서 놀라신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놀랄 일이다. 예수님께서도 놀라실 만큼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감정, 생각에 빠져있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지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놀랄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매우 불행하고 아무런 기적의 은총도 받지 못한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주님의 은총에서 멀어질 것이다. 불확실하지만 도전하고 시도하며 자기 시대에 적응하려는 노력은 신앙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라 여긴다.
첫댓글 적응과 도전의 연속성
삶의 역동안에서 방향을 잡아가기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근원적 존재를 위한 삶을 찾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걸까요???
우린 아직 죽음을 모르지만 때가 되면 지금 그러한 물음이 분명해지겠죠?^^ 믿고 가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