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은 시인
1980년 대전 출생.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및 같은 과 대학원 졸업.
2015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
감정교육 뉴스
임지은
우리 사회에서 가정교육은 항상 중시되어 왔습니다
어떤 게 진짜 감정인지 알 수 없을 땐 엄마에게 물어보면 좋은데요
엄마는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대기 기자와 연결해 보겠습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모두 널 위한 거야 너도 크면 이해할 거다”
저는 엄마와 아들이 싸우는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아들인 이모 씨는 엄마가 정해주는 감정에 따르지 않겠다는 입장인데요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행복하지 않아요
행복은 엄마가 했겠죠“
이번엔 감정전문가와 연결해 보겠습니다
“감정을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면
평소에 감정을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한편, 감정을 느껴보려는 이가 많아지면서 한 제약회사는 감정 치약을 개
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감정 치약을 칫솔에 묻혀 닦아주기만 하면 되는데요
치약 속 감정 유발 물질이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럼 제가 한번 닦아 보겠습니다
“야, 이 씨!”
(카메라가 꺼진다)
나는 뉴스를 끄고
행복, 안도, 불안, 기쁨, 착잡, 초조, 허무, 답답, 절망, 섭섭, 끔찍, 기대, 들뜸,
민망, 미묘, 따분, 편안, 이질, 동질, 경이, 흥미, 재미, 괴리, 당혹, 충격, 심드
렁 속에 있었다
감정은 입구와 출구가 멀었다
한참을 달려도 나갈 곳을 찾지 못했다
나는 안에 있었다
감정이 있었다
부록
땀에 젖은 문장으로 내달릴 것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으로
순간을 찢을 것
벤치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골몰하다
잠시 모자 속에서 꺼낸 날씨를 산책한다
이리로 가지 마시오
구름으로 가시오
같은 기분 위에 서 있는 오후
사과나무의 기분은 좀 멀고
방향 표지판의 기분과는 가까운
생각을 얼마나 멀리 던지느냐가 이 산책의 관건이다
목줄보다 긴 그림자를 가지게 되는 것은
이 산책의 부록이다
날아가기 직전의 모자처럼
바람에 기대앉아
밑줄 가득한 햇빛을 넘긴다
그러니
두 다리를 잃어버릴 것
처음 듣는 음악으로 조깅할 것
지루한 생각을 열고 뛰어나가는 개처럼
첫 문장은 시작된다
과일들
필통에 코끼리를 넣고 다녔다
지퍼를 열었는데 코끼리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이었다
오렌지였다
나는 덜 익은 오렌지를 밟고
노랗게 터져버렸다
가끔은 푸른 안개가 묻어 있어도 좋았다
이제 나는 오렌지가 어떤 세계의 날씨인지
알아내는 일에 빠졌다
박스째 진열된 과일 가게에 갔다
기다린다는 건 잘 익은 바나나
지갑을 열고 거짓말을 꺼냈다
딸기였다
손바닥 위에 씨앗 코끼리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는 분홍의 과즙
딸기 속에는 아주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거짓말이
어떤 세계의 바다인지 알아내는 일에 빠졌다
오렌지 속에 코끼리를 넣고 나왔다
론리 푸드
식초에 절인 고추
한 입 크기로 뱉어낸 사과
그림자를 매단 나뭇가지
외투에 묻어 있는 사소함
고개를 돌리면
한낮의 외로움이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다
나는 이미 배가 부르니까
천천히 먹기로 한다
밤이 되면 내가 먹은 것들이 쏟아져
이상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식초 안에 벗어놓은 얼굴
입가에 묻은 흰 날개 자국
부스러기로 돌아다니는
무구함과 소보로
무구함과
소보로
나는 식탁에 앉아 혼자라는 습관을 겪는다
의자를 옮기며 제자리를 잃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가끔 미래에 있다
놀라지 않기 위해
할 말을 꼭꼭 씹어 먹기로 한다
깨부수기
남편은 벽을 바라봤다
벽 속에 뭐가 있나요?
벽 속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남편은 저녁도 먹지 않고
주말 영화를 시청하듯 벽을 바라봤다
여보, 오늘은 월요일이잖아요
그는 이제 벽 속에서 내일을 보고 있다고 했다
잠도 자지 않고
벽을 바라보던 남편은 벽에 기대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벽에 닿았다
대체 무슨 맛이죠?
그는 벽 안쪽의 깊은 고독이 느껴진다고 했다
깜빡 잠이 든 내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남편이 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흐름이 조금 밀리고 그는 벽의 일부가 되었다
뺨일 거라고 만진 곳은 엉덩이고
진심이라고 만진 부분은 주로 거짓인 벽
나는 벽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다
망치를 들고 와 깨부수기 시작했다
벽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발견되지 않았다
튀어나온 못만이 할 말처럼 남아 았었다
다음 날 벽지에 풀칠을 하던 도배공이 물었다
벽 속에 뭐가 있나요?
나는 남편이 있다고 했다