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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시리즈-바울(51)
준비된 사람을 쓰십니다!
참고말씀: 수3:5; 마25:20-24; 고전1:26-29; 빌3:7,8; 딤전4:5
읽을말씀: 딤후2:20-22
주제말씀: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첫째, 은사의 종류나 재능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
비전의 사람들이 흔히 갖게 되는 오해 중 하나는 무엇입니까? 그릇의 크기나 종류 등을 중시하는 것처럼, 우리의 경우도 은사의 종류나 재능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다는 오해입니다. 정말로 그러합니까? 하나님께서 소위 ‘금수저’나 ‘은수저’ 등은 귀히 쓰시고, ‘흙수저’ 등은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본문에 명시한 바와 같이, 금그릇이나 은그릇이라고 더 중히 쓰시는 것이 아니고,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이라고 천히 쓰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깨끗하게 준비한 그릇을 귀하고 요긴하게 쓰신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20,21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달란트 비유만 봐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어느 것이 더 많습니까? 당연히 다섯 달란트겠죠. 그런데 그것들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두 사람이 주인으로부터 동일한 칭찬을 듣습니다. 그것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서 말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0-23)
만일 한 달란트 받았던 자 역시 앞선 두 사람처럼 열심을 다했다면 동일한 칭찬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왜 그리 하지 않았습니까? 앞선 두 사람과 비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들은 다섯이나 둘은 주었는데 왜 난 하나뿐인가? 출발부터 너무 불공정한 것이 아닌가?’ 물론 무엇도 한 몫 했습니까? 주인에 대한 오해, 곧 주인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굳은 사람’이라는 오해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마25:24)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로 쓰임 받은 사람들의 면면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소위 ‘금수저’나 ‘은수저’ 등도 사용하긴 하셨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흙수저들을 훨씬 더 많이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구약의 경우만 봐도 형과 아비를 속인 야곱을 들어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삼으셨고, 도망자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진행하셨으며, 기생 라합이나 이방여인 룻을 통해 구속사의 명맥을 이어가셨으며, 겁쟁이 기드온을 통해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원하게 하셨으며, 일개 목동이었던 다윗을 들어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습니다.
신약은 또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대부분이 천시 받던 갈릴리 출신이었고, 마태나 삭개오는 세리 출신이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자였으며, 사울(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유대교신봉자요 기독교박해자였던 것입니다.
혹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우리 자신이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아닌 점을 원망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우리가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인 점을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이면 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유용하게 쓰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따름이지요.
내가 받은 은사나 재능이 적거나 하찮아 보입니까? 그리고 왠지 다른 사람의 은사나 재능이 훨씬 크고 화려해보입니까?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이는 착시현상(錯視現象)일 뿐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언제나 내가 받은 은사나 재능이 귀한 것임을 깨닫고 언제나 이를 통해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오직 자신을 깨끗하게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
앞서 우리는 비전의 사람에게 있어서 은사의 종류나 재능의 많고 적음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신 무엇이 중요하다고 했습니까? 자신을 깨끗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은 주인이 언제든지 꺼내어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21절)
물론 ‘모든 선한 일’이라는 표현으로 보건대, 하나님의 일은 한 가지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아주 다양하고 방대합니다. 그러니 그때마다 필요로 하는 그릇들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그릇은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사용하지 않는가 하면, 어떤 그릇들은 매일 수시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그 용도에 맞는 그릇을 찾아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허면 묻겠습니까? 어떤 것이 귀히 쓰는 그릇입니까? 일 년에 한두 번 쓰는 그릇입니까? 아니면 매일 수시로 꺼내서 사용하는 그릇입니까? 개인적으로는 매일같이 자주 사용하는 그릇이 어쩌다가 한 번 꺼내서 쓰는 ‘금그릇’이나 ‘은그릇’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자주 사용하다보니 그만큼 애착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 같고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떻습니까? 받은 은사가 적고 달란트가 작아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반대로 은사가 많고 달란트가 많다고 귀히 쓰일 것이라고 자만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21절)
그렇다면 비전의 사람은 어떻게 자신을 준비할 수 있습니까? 먼저는,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격적인 가나안 입성을 위해 자신을 성결하게 했던 것처럼,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수3:5) 우리도 비전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우리 자신부터 성결하게 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것들로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즉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성결하게 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
이를 위해서는 무엇을 피해야 합니까? 청년의 정욕입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22절 상) 세상 사람들이 한 결 같이 지향하고 또 따르고 있는 정욕적인 삶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를 얼룩지게 만들고 불결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속세에 찌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를 무엇을 적극적으로 힘써야 합니까? 교회 공동체에 깊숙이 들어와야 합니다. 깊숙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이들과 함께 각종 고귀한 목표를 추구해야 합니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22절 하)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부지런히 성결하게 하되, 정욕적인 삶과 거리두기를 한 채로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 오로지 고상한 목표들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7,8)
지금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비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을 준비하기 위해 무엇에 힘쓰고 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시며, 또한 준비한 만큼 쓰신다는 점을 말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