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부패·간통·기밀 누설죄… 상무위원 출신 첫 처벌 ‘오명’
ㆍ시진핑 체제 무력화 시도했던 ‘신4인방’ 수장 결국 축출
중국의 ‘공안 황제’로 불렸던 저우융캉(周永康·72·사진) 전 상무위원이 비리 혐의로 마침내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됐다. 시진핑(習近平) 체제가 2년 동안 벌인 부패와의 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성과이자 시 주석의 정치적 승리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 시절 집단 지도체제 아래서 공안·사법 분야를 장악,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저우융캉은 1949년 신중국 성립 후 비리 혐의로 처벌받는 첫 번째 상무위원으로 남게 됐다.
지난 5일 시 주석 주재로 열린 당 중앙정치국(25인) 회의에서는 저우융캉에 대한 당적 박탈과 사법기관 이송이 결정됐다. 부패와 권력남용 등 부패 당원들에게 적용되는 죄목 외에 국가기밀 누설죄와 간통이 추가됐다. 천다오인 상하이정법대 교수는 7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2012년 11월) 당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목적으로 당 관리나 후보들, 해외 매체에 정보를 흘렸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저우융캉이 다수의 여성과 간통을 했으며 섹스를 위해 권력과 돈을 교환했다고 공개한 것도 저우융캉에 대한 처벌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대만연합보는 저우융캉의 여인들을 거론하면서 예잉춘(葉迎春·약 40세)과 선빙(沈氷·38)이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둘 다 중국 국영 CCTV에서 앵커나 방송 진행자로 활동했고 예잉춘은 나중에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 선빙은 중앙정법위원회에서 일했다. 저우융캉의 두 번째 부인인 자샤오예(賈曉燁·44) 역시 CCTV 앵커 출신이며 이미 체포된 상태다. 이들 3명은 같은 기간 CCTV에서 근무해 외부에서는 ‘공시일부(共侍一夫·함께 한 남자를 섬기다)’로 불리기도 했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 후진타오 전 주석은 저우융캉 처벌을 한때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저우융캉은 시진핑 체제의 무력화를 시도했던 이른바 ‘신4인방’의 수장으로 당과 정부, 군, 국영기업 곳곳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왔다. 결국 저우융캉을 당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시 주석의 권력 기반은 더욱 강화됐다.
중국 정가 전문매체인 명경(明鏡)의 허핀(何頻) 총편집은 “신4인방은 보시라이(薄熙來)를 (2012년 11월 18차 당 대회에서) 상무위원으로 앉히고 (2017년) 19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의 낙마를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시진핑 지도부는 저우융캉 세력을 신중국 성립 후 최대의 붕당(朋黨) 정치활동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4인방은 저우융캉 외에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 쉬차이허우(徐才厚) 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링지화(令計劃)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말하며 이제 남은 사람은 링지화 한 명이다. 저우융캉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사형이 선고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
중국의 내부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겠죠.
김정일 위원장이 2011.5.20일에
상하이 난조우까지 쫓아가 짱쩌민을 만나고,
갑자기 1달 후에 짱쩌민 부고 기사가 나오죠.
65년 이후의 문화혁명 시절의 뉴스를 보면,
모택동이 배후에서 조정한 공산당청년연맹세력이 홍위병의 본진인데
북과 상당히 극심한 갈등을 일으켰고, 소련대사관을 공격하기도 하죠.
동북에서 홍위병의 반조선활동이 강하게 펼쳐지고 총격전도 벌어지죠.
결국 이들 세력이 문화혁명을 거쳐 친미로 움직인 세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뉴스를 보면 이미 미국은 65년 문화혁명 시절부터 비밀리에 소련을 견제할 수 있는
군사기술을 제공한 것으로 봅니다.
68년에 벌써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전면적인 대중 외교 수립을 주장하고 나오는데
이미 문화혁명이 시작되는 65년부터 중국과 미국은 상당한 외교적 교섭을 시작합니다.
중국이 64.1월에 1차 핵실험을 하는데 66.5월에 부스팅 120kt를 실시하고,
66.12 300kt,67.6월에 수메가톤 수폭시험을 실시하는데 소련이 53년에 3기의 원자탄을 공여했다지만,
그 이후 당시 중국의 공업기술수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진전이죠. 중국은 80년에 와서 icbm 발사에 성공하죠.
67년 모택동이 배후 조종한 공청이 주축인 홍위병들이 소련 대사관을 공격하고 북을 비방하면서
친미자본세력의 길로 나섰던게 아니냐하는 판단입니다.
문화혁명이라는 좌경모험주의, 트로츠키스트의 외형이지만 실제로는
친미노선으로의 변신을 위한 쇼였다고 볼 수 있죠.
첫댓글 중국의 공무원 부패는 혀를 내두르지요. 한국이야 안정된 직업이라 공무원을 선호하지만 중국은 공무원이 되면 황금알을 낳는 직업이지요.
잘 봤습니다
감사헙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