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미생물) 01. 제2의 게놈을 만나다.
인간의 게놈[생물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염색체의 한 조(組)]에는 2만 1,000개가 조금 못 되는 유전자가 있다. 이는 기껏해야 예쁜꼬마선충의 게놈 정도에 불과하다. 식물인 벼에 비하면 절반 수준 정도이고, 작은 물벼룩조차도 3만 1,000개로 인간을 한참 앞선다. 하지만 이 생물들은 말을 할 수 없고 창조적인 능력도 없으며 지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다. 사람들 대부분이 풀이나 기생충, 물벼룩보다는 훨씬 많은 유전자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전자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 생산에 필요한 정보다. 그런데 인체와 같이 복잡하고 섬세한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단백질과 유전자라면 적어도 벌레보다는 그 수가 많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인간의 몸이 2만 1,000개의 유전자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각자는 모두 슈퍼생물체(superorganism), 다시 말해 여러 종이 모여있는 하나의 집합체다. 이들은 서로 함께 협력해 가며 모두의 생존을 책임지는 이 육신을 관리하고 운영한다. 인간의 세포는 미생물보다 무게나 부피는 훨씬 클지 몰라도 개수로 따지면 몸 안에 서식하는 미생물의 10분의 1밖에 안 된다.
미생물총(微生物叢, microbiota)이라고 불리는 100조 마리의 체내 미생물은 대부분이 박테리아로 구성되어 있다. 박테리아는 보통 세균이라고 부르며 겨우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진 아주 작은 생물체다. 미생물총은 박테리아 말고도 바이러스, 곰팡이 같은 균류(fungi), 원시세균(고세균, Archaea)을 포함한다. 이 중 바이러스는 너무 작고 구조가 단순해서 차마 생명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이들은 전적으로 다른 생명체가 지닌 세포에 의지해 자신을 복제한다. 우리 몸에 사는 균류는 이스트(효모균)인데 박테리아보다는 훨씬 복잡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고 단세포로 이루어진 생물이다. 원시세균(고세균)은 박테리아(세균)와 비슷해 보이지만 진화적으로 보면 식물과 동물의 관계만큼이나 서로 거리가 멀다.
이렇게 우리 몸에 거주하는 바이러스, 박테리아(세균), 원시세균(고세균), 균류를 포함하는 모든 미생물총의 유전자들이 2만 1,000개의 인간 유전자와 더불어 우리의 몸을 함께 이끌어가고 있다. 모두 합치면 인체에 서식하는 미생물은 총 440만 개의 유전자를 가진다. 이것이 바로 미생물군 유전체, 즉 미생물총을 이루는 게놈의 집합체다. 따라서 숫자로만 따지면 우리는 불과 0.5 퍼센트만 인간이다.
인간 게놈이 유전자의 개수뿐 아니라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단백질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인체의 복잡성을 창조해 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인간과 동물의 게놈은 단순히 체내에서 생산하는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수준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체내 미생물이 가진 유전자가 더해져 복잡성이 배로 늘어난다. 이 단순한 생물체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는 손쉽게 지원되면서도 빨리 진화하는 특징이 있다.
최근까지 체내 미생물에 관한 연구는 배지(培地)가 담긴 페트리 접시 위에서 배양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했다. 이것은 꽤 어려운 작업이다. 페트리 접시 속에 담긴 젤리 형태의 배지는 미생물이 자랄 수 있는 생육환경을 재현하기 위해 보통 혈액이나 골수 혹은 당분으로 만들어지는데, 장내에 서식하는 미생물 대부분은 산소에 노출되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미생물들은 산소를 견뎌낼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체외에서 미생물을 키울 때는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과 온도, 기체 조건 등을 추정하여 배양하는데 만약 적절한 조건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 종에 관한 연구는 실패로 돌아간다. 미생물 배양은 교사가 수업 시간에 출석부를 보고 출석을 확인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때는 학생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누가 강의실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DNA 염기서열 분석은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상대에게 신분증을 요청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때로는 예상하지 않은 사람을 마주칠 수도 있다. 또한, 이 기술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 이후 빠르게 발전하여 현재는 훨씬 빠르고 저렴하게 정보를 제공한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종결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기대가 높아졌다. 인간 게놈은 신이 창조한 가장 위대한 작품인 인체의 신비를 밝히는 열쇠이자 질병의 비밀을 담고 있는 성스러운 도서관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이후 몇 년간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밝혀진 전체 DNA 염기서열 정보가 실제로 의학 발전에 이바지한 수준에 대해 실망감이 나타났다. 인체 설명서의 해독을 통해 몇몇 중요한 질병을 치료하는 데 반박할 수 없는 큰 변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다 일반적인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기대한 만큼 밝혀내지 못했다. 특정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유전적 변이가 직접 병과 연관되는 경우는 예상외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은 수준으로나마 수십 혹은 수백 개의 유전자 변이와 연관성을 보이는 질병도 있었지만, 특정한 유전자 변이를 가진다고 해서 바로 해당 질병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인간이 가진 2만 1,000개 유전자만으로는 스토리를 제대로 풀어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시기에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된 DNA 염기서열 분석 기술을 적용한 또 하나의 중대한 게놈 프로젝트가 발족하였다. 바로 ‘인간 미생물군 유전체(마이크로바이옴) 프로젝트(Human Microbiome Project)’다. 인간 미생물군 유전체 프로젝트는 인간의 게놈이 아닌 미생물총의 게놈을 분석하여 우리 몸속에 어떤 미생물이 서식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계획된 프로젝트다.
이제는 페트리 접시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산소가 미생물을 죽이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인간 미생물군 유전체 프로젝트는 1억 7,00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5년간 진행된 DNA 염기서열 분석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인체의 18개 부위에 서식하는 미생물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인간 게놈 프로젝트보다 수천 배 더 많은 DNA 염기서열을 읽었다. 이 프로젝트는 인체를 구성하는 인간과 미생물의 유전자를 동시에 점검하는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다. 인간 미생물군 유전체 프로젝트는 앞으로 우리 자신의 게놈이 알려준 것 이상으로 인간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앨러나 콜렌(저), 조은영(역). 미생물의 과학, 10% HUMAN. 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